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리스모의 푸치니

푸치니 스캔들

정준극 2014. 10. 28. 22:32

푸치니의 스캔들...다채로운 사생활

도리아와 줄리아의 망령 속에 괴로움도

 

1900년대 초반의 푸치니

 

거장 푸치니의 사생활은 한가닥하는 다채로운 것이었다. '다채로운 사생활'이라고 하니까 혹시 백만장자처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보다는 여자 관계가 아주 복잡했다는 의미이다. 푸치니의 사생활은 과연 그의 오페라만큼 다채로웠다. 그는 생전에 스캔들을 달고 다녔다. 혹자는 그만한 인물에 그만한 지위의 남자라면 여자들이 줄을 서서 따라 다닐 터인데 무얼 그러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푸치니의 경우는 좀 특별하다. 왜냐하면 아무튼 푸치니로 인하여 무고한 젊은 여인이 아깝게도 목숨을 끊은 비참한 사건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푸치니의 스캔들 중에는 당시에는 물론 그 후에도 줄곧 아무도 모르게 숨겨진 것도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에야 그렇게 숨겨졌던 스캔들이 뜻밖에도 밝혀져서 그동안 추측으로만 궁금하게 여겼던 사항들이 밝혀진 사례가 있다. 또 다른 아들이 있었고 그 후손들이 아직도 푸치니를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지고 보면 푸치니의 스캔들은 마치 한 편의 비극적 오페라처럼 불륜과 질투와 복수에 얽혀 있는 것이었다. 푸치니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1백년이 가까워 온다. 2024년이면 서거 1백 주년을 기념하게 된다. 그런데도 푸치니에 대한 스캔들은 마치 허공을 맴도는 망령처럼 푸치니의 후손들을 쫓아 다니고 있다. 화려한 무대의 조명 뒤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 것처럼 위대한 작곡가의 사생활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두말 하면 잔소리이겠지만 푸치니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오페라들을 만든 사람이다. 사람들은 베르디를 '오페라의 황제'라고 하면서 존경하지만 실상 푸치니의 오페라들이 베르디의 오페라들보다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고 있어서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는 대표적인 세 오페라가 모두 푸치니의 작품이다.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이다. 푸치니는 이들 작품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 푸치니는 1924년 세상을 떠날 즈음에 그가 작곡한 오페라로 약 4백만불 상당의 돈을 벌었다고 한다. 우리 돈으로 약 40억 원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푸치니는 오페라로 많은 돈이 생기자 우선 마사치우콜리(Massaciuccoli) 호반의 토레 델 라고(Torre del Lago) 마을에 저택을 하나 장만했다. 그때가 1905년 쯤이었다. 오늘날 토레 델 라고는 토레 델 라고 푸치니라는 이름으로 바뀌었고 푸치니의 저택은 푸치니기념관이 되어 있다. 그런데 푸치니가 토레 델 라고에 저택을 마련하고 유유자적의 형편이 되자 그는 오히려 활력을 잃은 듯 했다. 그래서 종전처럼 작곡에 전념하지 못했다. 푸치니의 다음 작품인 '황금서부의 아가씨'(La Fanciulla del West)는 1910년이 되기까지 완성되지 못했던 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황금서부의 아가씨'는 그 이전의 '라보엠'이나 '토스카' 또는 '나비부인'의 수준에는 들어가지 못하였으니 역시 푸치니의 기운이 쇠약해 졌음을 알수 있다.

