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참고자료] 마가렛 가너는 누구?

정준극 2014. 3. 29. 14:49

[참고자료] 마가렛 가너(Margaret Garner)는 누구?

 

재판을 받고 있는 마가렛 가너(오페라에서는 데니스 그레이브스)

 

마가렛 가너는 남북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켄터키의 어떤 농장에서 일했던 흑인 노예이다. 마가렛 가너는 자기의 어린 딸이 자기처럼 비참한 노예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쩔수 없이 딸을 죽인 사건으로 유명하다. 그때 마가렛 가너는 식구들과 함께 켄터키의 농장으로부터 도망하여 노예들이 비교적 자유스럽게 살수 있는 오하이오의 신시나티에 천신만고 끝에 도착했으나 곧이어 뒤를 쫓아온 노예사냥꾼들에게 붙잡혀 더 큰 고통이 기다리고 있는 켄터키의 노예 생활로 다시 돌아가야만 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이고 자기도 죽으려고 했으나 어린 딸만 죽였을 뿐 다른 아이들은 상처만 입혔고 그러는 사이에 노예사냥꾼들에게 붙잡혀 뜻을 이루지 못했다. 마가렛 가너는 잡혀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마가렛 가너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마가렛 가너를 오하이오에서 살인죄로 재판을 받도록 하기 위해 노력했다. 오하이오는 '도망자 노예법'에 비교적 관대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결국 마가렛 가너는 주인 재산을 훔치고 파손했다는 죄목으로 켄터키에서 재판을 받아야 했다. 주인 재산을 훔치고 못쓰게 만들었다는 것은 앞으로 노예로서 부려 먹을 아이를 주인 허락 없이 마음대로 데리고 가서 죽였다는 의미이다. 노예들은 팔고 살수가 있기 때문에 인간으로 간주하지 않고 물건으로 간주했었다. 이 사건은 당시 사회적으로 커다란 잇슈가 되었다. 노예제도 폐지론자들과 노예제도 유지론자들간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지도록 만든 사건이었다. 그리고 결국은 남북전쟁이 일어나도록 기여를 한 사건이었다.

 

마가렛 가너 사건은 세월이 흘러도 잊을수 없는 것이었다. 미국의 여류 흑인작가인 토니 모리슨(Toni Morrison)은 마가렛 가너의 스토리에 감명을 받아 그의 이야기를 '빌러브드'(Beloved)라는 소설로 만들었다. 1987년에 나온 이 소설은 베스트 셀러가 되었음며 그로 인하여 토니 모리슨은 1988년에 퓰리처 상을 받았으며 1993년에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빌러브드'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오프라 위프리가 주역을 맡았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에서는 미국의 작곡가인 리챠드 다니엘푸어가 '마가렛 가너'라는 타이틀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대본은 원작자인 니 모리슨이 직접 썼다. 2005년에 디트로이트에서 처음 공연되었고 이어 신시나티와 필라델피아에서도 공연되어 상당한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실제로 마가렛 가너는 1856년 1월에 식구들과 함께 얼어 붙은 오하이오 강을 건너서 신시나티로 갔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서 노예사냥꾼들과 보안관들에게 붙잡혔다. 그래서 자유를 향한 조그만 불길은 피워보지도 못한채 바람에 스러지고 말았다. 마가렛 가느는 실존인물이다. 1800년대 중반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된다. 켄터키 주의 프리실라(Priscilla)에서 태어났다. 가너는 뮬라토라고 기록되어 있다. 흑인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사람을 말한다. 그래서 완전 흑인은 아니다. 피부가 황갈색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너는 켄터키 주 분 카운트(Boone County)에 있는 메이플우드 농장에 살고 있는 게인스 식구들을 위해 하녀로서 일했다. 가너는 뮬라토이기 때문에 농장 주인인 존 폴라드 게인스의 딸이라고 보고 있다. 마가렛이 농장 주인이 새로 바뀐 후 태어난 아이들(사무엘, 메리, 프리실라)은 모두 뮬라토라고 한다. 그런데 주인인 아치발드 게인스의 아이들이 태어난지 5개월이나 7개월 후에 가너의 아이들도 태어났다. 그래서 피부색이 검지 않고 황갈색인 가너의 아이들이 아치발드 게인스의 아이들이 아니겠느냐는 짐작이다. 그러나 저러나 메이플우드 농장의 주변에는 성인 남자가 아치발드 게인스 밖에는 없으므로 가너가 낳은 아이들이 뮬라토라고 하면 아이들 아버지는 아치발드 게인스일수 밖에 없는 노릇이다. 아치발드 게인스의 부인이 임신을 해서 출산을 하는 기간 중에는 남편과 성생활을 제대로 할수 없기 때문에 게인스는 그 기간을 이용해서 가너와 성생활을 했다고 볼수 있다.

