비엔나 이야기/로마의 영향

정치적 선언: 칼스키르헤

정준극 2014. 3. 26. 20:47

정치적 선언: 칼스키르헤(Karlskirche)

비엔나와 로마의 정치, 종교, 문화 연계의 대표작

 

칼스키르페(칼교회)

 

비엔나와 로마가 정치적, 종교적, 문화적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것을 가장 그럴듯하게 보여주는 것이 칼스키르헤이다. 칼스키르헤는 주소상으로는 비엔나 교외에 해당하는 4구 뷔덴에 있지만 비엔나의 중심지역인 칼스플라츠에 있기 때문에 도심의 교회라고 볼수 있다. 칼스키르헤는 아름다운 교회이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칼스키르헤는 샤를르(칼) 6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거장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얼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에게 의뢰하여 완성한 교회이다. 폰 에얼라흐가 처음에 계획서를 황제에게 제출한 것은 1715년이었다. 칼스키르헤는 그후 무려 24년만인 1739년에 완성된 대공사였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는 칼스키르헤가 완성되고 나서 1년 후인 1740년에 세상을 떠났다. 교회가 완성되는 것을 보고나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보면 칼스키르헤는 샤를르 6세의 교회나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처음에 교회를 짓고자 생각했을 때 자기의 이름을 붙여서 교회를 지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교회에는 성자 이름을 붙여야지, 죽지도 않은 자기 이름을 붙이면 그게 말이 되느냐?'라고 말들 할것 같아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다가 자기의 이름과 같은 성자를 찾아보자는 생각을 했다. 마침 유럽에서는 역병 때문에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리하여 역병을 구제하는데 앞장섰던 밀라노의 성자 샤를르 보로메오(칼 보로메우스: Charles Borromeo)에게 봉헌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 교회를 성자 샤를르(칼) 보로메오에게 봉헌하는 것은 정치적 또는 종교적으로 아무런 의도가 없었다. 다만, 샤를르 6세 당시에 스페인왕위계승전쟁의 여파로 밀라노 공국이 샤를르 6세의 통치 아래에 들어왔다는 것이 연관이면 연관이다. 샤를르 보로메오(이탈리아어로는 Carlo Borromeo: 1538-1584)는 밀라노의 주교로서 교황 비오 4세의 조카였다.

 

밀라노의 성자인 카를로 보로메오(샤를르 보로메오)

 

샤를르 6세는 합스부르크와 한 가족인 스페인에 적당한 왕위 후계자가 없자 그렇다면 비엔나의 합스부르크가 스페인도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이로 인하여 이른바 스페인왕위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전쟁은 누가 승자이고 누가 패자라는 것이 분명치 않은채 막을 내렸다. 1713년의 우트레헤트 평화조약(Peace of Utrecht)은 스페인왕위계승 전쟁의 결과를 정리한 것이었다. 샤를르 6세는 스페인의 왕위에 대한 요구를 거의 완전히 포기하는 대가로 밀라노공국, 베니스공국, 사르디니아를 얻게 되었고 이로써 합스부르크가 이탈리아에 대한 영향력을 크게 행사할수 있게 되었다. 사르디니아공국은 나중에 시실리와 교환되었다. 밀라노가 합스부르크의 수중에 들어오자 샤를르 6세는 밀라노의 대주교인 샤를르 보로메오를 중요하게 여기지 않을수 없었다. 비엔나에 샤를르 보로메오에게 봉헌하는 교회를 세운 것은 밀라노 사람들의 환영을 받는 일이었다.  

샤를르 6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아버지

 

샤를르 보로메오(카를로 보로메오)는 밀라노에 기근이 휩쓸어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허덕일 때 무려 석달동안 이들을 돌보아주고 음식을 구해 주었으며 그후 밀라노에 역병까지 돌자 병자들을 찾아다니며 간호해 주고 위로해 주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그를 기아와 역병을 이기게 해준 성자라고 불렀다. 그런 연고로 샤를르 6세는 비엔나에서 역병이 다시는 창궐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가호를 비는 데에는 성자 샤를르 보로메오만한 인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의미에서 새로 짓는 교회를 칼스키르헤라고 이름 지은 것은 바람직한 일이었다. 칼스키르헤의 내부에는 성 샤를르 보로메오가 자비를 베푸는 모습의 기념상이 있다. 교회 뒤편의 길건너에 있는 사제관 입구에 샤를르 보로메오의 기념상이 있는 것도 간과해서는 안될 일이다. 한편, 카를로 보로메오(샤를르 보로메오)는 가톨릭 교회의 구조를 개혁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교구, 주교관구, 그리고 교황청의 행정기구인 로만 큐리아(Roman Curia)의 부서들을 다시 조직하고 직무가 무엇인지를 명확히 해놓았다. 이러한 행정개혁은 가톨릭 교회를 열심자들의 동아리로 묶어 주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당시에는 루터교가 제국의 여러 곳에서 반가톨릭적인 정서로서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헝가리에서 그런 분위기가 넘쳐 있었다. 카를로 보로메오의 행정개혁은 루터교 때문에 궁지에 몰린 로마 가톨릭을 단결토록 하는 역할을 하였다. 이에 따라 샤를르 6세는 제국 내에서의 로마 가톨릭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비엔나와 바티칸이 더욱 연계되어야 한다고 내세웠고 그 하나의 방법으로 새로 짓는 교회의 이름을 칼스키르헤로 했다고 보아도 무난하다.