 

잘 아는 대로 그 때 쯤해서 도리아 사건이 터졌다. 도리아는 푸치니의 집에서 하녀로 있던 20대 초반의 귀엽고 착하게 생긴 아가씨의 이름이다. 원래 이름은 도리아 만프레디이다. 그런 도리아인데 푸치니와 불륜의 관계에 있었다는 비난을 받자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 사건이 도리아 사건이다. 사람들은 푸치니가 그 사건으로 인하여 정신적인 충격을 받아서 작곡활동이 종전처럼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생각했다. 도리아 사건은 법원의 재판으로 이어졌기 때문에 내용이 소상히 기록으로 남아 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1909년 1월 23일에 푸치니 집의 하녀였던 도리아 만프레디가 세 알의 염화제2수은이라는 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했다. 도리아는 사흘 동안이나 의식을 잃고 있다가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사인은 오늘날의 진단으로 수은 중독이었다. 도리아를 죽게 만든 직접적인 사람은 당시 39세였던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였다. 엘비라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서 남편인 푸치니와 하녀 도리아가 불륜의 관계에 있다고 공공연히 비난했기 때문이었다. 엘비라는 마치 사나운 사냥개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토끼 한마리를 잡아 챌 것처럼 도리아에게 덤벼 들며 모욕을 주었다. 사람들은 아무리 저명한 작곡가인 푸치니의 부인인 엘비라라고 하더라도 도리아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고 돌아다녔으며 결국은 도리아를 죽게 만든데 대하여 '아니, 사람이 어쩌면 그럴수가 있느냐'면서 비난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엘비라도 남들 앞에서 고개를 들고 다닐 형편은 아니었다.

 

도리아 만프레디. 푸치니 집의 하녀로서 푸치니와 모종의 관계가 있다는 오해를 받아서 견디지 못하고 자살했다.

 

도리아가 자살을 하자 도리아의 가족들이 들고 일어났다. 도리아가 푸치니와 그런 사이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서 불쌍하게 죽은 도리아의 명예를 찾아주어야 겠다는 것이었다. 도리아의 가족들은 도리아의 시신을 해부해서라도 처녀인지 아닌지를 가려 달라고 요청했다. 법원의 명령에 의해 도리아의 시신이 해부되었으며 결과는 도리아가 처녀였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로써 엘비라는 명예훼손 등으로 고소를 당했다. 법원은 엘비라가 유죄라는 것을 인정하여 5개월 5일간의 감옥생활을 선고했다. 일이 그렇게 되자 푸치니는 도무지 창피해서 견디지 못할 지경이 되었지만 그렇다고해서 부인 엘비라를 그대로 감옥에 보내는 것도 말이 안되므로 도리아의 가족들에게 1만 2천 리라의 위자료를 주고 합의를 받아내어 엘비라가 감옥에 가는 것만은 막았다. 그로부터 푸치니와 엘비라의 관계는 아주 소원해졌다. 몇달 동안 남남처럼 지냈다. 사람들은 이 사건으로 인하여 푸치니가 작곡에 대한 열정을 잃어서 '황금서부의 아가씨'를 7년만에 완성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엘비라가 도리아를 공공연히 비난하기 시작한 것은 1908년 10월 부터였다. '황금서부의 아가씨'는 1910년 12월에 뉴욕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므로 '황금서부의 아가씨'가 도리아 사건 때문에 7년 이상이나 지연되었다는 주장은 크게 설득력이 없다. 무엇인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였다. 딸까지 있는 유부녀의 몸으로서 푸치니와 불륜관계에 있다가 나중에 가서야 결혼했기 때문이다.

 

푸치니의 부인 엘비라

 

