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마스네의 '라 나바레스' - 136

정준극 2014. 9. 17. 09:46

라 나바레스(La Navarraise)

쥘르 마스네의 2막 오페라

쥘르 클라르티의 단편 '담배'(La Cigarette) 바탕

 

'라 나바레스'는 프랑스어로 나바레의 여인이라는 뜻이다. 나바레는 스페인의 북쪽 바스크 지역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지방이다. 현재는 스페인의 자치구로 되어 있다. 나바레는 한쪽이 피레네 산맥에 걸쳐 있으며 다른 쪽들은 스페인의 아라곤과 라 리오하(La Rioja), 그리고 북쪽 끝은 프랑스의 아퀴텡(Aquitaine)과도 경계를 이루고 있다. 나바레는 지리적, 그리고 정치적 이유 때문에 지난날의 역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2013년에 마스네의 '라 나바레스'가 영국의 웩스포드 페스티발에서 모처럼 공연되었을 때 무대 배경을 피카소의 '게르니카'로 삼은 것도 그러한 사정을 감안해서 였을 것이다. 게르니카는 1937년 나치가 바스크 지방의 작은 마을인 게로니카에 대하여 무차별 포격을 가하여 수천명의 주민들을 무참하게 죽인 대학살의 장소였다. 마스네의 '라 나바레스'는 1894년 6월 20일 런던의 코벤트 가든에서 초연되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소프라노인 엠마 칼베(Emma Calvé: 1858-1942)가 주인공인 나바레스 여인 아니타의 역할을 맡았다. 엠마 칼베가 아니타의 역할을 맡은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웩스포드 페스티발 공연. 배경은 피카소의 게르니카

 

19세기 중반에는 이탈리아에서 이른바 베리스모(Verismo)라고 하는 새로운 사조의 오페라가 큰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있었던 작품이 1890년에 로마에서 초연을 가진 마스카니의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였다. '카발레리아...'는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했던 사회적 충격이었다. '카발레리아...'의 초연에서 산뚜짜의 이미지를 처음으로 창조한 사람은 당대의 메조소프라노인 엠마 칼베였다. 이탈리아에서의 베리스모 열풍은 프랑스로 전파되었다. 프랑스의 작곡가들도 베리스모 오페라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마스네의 '라 나바레스'였다. 그래서 혹자들은 마스네의 '라 나바레스'를 '스페인의 카발레리아'(Calvelleria Espanola)라고까지 불렀다. 아무튼 '라 나바레스'는 마스네가 베리스모라는 마차에 합승한 작품이라고 보면 된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라 나바레스'와 '카발레리아...'는 더블 빌로서 공연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라 나바레스'의 공연시간이 불과 50분 밖에 되지 않으므로 생각할 것도 없이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와 더블 빌로서 공연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그러다가 어찌된 일인지 '라 나바레스'는 '카발레리아...'의 그늘에 가려서 점차 빛을 잃어갔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역시 두 작품이 콤비라는 인식으로 더블 빌의 체면을 다시 유지하고 있다.

 

런던 초연 포스터. 아니타 역의 엠마 칼베

 

