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오스트리아 유태인

레오폴드교회와 갈멜교회

정준극 2014. 10. 4. 22:57

레오폴드교회와 갈멜교회

Kirche St Leopold - Karmeliterkirche

 

측면에서 본 레오폴드 교회

 

비엔나의 제2구 레오폴드슈타트에 있는 로마 가톨릭의 성레오폴드교회(Kirche St Leopold: 키르헤 장크트 레오폴드)와 갈멜교회(Karmeliterkirche: 카멜리터키르헤)는 비엔나 유태인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성레오폴드교회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신앙심이 깊어서 나중에 교황이 성인으로 시성했던 레오폴드 3세(1073-1136)를 기억하여서 붙인 이름이다. 레오폴드 3세는 '선한 레오폴드'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였다. 그래서 레오폴드 3세는 오스트리아, 특히 비엔나와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수호성인으로 존경 받고 있다. 성레오폴드교회는 레오폴드 1세가 지었다. 레오폴드 1세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다른 항목에서 어떤 사람인지 자세히 설명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코자 한다. 다만, 레오폴드 1세도 성자가 저리가라고 할 정도로 신앙심이 깊었던 사람이었다. 다만, 그런 가톨릭 신앙이 너무 지나쳐서 가톨릭을 보호한다는 미명아래 유태인들을 핍박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음을 언급코자 한다. 레오폴드 1세는 그라벤에 있는 페스트조일레(페스트 기둥: Pestsäule: Plague Column)를 세운 사람이기도 하다. 레오폴드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비엔나에 있을 때인 1679년에 비엔나에 무서운 역병이 들이닥쳤다. 모두들 어찌할줄 모르고 속수무책이어서 역병(페스트)으로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레오폴드 1세는 역병을 피해 잠시 비엔나를 떠나 파사우로 가면서 역병이 물러가면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뜻으로 성삼위일체 기둥을 높이 세우겠다고 약속했다. 얼마후 역병은 스스로 물러갔다. 비엔나에 돌아온 레오폴드 1세는 하나님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위해 오늘날의 그라벤에 '자비의 기둥'을 세웠으니 그것이 오늘날 비엔나 관광명소인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이다.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가 처음 세워진 것은 1683년이었다. 1863년이라고 하면 오토만 터키의 술탄인 술레이만이 대군을 이끌고 비엔나를 포위하여 비엔나가 함락되는 것이 시간문제였던 해이다. 오리지널 조일레는 목재로 만든 것이었다. 레오폴드 1세는 하나님의 자비를 영원히 기억할수 있도록 기둥을 단단하게 다시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해서 10년 후인 1693년에 현재의 페스트조일레가 완성되었다. 페스트조일레의 한 쪽 면에는 레오폴드 1세가 무릅을 꿇고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를 드리는 조각이 있다. 그리고 다른 쪽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방패문장과 헝가리 왕국의 방패문장이 설치되어 있다. 이렇듯 레오폴드 1세는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비엔나 그라벤의 페스트조일레. 중간에 레오폴드 1세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자비를 감사하여 기도드리는 모습이 조각으로 설치되어 있다.

 

그나저나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 1세와 바벤버거의 레오폴드 3세를 혼돈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어서 기왕에 두 사람을 구분코자 한다. 레오폴드 3세는 레오폴드 1세보다 거의 2백년 전의 사람이다. 레오폴드 3세는 1073년에 태어나서 1136년에 세상을 떠났다. 레오폴드 1세는 1640년에 태어나서 1705년에 세상을 떠났다. 바벤버거 왕조의 레오폴드 3세는 당시 오스타리키의 변경백(Markgraf)이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레오폴드 3세는 신앙심이 두터운 것으로 유명했다. 그는 1114년에 비엔나 근교에 저 유명한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을 세웠다. 레오폴드 1세는 심성이 착하고 온건하며 언제나 기쁨으로 신앙생활을 하였기에 Leopold der Gute(선한 왕 레오폴드) 또는 der Milde(온건왕) 또는 der Fromme(기쁨왕)라는 여러가지 별명으로 불렸다. 그리하여 교황 인노센트 3세는 레오폴드 3세가 세상을 떠난지 한참 후인 1485년에 레오폴드 3세를 마침내 성인으로 시성하였다. 그로부터 레오폴드 3세는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으로서 추앙받았다. 레오폴드 3세는 일반적으로 오스트리아의 수호성인이지만 구체적으로는 비엔나와 니더외스터라이히의 수호성인이다. 사냥을 좋아했던 그는 어느날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서 숨을 거두었다. 레오폴드 1세도 사냥을 좋아하고 승마를 즐겨했지만 말에서 떨어져서 죽지는 않았다. 레오폴드 3세의 유해는 그가 설립한 클로스터노이부르크 수도원에 안치되었다. 아무튼 그래서 레오폴드 3세는 일반적으로 성자 레오폴드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다.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 1세가 유태교 시나고그를 허물고 그 자리에 지은 교회는 성자 레오폴드에게 봉헌된 교회이다.