이야기는 도리아 사건이 터진 때로부터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푸치니는 '나비부인'을 작곡하고 있었다. 푸치니는 작곡에 열중할 때에는 여자들과 데이트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때에는 예외였다. 푸치니는 자기의 연애 상대자를 '작은 정원'이라고 불렀다. 푸치니가 '작은 정원'을 처음 만난 것은 1900년 토리오에서였다. 푸치니는 '나비부인'의 작곡에 착수하고 있었다. 푸치니는 익명의 그 여인을 '코리나'라고 불렀다. 푸치니가 어떤 여자와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챈 엘비라는 너무 속이 상한 나머지 푸치니와 헤어지려는 생각까지 했었다. 당시 푸치니와 엘비라는 동거는 하고 있었지만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상태는 아니었다. 엘비라는 푸치니가 루카에 있을 때 학교를 같이 다녔던 친구의 부인이었다. 푸치니가 엘비라를 처음 만난 것은 1884년 푸치니가 엘비라에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한 때였다. 그때 푸치니는 26세의 청년이었고 엘비라는 그보다 두 살 아래인 24세였다. 엘비라의 남편인 나리스코는 말하자면 이름난 돈 후안이어서 젊은 엘비라의 속을 무던히도 썩혔다.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지만 곧 이어 푸치니와 엘비라는 뜨거운 사이가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86년 엘비라는 남편 나리스코 제미냐니의 집에서 나와서 토레 델 라고에 있는 푸치니의 빌라로 아예 거처를 옮겼다. 그때 엘비라는 나리스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살 짜리 딸 포스코와 함께 푸치니의 집으로 들어왔다. 푸치니는 엘비라의 전남편의 소생이지만 포스카를 무척 귀여워 했다. 그런 중에 엘비라는 푸치니의 아이를 임신하였고 시간이 되어 아들 안토니오가 태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푸치니와 엘비라는 당시 이탈리아의 법에 의해 정식 부부로서 살지 못했고 아들 안토니오도 정식 아들로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엘비라는 이혼도 하기 어려웠다. 푸치니와 엘비라가 법적으로 부부가 되려면 엘비라의 남편인 나리스코가 세상을 떠나야 하는 등 불가피한 사유가 있어야 했다. 푸치니는 엘비라와의 관계가 풀리지 않자 한편으로는 천성을 발휘해서 다른 여자와 은밀한 데이트를 엔조이했다. 그 여인이 코리나라는 별명의 여인이었다. 나중에 푸치니는 코리나에게 프로포즈할 생각까지 했었다고 털어 놓았다.

 

그러는 중, 1903년 2월 25일에 운명이 이상한 방향으로 굴러가게 되었다. 그날 밤에 푸치니는 엘비라와 아들 안토니오와 함께 루카에 갔다가 차를 타고 토레 델 라고의 빌라로 돌아오는 중에 차가 길에서 미끌어져서 전복되는 커다란 교통사고를 당했다. 푸치니가 교통사고로 중상을 입었다는 뉴스는 이탈리아 전국에 전파될 정도였다. 그때 푸치니는 자동차에 깔려서 오른쪽 다리뼈가 부서지고 가슴에 상처를 입었다. 그리고 사고 자동차에서 나오는 휘발유 매연때문에 거의 질식해서 죽을 지경에까지 이르렀었다. 사고지점은 루카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이었기에 마침 지나가던 사람들이 자동차를 밀어서 푸치니를 꺼냈고 그 중에 의사도 있어서 응급조치를 받을수 있었다. 푸치니는 당분간 집에서 거의 움직이지 못하고 요양을 해야 했다. 누군가는 옆에서 심부름도 해주며 도와주어야 했다. 그런데 그런 자동차 사고가 일어난 바로 다음날, 또 하나의 운명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엘비라의 남편인 나리스코가 죽은 것이다. 이제 미망인이 된 엘비라는 마음 놓고 푸치니와 정식으로 결혼할수 있게 되었다. 17년간이나 기다리던 일이었다. 푸치니의 음악출판인이며 후원자인 줄리오 리코르디는 병상에 몸져 누어 있는 푸치니에게 이제 코리나인지 무언지는 그만 생각하고 엘비라에게 잘해 주라고 조언했다. 푸치니는 리코르디의 충고도 있고 또 자기 누이들이 정신 좀 차리라고 자꾸 주장하는 바람에 코리나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기로 했다. 더구나 그 때 푸치니의 귀에 코리나가 다른 남자와 섬싱이 있다는 소문이 들렸다. 푸치니는 개인탐정을 고용해서 과연 코리나가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를 탐색토록 했다. 결과, 코리나는 푸치니를 속이고 다른 남자와 만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코리나는 자기가 항상 얘기하는 대로 푸치니만 생각하는 순진한 여자가 아니었다. 코리나는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푸치니의 돈까지 마음대로 쓴 의심을 받았다. 푸치니가 코리나와의 관계를 당장 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푸치니가 분노와 수치심으로 코리나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얼마나 악랄한 행동인가, 얼마나 비난받아야 할 창녀인가. 그대는 쓰레기만도 못하다. 이로써 나는 그대를 영영 떠나노라'라고 썼다.