 

마가렛 가너는 1849년에 같은 농장에 있는 흑인 노예인 로버트 가너와 결혼했다. 그해 12월에 농장과 모든 노예들이 존 게인스의 남동생인 아치발드 게인스에게 팔렸다. 로버트와 마가렛의 첫 아들인 토마스는 1850년 초에 태어났다. 노예제도 해방주의자인 르바이 코핀(Levi Coffin)이라는 사람이 당시에 마가렛 가너를 체포하면서 기록해  놓은 내용을 보니 '뮬라토로서 키는 5피트 정도이며 나이는 21살이나 23살 정도'라고 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가렛 가너는 이마와 뺨에 오래된 상처 자국이 있는데 물어보니까 어떤 백인이 때리는 바람에 생긴 상처자국이아고 했다는 것이다. 마가렛 가너에게는 네 아이들이 있었는데 남자아이들은 여섯살과 네살이었으며 여자아이는 두살 반과 아주 갓난 아기(메리와 프리실라)였다고 적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마가렛 가너의 도망 경위는 어떠했는가? 1856년 1월 28일 임신 중인 마가렛은 남편 로버트와 네 아이들을 데리고 켄터키에서 오하이오의 신시나티로 도망을 갔다. 다른 노예들도 도망에 동참했다. 일행은 모두 17명이었다. 로버트는 만일을 위해 주인인 게인스의 말과 썰매와 총 한자루를 훔쳤다. 그해 1월은 60년만에 처음 보는 추운 날씨였다. 오하이오 강이 꽁꽁 얼어 붙을 정도로 추웠다. 일행은 새벽에 켄터키의 코빙턴에서 서쪽으로 오하이오에 가장 가까운 곳을 통해 강을 건넜다. 그리하여 결국 신시나티로 도착할수 있었다. 일행은 신시나티에서 두 그룹으로 나뉘어져 헤어졌다. 로버트와 마가렛, 그리고 네명의 아이들과 로버트의 아버지인 사이몬, 어머니인 메리는 마가렛의 삼촌인 조 카이트의 집을 찾아 가기로 한다. 조 카이트는 켄터키에서 노예생활을 했다가 신시나티로 도주해서 신시나티의 아랫쪽인 밀 크릭에 살고 있다. 다른 아홉명의 노예들은 신시나티에서 아는 사람을 통해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를 통해 캐나다로 빠져나갔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Underground Railroad)라는 것은 지하철도가 아니라 미국에서 도망친 노예들이 캐나다로 들어가는 비밀 루트의 노선을 말한다. 마가렛의 삼촌인 카이트는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르바이 코핀을 찾아가서 어떻게 하면 켄터키에서 도망쳐 나온 친척 노예들을 무사히 지내게 할수 있는지에 대하여 자문을 받는다. 코핀은 이들을 신시내티 외부로 빠져 나갈수 있도록 도와 주겠다고 약속한다. 코핀은 카이트에게 우선 가너의 식구들을 도시에서 서쪽으로 되도록이면 멀리 나가서 있으라고 말한다. 그쪽에는 자유를 얻은 흑인들이 많이 살고있다. 가너의 식구들은 밤이 되기를 기다린다. 그후에 도시의 서쪽으로 빠져 나갈 생각이다.

 