 

레오폴드 1세. 대표적인 합스부르크 턱과 입술을 가지고 있는 얼굴이다.

 

비엔나의 제2구인 레오폴드슈타트는 17세기에 이르기까지 숲지대가 많아서 사냥터였고 또한 늪지대가 많은 곳이었다. 이곳에 중세 때에 오늘날의 비엔나 1구로부터 추방 당한 유태인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 황량하던 숲지대와 늪지대는 어느덧 유태인들이 붐비는 곳으로 변모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인 1670년에 합스부르크의 레오폴드 1세는 유태인들에게 비엔나 뿐만 아니라 니더외스터라이히와 오버외스터라이히의 어떠한 곳에서도 살지 말고 다른 곳으로 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연히 오늘날의 레오폴드슈타트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도 해당되었다. 갑작스런 추방령에 당황한 유태인들은 '아니, 도대체 어디로 가서 살라는 말이냐?'면서 걱정을 했다. 그렇지만 비엔나 시당국은 별다른 관심도 기울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오늘날의 레오폴드슈타트 일대를 매입하여 보다 쾌적하고 살기 편한 곳으로 만들어서 포화상태에 있는 비엔나 중심지역의 사람들이 이주해서 살도록 했다. 레오폴드 1세는 유태인들이 자기들이 살던 이 지역에 대하여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 유태교 회당들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가톨릭 교회를 세웠다. 그것이 성레오폴드교회이다. 한편. 그때부터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오스트리아 주민들은 레오폴드 1세를 기억하는 의미에서 이 지역을 레오폴드슈타트라는 지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성레오폴드교회 중앙제단과 회중석

 

레오폴드 1세가 유태교 회당(시나고그)를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성레오폴드 교회(Kirche St Leopold)는 얼마 후부터 여러 수난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오토만 터키에 의해 수난을 당했다. 1683년 터키의 2차 비엔나 공성 때에 레오폴드슈타트는 터키군의 중요한 진지였다. 터키군은 레오폴드슈타트에 들어서자 마자 성레오폴드교회를 당장에 파괴했다. 얼마후 터키군이 패배를 하고 퇴각하자 주민들은 그 자리에 즉시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1700년대 이후의 레오폴드슈타트는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서 살게 되어 신속한 발전이 이루어지는 지역이었다. 새로 지은 교회는 너무 작았다. 1722년에 교회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새로 비교적 큰 교회를 건축했다. 하지만 이름은 그대로 성레오폴드교회였다. 그로부터 약 1백년이 지난 1824년에 대대적인 내부수리에 들어갔다. 얼마후 1차 대전이 터졌다. 이 교회에 있는 8개의 종 중에서 6개의 종을 녹여서 무기 만드는데 썼다. 1차 대전이 끝나고 한참 후인 1923년에 두번째 대대적인 개축공사가 이루어졌다. 내부에 현대식을 가미하는 공사였다. 그러다가 2차 대전이 일어났다. 성레오폴드교회는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3월에 러시아군의 직접적인 포격을 받아 크게 파괴되었다. 천정의 돔과 내부 시설들과 담벽이 모두 부서졌다. 1948년부터 복구공사가 시작되어 1961년에야 겨우 마칠수가 있었다. 성레오폴드교회는 종전의 모습대로 바로크 양식의 교회로 다시 태어났다. 성레오폴드교회의 주소는 알렉산도 포흐 플라츠(Alexander-Poch-Platz) 6 번지이다. 지하철 타보르슈트라쎄(Taborstrasse)에서 내려서 잠시 걸어가면 나온다. 그로쎄 화르가쎄(Grosse-Pfarrgasse)에서 찾아갈수도 있다. 아우가르텐 공원의 남쪽 끝이다.

 

레오폴드키르헤 내부


레오폴드 1세가 오늘날의 레오폴드슈타트에서 유태인들을 강제로 나가라고 하자 유태인들은 어쩔수 없이 각처로 흩어졌지만 한참후부터 비록 계속적인 핍박이 있었지만 다시 하나둘씩 모여들기 시작했다. 따지고 보면 레오폴드슈타트의 유태인들은 계속에서 포그럼을 당하였고 마침내 나치 독일 시대에는 홀로코스트를 경험하기도 했으니 비참한 운명이었다. 그런 참혹한 과거 역사를 안고 있는 지역이지만 레오폴드슈타트는 오늘날 1구 인네레 슈타트의 일부 지역과 함께 비엔나 유태인의 본거지가 되어 있다. 레오폴드슈타트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유태인 구역은 카르멜리터키르헤(갈멜교회: Karmeliterkirche)가 있는 곳이다. 오늘날 이 구역은 카르멜리터 휘어르텔(Karmeliter Viertel)이라고 부른다. 전에는 이곳에 갈멜수도원이 있었다. 갈멜수도원은 유태인 구역인 게토와 분리하기 위해 담을 세웠다. 오늘날 그때 세운 담의 흔적들이 남아 있다. 갈멜교회 앞에는 갈멜광장(Karmeliter Markt)가 있다. 비엔나에서도 이름난 광장이다. 광장에서는 거의 매일같이 신선한 식품들을 파는 시장이 열린다. 광장 주위에는 카페와 상점들이 자리잡고 있다.

