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베르가모의 도니체티

도니체티 더 알기

정준극 2020. 4. 24. 16:45

도니체티 더 알기 10개 항목

 

 

게타노 도니체티 초상화

 

사람들은 세기의 벨칸토 오페라 작곡가인 도니체티가 그의 음악만큼이나 감동적이고 화려한 생애를 살았을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실상 그의 생애는 영광도 영광이지만 오욕도 함께 점철된 것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는 생애의 마지막을 대단히 비극적으로 보냈다. 그는 또한 한창 시절에 대문호 빅토르 위고와의 법정 소송에 휘말려서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어떠했는가? 나중에 알고보니 그의 유골중에서 두개골이 분실되는 이상한 사건도 발생했다. 이밖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기이한 사항들이 많이 있다. '사랑의 묘약'이나 '람메무어의 루치아', '연대의 딸', '돈 파스쿠알레' 등등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들을 작곡한 위대한 도니체티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있는 사항들이 의외로 많다는 것은 미안한 일이다. 도니체티에 대하여 좀 더 알아보자.

 

교향곡, 현악4중주곡 등도 다수 작곡했다

도니체티는 놀랍게도 75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도니체티는 로시니, 벨리니와 함께 이탈리아 벨칸토 운동의 정상에 있었다. 실로 그의 음악은 이탈리아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것이다. 그의 오페라에 나오는 아리아들은 아름답고 풍성한 것이며 아울러 한없는 감동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도니체티를 오페라 작곡가로만 알고 있다면 그건 아니다. 그는 16편의 교향곡, 19편의 현악4중주곡, 193개의 가곡, 45개의 듀엣, 3개의 오라토리오 28개의 칸타나, 10여곡의 합창곡, 기타 여러 편의 기악협주곡과 소나타 및 실내악 등을 작곡했다. 놀라운 일이 아닐수 없다. 다만, 그의 교향곡이나 현악4중주곡이나 종교음악은 그의 위대한 오페라들의 그늘에 가려져서 잘 알려지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오페라 이외의 작품들도 아름답고 풍성한 멜로디로 넘쳐 있다는 사실이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의 한 장면. 알폰소에 알라스테어 마일수, 루크레치아에 클레어 러터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입대

도니체티도 군대에 갔다 왔다. 군대에 갔다 온 사람이 하나 둘은 아니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가족들의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갔었다. 당시에 도니체티의 가족들은 생활이 대단히 곤궁했었다. 도니체티는 이탈리아 북부의 베르가모에서 태어났다. 실은 베르가모의 성벽 밖에 있는 빈촌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베르가모에 있는 어떤 전당포의 관리인이었다. 벌이가 신통치 않았다. 음악과는 거리가 먼 가정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니체티는 학교도 운좋게 어떤 후원자를 만나서 다닐수 있었다. 하지만 학교도 집안 일을 돌보느라고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그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잠시 군대에 들어 갔다. 그때가 20세 때였다. 도니체티의 군대생활은 전투라는 것이 없어서 지루하고 심심한 것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작곡으로 시간을 보낼수 있었다. 그는 군대에 있으면서도 소년시절부터의 스승인 조반니 시모네 마이르(Giovanni Simone Mayr)의 주선으로 몇 편의 오페라를 주문받아 작곡했다. 그가 21세 때에 작곡한 '보르고냐의 엔리코'(Enrico di Borgogna)는 1818년에, 즉 그가 21세 때에 베니스에서 공연되어 성공을 거두었다. 이에 힘입은 그는 아예 군복을 벗어 던지고 작곡가로서의 본격적인 길을 걷기로 했다. 아마 그때 '보르고나의 엔리코'가 성공하지 않았다면 그는 직업군인으로서 평생을 마쳤을지도 모른다.

 

 

도니체티의 고향인 베르가모의 중심지역. 실상 도니체티는 베르가모 성벽 밖의 빈촌에서 태어났다.

