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리스모의 푸치니

푸치니의 죽음

정준극 2014. 10. 31. 12:20

죽음과 장례식

세계가 애도하다

 

푸치니는 평소에 담배를 즐겨했다. 토스카노 시가와 시가레트가 손에서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1920년대에 들어와서 푸치니는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인지 간혹 기침을 하고 목이 좋지 않다고 말해왔다. 그러다가 급기야 1923년 말부터는 목에 통증이 심하다고 호소했다. 진단 결과, 후두암으로 판명되었다. 의사들은 푸치니에게는 물론, 그의 부인인 엘비라에게도 후두암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충격을 받을 것 같아서였다. 다만, 푸치니의 아들인 안토니오(토니오)에게만은 설명해 주었다. 의사들은 방사선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소견을 내보였다. 그리고 기본적으로 수술도 겸해야 한다고 했다. 푸치니는 치료를 받기로 결심했다. 처음에는 베를린에 훌륭한 병원이 있다고 해서 그곳으로 가려고 했다. 그러다가 벨기에의 브뤼셀 병원이 새로운 방사선 치료시설을 설치했으니 오라고 하자 브뤼셀로 가기로 정하였다. Institut Chirurgical de Brussels 병원이었다. 주소는 rue de Linthout 150 번지였다. 굳이 병원의 주소까지 소개할 필요가 있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이 주소에서 푸치니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애도하는 심정에서 소개하는 것이다. 당시에 방사선 치료는 전혀 새로운 방법이었다. 이제 겨우 실험단계에 있던 방법이었다. 푸치니는 1924년 11월 28일에 수술을 받았다. 그러나 수술후 지혈이 되지 않아 모두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이튿날인 11월 29일 새벽 4시에 담당의사는 푸치니의 아들 안토니오(토니오)와 푸치니의 의붓 딸인 포스카에게 '아무래도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얘기를 해주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라고 말했다. 아침 7시가 좀 지나서는 파리 주재 교황청 대사로서 브뤼셀에 와 있던 몬시뇰 미카라 대주교가 병실로 푸치니를 찾아와서 마지막 병자성사를 집전하였다. 병자성사에는 가족들은 참석하지 않았고 푸치니 혼자만 있었다. 그로부터 몇 시간후, 수술의 여파가 심장마비로 이어져서 마침내 오전 11시 30분에 숨을 거두었다. 1924년 11월 29일이었고 향년은 66세였다.

 

담배를 무척 좋아했던 푸치니

 

푸치니의 서거 소식은 즉시 밀라노에 있는 주세페 아다미에게 전보로 알려졌다. 대본가인 아다미는 푸치니의 절친한 친구로서 '제비'(La Rondini)와 3부작(외투, 수녀 안젤리카, 자니 스키키)의 대본을 썼고 푸치니가 작곡 중인 '투란도트'의 대본도 미리 써놓았던 사람이었다. 전보를 받은 아다미는 당장 토스카니니에게 이 소식을 전해야 겠다고 생각해서 그를 찾아 나섰다. 토스카니니는 라 스칼라에서 리허설 중이었다. 토스카니니는 아다미가 리허설 무대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자 그의 얼굴만을 보고 이무래도 무슨 일이 있어났다고 짐작했다. 토스카니니는 리허설을 중지하고 아다미와 함께 지휘자 대기실로 갔다. 아다미는 의자에 털석 주저 앉으며 아무 말도 못하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세상을 떠난 것이라고 직감적으로 느꼈다. 토스카니니는 아다미에게 어서 이 소식을 엘비라에게 전하라고 당부했다. 그렇게해서 엘비라도 비로소 푸치니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엘비라의 첫마디는 '아이구, 영감, 왜 나를 두고 혼자 떠났소?'가 아니라 '그래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는군요'라는 것이었다. 푸치니의 서거 소식은 순식간에 밀라노의 언론사에 알려졌다. 밀라노의 코리에레 델라 세라(Corriere della Sera)는 즉시 호외를 발행했다. Giacomo Puccini, the gentle maker of melodies of sorrow and grace, diet at 11: 30 on November 29 in Brussels. The Maestro died without being able to speak, but he was fully conscious.이라는 내용이었다. 굳이 번역하자면 '슬프고도 우아한 멜로디를 고귀하게 만들어낸 자코모 푸치니가 29일 11시 30분에 브뤼셀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에스트로는 아무 말도 남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정신만은 완전했었다.'이다.

 

푸치니가 세상을 떠난 병원 건물의 외벽에 설치되어 있는 기념 명판. '1858년 12월 23일 이탈리아의 루카에서 태어난 자코모 푸치니는 1924년 11월 29일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 있다.

 

이날 무솔리니는 로마에서 내각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무솔리니는 회의 도중에 푸치니의 서거 소식을 듣고 내각의 모두에게 푸치니의 죽음을 공식적으로 선언하고 심심한 애도를 표명하였다. 그 때가 오후 4시경이었다. 무솔리니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존경하는 동료 여러분, 본인은 마에스트로 자코모 푸치니가 브뤼셀의 병원에서 운명했다는 놀랍고도 슬픈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탈리아 전체가 그의 죽음을 애도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가 만들어낸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멜로디들을 기억합니다. 물론 지금은 그의 예술성이나 업적을 논하는 시간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푸치니야말로 가장 뛰어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라는 내용의 연설을 하였다. 혹시 참고로 삼을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 무솔리니의 연설문을 영어로 하단에 소개한다. 한편 이탈리아 상원은 버로 며칠 전에 푸치니를 명예의원으로 임명한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 상원은 정기회의를 개최하고 상원의원인 푸치니의 서거를 애도하는 순서를 가졌다. 상원의장은 조사를 통해 우리 모두 푸치니를 기억하자고 말했다.

