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와 유태인/오스트리아 유태인

비엔나의 유덴플라츠

정준극 2014. 10. 12. 22:10

비엔나의 유덴플라츠(Judenplatz)

영욕이 점철된 유태인의 광장


  유덴플라츠. 광장 가운데의 쇼와(홀로코스트) 기념조형물과 광장의 한쪽에 있는 레싱의 기념상.

 

유덴플라츠(Judenplatz: 유태광장)는 비엔나의 중심지인 1구 인네레 슈타트에서도 중심지에 있는 작은 광장이다. 사람들은 비엔나의 중심지를 슈테판스돔이 있는 슈테판스플라츠라고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암 호프(Am Hof) 광장이 중심지이다. 비엔나를 오스트리아의 수도로 정한 바벤버그의 군주가 처음으로 궁전을 짓고 지냈던 곳이기 때문이다. 간혹 교황이 비엔나를 방문했을 때 암호프교회의 발코니에 나타나서 비엔나 시민들에게 강복을 하는 장소도 바로 이곳이었다. 유덴플라츠는 암 호프 광장의 바로 옆에 있다. 유덴플라츠는 중세로부터 비엔나 유태인 사회의 중심지였다. 유덴플라츠는 암 호프(Am Hof), 슐호프(Schulhof), 뷔플링거슈트라쎄(Wipplingerstrasse)에 둘러싸여 있다. 암 호프의 옆에 있는 슐호프는 유태인 탈무드 학교와 관련하여 그런 이름이 붙었다. 뷔플링거슈트라쎄에는 비엔나 (구)시청 건물이 있다. 한때는 니더외스터라이히 주청사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어떤 도시든지 시청이 있는 곳이 그 도시의 중심지인 경우가 많다. 비엔나도 중세로부터 암 호프 옆에 있는 뷔플링거슈트라쎄에 시청이 있었기 때문에 과연 이 일대가 비엔나의 중심지라고 해도 큰 문제는 아니다.

 

암 호프 교회와 마리안조일레(마리아 기둥).

 

오늘날 유덴플라츠에는 한 가운데에 쇼와(홀로코스트) 기념조형물이 자리잡고 있고 그 옆에는 유태인에게 관용을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한 독일의 시인 겸 철학자인 고틀로브 레싱의 기념상이 있으며 또 한 구석에는 유태박물관이 있다. 이것만으로도 이곳이 유태인들과 관련이 깊은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해준다. 물론 오늘날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들을 보면 굳이 유태인들과 연관지을 사항들을 발견하기 어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엔나의 유태인 역사를 음미하려면 유덴플라츠를 찾아가야 한다. 유덴플라츠는 중세로부터 유태인들의 신앙과 생활의 센터였다. 1995년에 유덴플라츠에 쇼아 기념조형물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팠는데 땅속에서 건물형태의 유적들이 발견되어 도대체 이것이 무엇인가라는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래서 유덴플라츠에 대한 고고학 탐사가 시작되었다. 결과, 중세 유태교 회당(시나고그)의 유적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땅속의 유적은 규모가 상당히 컸다. 이로 미루어 보아 비엔나의 유태교 시나고그가 유럽에서도 가장 큰 시나고그 중의 하나였다는 것을 알수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난후 나치에 희생된 유태인들을 추모하는 조형물을 세우자고 했을 때 과연 이러한 역사적인 장소에 세우는 것이 타당하느냐는 논란이 있었다. 그래도 유덴플라츠라는 역사성이 있기 때문에 쇼와 기념조형물을 유덴플라츠에 세우기로 했다. 그리고 지하의 시나고그 유적들은 오늘날 유덴플라츠의 한쪽 구석에 있는 유태박물관으로 이전하여 전시해 놓았다.


유덴플라츠. 기념상은 레싱이며 그 뒤의 네모난 조형물이 쇼와기념물이다.