켄터키의 노예사냥꾼들이 연방보안관(마샬)들과 함께 카이트의 집에 숨어 있는 가너 일행을 찾아냈다. 르바이 코핀을 만나러 갔던 카이트가 집에 돌아오기 전이었다. 노예사냥꾼들과 경찰들은 카이트의 집을 우선 포위하여 아무도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고 이어 집안으로 처들어갔다. 로버트는 가지고 있던 총으로 방어하다가 최소한 한 명의 부보안관에게 총상을 입혔다. 보안관을 죽이려고 총을 쏘아 대는 것은 당장 처형당하는 처사였다. 마가렛은 자기의 아이들이 잡혀서 노예로 키워져서 그 고통스런 노예생활을 해야 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아이들을 죽이고 자기도 죽을 결심을 한다. 그래서 부엌에서 쓰는 커다란 식칼을 들고 우선 두살짜리 딸을 죽인다. 마가렛은 다른 아이들도 죽이려고 칼을 내리쳤지만 부상만 입히고 죽이지는 못한다. 이때 노예사냥꾼들이 들이닥쳐서 마가렛을 꼼짝 못하게 만든다. 마가렛 가너의 식구들은 모두 감옥으로 끌려간다. 그후에 열린 재판은 무려 2주 동안이나 계속되는 것이었다. 가장 시간이 오래 걸리고 복잡한 재판이었다. 재판이 오래 걸린 핵심적인 이슈는 이들을 인간으로 볼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재산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의 도망노예법에 따르면 주인 집에서 도망간 노예는 물건 취급을 받았다. 사람이 아니라 주인의 재산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으로 인정하면 마가렛에게 살인죄를, 로버트에게 살인미수죄를 적용해야 하지만 만일 재산으로 간주한다면 재산의 절도 및 파손죄에 해당하였다. 기막힌 법이었다. 가너 식구들을 변호하는 변호인은 이들이 오하이오주의 법에 따라서 인간으로 대우를 받아야 하며 오하이오주는 시민을 보호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노예사냥꾼들과 주인인 게인스는 도망노예법이 연방법으로서 주법에 우선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변호인은 마가렛이 비록 살인을 저질렀지만 이미 오하이오주에 건너와 있기 때문에 오하이오의 법을 적용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변호인은 마가렛이 살인죄로 선고를 받을지라도 과거의 경우에 따라 나중에 주지사의 사면절차를 받을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했던 것이다. 재판이 열리는 날은 매일 천명 정도의 사람들이 몰려와서 재판과정을 지켜보았다. 재판소 밖의 길거리에는 방청하려는 사람들로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이들에 대한 질서유지를 위해 5백명이나 되는 주민들이 보안관 대리로 임명받아 일을 했다. 판사인 펜드리(Pendery)는 결국 노예사냥꾼들과 게인스의 손을 들어주었다. 연방법이 우선한다는 판결이었다. 변호인인 존 졸리프(John Jolliffe)는 여기에 굴복하지 않고 이번에는 도망노예법이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전략으로 나갔다. 자유를 찾아 도망간 노예를 시민들이 찾아내어 주인에게 되돌려 주는 것은 악행이며 이런 악행을 재판부가 정당하게 인정하는 것을 악을 비호하는 것으로 이것이야말로 시민들을 반종교적인 행위로 몰고 가는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설득력이 약해서 변호인은 나중에 이 주장을 철회했다.

 

재판이 끝나는 날, 노예제도 폐지론자인 루시 스톤이라는 여자가 재판정에서 발언권을 얻어 그가 전에 마가렛과 나누었던 대화를 중심으로 마가렛을 변호하였다. 물론 이같은 변호는 검사측에서 필요없는 일이라고 불만을 제기했지만 이미 판결이 나온 마당에서 그정도 아량은 베풀수 있지 않느냐는 것이 판사의 생각이었다. 루시 스톤 여사는 백인이 강제로 흑인과 성관계를 가진 일은 온당치 못하다는 내용으로 그동안 마가렛이 겪은 성폭행을 설명했다. 하지만 그 당시만해도 재판정에서 성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더구나 여자가 그런 얘기를 꺼내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생각되어 야유를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 스톤 여사는 차분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루시 스톤 여사는 우선 방청객들에게 마가렛의 아이들의 얼굴들과 주인인 게인스의 얼굴들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어머니로서 자기의 딸이 다시는 수치스러운 노예생활을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선책할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딸을 비열하고 잔인한 원수의 손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품으로 돌려 보내는 것이었다. 그 누가 어머니로서 그런 권리가 없다고 말할수 있겠는가? 딸을 죽여야만 했던 어머니의 그 깊고도 침통한 심정을 이해할수 있겠는가?'라고 말하였다.

 

