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오스트리아 유태인

부르겐란트와 유태인

정준극 2014. 10. 9. 22:32

부르겐란트와 유태인

 

부르겐란트의 들판과 호수

 

부르겐란트(Burgenland: 부어겐란트)는 오스트리아에서 비엔나 다음으로 유태인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다. 한때 유태인들은 이 지역을 일곱개 구역으로 나누고 각 구역마다 예쉬바(Yeshiva)를 두어 유태인 청소년들에게 유태인으로서 받아야 하는 교육을 주도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예쉬바(복수는 예쉬보트)는 유태인들의 전통 종교서적인 탈무드와 토라(모세 5경)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을 말한다. 예쉬바라는 단어는 '앉아 있다'는 뜻이다. 가만히 앉아서 할 일은 공부 뿐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예쉬바라는 단어는 학교와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나라로 보면 옛날 서당과 같은 존재였다. 부르겐란트의 일곱개 유태인 구역이란 아이젠슈타트(Eisenstadt), 마터스부르크(Mattersburg), 도이치크로이츠(Deutschkreuz), 프라우엔키르헨(Frauenkirchen), 키트제(Kittsee), 코버스도르프(Kobersdorf), 라켄바흐(Lackenbach)이다. 이들 일곱개 지역에는 예쉬바도 있지만 유태인 랍비 중에서도 가장 훌륭한 랍비(선생이란 뜻)들이 각 구역에 한 사람씩 있어서 유태인들의 일상을 지도하였다. 이들 일곱개 지역을 셰바 케힐로트(Sheva kehillot)라고 불렀다. '일곱 공동체'(Seven Communities)라는 뜻이다. 부르겐란트는 오스트리아의 가장 동쪽 끝에 있다. 헝가리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그러다보니 역사적으로 헝가리 땅이 되었다가 다시 오스트리아 땅이 되는 등 수난이 많았다. 특히 소프론(Sopron: 독일어로는 Ödenburg)이라는 곳이 그랬다.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던 소프론은 1921년 주민투표를 통해서 헝가리에 남아 있게 되어 지금에 이른 곳이다. 유태인들은 소프론도 간혹 일곱개 구역에 포함하였다. 소프론에도 유태인들이 상당히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프론의 유태인 홀로코스트 기념조형물. 하단의 조형물은 벗어놓은 구두들이다.

 

부르겐란트는 오스트리아를 구성하고 있는 9개 주의 하나이다. 주도(州都)는 아이젠슈타트(Eisenstadt)이다. 그런데 면적에서도 그렇고 인구를 보더라도 다른 주들에 비하여 가장 작다. 산은 거의 없고 대체로 호수와 늪지대가 많은 지역이다. 호수 중에서는 노이지들러 제(Neusiedler See)가 가장 크다. 헝가리와의 국경에 걸쳐 있는 호수이다. 호수의 반쪽은 헝가리에 속해 있다. 그래서 호수의 가운데에 보이지 않는 국경이 있다. 노이지들러 제는 매년 여름 호수극장에서 오페레타 패스티발을 갖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밖에 부르겐란트가 내세울 것이라고는 별로 없다. 다른 주들, 예를 들어 잘츠부르크와 티롤은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관광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부르겐란트는 밋밋한 지역이어서 별로 볼만한 곳이 없다. 부르겐란트에서 나오는 포도주가 그나마 좋다고 해서 포도주를 마시러 오는 사람들이 간혹 있기는 하다. 그래도 내세울 것이 있다면 하이든이다. 하이든은 아이젠슈타트와 인연이 깊다. 하이든이 오랫동안 살았고 오랫동안 일했던 곳이다. 그래서 하이든 기념관이 있고 하이든 묘지가 있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에 있는 하이든홀(Haydn Saal)은 전통과 역사를 지닌 아름다운 연주회장이다. 아이젠슈타트, 나아가 부르겐란트는 하이든만 크게 자랑해도 누가 뭐라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또 한가지 부르겐란트라고 하면 생각나는 것이 유태인에 대한 문제이다. 부르겐란트의 유태인들은 그나마 상당기간 동안 특별한 핍박을 받지 않고 편안하게 지냈다. 그러다가 나치의 치하에서 사정이 완전히 달라져서 말할수 없는수난을 당했다. 부르겐란트는 유태인들을 동구의 강제수용소로 끌고가는 중간기착지 역할을 충실히 하여 오히려 아픈 기억을 되새기게 해주는 지역이 되었다.