 

줄리오 리코르디. 푸치니의 생애와 작품활동에 커다란 영향을 준 사람이다.

 

푸치니로부터 결별통고를 받은 코리나는 순간 화가 치밀어서 당장 답장을 보내어 '명예훼손 및 위자료등 법적인 대응을 하겠다.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관계를 알리겠다'고 협박했다. 푸치니는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힐 지경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겁도 나서 당황해 했다. 푸치니는 스위스로 도망칠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일이 묘하게 풀리느라고 그때 코리나의 아버지라는 사람이 어린 자기 딸을 이용해서 부당한 방법으로 돈을 착취했다는 죄를 쓰게 되었다. 코리나와 관계를 가졌던 다른 남자가 코리나의 아버지를 고소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코리나가 아무리 푸치니를 위협하고 소송을 걸겠다고 나서도 소송에 들어가면 그런 전과가 있는 사람의 딸이기 때문에 불리할 것이 분명했다. 코리나가 잠잠해 졌다. 푸치니는 위기를 모면했지만 모욕은 씻을수 없었다. 코리나가 푸치니를 협박하기 위해 보낸 편지는 푸치니가 가지고 있지 못하고 엘비라의 여동생이 가지고 있었다. 여차직하면 그것으로 푸치니를 곤란하게 만들 생각이었던 것 같다. 푸치니로서는 그동안 아들까지 낳은 엘비라를 무시할수 없었다. 푸치니는 '나비부인'을 완성한지 1주일 후인 1904년 1월 3일 마침내 엘비라와 결혼식을 올렸다. 엘비라가 미망인이 된지 10개월이 지났기 때문이다. 당시 이탈리아 법에 따르면 남편이 죽은 부인은 적어도 10개월간 재혼하지 못했다. 종합해서 보건대 푸치니의 결혼은 순탄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우여곡절로 뒤덮힌 것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푸치니의 사생활과 창작활동은 언제나 뒤엉키는 것이었다. 코리나로 인하여 받은 마음의 상처는 '나비부인'의 비극적인 마지막 장면에 표현되어 있다는 얘기다.

 

초초상이 '명예롭지 못하게 살려면 명예롭게 죽어라'라는 자기 아버지의 가르침에 따라 스스로 목숨을 끊는 장면.

 

창피를 당하고 굴욕을 당한 푸치니는 '나비부인' 이후에 거의 6년 동안이나 아무런 창작활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황금서부의 아가씨'가 나왔다. '황금서부의 아가씨'의 여주인공은 과거의 미미나 초초상과는 다른 성격의 활달한 인물이었다. 미미처럼 운명에 순종만하는 가련한 여인이 아니었다. 토스카처럼 질투심에 넘쳐 있고 살인까지도 마다하지 않는 과격한 여인도 아니었다. 오히려 터프하지만 능력있는 여인이었다. 서부개척시대에 캘리포니아의 광산 마을에서 거친 남자들을 상대로 살롱을 경영하는 여인이니 얼마나 터프한 여인인지 충분히 짐작할수 있다. 미니는 심심하면 총소리가 들리는 마을에서 허리에 권총을 차고 지내는 터프한 여인이지만 한편으로는 사랑에 마음 약한 여인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도대체 푸치니가 어디서 이런 성격의 여인상을 찾아 냈는지 궁금해 했다. 이같은 궁금증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는 이탈리아의 영화 감독인 파올로 벤베누티를 빼놓을수 없다. 벤베누티는 도리아 사건을 영화로 만들 구상을 했다. 그래서 몇년에 걸쳐서 도리아 사건을 세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가 발견한 하나의 새로운 사실이 있었다. 푸치니는 오페라를 작곡할 때에 그 오페라의 여주인공과 흡사한 실제 인물들과 사랑에 빠지는 습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라 보엠'을 작곡할 때에는 미미와 흡사한 여인을 사랑했고 '토스카'를 작곡할 때에는 토스카와 비슷한 성격의 여인을 사랑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푸치니가 '황금서부의 아가씨'를 작곡할 때에는 이 오페라의 여주인공인 미니와 흡사한 여인과 사랑에 빠져 있어야 하는데 아무리 기록을 찾아 보아도 당시 푸치니의 주변에서 그런 분위기의 여인을 찾아 볼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벤베누티는 분명히 미니와 닮은 또 하나의 여성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런 여인이 누구였는가? 벤베누티의 조사 팀은 줄리아 만프레디(Giulia Manfredi)라는 여인을 찾아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줄리아는 자살한 도리아의 사촌이었다.

