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오네거-이베르의 합작 '레글롱' - 119

정준극 2014. 7. 5. 21:27

레글롱(L'Aiglon) - 새끼 독수리 - 나폴레옹 2세

아서 오네거와 자크 이베르의 합작 5막 오페라

나폴레옹 2세 라이히슈타트 공작의 생애를 그린 작품

 

 

아서 오네거와 자크 이베르

 

오페라 '레글롱'(L'Aiglon)은 스위스의 아서 오네거(Arthur Honegger: 1892-1955)와 프랑스의 자크 이베르(Jacques Ibert: 1890-1962)가 합작하여 완성한 작품이다. 과거에 보면 파스티슈(또는 파스타치오)라고 해서 여러 작곡가들이 합심해서 하나의 오페라를 완성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레글롱'은 전 5막 중에서 아서 오네거가 2, 3, 4막을 작곡했고 자크 이베르가 1막과 5막을 나누어서 작곡한 특이한 케이스이다. 다시 말하여서 이베르가 프레임을 만들었고 오네거는 그 안에 들어가는 핵심을 만들었다고 보면 된다. '레글롱'은 프랑스어로 '새끼 독수리'를 말한다. '레글롱'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의 아들인 나폴레옹 2세의 별명이다. 나폴레옹 2세의 아버지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나폴레옹 1세)이며 어머니는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프란시스 2세의 딸인 마리 루이제(Marie Luise: 마리 루이스)이다. 그런고로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을 '어린 독수리'라고 부르는데에는 아무런 이견이 없다. 나폴레옹 2세는 오스트리아에서 라이히슈타트(Reichstadt) 공작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이름은 프란츠라고 지어주었다. 나폴레옹 2세(라이히슈타트 공작)는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실각하여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당하자 비엔나의 쇤브룬궁전에 연금되다시피 하며 지내다가 21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비운의 인물이다. 오페라 '레글롱'은 나폴레옹 2세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린 독수리'라는 별명의 나폴레옹 2세. 오스트리아에서는 그를 라이히슈타트 공작이라고 불렀다. 메조소프라노 카린 세사예(Carine Sechaye)

 

오페라 '레글롱'은 프랑스의 에드몽 로스탕(Edmond Rostand)이 나폴레옹 2세를 주인공으로 삼아 쓴 희곡을 바탕으로 삼은 작품이다. 로스탕의 연극은 1900년 3월에 파리의 '사라 베른하르트 극장'에서 처음 공연된 이래 상당한 반응을 불러일으켜서 다른 곳에서도 자주 공연되었다. 로스탕은 '레글롱'을 특별히 사라 베른하르트를 위해 썼다. 사라 베른하르트가 나폴레옹 2세의 역할이었다. 이후 사라 베른하르트는 유럽의 여러 곳에서 연극 '레글롱'의 주인공으로 출연하였고 사람들은 나폴레옹 2세의 역할을 사라 베른하르트의 시그네이쳐 롤이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을 프랑스의 대본가인 앙리 깽(Henri Cain: 1890-1962)이 오페라 대본으로 만들었다. 희곡의 줄거리는 나폴레옹 2세인 라이히슈타트 공작이 충복 겸 친구인 세라팽 플람보(Seraphin Flambeau)와 함께 비엔나에서 탈출하여 바그람 전투의 격전지를 찾아가 아버지 나폴레옹 1세를 회상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나폴레옹 2세는 바그람 전투의 장소를 방문한 후 폐렴으로 세상을 떠난다. 오페라 '레글롱'은 1937년 몬테 칼로 오페라에서 초연을 가졌다. 초연에서 라이히슈타트 공작의 이미지를 창조한 사람은 벨기에 출신인 당대의 소프라노 패리 헬디(Fanny Heldy: 1888-1973)였다.

 

몬테 칼로 오페라 극장에서의 초연에서 라이히슈타트 공작의 이미지를 창조한 소프라노 패니 헬디. 프랑스 오페라에서 바지 역할은 상당히 드믄 것이다.