 

노이지들러제의 호수무대. 프란츠 레하르의 '주디타' 무대

 

부르겐란트에는 언제부터 유태인들이 들어와서 살았는가? 8세기부터였다고 한다. 그러나 유태인들이 거주했다는 기록이 처음 나타난 것은 1296년이다. 1373년에는 아이젠슈타트가 특별대우를 받는 도시가 되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여기에도 유태인들이 아이젠슈타트에 살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1491년부터는 부르겐란트가 니더외스터라이히주의 행정구역에 속하게 되자 지방 영주들이 부르겐란트의 각 지역을 다스리게 되었다. 그 때에도 영주들이 유태인들을 잘 돌보아 주어서 특별한 불편함이 없이 지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 영주들이 잘 돌보아 주었다는 것은 세금만 잘 내면 특별히 구박하지 않고 지내게 했다는 말이다. 그러던 차에 16세기에 슈티리아가 무슨 생각을 했던지 유태인들을 추방하는 일이 생겼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군주인 막시밀리안 1세는 슈티리아가 추방한 유태인들이 부르겐란트에 잘 정착해서 살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말하자면 병주고 약주는 식이었다. 그래도 유태인들은 군말 없이 황무지와 다름 없는 부르겐란트에 정착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했다. 그로부터 30 여년 후인 1529년에 페르디난트 1세가 제국의 황제가 되자 그 역시 그동안 아이젠슈타트, 마터스도르프(당시에는 마터스부르크), 코버스도르프의 유태인들에게 주었던 일종의 특권(말하자면 세금만 잘 내면 구박하지 않겠다는) 정책을 계속 유지하였다. 유태인들은 그나마 마음 편하게 지낼수 있었다.

 

합병 이전의 마터스도르프 유태교 시나고그. 예배를 마친 유태인들이 시나고그 바깥에 모여 있다.

 

부르겐란트, 특히 아이젠슈타트, 마터스도르프, 코버스도르프의 유태인들이 가장 번영하며 지냈던 시기는 아마 1622년부터 1626년까지일 것이다. 이 지역의 영주인 에스터하지 백작이 유태인들을 상당히 자유스럽게 살도록 했기 때문이었다. 부르겐란트의 다른 지역에 사는 유태인들의 경우도 아이젠슈타트의 유태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부르겐란트의 남부에 있는 라이히니츠(Reichnitz), 귀싱(Güssing), 슐라이닝(Schlaining)의 유태인들은 영주인 바티야니 백작 가문의 보호를 받았다. 이밖에 다른 지역의 유태인들은 나다스디 백작가문의 보호를 받았다. 유태인들로서는 그나마 태평성대였다. 부르겐란트는 1647년에 행정상으로는 헝가리 왕국에 속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합스부르크 제국의 테두리에 있어서 차이가 없었다. 그러다가 레오폴드 1세 때인 1670년에 비엔나와 니더외스터라이히 등지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에게 다른 곳으로 나가라는 추방령이 내려졌다. 레오폴드 1세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다른 카테고리에서 소개하였으므로 참고 바람! 부르겐란트는 니더외스터라이히에 속해 있었기 때문에 부르겐란트에 살고 있는 유태인들도 보따리를 싸서 다른 곳으로 정처 없이 떠나야 했다. 아이젠슈타트, 마터스도르프, 코버스도르프의 유태인들도 당연히 떠나기는 했지만 영주인 에스터하지 백작이 이들 지역을 다른 지방의 행정구역으로 옮겼기 때문에 잠시후에 다시 돌아올수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큰 다행이었다. 그리하여 부르겐란트의 유태인들은 비엔나 또는 다른 주에 있는 유태인들보다 그나마 마음 편하게 지낼수 있었다. 1700년 경에는 부르겐란트에서 유태인들이 집단을 이루어 사는 곳이 12개로 늘어났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 하이든 홀이 있다.