 

빌라 푸치니에서의 푸치니

 

브뤼셀은 푸치니가 후두암 치료를 위해 브뤼셀에 와서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거장의 죽음이라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브뤼셀의 신문들은 앞을 다투어 푸치니의 서거 소식을 톱 뉴스로 전했다. 신문들은 푸치니의 작품에 대한 특집을 마련했다. 어떤 신문은 2 면을 모두 푸치니 관련 소식으로 도배했다. 어떤 신문은 심지어 병원에 도착한 조전, 조화, 서한등에 대하여도 소개했다. 벨기에의 여왕은 포스카와 안토니오에게 개인적으로 조의를 전달하였다. Le Soir(르 수아)지는 벨기에 국민과 브뤼셀 시민이 한 위대한 음악가의 서거 소식을 처음으로 접하고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고 보도했다. 그러면서 모두가 안타까운 심정을 어찌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들은 이탈리아의 왕, 바티칸 교황, 무솔리니가 보낸 조전도 소개했다. 브뤼셀의 Institut Chirurgical 병원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연락을 받은 몇 사람만이 푸치니의 마지막 모습을 볼수 있었다. 병원의 빈소에서는 이탈리아 대사인 몬시뇰 미카라가 간단한 장례미사를 집전하였다. 포스카와 안토니오와 몇 사람의 친구만이 참석하는 미사였다. 그날 저녁에 라 모네에서는 '라 보엠'의 공연이 계획되어 있었다. 무대 위에는 대형 조화가 놓여졌다. 관중들은 대형 조화만을 보고서도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이어 오케스트라가 쇼팽의 장송곡을 연주했다. 관중 모두가 일어나서 2분간 애도의 묵념을 드렸다. 라 모네는 '황금서부의 아가씨'와 '자니 스키키'의 공연도 별도로 계획하였다. 다음날에는 브뤼셀에서 가장 큰 생마리(St Marie)성당에서 공식적인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무솔리니는 몬시뇰 대사에게 전보를 보내어 이탈리아 국민들이 벨기에 국민들과 특별히 브뤼셀 시민들에게 감사를 드린다고 전했다. 생마리 성당은 외부와 내부가 모두 검은 천으로 장식되었다. 그리고 미사가 진행되는 중에 조종이 천천히 울려퍼졌다. 주변 거리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모여들어서 거장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 보았다. 미사를 마치고 나서 푸치니의 시신은 브뤼셀 역으로 향하였다. 세대의 오픈 카가 마련되었다. 오픈카들은 국화, 장미, 달리아, 라일락으로 장식되었다. 장례 행렬이 기차역으로 진행하는 동안 수많은 시민들이 운구차를 따라갔다. 오후 6시에 기차역에서 의장대가 고별의식을 거행하였다. 밀라노행 정규열차에 별도의 객차를 연결하여 푸치니의 시신을 운구토록 했다.

 

브뤼셀에서의 장례 행렬

 

다음날 아침, 푸치니의 시신은 밀라노의 중앙역(Stazione Centrale)에 도착했다. 밀라노 시장과 토스카니니를 비롯한 여러 음악인들이 푸치니의 시신을 마중하였다. 조르다노(Giordano), 피쩨티(Pizzetti), 찬도나이(Zandonai), 파니짜(Panizza), 그리고 라 스칼라의 성악가들이 플랫홈에 도열하여 말 없이 돌아온 푸치니를 슬픔으로 마지하였다. 12월 3일 밀라노에서 라 스칼라의 주관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거리는 온통 검은 조기로 뒤덮였다. 국장에 준하는 장례식이었다. 밀라노 대주교인 토시(Tosi)가 두오모에서 장례미사를 집전하였다. 두오모에는 수천명이 푸치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려고 모였다. 두오모의 밖에도 수천명이 모여 발디딜 틈이 없었다. 토스카니니가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를 지휘하여 푸치니의 오페라 '에드가'의 음악을 연주했다. 이어 아르헨티나 출신의 소프라노로서 라 스칼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히나 스파니(Hina Spani)가 Addio, addio, mio dolce amor(아디오, 아디오, 아름다운 사랑이여)라는 조가를 불렀다. 이날 따라 비가 억수 같이 쏟아졌다. 장례행렬은 천천히 빗속을 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장례행렬은 라 스칼라 앞에서 잠시 멈추어 마치 노제를 드리듯 마지막 고별을 하였다. 푸치니는 임시로 토스카니니의 가족 묘지에 안치되었다. 2년후인 1926년에 안토니오가 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 빌라 한 편에 채플을 마련하고 푸치니의 유해를 그곳으로 옮겼다. 오늘날에는 영묘가 마련되었다.

 

토레 델 라고의 빌라 푸치니의 한쪽에 있는 푸치니 영묘

 

[푸치니 서거소식을 접한 무솔리니가 내각회의에서 연설한 내용]

 

Honorable colleagues, with profoundest sorrow I communicate to the Italian Chamber the death of Maestro Giacomo Puccini in a clinic at Brussles whither he repaired when his malady was already irreparable. I am sure that the sadness which overcomes us at this moment it profoundly shared by the whole Italian nation and by the civilized world. Every one of us has been moved by the beautiful unforgettable characters he animated through his incomparable music. This is not the moment to discuss the high qualities and nobillity of this creations, but certain it is that in the history of music, and the Italian people Giacomo Puccini occupies a most eminent position. His music, which has moved many generations, will never die, because the Italian spirit is undy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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