 

라이히슈타트 공작(Herzog von Reichstadt)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잠시 그 배경을 고찰해 보는 것도 이 오페라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은 유럽을 하나로 통합하겠다는 거창한 기상으로 다른 나라들과 전쟁을 일으켜 승승장구하였다. 프랑스와 오래동안 상대적으로 라이발 위치에 있었던 오스트리아는 나폴레옹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할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은 비엔나를 두번이나 점령하기까지 했다. 오스트리아 대공이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프란시스 2세는 무슨 방책을 마련해야 했다. 프란시스 2세 황제는 1804년에 오스트리아를 제국으로 선포하고 초대 황제에 올랐다. 프란시스 2세는 호칭도 프란시스 1세라고 바꾸었다. 그러는 중에 나폴레옹의 세력은 점점 커지기만 했다. 결국 프란시스 1세는 7백년 역사의 신성로마제국의 막을 내려야 했다. 프란시스 1세는 나폴레옹과 평화를 유지하고 싶었다. 당시로서 국가간의 평화는 결혼이 제일이었다. 프란시스 1세는 큰 딸 마리 루이스와 나폴레옹의 결혼을 주선했다. 마침 나폴레옹은 첫번째 부인 조시핀과 사별하고 나서 혼자 신세였다. 마리 루이스는 어릴 때부터 '프랑스는 나쁜 나라'라는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아버지의 거룩한 뜻을 받아 들여서 고분고분하게 나폴레옹과 결혼하였다. 나폴레옹도 합스부르크의 마리 루이스와 결혼하게 되어 기분이 좋았다. 잘하면 나중에 오스트리아를 통합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1세는 마리 루이스와 나폴레옹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면 그 아들을 볼모로 삼아서 프랑스가 더 이상 오스트리아를 넘보지 않도록 할 생각이었다. 그리하여 1810년에 마리 루이스와 나폴레옹의 결혼식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마리 루이스는 1810-1814년에 프랑스의 황비였다.그리고 '어린 독수리'라고 하는 나폴레옹 2세, 즉 라이히슈타트 공작이 1811년에 태어났다.

 

그러던중 나폴레옹은 1812년 저 유명한 모스크바 후퇴로 몰락하여 엘바 섬에 유배 되었다. 마리 루이스는 비엔나에 있으면서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폴레옹은 엘바 섬에 간지 1년 후에 복귀하여 다시 프랑스를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815년 영국과의 워털루 전투에서 패배하여 결국 영국의 감시 아래에 대서양의 고도 세인트 헬레나에 강제 유배되었다가 6년 후인 1821년에 세상을 떠났다. 프란츠라는 오스트리아식 이름을 가진 나폴레옹 2세는 아버지 보나파르트가 세인트 헬레나에서 세상을 떠날 때에 열살이었다. 나폴레옹이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자 마리 루이스는 어린 나폴레옹 2세를 데리고 비엔나로 돌아왔다. 나폴레옹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완전히 찬밥 신세여서 겉으로는 쇤브룬 궁전에서 부족함 없이 지냈지만 실제로는 나폴레옹의 세력이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볼모로 지냈다. 미안한 얘기지만 당시의 유럽 정황과 나폴레옹 1세와 합스부르크의 마리 루이제의 결혼, 그 후 라이히슈타트 공작의 탄생과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자면 한도 끝도 없을 것 같으므로 이만 줄인다.

 

라이히슈타트 공작 프란츠(Le duc de Reichstadt). 나폴레옹 2세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레글롱(어린 독수리: 라이히슈타트 공작: S), 세라팽 플람보(Seraphin Flambeau: 어린 독수리의 친구 겸 충복: B), 프랑스 아타세(T),  카메라타 백작부인(Countess Camerata: Cont), 르 슈발리에 드 프로케슈 오스텐(Le Chevalier de Prokesch-Osten: B), 마레샬 마르몽(Marechal Marmont: Bar), 메테르니히 공자(B-Bar), 마리 루이스(MS), 세들린스키 백작(Comte de Sedlinsky: T), 프레데릭 드 겐츠(Frederic de Gentz: T), 테레스 드 로르제(Therese de Lorget: S), 패니 엘슬러(Fanny Elssler: MS) 등이다.

 

메테르니히와 어린 독수리와 마리 루이스

 

오페라는 소년 프란츠(라이히슈타트 공작)를 로맨틱한 이상가로 그렸다. 프란츠는 아버지 나폴레옹 1세가 이룩한 영광스런 업적들을 마음에 간직하면서 자랐다. 비록 그는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지만 그의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경외심은 마음 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오네거와 이베르는 오페라 '레글롱'을 1937년부터 작곡하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의 악몽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던 때였다. 그러나 유럽은 다시한번 전쟁의 소용돌이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오네거는 과거를 미래로 가는 루트로 생각하고 과거를 다시 검토해 보기로 했다. '레글롱'은 에드몽 로스탕의 희곡에 바탕을 둔 것이지만 1927년도 아벨 그레이스의 서사시인 '나폴레옹'을 참고하기도 했다. 오네거는 이 서사시를 바탕으로 극본이 만들어지자 연극을 위한 음악을 작곡했었다. 그리고 칼 테오도르 드라이어가 감독한 1928년도 프랑스 영화인 '잔다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 The Passion of Joan of Arc)으로부터도 영감을 받았다. 오네거는 영화를 참고로 하여 Jeanne d'Arc au Bucher 라는 제목의 작품을 쓰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브라운스펠스 또는 하르트만의 반파치스트 드라마로부터도 영향을 받았다.  