 

13세 소녀를 사랑한 도니체티

도니체티의 결혼생활은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824년에, 즉 그가 27세 때에 오페라 '초라이다'(Zoraida)의 로마 공연을 위해 로마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때 바셀리(Vasselli) 가족과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바셀리 가문의 안토니오는 오랫동안 도니체티의 절친이었다. 안토니오에게는 비르지니아(Virginia)라는 귀여운 여동생이 있었다. 도니체티가 비르지니아를 처음 만났을 때 비르지니아는 13세의 소녀였다. 도니체티는 그런 비르지니아를 사랑하게 되었고 4년 후인 1828년에 두 사람은 마침내 결혼하였다. 그때 도니체티는 31세였고 비르지니아는 17세였다. 결혼생활 9년 동안 두 사람에게는 세 자녀가 태어났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모두 어릴 때에 이런 저런 이유로 세상을 떠났다. 1836년에는 도니체티의 부모가 모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 이듬해인 1837년에는 비르지니아가 세상을 떠났다. 콜레로 또는 천연두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만 아마도 도니체티가 걸린 매독에 감염되어서라는 얘기이다. 결국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도니체티도 매독 증상이 심해져서 1848년에 고향 베르가모에서 세상을 떠났다.

 

 

도니체티의 부인 비르지니아 바셀리

 

벨리나와의 라이발 소문

도니체티와 벨리니가 서로 심한 라이발이란 소문이 있었다. 도니체티보다 4년 아래인 벨리니는 우선 생긴 것이 귀족처럼 핸섬하게 생겼고 기가 막히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멜로디를 만들어 내는 실력이 있었으며 또한 도니체티에 비하여 비교적 상류사회 인사들과 자주 교류하며 지냈다. 도니체티는 서민층 출신으로 상류사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아버지가 음악과는 거리가 먼 마을 전당포 관리인이었던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그러나 아무튼 두 사람은 로시니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의 큰 별로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다보니 벨리니와 도니체티가 라이발이라는 소문이 심심찮게 나돌았다. 하기야 그런 소문은 가십이나 좋아하는 사람들, 공연히 싸움을 부추키고 그걸 재미나게 구경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것이어서 신빙성은 없었다. 실제로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떠했는가? 두 사람은 1822년에 나폴리에서 처음 만났다. 벨리니는 새촘한 성격이지만 도니체티는 쾌활, 명랑, 유쾌한 성격이었다. 그래서인지 벨리니는 도니체티를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벨리니는 1835년에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도니체티는 '람메무어의 루치아'의 공연을 위한 리허설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벨리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크게 낙심하여 서재의 문을 걸어 잠그고 사람들과 만나지를 않았다. '루치아' 공연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엉망이 되었다. 하지만 도니체티는 애통하며 지내던 그 기간에 저 유명한 '레퀴렘'을 완성했다. 벨리니를 위한 레퀴엠이었다.

 

 

벨리니. 도니체티와 라이발이란 소문이 있었지만 두 사람은 그런 사이가 아니었다.

 

속도전 작곡가

작곡가 중에는 빨리 작곡하는 사람들이 있다. 모차르트가 그랬고 로시니가 그랬다. 도니체티도 마찬가지였다. 어찌나 빨리 작곡을 했던지 사람들은 그를 '전광석화'(Lightening) 같다고 말했다. 도니체티는 75편의 오페라를 30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작곡했다. 작곡을 하려면 영감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도니체티도 물론 어떤 것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작곡을 했겠지만 그보다도 그는 정말 작곡 속도가 빨랐다. '사랑의 묘약'(L'elixir d'amour)은 단 15일 만에 완성했다. 대작인 '람메무어의 루치아'(Lucia di Lammermoor)는 단 6주 만에 완성했다. 나폴리 사람들은 그런 도니체티를 도치네티(Dozzinetti)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도치네티라는 말은 이탈리아어의 도치나(Dozzina)에서 나온 것으로 '한 다스' 또는 '산더미'라는 뜻이다. 도니체티가 마음만 먹으면 그저 술술 작곡을 했다는 표현이다. 도니체티는 청소년 시절에 볼로냐의 명문 음악원인 '리세오 무시칼레'(Liceo Musicale)에 입학하여 훌륭한 음악교사이기도 한 마테이 신부님으로부터 지도를 받았다. 당시에 도니체티의 창작성과 신속성은 이미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고도 남음이 있었다. 도니체티는 20세가 되기 전에 이미 3편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피그말리온'(Il Pigmalione), '올림피아드'(Olimpiade), '아킬레의 분노'(L'ira di Achille)이다. 비록 모두 단막이고 '피그말리온'을 제외하고는 미완성이었지만 그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훌륭한 작품들이었다. 훗날 도니체티는 '주제가 마음에 드는 것이면 우선 가슴이 말하고 머리가 앞질러 나간다. 그리고 손이 오선지에 음표를 쓰기 시작한다.'라고 말했다.

