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합스부르크 왕조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

정준극 2014. 10. 14. 07:40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

또는 합스부르크 입술(Habsburg Lip) - 오스트리아 입술(Austrian Lip)

근친결혼의 산물

 

 

왼쪽 신성로마제국 황제 레오폴드 1세. 오른쪽 스페인의 샤를르 2세. 모두 주걱턱과 두터운 입술로 유명하다. 합스부르크 턱, 합스부르크 입술이다.

 

합스부르크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대체로 얼굴 모습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턱이 주걱턱이고 아랫 입술이 두텁다. 때문에 그런 얼굴의 왕족이라면 '아하, 이 양반도 합스부르크 가문이구나!'라며 금방 알아볼수 있다. 대표적으로 두 사람의 초상화를 소개한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대공인 레오폴드 1세와 스페인의 왕인 샤를르 2세(카를로스 2세)이다. 모두 턱이 아래로 길게 내뻗었으며 아랫 입술이 비정상적으로 두텁다. 그러다보니 혀도 이상하리만치 길었다고 한다. 아무튼 이런 신체상의 특징을 '합스부르크 턱'(Habsburg Jaw), '합스부르크 입술'(Habsburg Lips)이라고 부른다. 어째서 이런 특징이 나타나는 것일까? 간단히 말해서 근친교배 때문이라는 얘기다. 다른 왕가에서도 그렇겠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기 위한다는 명목 아래 사촌간에 결혼하는 것은 보통이고 심지어는 남매간에 결혼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러니 유전학적으로 열성유전이 가능해져서 주걱턱과 같은 특별한 모습이 유전되었던 것이다. 근친결혼은 얼굴 모습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었다. 정신적으로도 문제가 있었다. 대체로 근친결혼으로 태어난 자녀들 중에는 정신박약자들이 많았다. 턱과 입술이 비정상적으로 발달했기 때문에 말하는 데에도 지장을 받았고 먹는 일도 힘들었다. 그러다보니 성격이 괴퍅해지기가 일수였고 제대로 먹지 못하니 건강상태가 말이 아니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근친결혼에 의해 태어난 자녀들은 생식력이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 속한 스페인의 샤를르 2세를 예로 들어보면, 그는 또한 성기능 장애자(임포텐스)여서 자녀를 두지 못했다는 얘기다.

 

이러한 특징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내려진 저주였다. 사람들은 좋은 뜻에서 '합스부르크 스티그마타(Habsburg Stigmata)'라고 부르기도 했다. 스티그마타라는 단어는 죄를 지은 사람이나 노예들에게 찍는 낙인이라는 뜻도 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에 남아 있는 못박히고 창에 찔린 상처, 즉 성흔이라는 뜻도 있다. 성골에 나타난 흔적이므로 높이 존중해야 한다는 속셈이 들어 있는 표현이다. 합스부르크 사람들이 유달리 근친결혼을 감행 하였던 배경은 무엇인가? 겉으로는 왕족이라는 순수혈통을 유지하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한번 맛들인 권력을 오래 지키기 위해서였다. 전쟁과 배신이 죽 끓듯하는 시대에서 가족 간에 결혼을 해야 그나마 믿고 지낼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의학이 발달해서 근친간에 결혼하면 2세가 어떤 형태의 아이로 태어날지 짐작할수 있지만 몇세기 전만해도 그런 유전적인 영향을 알지도 못했다. 2세에게 당장 나타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그 다음 세대, 또는 그 다음 세대에 가서 그런 증상이 나타나므로 도무지 가늠할수가 없었다.

 

레오폴드 1세.

 

