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리스모의 푸치니

푸치니와 무솔리니

정준극 2014. 10. 28. 08:26

푸치니와 무솔리니

 

 

루카에 있는 푸치니 생가. 지금은 기념관이다. 집 앞의 광장에는 푸치니가 앉아 있는 기념상이 있다.

 

음악가로서 정치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던 사람들이 더러 있다. 아마 정치적으로 가장 높은 지위에 있었던 작곡가는 폴란드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얀 파다레브스키일 것이다. 1차 대전 후에 폴란드의 수상 겸 외무장관을 지냈다. 그 다음으로는 아마 오페라의 황제 베르디일 것이다. 베르디는 이탈리아의 통일과 해방을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그래서 통일 이탈리아의 상원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베르디와 동갑인 바그너는 독일에서 공화제를 지지하는 운동에 참가했다가 당국으로부터 지명수배까지 받아서 드레스덴을 떠나 스위스로 도망을 가야 했다. 그러므로 바그너는 정치에는 관심이 있었지만 파다레브스키나 베르디처럼 만인이 추앙하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도망자 신세였다. 베르디의 후계자라고 불리는 푸치니는 베르디와는 달리 정치에 관심이 없었다. 여성 편력, 자동차, 야생 오리 사냥 등에만 관심을 쏟았기 때문이리라. 푸치니의 전기작가인 메리 제인 필립스 마츠는 '푸치니의 정치에 대한 관심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고 말했다. 아주 적절한 표현이었다. 푸치니는 고향인 루카 마을의 시장 선거에도 관심이 없었고 무솔리니 정부의 내각 임명에도 관심이 없었다. 또 다른 푸치니의 전기작가는 '만일 푸치니가 정치에 관심을 두었다면 아마 공화제보다는 군주제에 더 관심을 가졌다고나 할까?'라고 말했다. 푸치니가 너무나 국제정세와 국내 정치에 관심이 없다보니 곤란했던 일도 있었다. 푸치니는 1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이탈리아는 독일로부터 혜택을 볼수도 있다'고 말한 일이 있다. 여러 사람들이 이같은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중에 애국심이 유난히 강했던 토스카니니가 특히 그러했다. 푸치니의 오랜 친구였던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독일과 이탈리아가 연합해야 서로 이득이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하자 그 다음부터는 아예 푸치니와 상종도 하지 않았다. 토스카니니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러기를 계속하여서 거의 10년이나 푸치니와 상대를 하지 않고 지냈다.

 

푸치니는 1차 대전 직전인 1913년에 비엔나로부터 '제비'(La rondini)의 의뢰를 받아 작곡에 착수하였다. 그후 1차 대전이 터지나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반대 입장에 서게 되었다. 사람들은 그런 형편에서 푸치니가 적국이나 마찬가지인 오스트리아의 극장으로부터 돈을 받고 오페라를 작곡해 준다는 것은 좀 그렇다면서 핀잔을 퍼부었다. 물론 얼마후에 비엔나의 극장과 체결한 계약은 취소되었지만 아무튼 푸치니는 그 일로 인하여 입장이 난처했었다. 전쟁이 터지자 이탈리아의 사회 각계에서는 전쟁을 돕는 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푸치니는 그 어떤 운동에도 공식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다만 개인적으로 전쟁으로 피해를 본 사람들이나 가족들을 도와주는 일을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선행을 잘 모르는 일부 사람들은 푸치니가 잘 먹고 잘 살면서도 애국심이 부족하다느니 어쩌니 하면서 입방아를 찌었다. 전쟁이 끝난 후인 1919년, 푸치니는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화우스토 살바토리(Fausto Salvatori)의 시에 의한 전승 기념곡을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로마 찬가'(Inno a Roma)였다. 1차 대전이 끝나자 이탈리아는 전승국의 위치에 있었다. 푸치니의 '로마 찬가'는 전승을 기념해서 1919년 4월 21일에 초연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날은 바로 로마가 창설된 기념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푸치니의 애국심을 의심하던 사람들이 무어라고 하는 바람에 초연은 6월 1일로 연기되었다. 그러다가 기왕 작곡해 놓은 것이니 연주를 하자고 해서 이탈리아 1차 대전 승전기념일 또는 로마 창설 기념일이 아니라 로마의 체육대회 개막식에서 초연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푸치니의 '로마 찬가'가 나중에 파치스트들이 즐겨 연주하는 레퍼토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파치스트는 이탈리아의 정권을 잡은 후 각종 행사나 퍼레이드에서 푸치니의 '로마 찬가'를 열심히 연주했다. 사실은 그렇지가 않지만, 사람들은 푸치니가 파치스트에 동조하지 않았느냐면서 의심을 눈길을 보냈다.

 

'제비'의 무대


푸치니는 무솔리니와 몇 번 만난 일이 있다. 그리고 파치스트 당과도 접촉이 있었다. 1923년에 비아레지오(Viareggio)에 자리 잡고 있던 파치스트당은 푸치니를 명예당원으로 만들고 당원증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치니가 파치스트 당원으로서 활동했다는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그리고 푸치니가 파치스트당과 관계가 있었다는 얘기다 분명치 않다. 한편, 이탈리아 상원은 문화예술적으로 크게 기여한 사람들 중에서 몇 사람을 선별하여 상원의원으로 임명하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베르디가 그러한 경우에 해당되었다. 푸치니도 그런 명예를 얻고 싶어했다. 그래서 실은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 로비까지 했다. 명예 상원의원을 임명하는데에는 투표를 해야 하며 이때에는 다른 명예 상원의원들도 투표에 참가한다. 그런데 그런 과정에서 푸치니가 다른 명예 상원의원들과 접촉했다는 기록이 없다. 푸치니는 비아레지오에 국립오페라극장을 세우고 싶어했다. 비아레지오는 투스카니 지방에서 루카 다음으로 큰 도시로서 지중해에 면하여 있기 때문에 휴양지로서 유명한 곳이다. 비아레지오에 국립오페라극장을 세우려면 정부의 지원이 필요했다. 푸치니는 이일과 관련해서 무솔리니를 두어번 만났다. 무솔리니는 그때 수상이었다. 그러나 그의 파치스트당은 이탈리아의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실정이었다. 1924년의 총선은 그야말로 폭력과 부정이 난무하는 것이었다. 무솔리니는 수상으로서 겨우 1년 남짓을 지냈다. 그러한 때여서 비아레지오 국립오페라극장의 건설 계획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푸치니는 1924년에 세상을 떠났고 무솔리니는 1925년 1월에 의회를 해산하고 파치스트 독재 정권을 출범시켰다. 그리고 푸치니는 세상을 떠나기 두어달 전에 상원의원(senatore a vita)으로 임명되었다.

 

1925. 12. 24 권력을 장악한 베니토 무솔리니는 1943년 7월 25일까지 이탈리아 정부 수반 겸 파치스트 총통(당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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