 

 

칼스키르헤 뒷편 길건너의 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성샤를르(칼) 보로메오 기념상. 오른쪽은 교회 안에 있는 성샤를르 보로메오 기념상

 

비엔나의 여러 교회 중에서 칼스키르헤의 돔은 타원형으로 로마의 일반적인 돔과 같은 형태이다. 원래 오스트리아에는 양파형의 돔이 유행인데 칼스키르헤는 바티칸의 성베드로대성당을 닮은 돔형으로 구성했다. 타원형의 돔이 있는 교회는 비엔나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1구에 있는 페터스키르헤가 그나마 아름다운 돔으로 구성되어 있다. 칼스키르헤의 건축을 책임진 폰 에얼라흐가 이탈리아에서 보고 배운 것을 그대로 실현해 보인 돔이라고 보면 된다. 칼스키르헤의 여러 세부적인 장식과 건축기법은 아무래도 이탈리아의 거장 건축가들인 보로미니와 베르니니의 작품을 닮은 것같다. 천사들의 머리 모습이나 조개껍질 형태의 부조 등이 특히 그러하다. 베르니니는 로마의 피아짜 콜로나(Piazza Colonna)에 트로얀 기둥을 세운 것이 있다. 베르니니는 교황 알렉산더 7세에게 그 기둥을 다른 기둥이 있는 곳으로 옮겨 기둥들을 함께 둘 것을 제안했다. 그 광장에 베르니니가 교황 가족들을 위한 궁전을 얼마전에 완성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장 옮기지는 못하고 1694년에야 옮기기로 했다. 근처의 피아짜 디 몬테치토리오(Piazza di Montecitorio)로 옮기기로 했다. 그런 후에 피아짜 콜로나와 피아짜 디 몬테치토리오의 두 광장을 한데 합치고자 했다. 사람들은 별로 할 일도 없었던지 두 기둥을 한 군데로 몰아서 세워 놓는 것이 좋은지 어떤지에 대하여 대단한 논란을 벌였다. 결국 반대여론으로 계획을 이루지 못했다. 피셔 폰 에얼라흐는 칼스키르헤를 지으면서 두 기둥을 사실상 한군데로 모아서 세웠다. 로마인들은 논란을 벌이며 난리를 쳤던 것을 비엔나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처리했던 것이다.

 

 

로마의 피아짜 콜로나와 한 가운데 있는 컬럼

 

비에나의 거리를 재조정할 때에 샤를르 6세는 로마에서처럼 비아 트리움팔리스(Via Triumphalis)를 구상했었다. 말하자면 승리대로(勝利大路)이다. 샤를르 6세는 비엔나의 비아 트리움팔리스를 호프부르크를 시작으로 하여 칼스키르헤까지 일직선으로 생각했었다. 병사들이 개선의 행진을 할때 호프부르크로부터 시작하여 칼스키르헤까지의 대로를 이용한다는 것은 멋진 생각이었다. 그 계획은 사정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만일 그대로 되었다면 오늘날의 링슈트라세는 다른 면모를 지녔을 것이다. 그리고 칼스키르헤의 앞을 가로막는 것은 어떠한 것도 없었을 것이다.

 

 

샤를르 6세는 로마의 비아 트리움팔리스 처럼 호프부르크로부터 칼스키르헤까지 대로를 만들어 개선행진에 활용토록 할 생각이었다.

 

칼스키르헤와 그 앞의 연못이 있는 칼스플라츠

 

교회내부는 대단히 밝다. 주로 하얀색의 스투코로 장식했다. 여기에 황금색으로 권위를 더했다. 피셔 폰 에얼라흐는 베르니니가 성베드로대성당에서 했던대로 중앙제단 뒷편에 천사들이 서클을 이루고 햇빛이 찬란하게 비추는 형상을 만들었다. 또 다른 로마 스타일은 열명의 천사들이 고난의 열개 요소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타원형의 돔은 요한 미하엘 로트마이르(Johann Michael Rottmayr)가 프레스코화로 장식했다. 그는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Pietro da Cortona)가 팔라쪼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의 천정에 그렸던 그대로의 주제와 기법으로 칼스키르헤의 돔을 장식했다. 로트마이르가 그린 천정 프레스코화 중에서는 마르틴 루터가 쓴 책을 천사들이 이단으로 규정하여 불사르는 장면도 있다. 이것은 당시 로마 가톨릭의 가이드라인을 따른 것이다. 일반적으로 18세기의 예술은 힘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우아함으로 그런 부족함을 보상하고도 남는다.

 

 

천정 프레스코. 마르틴 루터가 쓴 책을 천사들이 이단으로 규정하여 불태우고 있다. 그 옆에는 사탄이 뱀과 함께 있는 모습. 얼굴을 가면으로 가리려는 사람등의 모습을 볼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