 

푸치니의 숨겨놓은 애인 줄리아 만프레디

 

줄리아가 미니와 비슷하다는 것은 우선 그가 샬레 카밀리오라는 여관 겸 술집에서 일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미니가 살롱에서 일했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미니의 살롱에는 거친 남자들이 득실거렸다. 서부개척시대의 금광촌이니 두말하지 않아도 살롱의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는 잘 알수 있는 일이다. 줄리아의 여관에도 사냥꾼이나 마을 농부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샬레 카밀리오라는 명칭은 줄리아의 아버지인 카밀리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이 여관은 오늘날에도 빌라 푸치니의 건너편, 마사치우콜리 호수의 한 구석에 있다. 벤베누티에 의하면 줄리아는 아주 개성이 강하고 억센 여자였다고 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마을 사람들에게나 나그네들에게나 똑같이 겸손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던 여자였다고 한다. 토레 델 라고에서는 푸치니와 줄리아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소문이 약간 있었지만 별로 관심들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오래된 어떤 마을 사람들의 얘기에 의하면 마을에는 리도 디 카마이오레라는 식당이 있었는데 줄리아가 푸치니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아들과 함께 이 식당에 자주 와서 식사를 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아 줄리아와 푸치니가 아들까지 둘 정도로 상당히 깊은 관계였다는 것을 알수 있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벤베누티는 줄리아의 성이 만프레디인 것을 알아내고 그렇다면 도리아 만프레디와 같은 집안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행하게도 만프레디 후손들이 피사 부근의 치사넬로라는 마을의 일반 집에서 살고 있었다. 벤베누티가 2007년 1월에 만난 사람은 나디아(Nadia)라는 나이 많은 여자였다. 평범한 가정주부이면서 마을 사람들을 위해 미용사로 일하고 있는 여자였다. 벤베누티는 나디아를 처음 보는 순간 '아, 푸치니를 닮았구나'라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다고 한다. 특히 눈 언저리가 닮았다고 했다. 나디아는 말하자면 푸치니의 손녀였다. 푸치니와 줄리아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안토니오의 딸이었다. 나디아는 푸치니와 줄리아가 주고 받았던 편지들을 거의 40년 이상이나 간직하고 있었다. 그 편지들 중에는 도리아의 자살에 대한 이야기도 적혀 있는 것이 있었다. 푸치니가 밀라노의 어떤 호텔에 투숙하고 있으면서 줄리아에게 보낸 편지였다. 도리아는 나디아의 이모할머니 뻘이 된다.

 

푸치니의 손녀가 되는 나디아 만프레디. 피사에 살고 있는 그는 나디아 푸치니라는 이름을 갖기를 원했다. 하기야 푸치니의 모습을 찾아볼수 있다.

