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세기의 모차르트

모차르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요제프 미슬리베체크

정준극 2014. 4. 10. 12:55

요제프 미슬리베체크(Josef Myslivecek)

잊혀진 작곡가, 그러나 모차르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곡가

 

요제프 미슬리베체크

 

모차르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작곡가는 누구일까? 하이든? 살리에리? 그렇지 않으면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프라하 출신의 요제프 미슬리베체크(Josef Myslivecek: 1737-1781)라고 한다. 어떤 사람인가? 프라하에서 태어났지만 이탈리아에서 생애를 보낸 작곡가이다. 미슬리베체크는 교향곡을 85편이나 작곡했다. 그러고 보면 마치 교향곡의 아버지처럼 생각된다. 다행히 하이든이 104편을 작곡했기 때문에 명함도 내밀지 못해서 혹시 '미슬리베체크의 교향곡 몇 번이올시다'라고 고새하면 '누구시더라?'라고 되물을 판이다. 오페라는 26편이나 남겼다. 모차르트보다 많이 남겼다. 대부분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을 주제로 삼은 오페라들이다. 그런데도 그의 오페라는 오늘날 거의 잊혀져 있다. 미슬리베체크의 오페라들은, 세미라미데(Semiramide), 일 벨레로폰테(Il Bellerofonte), 화르나체(Farnace), 일 트리온포 디 클렐리아(Il trionfo di Clelia), 림페르메스트라(L'Impermestra), 라 니테리(La Nitteri), 모테추마(Motezuma), 일 그란 타메르라노(Il gran Tamerlano), 데메트리오(Demetrio), 로몰로와 에르실라(Romole ed Ersilla), 안티고나(Antigona),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 아티데(Atide), 아르타세르세(Artaserse), 에치오(Ezio), 시리아의 아드리아노(Adriano di Siria), 라 칼리로에(La Calliore), 올림피아데(L'Olimpiade), 라 치르체(La Circe), 아르미다(Armida), 일 메돈테(Il Medonte) 등이다. 이같은 작품으로 그는 1770년대에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로 인정을 받았다. 미슬리베체크는 현악5중주 곡을 처음으로 작곡했다. 말하자면 현악5중주곡의 창시자이다. 미슬리베체크는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보헤미아의 신'(Il Divino Boemo)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모차르트는 14세 때인 1770년에 미슬리베체크를 볼로냐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모차르트는 미슬리베체크의 음악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미슬리베체크의 음악은 명랑하며 활기찬 것이었다. 또한 멜로디는 기분 좋은 것이었다. 당시의 스타일로 보아 대단히 혁신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창의적인 것이기는 했다. 아무튼 모차르트는 미슬리베체크 스타일의 멜로디를 자기의 작품에 즐겨 사용했다. 뿐만 아니라 모차르트는 미슬리베체크를 개인적으로도 크게 좋아하고 존경했다. 미슬리베체크는 모차르트보다 불과 아홉살 위였다. 모차르트는 아버지 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슬리베체크를 '불과 정신력과 생활을 분출하는 인물'이라고 찬탄했다. 모차르트가 그런 찬사를 보낸 작곡가는 미슬리베체크 이외에 아무도 없다. 모차르트는 하이든도 존경했지만 미슬리베체크의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모차르트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 또는 누이 난네를에게 보낸 편지 등을 보면 미슬리베체크의 이름이 40번쯤 나온다. 주로 개인적인 이야기가 적혀 있다. 그만큼 절친한 관계였다. 그런데 모차르트 학자들이 미슬리베체크에 대하여 소홀하게 취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짐작컨대 당시의 풍조로 보아서 비엔나의 사람들은 보헤미아 사람들은 무시하고 은근히 얕잡아 보았다. 그래서 보헤미아 출신의 미슬리베체크에 대하여 깊이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라고 볼수 있다.

 