'합스부르크 턱'은 15세기에 어떤 폴란드 왕족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사람과 결혼함으로부터 비롯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들의 자녀가 그런 특징을 보여주었다고 하는데 명확한 인적사항이 남아 있지 않아서 좋은 예가 되지 못했다. 그런 특징을 분명하게 보여준 첫번째 합스부르크의 군주는 막시밀리안 1세였다. 그는 1486년부터 1519년까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다.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군디의 메리와 결혼해서 막대한 재산을 보유하게 되었지만 그의 모습은 어쩔수 없이 전형적인 '합스부르크 턱'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아버지는 프레데릭 3세였고 어머니는 포르투갈의 엘레아노르 공주였다. 아마도 어머니 쪽에서 유전된 것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이다. 합스부르크의 얼굴 특징은 스페인 합스부르크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대표적인 인물은 샤를르 2세였다. 샤를르 2세(카를로스 2세)는 심성도 연약했지만 신체적으로도 불구자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샤를르 2세가 그렇게 된 데에는 아마도 그의 선조인 카스티야의 후안나 때문이 아닌가 싶다. 후안나는 본인도 그렇지만 그의 자손들이 사촌간 결혼한 경우가 많았다. 샤를르 2세는 후사가 없이 5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 인하여 무려 13년간에 걸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일어났다. 결과적으로 부르봉 가문의 필립 5세가 스페인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현재의 스페인 국왕인 후안 카를로스 1세는 필립 5세에 의한 부르봉 가문에 속하지만 합스부르크 가문의 먼 후손이 되기도 한다. 합스부르크 가문에서 턱이 튀어난 사람으로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샤를르 5세, 역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페르디난트 1세가 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막시밀리안 1세(재위: 1486-1519). 초상화에서는 아랫 턱이 그다지 튀어나오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모습은 상당히 튀어나왔다고 한다. 초상화를 그린 화가들이 황제가 멋있게 보이기 위해 턱을 줄였다고 한다. 그래도 일반 사람들보다는 긴 편이었다.

 

기왕에 얘기가 나온 김에 한마디만 더 하자면 유럽의 왕족들에게 혈우병(Hemophilia)이 끔찍한 재앙으로 등장했던 일이 있다. 혈우병은 한번 다치면 피가 멈추지 않는 병이다. 그러니 잘못하다가는 지혈이 되지 않아서 그대로 죽을수가 있다. 그러므로 다치지 않기 위해 여간 조심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혈우병은 근친결혼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혈우병의 인자를 가지고 있어서 유전으로 그런 증상이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유럽의 왕가들이 결혼을 통해서 동맹을 맺는 경우가 많아서 잘못하면 혈우병이 마치 전염병처럼 번진다는 것이다. 유럽 왕가에 혈우병의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게 한 시초는 아마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일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은 1837년부터 1901년까지 무려 64년을 제왕으로서 통치한 여걸이다. 아무튼 빅토리아 여왕의 여러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은 유럽 왕실들과 얼키고 설키면서 결혼을 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빅토리아 여왕을 '현대 유럽의 할머니'(Grandmother of Modern Europe)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 빅토리아 여왕이 혈우병의 인자를 유전시켰다고 믿어지고 있다. 아버지인 에드워드 왕자와 어머니인 작세 코부르크 잘펠트의 빅토리아 공주로부터 혈우병 유전인자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떤 역사학자들은 빅토리아 여왕이 혈우병 인자를 아버지인 에드워드로부터 받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빅토리아가 에드워드의 친딸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혈우병 유전이 비롯되었다면 영국의 왕족으로부터가 아니라 다른 사람으로부터 유전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후손들에게 혈우병 유전자 제공의 장본인이라고 믿어지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는 문서로서 잘 기록되어 있어서 왕실과 혈우병의 관계를 보다 쉽게 파악할수 있다. 빅토리아 여왕이 혈우병 유전인자를 아들 레오폴드와 딸들에게 전해 주었고 이어 이들이 다시 그들의 자녀들에게 물려 주었다는 것이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서 유럽의 여러 왕실과 혼인으로서 인척관계가 된 사람들 중에서 혈우병으로 고통을 받은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대표적인 경우만 소개코자 한다. 빅토리아 여왕은 모두 9명의 자녀를 두었다. 4남 5년였다.

 

- 빅토리아 여왕의 아들인 레오폴드 왕자(알바니 공작: 여덟번째 자녀)는 낙상하여 뇌출혈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 빅토리아 여왕의 세번째 자녀이며 딸로서는 둘째 딸인 알리스는 독일의 헤세 대공인 루이 4세와 결혼하여 프리드리히 왕자를 낳았다. 프리드리히왕자는 어머니 앨리스 공주로부터 혈우병 유전인자를 받았다. 어느날 프리디르히 황자는 창문에서 떨어졌다. 상처는 별것 아니었지만 내출혈을 막을수 없어서 세상을 떠났다. 그때 프리드리히 왕자는 두살 반이었다.