 

푸치니와 줄리아가 주고 받은 편지의 내용에 의하면 순진하고 무고한 하녀인 도리아의 자살 사건은 단순히 푸치니의 부인인 엘비라의 질투 때문에 빚어진 것이라고 보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았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보다도 더 복잡한 사연이 사건이 배경이라는 것이다. 사건의 발단은 1908년 9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푸치니는 토레 델 라고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아마도 토리노에 갔다가 오던 것 같았다. 이때 쯤해서 푸치니는 이미 또 다른 '작은 가든'을 발견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았다. 푸치니는 하녀인 도리아에게 전보를 보내어 지금 토레 델 라고의 빌라로 돌아가고 있으니 미리 방도 정리해 놓고 준비해 달라고 전했다. 도리아는 빌라로 가서 푸치니가 돌아올 것에 대비코자 했다. 그런데 도리아는 푸치니 빌라의 어떤 방에 있는 침대에서 푸치니의 의붓 딸인 포스카가 구엘포 치비니니와 딩굴고 있는 황당한 장면을 목격했다. 구엘포 치비니니는 '황금서부의 아가씨'의 대본가였다. 포스카는 푸치니의 부인인 엘비라가 전남편인 나르시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로서 엘비라가 나르시코를 버리고 푸치니에게 갔을 때 함께 데리고 와서 생활했던 터였다. 그때 포스카는 이미 28세였다. 임프레사리오인 살바토레 레오나르디와 결혼한 상태였다. 그런데 대본가인 구엘포 치비니니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던 것이다. 모전여전!. 불륜을 현장에서 들킨 포스카는 도리아가 그 일을 의붓 아버지인 푸치니에게 말할 것 같아서 도리아를 모함해서 곤란하게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만나서 도리아가 푸치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푸치니의 부인인 엘비라가 딸 포스타의 말을 듣고 도리아를 구박하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도리아는 뜻밖에 포스카의 비난을 받자 너무나 당황해서 푸치니에게 편지를 써서 실은 포스카가 자기의 불륜을 감추기 위해 자기를 음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푸치니는 도리아를 은밀히 만나서 포스카에 대한 문제는 자기가 알아서 처리하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안심시켰다. 푸치니가 포스카 문제에 대하여 무슨 조치를 취했는지의 여부는 알길 없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도리아가 푸치니에게 포스카 사건을 얘기했다는 것을 엘비라가 알고 '하녀 주제에'라면서 대단히 화를 냈다. 엘비라는 도리아가 없는 사실까지도 보태서 푸치니에게 고해바쳤다고 믿었다. 그 때쯤해서 엘비라는 아무래도 푸치니가 어떤 여자와 모종의 관계에 있다는 낌새를 채고 푸치니의 뒤를 은밀히 밟고 있었다. 그러다가 며칠 후 어두운 밤에 푸치니가 어떤 여자를 만나는 장면을 목격하였다. 엘비라는 그 여자가 도리아라고 믿었다. 이제 엘비라가 할 일은 도리아를 무차별하게 비난해서 꼼짝 못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해가 바뀌어 1909년 1월 1일이 되었다. 푸치니의 빌라에서 새해 가족 모임이 열렸다. 엘비라는 우정 도리아를 불러서 '더러운 년, 추잡한 년'이라면서 도리아에게 욕을 퍼부었다. 그 자리에는 줄리아도 있었다. 도리아는 주인 마님의 욕을 그저 듣고만 있을뿐 한마디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10여일이 지났다. 1월 19일에 엘비라는 빌라 푸치니에 모인 여러 사람 앞에서 도리아에게 또 다시 '창녀, 매춘부'(whore, tart)라면서 차마 입에도 담기 어려운 욕을 퍼부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도리아가 자기 남편인 푸치니를 쫓아 다니는 음탕한 여자(tramp)라고 비난하고 이어 '언젠가는 도리아를 저 호수에 처넣어 버리고 말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1월 23일에는 이번에는 줄리아가 푸치니와 도리아를 연결해 준 못된 여자라고 비난했다. 말하자면 뚜쟁이라는 것이었다. 이어 도리아가 다시는 토레 델 라고에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도리아는 정말 아무 잘못도 없었다. 다만, 존경하는 주인인 푸치니를 보호하고 사촌인 줄리아를 배반할수 없기 때문에 자기가 잘못이 없다고 항변하지 못했을 뿐이다.  