 

에스터하지 가문은 유태인들에게 상당히 관대하였다. 돌이켜보면 유태인들은 어디를 가나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미운 오리새끼처럼 무시를 당하고 구박을 받으며 살아야 했다. 그러나 부르겐란트의 아이젠슈타트 등지에서는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특권아닌 특권을 누리며 살수 있었다. 1690년에 에스터하지 백작이 공포한 장전에 따르면 아이젠슈타트의 유태인들은 그들의 사회를 자율적으로 관리토록 했으며 전쟁이 나더라도 당국이 보호해 주겠다고 되어 있다. 이같은 내용의 장전은 얼마후 다른 유태인 구역으로도 확대 적용되었다. 그로부터 유태인들은 자체 행정이라는 자유를 얻어서 자기들의 구역을 관리했다. 일곱개 구역의 대표자들은 정기적으로 모임을 갖고 세금납부에 대한 몫을 정해 주었으며 백작의 가신들에 대한 '선물'(촌지)부담을 할당했고 심지어는 백작의 마부에게도 '선물'을 준비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1749년에 일곱개 구역 중에서 프라우엔키르헨과 키트제를 제외한 다섯개 구역이 헝가리의 소프론에 소속되게 되었다. 헝가리 정부는 유태인들에 대한 세금을 재조정하여 전보다 더 과중하게 부과하였다. 이로써 부르겐란트의 유태인들은 그동안 그나마 누렸던 특권아닌 특권조차 종지부를 찍어야 했다. 유태인 조직은 과거의 일곱 구역에서 다섯으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소프론에 흩어져 살고 있는 유태인들을 규합하여 여섯번째 구역을 만들수 있었다. 1840년에 헝가리 의회(라이히스타그)는 유태인들이 원하는 곳에서 살수 있으며 원하는 직업을 가질수 있다는 것을 법으로 인정하였다. 그후 1848년에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에서 공화제를 열망하는 혁명이 일어났고 이 봉기가 당국에 의해 강압적으로 진압된 일이 있었다. 당국은 유태인들이 공산주의자들, 사회주의자들과 협력하여 봉기를 일으켰다고 몰아 붙였다. 당국은 유태인 집단들이 자치행정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다만, 아이젠슈타트와 마터스도르프는 예외였다. 그러자 부르겐란트에 대하여 정떨어졌다고 하면서 떠나는 유태인들이 많아졌다. 대체로 비엔나로 발길을 향하였다. 하기야 비엔나는 아이젠슈타트로부터 60 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으니 반나절이면 걸어서 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50년 경의 부르겐란트 유태인은 거의 9천명이나 되었고 어떤 구역에서는 주민의 절반 이상이 유태인인 경우도 있었다.

 

아이젠슈타트의 하이든하우스. 하이든이 살던 집

 

19세기에 들어서서 부르겐란트의 유태인 사회는 헝가리의 정통 유태교와 분리코자 하는 시도가 있었다. 헝가리의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생각된다. 도이치크로이츠 구역의 랍비인 메나헴 카츠 반프리트가 1869년에 헝가리의 랍비들을 초청해서 분리에 대한 의논을 했다. 그러던중 세월은 흘러서 1차 대전의 여파로 오스트로-헝가리 제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대신 새로운 오스트리아 공화국이 탄생하였다. 이에 따라 헝가리의 부르겐란트는 1921년에 오스트리아 공화국에 속하게 되었다. 부르겐란트의 유태인들은 헝가리 유태 사회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공화국은 부르겐란트의 유태인들이 그동안 헝가리의 지배를 받다가 다시 오스트리아로 온 것을 기억하여서 이들의 위상을 어느정도 높여 주었다. 예를 들면 1936년에 개정된 학교법에 따르면 부르겐란트의 유태인 학교도 가톨릭이나 개신교 학교와 마찬가지의 지위를 갖도록 한 것이다. 1938년에 부르겐란트의 유태인은 3,800명에 이르렀다.