- 프러시아의 발데마르 왕자는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앨리스 공주의 딸인 이레느 공주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가 된다. 발데마르 왕자는 1945년에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혈우병 증세가 있는 그는 2차 대전 중에 출혈이 있어서 수혈을 해야 할 입장이었는데 의사가 집중치료를 해야 한다면서 잠시 대기하고 있으라고 하는 중에 출혈이 멈추지 않아서 숨을 거두었다.

- 레오폴드 마운트배튼 경은 어머니가 빅토리아 여왕의 딸인 베아트리스 공주였다. 그는 32세 청년때에 둔부 수술을 받는 중에 출혈을 막을수가 없어서 세상을 떠났다.

- 프러시아의 하인리히 왕자는 빅토리아 여왕의 증손자가 된다. 하인리하 왕자는 네살 때에 낙상하여 출혈을 막지 못해 숨을 거두었다. 그의 형이 프러시아의 발데마르 왕자였다. 그런데 이들의 동생인 지기스문트 왕자는 혈우병 증세가 하나도 없었다.

- 스페인의 알폰소 왕자와 곤잘로 왕자의 어머니인 빅토리아 유제니아 공주는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가 된다. 두 왕자 모두 차사고로 숨을 거두었다. 이들에게 만일 혈우병 증세가 없었다면 살수 있었을 것이다. 알폰소 왕자는 31세였고 곤잘로 왕자는 19세였다.

- 러시아의 알렉세이 니콜라에비치 황태자의 스토리는 비참하다. 어머니 알렉산드라 페오도로브나 황비가 빅토리아 여왕의 손녀이다. 아버지 니콜라스는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짜르이다. 니콜라스 황제와 황비, 네 딸, 그리고 알렉세이 황태자는 모두 1918년 혁명 때에 볼셰비키에게 죽임을 당했다.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원인 중의 하나는 아들 알렉세이의 혈우병을 고치기 위해 특히 알렉세이의 어머니가 요승 라스푸틴에게 너무 의존했고 그 기회를 이용해서 라스푸틴이 제정 러시아의 내정을 혼란스럽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제정러이사의 마지막 황태자인 알렉세이 니콜라에비치. 혈우병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의미는 글자 그대로 '형제애의 도시'이다. 고대 그리스어인 필라델포이(Philadelphoi)라는 말에서 가져온 명칭이다. 그런데 그리스어의 필라델포이는 '형재애의 도시'(City of Brotherly Love)와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필라델포이라는 말은 남매간에 결혼한 사람에게 붙이는 별명이었다. 특히 남매로서 결혼한 고대 이집트의 톨레미 2세(Ptolemy II)와 아르시노에(Arsinoe)에게 붙인 이름이다. 그래서인지 톨레미 2세의 공식 이름은 간혹 톨레미 필라델포스 2세(Ptolemy Philadelphos II)라고 부른다. 고대 이집트의 왕조에서는 남매간에 결혼하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가하면 형제나 누이의 딸, 즉 조카 딸과 결혼하는 일들도 많았다. 이것을 더블 니스(double niece)결혼이라고 부른다. 이런 관습은 혈통을 보존하기 위해 오시리스 신도 자기 여동생인 이시스와 결혼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소년 왕이라고 하는 투탄카멘도 이러한 친족간 결혼의 관습을 지킨 인물이다. 투탄카멘의 부인인 안케세나문은 그의 여동생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조카일 것으로 보고 있다. 투탄카멘의 무덤에서 사산된 것으로 보이는 어린아이 두 명의 미이라를 발견했다. 두 어린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같은 가족 출신인 것이 틀림없고 아버지는 투탄카멘임이 밝혀졌다. 마지막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도 시저 또는 안토니와 관계를 갖기 전에 자기의 남동생과 결혼했다고 한다. 클레오파트라는 남편을 살해했다. 다행인 것은 오늘날 유럽의 왕가에서는 혈우병이던지 정신박약이던지를 거의 찾아 볼수 없다. 결혼 전에 철저하게 친족 관계를 조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영국의 윌리엄 왕자가 캐서린 미들턴과 결혼할 때에 족보학자들은 두 사람의 선조 중에 어느 누구라도 인척관계가 되는지를 열심히 조사했다. 그 결과 별다른 문제가 없기 때문에 결혼해도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굳이 계산하자면 윌렴과 캐서린은 11번재 사촌간이 된다는 것인데 그건 거의 남이나 마찬가지이다.

 

고대 이집트의 소년 왕 투탄카멘. 그는 분명히 자기 누이 또는 사촌과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