 

푸치니와 엘비라. 뒤에 서 있는 여자가 포스카

 

급기야 도리아는 그 모은 비난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도리아의 가족들은 도리아의 죽음이 억울하다면서 법원에 사실을 가려 달라고 호소했다. 법원은 만프레디 가족들의 호소를 이유있다고 판단해서 우선 도리아가 처녀인지 아닌지를 판명키로 하고 도리아의 시신을 검시토록 했다. 결과, 도리아는 처녀인 것이 판명되었다. 도리아의 가족들은 엘비라를 정식으로 고소했다. 혐의는 세가지였다. 명예훼손, 중상모략, 공갈협박이었다. 이 소송으로 인하여 푸치니의 가족들은 사회적으로도 그렇고 가정적으로도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푸치니는 정말로 엘비라와 헤어질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또 다른 엉뚱한 일이 생겼다. 포스카의 남편인 레오나르디가 포스카와 치비니니가 불륜의 관계에 있다는 냄새를 맡고 이 참에 못마땅한 포스카를 난처하게 만들어서 꼼짝하지 못하도록 할 생각을 했다. 우선 포스카의 남편 레오나르디는 포스카에게 일체의 생활비를 주지 않고 그동안 포스카가 이곳저곳에 빚진 것도 완전히 모른채 했다. 돈이 궁한 포스카는 의지할데가 엄마인 엘비라 밖에 없으므로 엘비라에게 손을 벌리고 그동안 치비니니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자기가 그동안 도리아를 모함했던 것은 치비니니와의 불륜을 덮어 두기 위해서였다고 밝혔다. 엘비라로서는 크게 당혹스러운 일이었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이었다. 그런데 당시에 엘비라도 돈이 없어서 궁색한 실정이었다. 도리아 사건으로 남편 푸치니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엘비라는 푸치니로부터 도움을 받을수 밖에 없으므로 푸치니에게 도리아 사건은 자기가 잘못 했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돈이 필요하니 좀 달라고 간청했다. 푸치니도 인간인지라 엘비라를 다시 받아들이기로 하고 도리아 가족들에게 위자료를 줄테니 엘비라에 대한 소송을 취하하도록 부탁하고 아울러 사위가 되는 레오나르디에 대하여도 돈을 주겠으니 잠자코 있어 달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엘비라는 감옥에 가는 것만은 피하게 되었고 푸치니로서도 사건이 해결되어 작곡에 전념할수 있었다. 푸치니와 줄리아의 관계도 종지부를 찍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벤베누티가 집요하게 조사한 바에 의하면 푸치니와 줄리아의 관계는 푸치니가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놀라운 발견이었다. 도리아 사건이 해결된 때로부터 몇 년 후인 1923년, 그러니까 푸치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해에 줄리아는 아들을 낳았다. 말하자면 혼외자식이고 사생아였다. 줄리아는 아들의 세례를 받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들의 이름을 푸치니의 할아버지인 안토니오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줄리아는 푸치니와 일종의 계약을 맺어서 매달 1천 리라라는 생활비를 받는 것으로 했다. 대신 피사로 가서 살고 안토니오의 양육을 책임진다는 조건이었다. 당시로서 매달 1천 리라는 많은 액수였다. 그러다가 줄리아에 대한 생활비는 1924년 12월에 갑자기 중단되었다. 푸치니가 세상을 떠난 직후부터였다.