루시 스톤 여사는 계속해서 '마가렛의 그런 행동은 주인인 게인스의 말할수 없이 지나친 학대에 따른 결과였다. 물론 이런 노예학대는 공공연히 전국적으로 자행되고 있는 것이지만 게인스의 경우는 일반적인 학대의 범위를 벗어나는 비열하고 잔인한 것이었다. 여자 노예들은 아이를 낳아도 매일의 힘든 노동에 지쳐서 아이들을 제대로 키울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노예의 아이들이 태어나는 것은 주인으로서는 재산이 늘어나는 것이므로 만족할수 있지만 당사자인 노예로서는 더 할수 없는 고통의 연속이기도 하다. 마가렛의 경우에는 아이들이 뮬라토인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뮬라토를 낳은 여인은 같은 노예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받지만 백인들로부터도 외면을 당해서 갈곳이 없다. 뮬라토 아이들은 불명예와 치욕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뮬라토 아이들은 태어난 죄밖에 없다. 하지만 이들은 범죄의 대상이 되기가 쉽고 더러는 폭행을 당하거나 팔려가기가 쉽다. 어머니로서 마가렛은 자기 아이들이 고통의 연속인 노예로서의 생활을 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을 뿐만 아니라 뮬라토로서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비장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마가렛 가너는 당장 살인죄로 재판을 받지 않았다. 대신 9개월 정도 밖에 되지 않은 딸 아이를 데리고 남편 로버트와 함께 주인의 농장으로 일단 돌아가는 판결을 받았다. 오하이오 당국이 마가렛 가너를 살인죄인으로 붙잡아 두어서 재판을 다시 시작코자 했지만 이미 켄터키의 보안관들이 마가렛 가너의 식구들을 빼돌린 후였다. 그래서 마가렛 가너를 체포하려고 해도 체포할수 없었다. 이들의 주인인 아치발드 게인스는 이들을 데리고 켄터키의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녔기 때문에 소재를 파악하기가 어려웠다. 오하이오 관리들이 마가렛 가너를 체포하기 위해 켄터키의 코빙턴까지 갔었지만 바로 몇 시간 전에 다른 곳으로 떠나서 헛수고를 한 경우도 있었다. 켄터키의 프랑크포트에서도 체포할 뻔 했다고 놓쳤다. 마침내 오하이오 관리들이 루이빌에서 게인스를 찾을수 있었지만 그때에는 마가렛 식구들을 이미 아칸서스 주에 있는 자기 동생의 농장으로 팔아서 배를 타고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해 3월 11일 리버레이터지(The Liberator)는 핸리 루이스라는 증기선에서 마가렛 식구들이 어디론가 가고 있는 것이 목격되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그 배는 얼마 못가서 다른 배와 부딪치는 바람에 침몰하게 되었고 그때 마가렛의 한살도 안된 딸이 물에 빠져서 익사했다고 한다. 마가렛은 자기 어린 딸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보고 오히려 기뻐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자신도 물에 빠져 죽으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마가렛과 로버트는 아카서스 주에 그저 잠시 머물다가 뉴올리언즈에 있는 게인스의 가족 친구의 집의 하인으로 팔려갔다고 한다. 그후 누구도 마가렛과 로버트에 대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870년에 신시나티 크로니클지는 로버트 가너를 발견하여 그에 대한 소식을 기사로 실었다. 그에 따르면 로버트와 마가렛은 뉴올리언즈에서 일하다가 이듬해인 1857년에 미시시피주의 테네시 랜딩이란 곳에 있는 드위트 클링턴 본햄 판사의 농장에 팔렸다고 한다. 로버트에 말에 의하면 마가렛은 1858년에 정질부사 열병으로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로버트는 마가렛이 죽기 전에 자기에게 '절대로 노예신분으로서 결혼하지 말아 달라. 자유에 대한 희망으로 살아 달라'고 당부했다고 전했다.

 

마가렛 가너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프란시스 하퍼(Frances Harper)의 1859년도 시 '노예 어머니: 오하이오 이야기'(Slave Mother: A Tale of Ohio)의 바탕이 되었다. 마가렛 가너는 켄터키 출신의 화가인 토마스 새터화이트 노블의 1867년도 작품인 '현대판 메데아'(The Modern Medea)의 소재가 되었다. 메데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인으로 자기 자신의 아이들을 죽인 어머니이다. 그 그림은 신시나티의 어떤 개인 회사가 소유하고 있다가 미국지하철도자유센터(National Underground Railroad Freedom Center)의 소관이 되어 영구 전시되어 있다. 미국지하철도자유센터는 남북전쟁 이전부터 남부에서 도망온 흑인 노예들을 캐나다로 보내어 자유를 찾게 하는 비밀 단체이다. 마가렛 가너의 스토리를 토니 모리슨이 1987년에'빌러브드'(Beloved)라는 소설로 펴내어 퓰리처 상을 받았고 1993년에는 노벨문학상까지 받은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2천년대에 들어솨서 미시간오페라극장, 신시나티오페라, 필라델피아오페라단이 리챠드 다니엘푸어에게 마가렛 가너의 이야기를 오페라로 만들어 줄것을 요청하여 다니엘푸어가 2005년에 오페라 '마가렛 가너'를 완성했고 그 해에 미시간, 신시나티, 필라델피아에서 공연되었다. 신시나티는 마가렛 가너 스토리의 무대여서 그런지 이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 신시나티 오페라극장 역사상 가장 많은 관객이 몰려 왔다. 디트로이트에서 유례가 없이 많은 관객들이 몰려 왔는데 대부분이 흑인들이었다. 필라델피아에서도 매진이었다. 2005년에 세 도시에서 공연할 때에 타이틀 롤인 마가렛 역할은 세계적인 흑인 메조소프라노인 데니스 그레이브스가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