 

 

도니체티의 첫 오페라인 '피그말리온'(Il Pigmalione). 시카고오페라극장 공연. 2018년 4월. 단막이어서 보통 '리타'(Rita)와 더블 빌로서 공연되고 있다.

 

오페라 성공의 비결

도니체티의 오페라가 사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는 오페라가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던 같았다. 무대에 적합한, 즉 연극적인 대본, 그리고 누구나 즐겁게 해주는 아리아들이 그것이다. 도니체티는 주인공 한 사람만을 위한 아리아를 만든 것이 아니라 다른 주인공들을 위한 아리아들도 만들었다. 그것도 성공의 한 비결이었다. 그리고 아리아는 감미로운 벨칸토 스타일이었다. 도니체티의 오페라들을 보면 처음에는 매혹적인 신포니아로 시작한다. 일종의 서곡이다. 그런 후에는 서서히 합창을 더한다. 프리마 돈나가 등장하는 것은 그런 연후이다. 그것도 하나의 색다른 매력이다. 그리고 열정과 사랑과 질투...이런 것들이 등장한다. 물론 비극이라고 해도 간혹 중간 중간에 한 조각 유머가 들어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음악이 사랑스럽고 스토리가 흥미 있으니 성공하지 않을수 없다.

 

 

'람메무어의 루치아'의 오프닝 장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빅토르 위고의 소송

도니체티의 스타일과 비전은 모든 사람의 취향에 맞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대표적인 경우가 문호 빅토르 위고(Victor Hugo)이다. 도니체티는 위고의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를 이탈리아 오페라로 만들었고 1833년 12월 26일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처음 공연했다. 펠리체 로마니의 대본이었다. 그때까지는 별 문제 없었다. 그러다가 1839년에 파리에서 처음 무대에 올려졌다. 공연이 끝나자마자 원작자인 위고는 도니체티가 저작권을 침해 했다고 하면서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다. 원작의 내용을 상당히 다르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제목부터가 '루크레치아 보르지나'가 아니라 '그레나데의 니짜'였다. 그러니 위고의 기분이 상하지 않을수 없었다. 법원은 위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도니체티는 오페라의 제목도 바꿔야 했고 세트와 의상, 그리고 오페라의 길이까지 변경해야 했다. 처음 제목인 Nizza di Grenade에서 La Rinnegata(정절여인)로 바꾸었다.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라는 제목은 훗날 붙인 것이다. 위고는 그의 작품들, 다시 말해서 그의 문장이 오페라의 대본으로 사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위고와 그의 변호사는 극장적인 드라마라면 대사가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며 음악에 대사를 맞추기 위해서 변형되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드라마가 아니라 하나의 꾸며낸 이야기라는 얘기였다.

 

 

빅토르 위고. '루크레치아 보르지아'로 인하여 도니체티에게 저작권 침해 소송을 내서 승소했다.