 

아이젠슈타트의 '오스트리아 유태인 박물관' 1층에  있는 삼손 베르트하이머의 개인 시나고그. 지금은 전시실

 

1938년 3월에 나치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합병(안슐르스)하자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을 몰아내는 작업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부르겐란트의 유태인들도 당연히 해당되었다. 부르겐란트의 유태인들 중에서 약 2천명이 추방을 당하였다. 그 전에 박해를 예상하여서 다른 나라로 이민을 떠난 유태인들도 많았다. 그리고 1천 5백명 이상의 유태인들은 있는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무일푼 신세로 할수 없이 비엔나로 떠났다. 큰 도시에 가서 숨어서 살 생각이었다. 유태인들이 거리를 누비던 아이젠슈타트를 포함하여 부르겐란트의 10개 지역에서 유태인들의 모습을 볼수 없게 되었다. 부르겐란트 당국은 이들 지역을 '유태인 없는 지역'(Judenrein: Free of Jews)으로 선언했다. 부르겐란트를 떠나야 했던 유태인 중에서 51명의 운명은 참혹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거절 당했고 헝가리에 들어가려고 했으나 역시 거절 당했다. 이들은 주인 없는 땅인 도나우 중간에 있는 좁고 길다란 땅에 들어가서 움막을 짓고 살아야 했다. 그후에는 이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1938년 11월 10에 크리스탈나하트의 불길이 부르겐란트에도 번져왔다. 부르겐란트에 있는 유태교 회당이란 회당은 모조리 나치 추종자들의 야만적인 불길에 휩싸였다. 그후 부르겐란트 전체 유태인의 30% 정도가 나치의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죽음을 맞이했다.

 

아이젠슈타트 유태인 공동묘지

 

종전이 되고 유태인들이 서서히 부르겐란트에 돌아와 살기 시작했다. 이들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회당을 짓는 것도 시급했지만 유태인 묘지를 복구하는 것이 더 시급했다. 유태인 묘지들은 가차없이 파손을 당했거나 전쟁 중에 포화로 파괴되어 한심한 지경이었다. 그동안 부르겐란트의 유태인 공동묘지들은 비엔나에 있는 이스라엘 문화협회가 돌보았으며 어떤 구역에서는 그 구역에 남아 있던 유태인들이 스스로 보살피기도 했다. 유태인 공동묘지를 제대로 관리하기 위해 '샬롬 연맹'(Verein Schalom)이 나섰다. 한편, 유태인들의 유물이나 유적들을 보관하자는 운동도 일어났다. 산도르 볼프(Sandor Wolf)라는 사람이 유태인 홀로코스트에 대한 자료를 무척 많이 수집하였다.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부르겐란트 박물관이 특별 부서를 설치하고 유태인 관련 자료들과 유물들을 챙기도록 했다. 부르겐란트 문서부관소도 유태인 관련 문서의 종합 보관을 책임 맡고 있다. 1962년에 '오스트리아 유태인 박물관'(Österreichische Jüdische Museum)이 아이젠슈타트에서 오픈되었다. 과거에 합스부르크 궁정에서 고위직(Hof- und Kriegsoberfactor)을 맡아했던 삼손 베르트하이머(Samson Wertheimer: 1658-1724)가 살던 집을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그 집의 1층은 베르트하이머의 개인 시나고그였다. 그것도 박물관의 일부로 개방되고 있다. 이 박물관에는 산도르 볼프가 수집한 자료들도 일부 전시되어 있다. 슈타트슐라이닝(Stadtschlaining)의 시나고그는 오늘날 오스트리아자유및분쟁해결연구센터(Österreichisches Studienzentrum für Frieden und Konfliktlosung) 및 유럽대학교평화연구센터(EPU)의 도서실로 사용되고 있다.

 

아이젠슈타트에 있는 '오스트리아 유태인 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