 

갈멜교회(카르멜리터 키르헤)

 

비엔나에 갈멜파 수도승들이 들어 온것은 1360년으로서 합스부르크의 루돌프가 초청해서였다. 갈멜파 수도승들은 우선 암 호프에 교회를 지었다. Kirche am Hof(암 호프 교회)이다. 그러다가 종교개혁의 여파로 로마 가톨릭이 어려움에 처하여 있을 때에 비엔나를 떠났다. 암 호프 교회는 반종교개혁운동을 위해 비엔나에 들어온 예수회에 주어졌다. 갈멜파 수도승들이 비엔나를 다시 찾은 것은 1620년이었다. 오늘날의 레오폴드슈타트에 있는 넓은 땅을 주겠다고 하자 다시 들어왔다. 갈멜파 수도승들은 오늘날의 레오폴드슈타트에 수도원과 교회를 지었다. 이들이 지은 수도원과 교회는 아름다운 것이어서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1683년에 터키가 침공하여 아름다운 갈멜파 수도승들의 건물들을 모두 파괴했다. 터키군이 물러나자 갈멜파 수도승들은 다시 교회를 지었다. 오늘날의 카르멜리터마르크트가 있는 곳은 전약적으로 중요한 길목에 있는 지역이다. 이곳을 통해서 비엔나의 센터로 쉽게 들어갈수 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전쟁 때에도 이곳은 격전지여서 건물들이 다수 파괴되었다. 건물들은 1830년의 대홍수로 인해서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그리고 1848년의 3월 혁명 때에도 사람들이 그러면 안되는데 하여튼 이 곳의 건물들을 파괴했다. 건물들은 그나마 복구되었다고 해도 자꾸 파괴되는 바람에 갈멜파 수도승들은 좀 더 안전하고 평화스러운 곳을 찾아서 되블링으로 갔다. 수도승들이 지내던 건물은 철거되었고 교회는 교구교회로 승격되었다.

 

1900년대의 카르멜리터키르헤(갈멜교회)

 

카멜리터플라츠는 특히 젊은이들과 이민자들에게 인기가 있는 곳이다. 특히 동구에서부터 흘러 들어온 유태인 이민자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살 집이나 일꺼리 등에 대한 정보를 이곳 광장에서 쉽게 얻을수 있기 때문이다. 1구에서 슈베덴플라츠나 칼스플라츠가 복잡한 지역이라고 하면 2구에서는 카멜리터플라츠(또는 카멜리터마르크트)가 그런 지역이다. 전쟁 후에는 동구로부터 흘러 들어온 유태인 이민자들이 많았다. 하기야 이 지역은 나치 시대에 유태인들을 끌어 모아서 저 멀리 폴란드의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집결지였다.

 

카르멜리터 마르크트

 

*********************************************************

 

[프로두크텐뵈르제] - 오스트리아 버전의 곡물 거래소

Produktenbörse

 

도나우 카날을 거쳐 1구에서 2구로 들어서면 카멜리터키르헤와 그 앞의 광장에 있는 마켓(마르크트)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어떤 아름답게 장식이 된 건물을 지나게 된다. 프로두크텐뵈르제이다. 오스트리아 버전의 곡물거래소이다. 전에는 곡물거래소였지만 지금은 그렇게 사용되지 않은지가 오래다. 오스트리아에서는 1812년까지 보리, 옥수수 또는 다른 곡물을 거래하는데 따른 법이 있었다. 곡물은 농부들이 직접 소비자에게 팔아야 한다는 법이었다. 그렇지만 농부들이 그렇게 하는 데에는 지방 영주들이나 지주들의 간섭이 많았다. 프란츠 1세 황제는 영주들이나 지주들이 간섭을 하고 중간에서 이득을 취하는 행동을 금지했다. 물론 중간 상인들이 거래를 도와주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에서 밀이나 옥수수를 거해하는 것은 상당히 이익을 보는 장사가 되었다. 1853년에 거래협회가 구성되었다. Wiener Frucht- und Mehlbörse(비엔나 과일-밀가루 거래협회)였다. 이 협회는 1869년까지 비엔나 시당국의 철저한 관리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산자나 상인들은 더 융통성있는 자유를 원했다. 1887년에 독립적인 농산물 거래소가 설립되었다. 이들은 우선 거래소 건물로서 프로두크텐뵈르제를 건설했다. 칼 쾨니히라는 건축가가 설계했다.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건물은 1890년에 준공되었다. 이탈리아 건물에서처럼 장식적이었다. 원주 기둥들이 버티고 있어서 어찌보면 신전이나 회당의 모습이다. 오늘날 프로두크텐뵈르제는 비엔나 랜드마크 중의 하나로서 레오폴드슈타트의 자랑이 되어 있다.

 

타보르슈트라쎄 10번지의 프로두크텐뵈르제. 전에는 곡물거래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