 

웃음 뒤의 비극적인 생애

웃음은 만병통치약이라는 말이 있다. 도니체티의 몇몇 대표적인 오페라들은 그야말로 웃음을 터트리게 만드는 것이다. '사랑의 묘약', '연대의 딸', '돈 파스쿠알레' 등을 보면 도니체티 오페라의 특징이 유머인 것을 인정하지 않을수 없다. 아무튼 세 작품을 보면 대체로 심술궂은 노인네가 열정적이고 사랑스러운 연인들에 대하여 닭싸움이라고 하는 듯한 내용이어서 흥미롭다. 그런데 과연 도니체티의 실생활도 이처럼 유머가 넘치는 것이었을까? 그렇지 못했다. 우선 그는 어린시절부터 가난과 싸워야 했다. 집이 빈곤하여서 학교에도 못 들어갈 형편이었지만 다행히 성당의 음악감독인 요한(조반니) 시모네 마이르가 후원을 아끼지 않아서 음악학교에 다닐수 있었다. 만일 마이르의 후원이 없었더라면 도니체티라는 이름도 역사속에서 묻혀져 있었을 것이다. 어려운 청소년 시절이 지나고 이제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드높아져 있을 때 이번에는 병마가 그를 찾아왔다. 좀 창피스런 일이었지만 매독에 걸렸던 것이다. 그가 32세 때인 1829년에 나폴리에서 처음 매독 증상이 발견되었다. 그의 매독은 후유증이 컸다. 그의 세 자녀 중에서 두 아이에게 매독균이 옮겨져 결국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837년에는 그의 부인인 비르지니아도 매독균에 옮겨져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도니체티 자신도 매독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고 결국 1848년에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비극적인 생애가 아닐수 없다.

 

 

요한(조반니) 시모네 마이르. 도니체티를 작곡가로서 만들어준 은사이다.

 

파리의 이탈리아인

19세기에 파리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대인기를 끌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도니체티가 파리에 입성했다. 그의 아내인 비르지니아가 세상을 떠난 직후였다. 도니체티는 파리의 저명인사가 되었다. 그가 오페라를 내놓을 때마다 극장은 그야말로 문전성시였고 사람들은 도니체티의 이름을 연호하느라고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도니체티가 파리에서 내놓은 오페라는 프랑스어 대본이었다. 대표적인 작품은 '연대의 딸'(La fille du régiment), '라 화보리타'(La Favorite), '돈 세바스티앙'(Dom Sébastien) 등이었다. 도니체티는 '파리의 이탈리아인'이었다. 그래서인지 파리의 16구에는 도니체티의 이름을 붙인 거리도 있다. 하지만 파리에서는 1848년 그가 베르가모에서 세상을 떠난 이후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도니체티에 대한 존경심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빅토르 위고가 도니체티를 저작권 침해로 고소한 것은 도니체티에 대한 파리 사람들의 존경심을 무디게 만든 것이었다. 또한  파리 생활의 말년에는 정신이상 증세를 보여 경찰이 그를 자가 격리시키고 이탈리아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이것도 그토록 열심히 환호했던 그에 대한 파리의 반응이었다.  

 

 

파리 16구의 도니체티 거리(rue Donizetti). 눈덮힌 거리

 

말년의 정신질환

위대한 작곡가 중에서 생애의 말년에 정신질환으로 고통스런 삶을 살다가 생애를 마감한 작곡가들이 더러 있다. 예를 들면 살리에리, 슈만, 스메타나, 볼프, 말러, 그리고 도니체티이다. 도니체티는 1840년대에 들어서서 부터 건강이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도니체티는 파리에 두번이나 가서 지냈는데 두번째 체류 중에는 사물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할 지경까지 되었다. 눈에 띠게 나타난 증세는 몸이 급작스럽게 여위어 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환각증상에 빠지는 경우가 자주 있게 되었다. 그런가하면 종종 신체에 마비가 오는 경우도 많았다. 도니체티에게는 부인도 없고 자녀들도 없었다. 조카인 안드레아가 유일한 친족이었다. 안드레아는 삼촌인 도니체티의 상태가 극도로 악화되자 어쩔수 없이 이브리 쉬르 세느(Ivry-sur-Seine) 정신병원에 강제 입원시켰다. 여기에서 도니체티는 무려 13개월이나 있어야 했다. 그런데 베르가모에 있는 친척들이 도니체티가 고향에 돌아와서 마지막을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파리 당국에 도니체티를 이탈리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파리 당국은 정신이상자를 국외로 여행하도록 내버려 둘수는 없다고 나섰다. 이때문에 이탈리아와 프랑스 간에 정치적 대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탈리아는 왜 보내지 않느냐라는 주장이며 프랑스당국과 의사들은 저런 상태로는 여행할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프랑스 경찰은 혹시라도 도니체티가 누구의 도움을 받아 몰래 파리를 탈출하지나 않을까 염려해서 그의 아파트 앞에 경찰을 배치하기까지 했다. 프랑스가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어떤 사람은 프랑스가 당대 최고의 작곡가를 자기 나라에서 영면하도록 하고 싶어서 그런 조치를 했다는 주장을 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도니체티를 연금하다시피 하는 것은 비난을 받아 마땅한 일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난처한 입장을 비엔나 왕실이 해결해 주었다. 당시에 도니체티는 비록 파리에서 병마와 싸우고 있었지만 비엔나 궁정음악감독이라는 타이틀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도니체티는 비엔나의 중재로 베르가모로 돌아 갈수 있었다.

