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장미의 기사 슈트라우스

비엔나에 헌정한 작품

정준극 2014. 5. 3. 19:46

비엔나시 경축음악(Festmusik der Stadt Wien) - Festive Music for the City of Vienna

비엔나 시의회에 헌정한 작품

깊은 인연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비엔나

 

지휘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비엔나를 위해 경축음악을 작곡했다. 금관악기와 타악기로 연주하는 팡파레이다. 비엔나와 인연을 맺은 작곡가들은 많이 있지만 그중에서 비엔나시에 헌정하는 작품을 남긴 사람은 아마도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유일할 것이다. 비엔나의 토박이인 요한 슈트라우스는 비엔나와 관련된 오페레타, 왈츠, 행진곡 등을 남겼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들이 비엔나를 위해 작곡되었고 비엔나에 헌정된 작품은 아니다. 그저 제목에만 비엔나의 이름을 빌려 붙였을 뿐이다. 예를 들어 요한 슈트라우스의 대표적인 왈츠로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가 있지만 그것이 비엔나 시당국에 헌정된 작품은 아니다. 또한 왈츠인 '비엔나 기질'(Wiener Blut), 오페레타인 '비엔나의 유쾌한 아낙네들'(Die lustige Weiber von Wien: 미완성)도 있지만 제목에 비엔나라는 단어가 들어갔을 뿐 비엔나 시에 헌정된 작품은 아니다. 그런데 다른 슈트라우스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비엔나를 위한 작품을 작곡하고 헌정했다. '비엔나시 경축음악'(Festmusik der Stadt Wien)이다.

 

아름다운 비엔나의 중심지. 슈테판성당이 한가운데 보인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가 '비엔나 경축음악'을 작곡한 것은 1943년 1월이었다. 당시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이 작품을 작곡하게 된 것은 그 전해에 비엔나시로부터 '베토벤 상'을 받았기 때문에 감사하는 의미에서였다. 이 작품은 정확히 말하면 비엔나시의회에 헌정한 것이다. 이 작품은 1943년 4월 9일 비엔나 시청의 대연회장(Festsaal)에서 처음 연주되었다. 이 작품은 '비엔나 트럼펫연주자 모임'이 연주하도록 작곡하였으며 구성은 트럼펫 10, 트럼본 7, 튜바 2, 팀파니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처음 연주회를 가진 때로부터 10일 후에 이 작품을 축소한 곡을 만들고 간단히 '비엔나 팡파레'라고 불렀다. '비엔나 트럼펫 연주자 모임'(Viennese Corps of Trumpeters)은 비엔나 필하모닉, 비엔나 심포니, 비엔나 폭스오퍼 오케스트라의 금관악기 연주자들로 구성된 연주단체이다. 통상적으로 12명의 트럼펫, 8명의 트럼본, 2명의 튜바, 팀파니와 타악기 각 1명씩으로 구성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빈필과 같은 교향악단이 연주하도록 작곡을 하지 않고 소규모 연주단체가 연주하도록 작곡한 것은 아마도 전시여서 모든 것이 축소된 규모였기 때문이 아니겠느냐는 짐작이다.

 

라트하우스의 페스트잘

 

독일 뮌헨에서 태어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비엔나와 많은 인연이 있다. 1920년부터 1923년까지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을 지내며 오페라를 지휘했다. 물론 그 전에도 비엔나를 간혹 방문하여 빈필을 지휘하였으나 이번에는 아예 상주하면서 지휘를 맡은 것이다. 1916년에는 그의 오페라 '낙소스 섬의 아리아드네'(Ariadne auf Naxos)의 2차 수정본이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에는 역시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그림자 없는 부인'(Die Frau ohne Schatten)이 세계 초연되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비엔나에 오면 혹은 호텔에도 머물렀지만 조금 오래 머무를 일이 있으면 1구 뢰벨슈트라쎄(Löwelstrasse) 8번지에 체류했다. 폭스가르텐 뒷길에 있는 집이다. 이 집은 예술후원가로 잘 알려진 예니 마우트터(Jenny Mautner)와 그의 남편의 소유였으나 그들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존경하여서 이 집을 사용토록 했던 것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가족과 함께 1919년부터 비엔나에 머무를 때에는 아예 이 집에서 살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감사의 뜻으로 예니 마우트너에게 하이네의 시에 의한 가곡 '숲으로의 여행'(Waldesfahrt)을 작곡하여 헌정했다. 한편, 비엔나는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기념하여서 23구 리징에 있는 거리 하나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슈트라쎄(Richard-Strauss-Strasse)라고 명명했다. 쇤브룬 궁전의 남쪽에 있는 거리이다. 그리고 시내 중심가에 있는 유서깊은 자허 호텔에 있는 메짜닌의 홀을 살롱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라고 이름 붙였다. 살롱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옆 방은 구스타브 말러 살롱이다.