그건 그렇고 다시 엠마 칼베 얘기로 돌아가면, '라 나바레스'의 여주인공인 아니타의 역할을 엠마 칼베가 맡도록 한것은 엠마 칼베가 이탈리아에서 '카발레리아...'의 산뚜짜로서 대단한 갈채를 받았기 때문에 그를 내세운 것이었다. '라 나바레스'는 당시 유럽 전역에서 유행이었던 베리스모에 알맞는 오페라로서 초연 이후 많은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얼마후 부터 프랑스에서는 오펜바흐의 오페레타가 등장하고 이밖에도 푸치니의 '라 보엠'과 같은 오페라가 열광적인 환영을 받는 통에 슬며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다가 백여년 만인 2013년에 웩스포드에서 리바이발 되어 또 다시 세계적인 관심을 끌게 되었다. '라 나바레스'의 프랑스어 대본은 쥘르 클라르티(Jules Claretie)와 앙리 깽(Henri Cain)이 공동으로 작성했다. 원작은 쥘르 클라르티의 단편소설 '담배'(La Cigarette)였다. 1894년 영국 런던에서의 초연에는 영국 왕세자가 직접 관람하였다. 영국 왕실은 '라 나바레스'를 왕실 사람들과 귀족들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해서 윈저 궁전에서 다시 공연토록 하였다. 1895년에는 프랑스 초연이 있었다. 파리의 플라스 뒤 샤틀레(현재의 테아트르 드 라 비유)에서 공연되었다. 역시 엠마 칼베가 아니타의 역할을 맡아 찬사를 받았다. 그후로 '라 나바레스'는 플라스 뒤 샤틀레에서 향후 60년 동안 무려 180회의 공연을 끊임없이 가졌다. 그만큼 인기를 끌었다. 2013년 웩스포드 페스티발에서는 마스네의 '테레스'(Therese)와 더블 빌(2편 동시공연)로서 공연되었다. '라 나바레스'는 음반으로도 여러 번 취입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것은 1970년대에 마릴린 혼, 플라치도 도밍고, 루치아 폽, 알랭 반조(Alain Vanzo) 등이 취입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가리도 장군

 

'라 나바레스'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아니타(Anita: MS): 라 나바레스(나바레 출신의 젊은 여인). 아라퀼을 사랑한다.

- 아라퀼(Araquil: T): 비스케이 연대의 상사. 나중에는 중위로 진급. 아니타를 사랑한다.

- 가리도(Garrido: B): 비스케이 연대장. 칼리스트 반군에 패한 정부군 장군

- 레미지오(Remigio: Bar): 아니타가 가난하고 미천하다고 해서 무시하는 아라퀼의 아버지

- 라몬(Ramon: T): 비스케이 연대의 대위

 

제목은 '라 나바레스'(나바레 여인)이지만 장소는 구체적으로 비스케이만에 면하여 있는 빌바오 주변 지역이다. 대서양을 바라보는 지역이다. 시기는 1874년, 스페인의 내전(칼리스트 전쟁)이 한창이던 때이다. 칼리스트 전쟁(Carlist War)에 대하여는 본문의 말미에 잠시 설명코자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간단히 설명하자면 19세기에 스페인에서 페르디난트 7세가 세상을 떠나자 카를로스 왕자의 추종자들(칼리스트)과 이사벨라 공주의 추종자들(크리스티노스)간에 왕위를 놓고 벌인 내전이다. 비스케이 연대의 상사인 아라퀼은 나바레 아가씨인 가난한 아니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아라퀼의 아버지인 레미지오는 두 사람의 결혼을 반대하며 만일 아니타가 아라퀼과 정말 결혼하고 싶다면 2천 듀로의 지참금을 가지고 오라고 제안한다. 아니타로서는 도저히 감당할수 없는 액수이다. 그러한 때에 비스케이 여단의 사령관인 가리도 장군은 만일 상대편 칼리스트 사령관인 추카라가를 죽이는 사람이 있다면 막대한 포상금을 주겠다고 발표한다. 돈이 필요했던 아니타가 아무도 몰래 그 임무를 자원해서 완수한다. 그리고 아라퀼의 아버지가 요구한 지참금을 충분히 커버할수 있는 상당한 액수의 포상금을 받는다. 그런데 아니타가 적군 사령관을 죽이기 위해 적군의 진영에 잠입하는 것을 아라퀼이 우연히 목격한다. 아라퀼은 아니타가 또 다른 애인을 만나러 가는 것으로 오해한다. 얼마후 아라퀼은 전투에서 치명적인 부상을 입어 결국 숨을 거둔다. 아니타는 사랑하는 아라퀼이 자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죽은 것을 알고 정신이상을 일으킨다. 이상이 '라 나바레스'의 대강 줄거리이다.