유태박물관이 있는 건물은 미스라히 하우스(Misrachi Haus)라고 부른다. 미스라히(또는 미즈라키: Mizrachi)라는 말은 시온주의 운동을 의미한다. 그런가하면 유태인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원래 비엔나에 처음 흘러 들어온 유태인들은 북부 아프리카와 중동에 있던 유태인들이었다. 이들을 미즈라히라고 불렀다. 그 후에 스페인과 포르투갈 등 이베리아 지방에서 유태인들이 들어 왔다. 이들을 세파르디(Sephardi)라고 불렀다. 그러는 중에 1902년에 비엔나에서도 시온주의 운동이 싹이 트기 시작했다. 선조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던 예루살렘의 시온산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을 정통 유태인들을 지칭하는 의미에서 미즈라히라고 불렀다. 그후로 미즈라히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유태인을 말하는 단어로 사용되었다.

 

유덴플라츠의 미스라히 하우스. 유태박물관이 있다.

 

유태인들이 비엔나의 유덴플라츠 주변에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1150년 경이었다. 바벤버그 왕조가 비엔나에 정착한 것도 그 즈음인 것은 우연한 일치였다. 이 지역에 유태인들이 살았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한 것은 1294년이었다. 이 지역을 슐호프(Schulhof)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나왔다. 슐호프에는 1400년대까지 약 8백명의 유태인들이 살았다고 한다. 주로 상인, 은행가, 학자들이었다. 그러다가 1421년의 포그롬(Pogrom: 유태인 학살) 사건이 터진지 얼마 후에는 슐호프라는 지명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에 유덴플라츠라는 지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1421년의 포그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엔나에 정착하는 유태인들은 점차 많아졌다. 어디서들 왔는지 모르지만 자꾸 모여들었다. 유태인들이 사는 지역도 점점 넓어졌다. 유태인들이 사는 지역은 북쪽으로는 마리아 암 게슈타데 교회가 있는 곳까지 확대되었고 서쪽으로는 티퍼 그라벤(Tiefer Graben)까지 이어졌으며 동쪽으로는 투흐하루벤(Tuchlauben)까지, 그리고 남쪽에서만은 암 호프에서 더 이상 확대되지 않았다. 유덴플라츠 일대에는 70개 가구가 살았다. 이들은 하나의 게토를 이루었다. 누가 세웠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유덴플라츠 일대에 벽이 둘러졌다. 게토는 네 곳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수 있었다. 두개의 메인 게이트는 뷔플링거슈트라쎄 쪽에 있었다. 유덴플라츠 일대에는 유태인 병원, 시나고그, 대중목욕탕, 랍비 사택, 유태인 학교가 있었다. 당시에 비엔나의 유태인 학교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나라에서 가장 중요하고 명성있는 학교로 알려졌다. 시나고그는 나중에 요르단가쎄와 쿠렌트가쎄 사이에 위치하게 되었다. 유덴플라츠는 유태인 학교의 마당이었기 때문에 슐호프라는 이름이 붙었다. 나중에 슐호프라는 지명은 그 옆에 있는 작은 광장의 지명으로 사용되었다. 오리지널 슐호프라는 지명은 1437년 이후부터 유덴플라츠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의 슐호프. 지금의 유덴플라츠를 처음에는 슐호프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유덴플라츠가 되었고 슐호프는 인근의 작은 광장의 이름이 되었다.

 