 

1구 뢰벨슈트라쎄 8번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비엔나에서 거주하던 건물이다. 지금은 어느 나라 대사관인듯 싶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비엔나 경축음악'을 작곡한 데에는 비엔나 시가 그에게 베토벤 상을 주었기 때문에 감사하는 의미에서 작곡을 했지만 그 것 말고도 그가 비엔나 시에 감사해야할 다른 의미가 있었다. 1941년쯤해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에게 달갑지 않은 인물,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 기피인물이었다. 글자그대로 페르소나 논 그라타(persona non grata)였다. 그가 별로 적극적으로 나치에게 협조하지 않았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하지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자신이 나치를 두려워하기 시작한 것이 그가 나치와 거리를 두게 된 가장 큰 이유였다. 직접적인 이유는 그의 하나뿐인 아들 프란츠의 부인인 알리스가 유태인이기 때문이었다. 알리스는 유태인이라는 것을 나타내지 않기 위해서 여권과 운전면허증을 위조해서 가지고 다녔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며느리인 알리스도 크게 사랑하였지만 두 손자들도 참으로 사랑하였다. 그런데 만일 알리스가 유태인이라는 것이 발각되면 당시 나치의 인종법에 의해 두 손자들도 유태인 취급을 받아야 했다. 그러면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강제수용소로 끌려가야 했다. 실제로 두 손자들은 거리에서 유태인이 아니냐는 욕설과 함게 나치 당원들에게 구타를 당한 일이 있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로서는 며느리와 손자들의 안전이 가장 큰 걱정이었다. 그리고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가족과 함께 뮌헨 부근의 가르미슈(Garmisch)에서 살고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으면서 연합군의 공중폭격도 심해졌고 나치의 본거지인 뮌헨은 좋은 타겟이었다. 그러므로 뮌헨 부근의 가르미슈도 연합군의 폭격을 받을 가능성이 다분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가족을 위해서 가르미슈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빌라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가족들을 데리고 비엔나로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에는 비엔나가 연합군의 폭격과는 거리가 멀었었다. 연합군은 유서깊은 비엔나를 무조건 폭격하고 싶지가 않았던 것 같았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비엔나에서 당시 비엔나 총독이나 마찬가지였던(가울라이터: Gauleiter) 발두르 폰 쉬라흐(Baldur von Schirach)의 보호를 받을수 있었다. 폰 쉬라흐는 오래전부터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숭배해 왔던 사람이었다. 폰 쉬라흐의 아버지는 베를린에서 유명한 극장장이었고 어머니는 미국인이었다. 그런 배경과 함께 폰 쉬라흐는 특별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에 대한 찬미자였다. 폰 쉬라흐는 나치의 비엔나 총독이 된 이후 비엔나를 다시 한번 세계적인 문화와 예술의 도시로 만들고 싶어했을 만큼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가족들은 비엔나에서 폰 쉬라흐의 간접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그나마 안심하고 지낼수 있었다. 사실상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비엔나에서 게슈타포의 압박을 받기도 했지만 그때마다 폰 쉬라흐가 보호해 주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그 점을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으며 '비엔나 경축 음악'을 작곡한 것도 일설에는 폰 쉬라흐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고 한다.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부인인 파울리네는 좋게 말해서 솔직한 성격이고 나쁘게 말해서 말이 많았는데 어느날 파티에서 폰 쉬라흐를 만나자 한다는 소리가 '나치가 전쟁에서 질것 같은데요 그때 폰 쉬라흐 총독께서 피난 갈 곳이 없으면 가르미슈에 있는 우리 집으로 오셔요. 하지만 다른 인간들은 안됩니다.'라고 말해서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1933년 뉘른베르크에서 히틀러 유겐트의 사열을 받고 있는 발두르 폰 쉬라흐. 폰 쉬라흐는 히틀로 유겐트의 총대장이었다. 그같은 공로로 비엔나 가울라이터가 되었다. 가울라이터는 나치가 점령하여 임명한 지방장관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은 자기들의 후원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또는 자기들과 특별한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존경과 사랑의 표시로 작품을 작곡하여 헌정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하이든도 그랬고 모차르트도 그랬으며 베토벤도 그랬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도 그랬다. 그와 그의 가족들이 비엔나에서 편안히 지낼수 있도록 집을 제공해준 예니 마우트너를 위해 가곡을 작곡하여 헌정한 것은 좋은 예이다. 또 다른 좋은 예는 그가 1909년에 황제를 위해 '성요한 기사의료봉사단 행진곡'(Solemn Procession of the Knights of the Order of St John's Hospitaller)을 작곡하여 헌정한 것이다. 12개의 트럼펫과 3개의 소롤 트럼펫, 4개의 혼, 4개의 트럼본, 2개의 튜바, 팀파니를 위한 작품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더라도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작곡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살롱 오케스트라를 위한 음악, 피아노와 하르모니움을 위한 음악들이 태어났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비엔나시를 위해서 '비엔나 경축음악'을 작곡했지만 빈필을 위해서도 특별음악을 작곡했다. 1924년에 작곡한 '빈필을 위한 팡파레'(Fanfare for the Vienna Philharmonic)이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빈필은 사실상 특별한 관계에 있다. 그가 처음으로 빈필을 지휘한 것은 1909년이었고 그후에도 여러번 지휘했으나 1920년부터 23년까지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음악감독을 맡으면서 빈필을 자주 지휘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1920년과 1925년에는 빈필을 이끌고 남미에 가서 순회연주회를 가지기도 했다.

 

비엔나악우회 황금홀에서의 빈필 연주회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1936년의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 '올림픽 찬가'(Olympische Hymne)를 작곡한 것은 과연 진실로 베를린 올림픽을 위해서 작곡한 것인지 또는 나치의 은근한 압력을 피할수 없어서 작곡한 것인지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가 친구인 대본가 슈테판 츠봐이크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의중을 알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편지에서 '강림절 기간을 무료하게 보내기가 싫어서 작곡을 해 보았습니다. 게으르다는 것은 일만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일반 사람들을 위한 올림픽 찬가입니다. 나는 스포츠를 싫어합니다. 싫어한다기 보다는 경멸합니다. 나처럼 스포츠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