 

마스네는 이처럼 복잡하다면 복잡한 스토리를 2막으로 압축하였다. 그래서 비록 인터메쪼가 있다고 해도 전체 공연시간이 50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한편, '라 나바레스'의 인물들은 어떻게 보면 '카발레리아...'의 인물들보다 덜 극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스네의 천재적인 음악이 그런 면을 살려주고도 남음이 있게 해 주었다. 하늘 높이 떠 오르는 듯한 서정적인 멜로디, 그런가하면 순간적으로나마 전율을 느낄수 있게 해 주는 음악이 그것이다.때문에 마스네가 베리스모에 있어서 비록 마스카니와 라이발 관계에 있다고 하더라도 전반적으로는 마스카니를 쉽게 능가할수 있다는 평을 들었다. 서곡부터가 대단하다. 소란하고 거칠며 마치 피에 흥건히 젖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곡이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끊임 없이 민속적인 색채가 덧칠해져 있어서 흥미를 갖게 해 준다. 예를 들면 무대 밖에서의 나팔 소리, 병사들이 부르는 연대의 노래, 바스크 댄스, 주민들이 손벽을 치며 부르는 노래, 여기에 카스타네츠 소리와 총소리가 곁들여져서 활기를 느끼게 해준다. 이제 스토리를 좀 더 자세히 설명코자 한다.

 

빌바오 외곽에 있는 어떤 작은 마을의 광장이다. 제2차 칼리스트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시기이다. 이 전쟁은 전면적인 내전이라기 보다는 카탈로니아 주민들의 반란이라고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한 것이다. 1874년 봄.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반란 세력은 추카라가 장군의 지휘아래 가리도 장군이 이끄는 정부군을 격파하고 빌바오를 점령한다. 이로 인하여 가리도 장군의 비스케이 연대는 빌바오를 포기하고 후퇴할수 밖에 없었다. 비스케이 연대는 빌바오에서 머지 않은 이 마을에 임시로 주둔하여 반군과 다시 한번 전투를 치룰 준비를 하고 있다. 가리도 장군은 병사들을 재촉하여서 진지를 구축하고 사령부 건물도 마련한다. 그리고 보초병들을 두어 적군이 추격하는지를 살피도록 한다. 잠시후 지친 병사들이 전사자들을 들것에 들고 힘들게 들어온다. 그 뒤로 걸음을 가누기도 어려운 부상병들이 따라 들어온다. 멀리서 대포 소리가 들린다. 이따금 소총 소리도 귀를 적신다. 무대의 한쪽에서는 한 무리의 여인들이 성모 마리아를 모신 예배처에서 조용히 기도를 드리고 있다. 마을 주민들인 모양이다.

 

 

[1막] 가리도 장군이 부하 장교들에게 용감히 싸웠다고 치하한다. 그러나 적군에게 빌바오를 빼앗긴 것 때문에 말할수 없이 원통해 하고있다. 가리도 장군은 적군 사령관인 추카라가에게 저주를 퍼붓다가 만일 추가라가가 갑자기 죽는다면 빌바오에 평화가 올수 있다는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추카라가 한 사람만 죽으면 전쟁을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수많은 목숨들을 구할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가리도 장군이 그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하기 위해 사령부 건물로 돌아가고 광장에는 몇 명의 장교들만이 남아 있다. 그때 어떤 젊은 여자 한 사람이 나타난다. 아니타이다. 아니타는 사랑하는 아라퀼 상사가 전투에 나갔지만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기 때문에 너무나 궁금해서 그를 찾아 온 것이다. 아니타는 마침 광장에 있는 연대의 장교인 라몬에게 아라퀼이라는 병사를 아느냐고 묻고 안다면 혹시 언제 마지막으로 보았느냐고 묻는다. 라몬은 아라퀼을 알기는 알지만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한다. 아니타는 옷 속에서 작은 성모상을 꺼내서 기도를 드린다. 제발 아라퀼이 무사히 돌아오게 해 달라는 기도이다. 잠시후 한 무리의 병사들이 전선에서 돌아온다. 마을 사람들은 그 병사들을 둘러싸고 누가 살아왔는지 확인하려고 부산하다. 마침내 제일 마지막에 아라퀼이 나타난다. 아니타의 기쁨은 한이 없다. 아니타는 아라퀼에게 성모에게 기도했기 때문에 무사히 돌아올수 있었다고 말한다. 아라퀼은 전선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투를 하고 있는 중에도 아니타만 생각했다고 말한다. 아라퀼은 아니타가 가지고 다니는 작은 성모상이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음이 분명하다고 덧 붙여 말한다.