미슬리베체크가 모차르트를 처음 만났을 때에는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이탈리아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던 미슬리베체크는 오페라 공연을 위해 볼로냐에 와서 어떤 여관에 투숙하고 있었다. 그때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드와 함께 바로 그 여관에 체크인하러 들어섰다. 모차르트는 연주를 위해 이탈리아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고 있던 때였다. 그렇게 해서 미슬리베체크와 14세 모차르트의 친분은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그해 여름에 모차르트는 다시 볼로냐를 찾아왔고 두 사람은 거의 매일처럼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식사를 했다. 두 사람의 친분은 1771년 베로나에까지 연결되었다. 미슬리베체크는 모차르트에게 나폴리로부터 오페라 의뢰를 받아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사정이 여의치 않아서 나폴리로부터 계약을 따내지 못했다. 모차르트의 아버지인 레오폴드는 모차르트가 나폴리를 위해 오페라를 작곡하게 되었다고 잘츠부르크 대주교에게 보고도 하고 양해도 받아 놓았는데 일이 틀어지자 몹시 화가 났다. 그로 인하여 레오폴드는 미슬리베체크와의 교분을 끊었다. 그렇지만 청년 모차르트는 미슬리베체크와의 친분을 잊지 않고 마음에 간직하였다. 모차르트가 1777년에 아버지 레오폴드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모차르트가 뮌헨에서 수술을 받은 미슬리베체크를 병원으로 찾아갔었다는 얘기가 적혀 있다. 미슬리베체크는 매독으로 코에 악성종양이 생겨 그것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었다. 레오폴드는 모차르트에게 답장을 보내어 미슬리베체크와 멀리하라고 조언했다. 아마 매독이 전염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모차르트는 미슬리베체크의 이탈리아 스타일의 우아한 멜로디와 리듬을 선호했다. 모차르트는 그의 첫번째 오페라 세리아인 '미트라다테'에 미슬리베체크의 작품에서 몇가지 멜로디를 빌려와서 사용했다. 모차르트는 그의 초기 교향곡에도 미슬리베체크의 아이디어를 빌려와서 사용했다. 모차르트는 미슬리베체크의 아리아를 편곡해서 내놓은 것도 있다. 인기가곡인 Ridente la calma(고요함을 미소짓고)이다. 미슬리베체크의 오라토리오인 Abramo ed Isacco(아브라함과 이삭)은 상당 기간동안 모차르트의 작품이 아니냐는 얘기가 있었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미트라다테'. 현대적 연출. 벨기에 라모네극장. '미트라다테'는 미슬리베체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작품이다.

 

미슬리베체크는 쌍둥이로 태어났다. 요제프와 야힘이다. 야힘이 형이었다. 미슬리베체크의 아버지는 장사를 했고 방앗간도 운영하였다. 쌍둥이 형제는 어려서부터 장사를 배웠다. 그런데 요제프는 바이올린에 재주가 있었다. 작곡에도 재능을 보인 요제프는 작곡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방앗간에서 밀가루를 만드는 일을 집어 치우고 교향곡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26세 때인 1763년에 먼친척이 되는 빈센츠 폰 봘트슈타인 백작의 도움을 받아 베니스로 음악공부를 하러 떠났다. 폰 봘트슈타인 백작은 베토벤이 '봘트슈타인 소나타'를 헌정했던 그 사람이다. 베니스의 유학에는 형인 야힘의 도움도 컸다. 방앗간 일을 착실하게 배우고 장사에 소질을 보인 야힘은 그동안 돈을 웬만큼 벌었고 동생 요제프를 도와 줄수 있었다. 베니스는 요제프 미슬리베체크를 위해 돈과 명예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슬리베체크는 첫 오페라인 '세미라미데'를 29세 때인 1766년에 베르가모에서 선보였다. 관심을 끌었다. 이어 2년 후에 나폴리에서 '일 벨레로폰테'를 선보였다. 대성공이었다. 미슬리베체크는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작곡가로서 대성할 생각으로 보헤미아로 돌아가지 않고 이탈리아에 정착키로 결심했다. 미슬리베체크는 토리노, 베네치아, 휘렌체, 볼로냐, 밀라노, 파두아, 로마를 위해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는 또한 바이올린 협주곡, 키보드 작품들, 노래, 실내악, 교향곡 등도 열심히 작곡했다. 미슬리베체크는 다방면의 작곡가였다. 미슬리베체크는 성공한 작곡가이지만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처럼 영주나 왕족들에게 봉사하며 생활하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프리 랜서였다. 그런 점에서도 미슬리베체크는 특별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프라하의 요제프 미슬리베체크 생가에 부착되어 있는 기념 명판. 미슬리베체크를 '보헤미아의 신'(Il Divino Boemo)라고 적었다.

 

1770년대 말에 들어서서 미슬리베체크에게는 좋지 않은 일들이 겹쳐서 일어났다. 두 편의 오페라가 실패로 돌아간 것이고 건강이 나빠진 것이다. 그의 오페라가 실패를 겪은 것은 음악이 올드 패션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었다. 지나치게 형식적인 오페라 세리아였다는 것이며 전반적으로 우울한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미슬리베체크는 경제적으로도 좋지 않았다. 결국 은행으로부터 돈을 빌려서 생활해야 했다. 더구나 미슬리베체크는 로마에서 무절제하고 환락적인 생활을 하는 바람에 그만 매독에 걸렸고 결국 뮌헨에 가서 수술을 받았으나 아마추어의 미숙하고도 야만적인 수술로 코를 반절이나 잃게 되어 몇 년 후인 1781년 2월 4일에 세상을 떠났다. 미슬리베체크는 로마의 루치나에 있는 산 로렌초 교회(Basilica di San Lorenzo in Lucina)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그의 제자로서 영국의 돈많은 미술작품 수집가인 제임스 휴 스미스 배리라는 사람이 미슬리베체크의 장례식 비용을 전부 부담했다.

 

로마의 산 로렌조 교회 내부. 요제프 미슬리베체크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