 

그러면 푸치니와 줄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그후 어떻게 되었는가? 벤베누티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결론적으로 안토니오 만프레디는 1988년 향년 65세로 피사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그때 그는 가난에 찌든 생활을 했었다는 것이다. 피사의 안토니오는 푸치니와 엘비라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역시 안토니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종양(암이라고 추정됨)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 그것도 유전이었을까? 피사의 안토니오는 정말이지 푸치니를 꼭 빼어 닮은 모습이었다. 어릴 때 모습이 특히 그러했다. 안토니오의 딸인 나디아의 모습도 푸치니를 닮았다. 그리고 나디아의 딸인 지아다(Giada)도 푸치니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지아다의 아들인 자코모도 역시 푸치니의 모습을 닮았다. 현재 피사에 살고 있는 나디아는 비록 이름이 나디아 만프레디로 되어 있지만 푸치니의 후손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법적으로 밝혀져서 나디아 푸치니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기를 소원하였다. 그래서 나디아는 벤베누티의 도움을 받아서 법원에 DNA 검사를 의뢰했다. 푸치니의 DNA와 나디아의 아버지 안토니오의 DNA가 같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2013년 현재 푸치니의 DNA 검사 건은 진행중에 있다. 나디아는 '모든 사실이 밝혀져서 아버지와 할머니의 영혼이 편히 쉬게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데 푸치니의 DNA 비교건이 지연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는 푸치니의 손녀가 되는 시모네타(Simonetta)가 이탈리아 대법원에 자기야 말로 푸치니의 유일한 합법적인 상속인임을 확인해 달라고 소송을 제기하고 피사의 나디아가 제기한 주장에 반대를 했기 때문이다.

 

푸치니와 엘비라 사이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는 물론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는 푸치니의 상속인이다. 그런데 문제는 안토니오가 1946년에 아무런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34년이 지난 때에 시모네타가 나타나서 자기야말로 안토니오의 유일한 딸이라고 주장했고 법원이 그의 손을 들어주어서 시모네타 지우루멜로(Simonetta Giurumello)가 안토니오의 상속인, 즉 푸치니의 상속인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자 시모네타 지우루멜로는 그 즉시 이름을 시모네타 푸치니로 바꾸고 밀라노 법원으로부터 푸치니의 모든 재산을 동결하라는 명령을 받아 낸후 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 빌라를 소유하였다. 시모네타는 현재 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 기념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수시로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아하고 있다. 그러면 피사의 나디아는 어떤 입장인가? 나디아는 자기가 푸치니의 후손임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것은 푸치니가 남긴 재산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다만 법적으로 사실을 인정받고 싶어서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나는 정의를 원한다. 우리 아버지는 마치 거지처럼 가난에 허덕이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생전에 자기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살았다. 나는 아버지에게 진짜 성을 찾아 주고 싶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한편, 시모네타의 변호사들은 이탈리아의 법에 의하면 누구던지 자기의 선조(특히 아버지)가 누구인지 밝히고 인정을 받고자하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지 2년 안에 청구를 해야 하는데 나디아는 그렇지 못했다는 점을 지적하고 푸치니가 세상을 떠난지 무려 9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누구인지 확인하겠다고 하는 것은 말이 안되는 요구라고 못 박았다. 그러자 나디아의 변호사는 '2년 이내라는 것은 증거를 발견한 때로부터 2년 이내라는 것이지 당사자의 사후 2년 이내라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비록 푸치니가 9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푸치니가 할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지냈으며 아울러 푸치니와 줄리아 사이에서 태어난 안토니오도 오래 전에 세상을 떠났지만 자기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세상을 떠났고 바로 얼마전에야 나디아의 아버지 안토니오가 푸치니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주장이다. 과연 어찌될 것인가?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 베리스모의 푸치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푸치니 기념관  (0) 2014.11.01
푸치니의 죽음  (0) 2014.10.31
푸치니와 무솔리니  (0) 2014.10.28
엘비라와 줄리아와 안토니오  (0) 2014.10.26
푸치니와 대본가들  (0) 2014.1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