 

아티나와 아라퀼이 서로의 사랑을 다짐하는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어떤 노인 한 사람이 나타난다. 아라퀼의 아버지인 레미지오이다. 레미지오는 아들이 빌바오 전투에서 무사히 돌아온데 대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아니타가  아라퀼과 함께 있는 것을 보자 아니타에게 '도대체 왜 계속해서 아라퀼만 따라 다니느냐?'면서 면박을 준다. 아니타는 레미지오에게 아라퀼을 사랑하고 있다고 대답한다. 그러자 레미지오는 아라퀼이 마을에서 존경받는 지주의 아들이므로 아니타처럼 미천한 집안 출신의 여자와는 맞지 않는다고 말한다. 아니타는 아라퀼을 사랑한지 벌써 2년이나 된다고 말하고 이제는 서로 헤어질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자 레미지오는 아니타에게 '내가 아라퀼에게 줄수 있는 만큼의 재산을 지참금으로 가져오면 그때에는 두 사람의 결혼을 심각하게 생각해 보겠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레미지오는 아니타에게 2천 듀로를 지참금으로 제시한다. 그건 아니타로서 도저히 마련할수 없는 액수이다. 아라퀼은 아버지인 레미지오에게 그러지 말고 제발 아니타를 받아들여 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레미지오는 아니카가 지참금에 대한 생각은 변할수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사령부 건물에서 나온 가리도 장군은 마을 광장에 서 있는 아라퀼을 보로 어디선가 많이 본 병사라고 말한다. 잠시후 가리도 장군은 아라퀼이 비스케이 연대가 빌바오에서 퇴각할 때에 마지막까지 비스케이의 연대의 안전한 후퇴를 위해 목숨을 걸고 방어한 병사인 것을 알아본다. 아라퀼은 가리도 장군에게 그때 소대장이 전사를 했기 때문에 상사인 자기가 소대를 인솔할수 밖에 없었다고 설명한다. 가리도 장군은 아라퀼의 용맹을 크게 치하하고 아라퀼을 그 자리에서 중위로 임명하여 소대를 맡도록 한다. 레미지오 영감은 아들이 장교가 된 것을 보고 흡족해서 아들 아라퀼에게 짐짓 거수경례를 붙인다. 그러나 아니타는 어쩐지 아라퀼이 자기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어서 슬픈 심정이다. 무대 위에서는 한쪽에어 아니타가 슬픔에 겨워서 흐느끼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가리도 장군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부하 장교들을 위해 슬프게 눈물을 흘리고 있다. 잠시후 라몬 대위가 가리도 장군에게 비스케이 병사들이 반군에 의해 더 많이 희생되었다는 보고를 한다. 가리도 장군은 추카라가를 죽여야 한다는 결심을 다시한번 굳게 하며 누구든지 추카라가를 죽이는 사람에게는 커다란 상금을 주겠다고 선포한다. 그러자 아니타가 다소 격앙된 목소리로 가리도 장군에게 만일 추카라가의 목을 가져오면 2천 듀로를 주겠느냐고 묻는다. 다만, 아니타는 자기가 그런 일을 하겠다는 것을 남에게 절대로 말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였다. 가리도 장군은 젊은 여인이 목숨을 거는 그런 임무를 맡겠다고 나서자 무척 놀란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 나서지 않으므로 아니타에게 그 일을 맡긴다. 아니타가 밖으로 뛰어 나간다. 가리도 장군은 병사들에게 이 마을의 수비를 더욱 단단히 하라고 명령한다.

 