유덴플라츠의 전신인 슐호프 주변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이 처음으로 커다란 박해를 받은 것은 1420년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의 군주는 알브레헤트 5세 공작이었다. 알브레헤트 5세는 유태인들에 대하여 좋지 않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에 유태인들이 체코의 종교개혁가인 얀 후스의 지지자들을 도와서 로마 가톨릭을 곤경에 빠트리고 있다고 생각하여 유태인들에 대한 박해를 결심했다. 유태인들은 별로 영문도 모른채 체포되어 감옥에 갇혔다. 감옥에 갇힌 유태인들은 먹을 것을 주지 않아서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죽거나 그렇지 않으면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여 죽었다. 유태 어린이들도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경우가 속출했다. 어떤 어린이들에게는 그나마 먹을 것을 주었는데 불결한 음식이어서 먹고서는 질병에 걸려 죽었다. 유태인 중에서 순순하게 끌려가지 않고 반항하는 사람들은 노예로 팔려갔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세례를 받았다. 일단 세례를 받으면 유태인 사회에서는 그를 변절자로 보고 상대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입장이 난처했다.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도 개종한 유태인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대체로 돈 없고 가난한 유태인들은 아무데로나 쫓겨 났고 돈 많은 유태인들은 감옥에 갇혔다가 돈을 주고 풀려났다. 그나마 요행으로 슐호프 지역에서 체포되지도 않고 추방되지도 않은 유태인들이 있었다. 이들은 이곳에 있는 시나고그인 오르 사루아(Or Sarua)로 일단 피신하였다. '오르 사루아'라는 말은 '빛을 씨뿌린다'는 뜻이다. 독일어로는 Lichtsaat 라고 한다. 그러나 오르 사루아 시나고그에 피신한 유태인들도 사흘을 견디지 못했다. 병사들이 포위를 하고 개미 한 마리도 드나들지 못하게 조였기 때문이었다. 배고픔과 목마름에  지친 이들은 결국 집단 자살을 선택하였다. 랍비인 요나는 시나고그가 가톨릭 병사들에게 짓 밟히는 것을 막기 위해 시나고그에 불을 질렀고 따라서 오르 사루아에 피신해 있던 유태인들은 모두 불에 타서 순교하였다. 마치 마사다를 연상케 하는 사건이었다. 이같은 결단은 유태인들이 말하는 키두쉬 하셈(Kiddush Hashem)의 한 형태이다. 키두쉬 하셈은 종교적인 박해 또는 개종을 위한 강제 세례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순교함으로서 신성모독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행위를 말한다. 이로써 슐호프(나중에 유덴플라츠)의 유태인들은 거의 모두 종적을 찾을수 없게 되었다. 이 사건을 '비엔나 게제라'(Wiener Geserah)라고 부른다. 영어로 애써 번역하자면 Viennese Decree(비엔나 칙령)이다.  

 

비너 게세라. 에르드버그의 들판에서 수많은 유태인들을 화형에 처한 끔찍한 사건이었다.

 

유덴플라츠(당시엔 슐호프) 일대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이렇듯 끔찍한 박해를 받았지만 비엔나의 다른 곳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도 마찬가지 신세였다. 알브레헤트 5세의 명령에 의해 군인들이 비엔나 지역에 남아 있던 유태인 약 2백명을 체포하여 1421년 3월 12일에 에르드버그의 거위들을 기르는 들판(갠제봐이데)에서 장작더미에 산채로 묶어 놓고 불을 질러 죽였다. 죄목은 체코의 후스파에게 무기를 조달해 주었다는 것이었다. 알브레헤트 공작은 이제부터는 단 한 사람의 유태인도 비엔나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유태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재산들은 모두 압수했다. 유태인들이 살던 집들도 압수해서 팔거나 유태인 체포에 앞장 섰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시나고그의 석재들은 해체하여 비엔나대학교를 세우는데 썼다. 현재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에 있는 구비엔나대학교의 일부 건물은 그렇게 해서 건설되었다. 세월이 흐르자 알브레헤트 5세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유태인들은 이런 저런 사유로 인하여 비엔나에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고 그 수는 점점 늘어났다. 특히 오늘날 레오폴드슈타트라고 불리는 구역에 집단을 이루고 살기 시작했다. 레오폴드슈타트의 유태인에 대하여는 다른 항목에서 다루었으므로 여기서는 생략코자 한다.

 

오스트리아 유태인 홀로코스트(쇼아) 기념물(만말)

 

유덴플라츠의 남쪽에 독일의 시인인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의 동상이 엄숙하게 서 있다. 영국계 오스트리아의 조각가인 지그프리트 샤루(Siegfried Charoux: 1896-1967)가 제작한 것이다. 1930년에 공모에서 당선되어 제작했고 1935년에 제막식을 가졌다. 그런데 이 동상이 실은 샤루가 다시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연은 이렇다.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후 유럽은 2차 대전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들어갔다. 1939년에 나치는 유덴플라츠에 있는 레싱 동상을 녹여서 무기를 만드는데 사용했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 비엔나 시당국과 비엔나의 유태인 협회는 유덴플라츠에 레싱의 동상을 다시 세워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역시 지그프리트 샤루에게 종전과 똑같은 형태로 새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1965년에 두번째 레싱 동상이 완성되었다. 그러나 1968년에 유덴플라츠가 아니라 루프레헤츠키르헤 앞에 세우고 제막식을 가졌다. 그것을 1981년에 현재의 유덴플라츠로 옮겼다. 레싱은 일찍이 1775-76년에 비엔나를 방문한바 있다. 그때 레싱은 요셉 2세 황제를 몇번 만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레싱은 요셉 2세의 계몽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는 짐작이다. 특히 레싱의 저서인 '현자 나탄'(Nathan der Weise)에서 링파라벨(Ringparabel)은 계몽주의 운동의 핵심 교본이라고 알려진 것이어서 아마도 요셉 2세의 관용정책에 아이디어를 제공했을 것으로 본다.