 

 

2막에서 어린 독수리와 메테르니히 공자       3막에서 가면무도회 장면

 

1막은 이제 청년이 된 프란츠(라이히슈타트 공작: 어린 독수리)가 친구 겸 충복인 플람보와 함께 비엔나로부터 탈출할 생각을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비엔나의 쇤브룬 궁전에서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프란츠는 자기의 아버지인 나폴레옹이 무명의 병사에서 황제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그런 영광을 차지할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2막은 메테르니히 재상이 무대를 압도하는 장면이다. 나폴레옹의 득세를 무조건 비난하고 거부하는 메테르니히는 권력의 상징으로서 프란츠를 압박한다. 메테르니히는 마치 뱀과 같이 차가우면서도 음모에 능하다. 한편, 프러시아의 프데레릭 대제도 나폴레옹에 대하여 상당한 거부감을 나타내 보이고 있다. 그는 프러시아의 젊은 왕자로서 프러시아가 군사기계화 되는 것을 탈피코자 한다. 이러한 장면에서 오네거는 멀리로부터 전쟁의 나팔소리가 들리도록 했으며 오로지 강자만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나폴레옹 2세이며 어린 독수리라고 해도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수 없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어린 독수리는 자기의 주장을 스타카토로서 거칠게 소리치지만 결국은 그 자리에 주저 앉고 만다.

 

 

메테르니히에게 항거하는 어린 독수리.    어머니 마리 루이스와 어린 독수리

 

 

3막은 무도회 장면이다. 가면무도회이다. 고전적으로 원을 그리며 단아하게 춤을 춘다. 가면무도회는 권력 투쟁의 변형이다. 오케스트라 음악은 우아하다. 그러나 음성 파트는 긴장에 넘쳐 있다. 어린 독수리와 플람보는 밤중에 마르세이유로 도피의 길을 떠난다. 4막도 2막처럼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내몰아치는 듯한, 소용돌이 치는 듯한 코드이다. 마치 연기처럼, 바람처럼, 폭풍처럼 전쟁의 단면을 표현하고 있다. 어는 순간에는 '모스크바 행진곡이 들린다. 어린 독수리는 바그람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른다. 바그람은 1809년에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군을 크게 물리친 장소이다. 그러나 오네거는 패배가 다가오고 있음도 상기시켜 준다. 어린 독수리와 플람보는 메테르니히가 보낸 오스트리아 군의 추격을 받는다. 플람보가 대신 죽음으로서 어린 독수리는 목숨을 건진다. 나팔 소리가 들리고 군기가 펄럭이며 군마들이 힘차게 진격하는 모습을 느낄수 있다. 합창단이 '바그람!'이라고 외친다. 어린 독수리는 바그람의 영광에 그만 정신을 빼앗긴 듯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병사들에 의해 어디론가 끌려간다. 어린 독수리는 더 이상 날수 없게 된다. 5막은 쇤브룬 궁전이다. 어린 독수리인 라이히슈타트 공작은 쇤브룬에서 감옥에서와 같은 생활을 한다. 어린 독수리는 사방에서 들리는 소리 때문에 정신이 혼란스럽다. 메테르니히의 소리도 들리고 병사들의 함성도 들리며 어머니인 마리 루이스의 소리도 들린다. 비통한 음악이 흐른다. 어쩔수 없는 결론을 향해 치닫는 듯한 음악이다. 마침내 어린 독수리는 죽음을 맞이한다. '아비뇽의 다리에서'(Sur le pont d'Avignon)가 들린다. 이 노래는 프랑스 사람이면 모두 아는 노래이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지낸 어린 독수리는 이 노래를 거의 듣지 못하고 자랐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해준다. 계속해서 L'on y dans, l'on y dans이 들린다. 돌림노래이다. 댄서들이 패턴을 그리면서 춤을 춘다. 어디로 끌고 가는 것인지 모르는 춤의 행렬이다.

 

새끼독수리의 임종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