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리스모의 푸치니

푸치니 페스티발

정준극 2014. 11. 2. 19:37

푸치니 페스티발(Puccini Festival) - Festival Puccini

토레 델 라고의 마사치우콜리 호수극장

대본가 포르차노와 작곡가 겸 지휘자 마스카니가 주도

 

토레 델 라고의 푸치니 페스티발 무대

 

푸치니 페스티발(또는 페스티발 푸치니)은 매년 7, 8월에 이탈리아 토레 델 라고의 마사치우콜리 호수극장에서 열리는 푸치니 오페라 음악제이다. 토레 델 라고에는 푸치니가 20여년을 살았던 빌라 푸치니가 있으며 호수극장은 바로 그 빌라 푸치니로부터 엎드리면 코 닿을 데에 있다. 토레 델 라고는 마사치우콜리 호수와 티레니아 바다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로서 투스카니 지방의 제2의 도시인 비아레지오 해변으로부터 불과 5 km 떨어진 곳에 있다. 비아레지오 해변은 투스카니 리비에라라고 불릴 만큼 이름난 여름 휴양지이다. 토레 델 레고는 푸치니의 고향인 루카, 그리고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피사로부터 18 km 떨어져 있다. 푸치니 페스티발에서는 매년 푸치니의 오페라 4편이 무대에 올려진다. 이 작품들을 가지고 4-5회의 공연을 가진다. 푸치니 페스티발에는 매년 약 4만명의 푸치니 오페라 팬들이 찾아온다. 호수극장은 Teatro dei Quattromila 라고 부른다. 4천명 극장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좌석수는 3천 2백개이지만 어쩌다가 4천명 규모라고 알려져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푸치니는 토레 델 라고의 빌라를 1900년에 건축했다. 푸치니는 이곳에서 '라 보엠' '토스카' '나비부인' 등 세계적인 오페라들을 작곡했다. 그러나 호수의 공해가 극심해 지자 1921년에 어쩔수 없이 비아레지오에 집을 구해서 지냈다. 푸치니의 유해는 이 빌라의 한쪽에 있는 채플에 안치 되어 있다. 이 채플에는 푸치니 뿐만 아니라 부인 엘비라, 아들 안토니오의 묘소도 있다. 현재 채플은 영묘(mausoleum)로 개축되었다.

 

2014년 페스티발 개최 60주년 포스터

 

푸치니 페스티발은 푸치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친구이며 대본가인 조바키노 포르차노(Giovacchino Forzano)에게 한 말이 바탕이 되어 출범하였다. 푸치니는 1924년 후두암 수술을 받기 위해 브뤼셀로 떠나기에 앞서 포르차노에게 '나는 시간만 있으면 호수에 나와서 보트를 타고 새 사냥을 하곤 했지요. 그런데 이렇게 확 트인 호수에서 내 오페라를 들을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도 했답니다.'라고 말했다. 푸치니는 그의 오페라들이 자연 속에서 공연되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푸치니가 세상을 떠난지 6년 후인 1930년 8월 24일, 피에트로 마스카니와 조바키노 포르차노가 협력하여 푸치니가 그렇게도 사랑했던 마사치우콜리 호반에서 푸치니의 '라 보엠'을 공연했다. 바로 빌라 푸치니 앞의 호반에서였다. 무대는 호수에 기둥들을 박아서 마련했다. 포르차노가 감독하고 마스카니가 지휘했다. Carro di Tespi Lirico 라는 순회오페라단이 공연했다. 이 오페라단은 그 다음 해에도 토레 델 라고에 와서 '라 보엠'을 공연했다. 그러나 이 때에는 정상의 성악가들이 출연하는 것이었다. 로돌포는 베냐미노 질리가 맡았고 미미는 아델라이데 사라체니(Adelaide Saraceni)가 맡았다. 그 다음날에는 로세타 팜파니니(Rosetta Pampanini: 초초상)와 안젤로 미케티(Angelo Saraceni: 핀커튼)이 출연하는 '나비부인'을 공연했다. 이것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푸치니 페스티발의 시초였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1949년까지 한번도 개최된 일이 없었다. 전쟁과 정치적이 소용돌이 때문이었다. 단, 1937년에 한번 개최되기는 했다. 그러나 무대 공연이 아니라 콘서트 형식이었다. 1949년에 모처럼 열리게 된 것은 푸치니 서거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황금서부의 아가씨'가 호수무대에 올려졌다. 이를 계기로 해서 그후 1950년대에도 계속 열리게 되었다.