 

고틀로브 에프라임 레싱 기념상

 

유태광장의 북쪽에는 네모난 상자처럼 생긴 커다란 홀로코스트 메모리알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유태인들이 오스트리아에서의 쇼아 희생자를 추모하기 위한 세운 기념물이다. 영국의 레이첼 화이트리드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높이는 3.8 미터이고 가로 10 미터, 세로 7 미터이다. 기념물은 마치 도서관에 책들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듯한 형태이다. 그런데 책의 제목이 적혀 있는 책등은 모두 안쪽으로 향해 있어서 어떤 책들인지 알수 없다. 기념물의 하단에는 오스트리아 유태인들이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한 아우슈비츠 등 41개의 장소가 적혀 있다. 기념물에는 마치 집의 현관처럼 문이 있고 자물쇠로 잠겨져 있지만 그건 그렇게 보이도록 만든 것일뿐, 안으로 들어갈수는 없다. 이 기념물은 미스라히 하우스에 있는 유태박물관의 전시품의 일환으로 자리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연계가 되어 있다. 미스라히 하우스에는 죽임 당한 오스트리아 유태인 6만 5천명의 이름이 자료로 보관되어 있다. 이명단은 콤퓨터로 쉽게 찾아 볼수 있다. 기념물을 건립하기 위해 유덴플라츠를 파헤치는 공사가 1955년부터 시작하여 1998년에 마무리되었다. 공사를 하는 중에 지하에서 건물의 벽으로 생각되는 유적을 발굴했다. 지하실처럼 생긴 유적도 함께 찾아냈다. 중세에 이곳에 있었던 유태회당의 유적이었다. 중세에 유럽에 있었던 유태 회당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큰 것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모두들 놀람을 금치 못했다. 아마 금세기에 비엔나의 고고학계에서 발굴한 가장 중요한 유적인지도 모른다. 이 유적의 발견으로 당초 예정했던 장소로부터 옆으로 1 미터 옮겨서 건립했다. 공사를 모두 마치고 유덴플라츠가 복구된 것은 2000년이다. 이때 기념물도 제막식을 가졌다.

 

유덴플라츠에서 발굴된 중세의 유태회당 유적

 

미스라히 하우스는 유덴플라츠 8번지 건물이다. 1694년에 세워진 집이다. 비엔나 유태박물관의 하나가 이 건물 안에 있다. 그러므로 미스라히 하우스의 유태박물관과 유덴플라츠에서 발굴된 중세의 시나고그 유적, 그리고 새로 세운 홀로코스트 기념물을 모두 연관이 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덴플라츠는 비엔나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 전역의 유태인들을 기억하는 장소로서 인식되어 있다. 미스라히 하우스에 박물관을 만들자는 생각은 1997년에 시작되었다. 중세로부터의 유태인 생활상을 담은 전시관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의해서였다. 그후 오스트리아에서 유태인들의 나치에 대한 저항운동, 나치에 희생된 유태인들을 추모하는 자료 등을 구비하는 박물관으로 태어났다. 전시물 중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은 1421년 비너 게세라(Wiener Geserah)라고 하는 포그럼(대학살)에 대한 것이다. 비엔나의 유태인들이 첫번째로 경험한 참혹한 학살이었기 때문이다.

 

크리스탈나하트 다음날, 유태인들에게 거리 청소를 시키며 재미있다는 듯이 지켜보고 있는 비엔나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