이제 아라퀼이 등장해서 아니타에 대한 사랑의 노래를 열정적으로 부른다. 한쪽에 있는 라몬 대위는 담배를 피워 물고 아라퀼의 노래를 듣는다. 그러면서 만일 아라퀼이 저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하고 있는 아가씨가 나바레에서 온 검은 머리의 빛나는 눈동자를 가진 바로 그 아가씨이고 만일 자기가 아라퀼이라고 하면 그 아가씨를 한치도 믿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아라퀼이 라몬에게 어째서 그런 소리를 하느냐고 묻자 라몬은 그렇게 생긴 아가씨가 병사들에게 칼리스트 진지로 가는 길을 물어 보았다고 하며 병사들이 그곳엔 왜 가느냐고 묻자 오늘 밤에 추카라가 장군을 만나야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는 얘기를 해 준다. 아라퀼은 설마 아니타가 밤중에 추카라가를 만나러 갈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라몬에게 그 아가씨가 누군지 확실치 않지만 혹시 우리쪽의 스파이로서 적진에 잠입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한다. 라몬은 추카라가라는 사람은 여자들에게 잘 대해주는 사람이므로 밤중에 만나기로 했다면 스파이는 아닐 것이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추카라가가 호색한이므로 예쁜 아가씨를 좋아한다는 얘기이다. 그 소리를 들은 아라퀼은 몹씨 기분이 상해서 자리를 뜬다. 한순간 무대에는 정적이 흐른다. 그 정적은 부스타망트 하사관을 비롯한 한 떼의 병사들이 마을의 주점을 털어서 와인을 마시고 기분들이 좋아서 노래를 부르자 깨진다. 병사들의 합창이다. 라몬이 병사들에게 어서 가서 취침하라고 지시한다.

 

[2막] 먼 동이 터오는 분위기의 간주곡이 흘러 나온다. 병사들이 이날의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옷과 머리가 흐트러지고 옷에는 선혈이 낭자하게 묻은 아니타가 마치 정신을 잃은 듯 나타난다. 아니타는 가리도 장군에게 약속한대로 2천 듀로를 달라고 요구한다. 가리도는 과연 아니타가 적군의 사령관인 추카라가를 죽였는지 아닌지 확실치 않아서 머뭇거린다. 아니타가 어떻게 해서 적진에 잠입하였으며 어떻게 해서 추카라가의 목을 베었는지를 자세히 설명한다. 아니타는 추카라가를 죽이고 적진을 빠져 나올 때 적군들에게 발견되었으나 적군들의 총알들을 피해서 다행히 부상을 입지 않고 돌아왔다고 말한다. 저 멀리 빌바오 쪽에서 교회의 종소리가 구슬프게 울린다. 어떤 중요한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알리는 종소리이다. 그제서야 가리도는 아니타의 말이 참말인 것으로 믿는다. 가리도는 아니타에게 약속한 상금을 준다. 그리고 이 사실을 어느 누구에게도 발설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다시한번 다짐한다.

 

아니타는 상금을 받아서 한없이 기쁘다. 아니타는 이제 그 어느 누구도 자기와 아라퀼과의 결혼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노래한다. 그러나 아니타의 기쁨은 아라퀼이 전투에서 큰 부상을 입어서 들것에 실려 들어오자 금방 사라진다. 아라퀼은 아니타에게 자기가 중상을 입은 것은 다름아니라 아니타 때문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밤중에 아니타가 적군 사령관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 따라가서 말리려고 했다가 적군에게 발각되어 총상을 입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아라퀼은 아니타가 돈 때문에 적군 사령관에게 몸을 팔러 가는 줄로 알았다는 것이다. 아라퀼로부터 그런 얘기를 들은 아니타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말을 하지 못한다. 빌바오에서 종소리가 다시 은은히 들려오자 마을 사람들이 궁금해서 몰려 나온다. 그 중에는 아라퀼의 아버지 레미지오도 있다. 레미지오는 저렇게 종소리가 울리는 것은 분명히 어떤 중요한 사람이 죽었기 때문이며 중요한 사람이라면 추카라가밖에 없다고 말한다. 아라퀼은 그제서야 모든 사실을 깨닫는다. 그때에 아라퀼의 외침이 '피의 값, 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이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아라퀼은 숨을 거두면서 저 종소리는 자기와 아니타를 위해 울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라퀼이 숨을 거둔 것을 본 아니타는 옷속에 간직하고 있던 작은 성모상을 꺼내어 성모에게 간구한 것이 모두 소용없다고 생각해서 성모상을 땅바닥에 던져 버린다. 이제 아니타는 제정신이 아니다. 땅에 떨어진 성모상을 다시 주어 들고 입을 마추고 자기를 보호해 주시어 무사히 적장을 죽이고 돌아와 상금을 받게 해주시고 또한 아라퀼과 결혼할수 있게 해 주시어서 감사하다고 말한다. 이때에 아니타의 독백이 '아라퀼! 지참금을 마련했어요. 우린 가야해요. 교회에 벌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어요. 행복이 바로 우리에게 있어요'이다. 마을 사람들은 아니타가 아라퀼의 머리를 부여안고 자장가를 부르다가 크게 웃는다. 가리도가 'La foolie! la folie!'라고 외친다. '불쌍하게도 이 아이가 미쳤구나, 불쌍하게도 미쳤구나'라는 뜻이다.