 

현재의 페스티발 무대가 있는 장소. 토레 델 라고 부두에 있다.

 

1966년에 무대를 다른 장소로 옮겼다. 원래의 장소에서 조금 북쪽으로 올라가서 부두가 있는 곳에 무대를 마련했다. 전보다 호수의 배경이 더 아름다웠다. 밤이 되면 호수 건너편의 작은 마을에서 반짝이는 불빛들이 마치 하늘의 별들이 수평선 너머까지 연결된듯이 보이는 환상적인 배경이 연출되는 장소이다. 무대가 새롭게 만들어지자 푸치니 페스티발은 매년 여름에 열리는 것으로 정착되었다. 1990년에는 푸치니 페스티발 재단이 설립되었다. 페스티발의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한 재단이었다. 재단은 새로운 현대식 첨단 극장의 건설을 계획하였다. 비아레지오 시당국은 2만 5천 평방미터의 부지를 매입하여 Parco della Musica(음악 공원)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 공원에 3천 2백석 규모의 Teatro al Aperto(야외 극장)를 건설했다. 이와 함께 6백석 규모의 스튜디오 극장도 마련되었고 이밖에 연습실, 세미나실 등도 마련되었다. 푸치니 페스티발은 지나간 70여년의 연혁을 통해 세계적으로 뛰어난 공연을 선보였다. 이 페스티발을 통해서 티토 고비가 '토스카'의 음악감독을 맡았으며 마리오 델 모나코는 그의 은퇴 공연을 이곳에서 '외투'로서 장식하였다. 이밖에도 수많은 기라성같은 오페라 성악가들이 토레 델 라고의 무대를 빛내주었다.

 

푸치니 페스티발에서의 '라 보엠' 무대

 

2000년은 1930년에 포르차노와 마스카니가 마련했던 페스티발의 7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였다. 연혁으로는 70년이지만 회수로는 46회였다. '나비부인'과 '토스카'가 무대에 올려졌다. 그리고 푸치니의 첫 오페라인 '빌리'(Le Villi)가 콘서트 형식으로 공연되었다. 테너 호세 쿠라와 소프라노 카티아 리키아렐리가 출연하는 콘서트였다. 2004년에는 푸치니 페스티발 50주년을 기념하였다. 두 작품이 무대에 올려졌다. 하나는 초연 100 주년을 맞이하는 '나비부인'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치니의 여주인공들을 위한 무대였다. 푸치니가 가장 좋아하였던 여주인공들(미미, 토스카, 초초상, 미니)의 아리아를 플라치도 도밍고가 푸치니로 분장하여 나와서 해설한 연주회였다. '나비부인'은 1904년 5월 28일에 브레스키아에서 초연 아닌 초연을 가졌다. 그해 1월에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초연을 가졌지만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에 푸치니가 스코어와 대본을 수정하여 5월에 초연 아닌 초연을 가져 대성공을 거두었던 것이다. 2004년의 '나비부인' 1백 주년 기념 공연은 플라치도 도밍고가 지휘를 맡았고 소프라노 다니엘라 데시(Daniela Dessi)와 테너 화비오 아르밀리아토(Fabio Armilliato)가 주역을 맡은 것이었다. [다니엘라 데시는 2016년 8월 20일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토레 델 라고에서의 푸치니 페스티발에서 '나비부인' 1백 주년 기념 공연.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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