 

 

[칼리스트 전쟁]

칼리스트 전쟁(Carlist Wars)는 19세기에 스페인에서 있었던 일련의 내전을 말한다. 스페인 왕위를 누가 차지하느냐를 두고 양측이 벌인 전쟁이다. 1833년에 페르디난트 7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네번째 왕비인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어린 딸 이사벨라 2세를 위한 섭정이 되어 1833년부터 1840년까지 7년 동안 스페인의 군주 노릇을 했다. 이사벨라를 지지하는 세력을 크리스티노스(Cristinos)라고 불렀다. 섭정인 마리아 크리스티나를 추종하는 자들이라는 뜻에서였다. 크리스티노스는 이사벨리노스(Isabelinos)라고도 불렀다. 어린 여왕인 이사벨라를 추종하는 무리들이란 뜻이다. 그러자 세상을 떠난 페르디난트 7세의 동생인 카를로스는 '여자가 무슨 왕이란 말인가? 더구나 아직 어린아이인데!'라면서 자기야 말로 정당한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고 이사벨라와 크리스티나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 선왕이 아들이 없이 세상을 떠났으므로 남동생인 자기가 왕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크리스티노스는 현정부를 거느리고 있었으므로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카를로스를 지지하는 칼리스트들을 반도들이라고 불렀다. 칼리스트들은 왕당파이며 정통 가톨릭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크리스티노스들은 진보주의자(리베랄리즘)들이었고 나중에 공화주의자들이 된 사람들이다.  이 두 세력이 1833년 페르디난트 7세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 1876년까지 33년을 서로 죽기 아니면 살기로 전투를 벌였다. 결론을 말하자면 카를로스는 바스크 지방과 카탈로니아 지방 상당부분의 지지를 받았으나 전쟁에서 패배하여 결코  왕이 되지 못하였다. 카를로스는 형인 페르디난트 7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인 1832년부터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여 1845년까지 13년 동안 투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제1차 칼리스트 전쟁: 1832년부터 1839년까지. 전국에서 간헐적인 전투가 벌어졌지만 주무대는 역시 칼리스트들의 본거지인 바스크, 아라곤, 카탈로니아, 그리고 발렌시아 일대였다.

- 제2차 칼리스트 전쟁: 1846년부터 1849년까지. 전쟁이라고까지 할 정도는 아니었다. 카탈로니아에서 비교적 소규모인 봉기가 일어난 것으로 시작되었다. 반군들은 카를로스 6세를 왕위에 오르도록 하려고 노력했다. 갈리시아에서도 봉기가 있었지만 라몬 마리아 나르바에즈 장군이 진압했다.

- 제3차 칼리스트 전쟁: 1872년부터 1876년까지. 이사벨라 2세 여왕은 1868년에 진보적인 장군들의 음모에 의해 왕좌에서 추방되었다. 이사벨라 2세는 불명예스럽게 스페인을 떠났다. 의회(코르테스)는 이사벨라 2세의 자리에 이탈리아 빅코르 에마누엘 왕의 둘째 아들인 아오스타 공작 아마데오를 왕위에 앉혔다. 그후 1872년의 스페인 성거에서 정부가 칼리스트 왕위 주장자인 카를로스 7세를 무시하고 칼리스트 추종세력을 추방하자 카를로스 7세는 오직 무력으로서 왕위를 되찾아야겠다고 결심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그리하여 제3차 칼리스트 전쟁이 시작되었다.

- 1936년부터 1938년까지 있었던 스페인 내전도 칼리스트 전쟁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프랑코 장군이 칼리스트들을 무시하고 정권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