 

 

도니체티와 두 친구가 이브리 쉬르 세느에 있는 정신병원 정원을 산책하고 있는 모습. 테오도로 게찌 그림.

 

사후에도 수난

도니체티는 1848년 4월 8일(48,48의 연속)에 베르가모의 자기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도니체티에 대한 이야기가 여기에서 끝난 것은 아니다. 그의 시신은 처음에 고향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러다가 무려 27년 후인 1875년에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성당의 납골당으로 이장하기 위해 묘지를 파게 되었다. 그래서 유해를 살펴 보았더니 이게 무슨 변고인지 두개골이 절단되어 없는 것이었다. 즉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어서 사정을 샅샅히 조사하였다. 놀랍게도 도니체티의 두개골은 베르가모의 어떤 정육점과 과자점을 겸하고 있는 상점에서 발견되었다. 사실은 이러했다. 도니체티의 부검을 담당했던 의사가 도 자세한 조사를 하기 위해 두개골을 절단하여 간직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어찌하다가 팔리게 되었고 정육점 주인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위대한 인물 또는 천재적인 인물의 두개골을 간직하고 있으면 그 영향을 받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래서 한때 하이든의 두개골도 도난 당한 일이 있으며 베토벤이 세상을 떠나서 매장되었을 때는 혹시 누가 베토벤의 머리, 즉 두개골을 훔쳐가지 않을까 해서 친구들이 배링 공동묘지의 베토벤 묘소를 불침번 서기까지 했다. 그러나 도니체티의 경우에는 해부의사가 좀 더 조사하기 위해 절단해서 가지고 있었다가 엉뚱하게 정육점 주인에게 팔렸던 것이다. 정육점 주인은 그 두개골 컵을 장사하면서 잔돈을 넣어 두는 그릇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정육점 주인은 그 두개골이 위대한 도니체티의 것인지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는 그 두개골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서 베르가모의 산타 마리아 마지오레 성당의 납골당에 안치되어 있다.

 

 

베르가모의 산타 마리아 자지오레 성당의 후문. 이 문으로 들어가면 도니체티의 석관을 만날수 있다.

 

칼라스에게 감사를

도니체티가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오페라들은 대중들의 관심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져 갔다. 대중들의 취향과 패션은 변하기 마련이니 누구를 탓할 것도 없었다. 세월은 변하여서 벨칸토의 전통은 한 옆으로 밀려나고 대신에 새로운 베리스모가 등장했다. 또한 베리스모 이전의 베르디의 오페라에 대한 인기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았던 것도 도니체티의 오페라들이 잊혀지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도니체티의 음악이 외면을 받은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에는 오페라를 작곡할 때에 특별히 당대를 풍미한 성악가들을 위해 아리아를 만드는 경우가 많았다. 도니체티도 예외가 아니었다. 파스타, 말리브란, 길베르 뒤프레(Gilbert Duprez) 등등을 위해 아리아를 작곡했다. 그러나 그런 경향은 점차 뒷전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드라마와 전체적인 음악에 더욱 중점을 두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성악가 위주의 오페라는 점차 잊혀져 가게 되었다. 그러기를 거의 100년이나 그랬다. 그러다가 문뜩 도니체티의 오페라들이 뜻하지 아니한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1957년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마라이 칼라스가 도니체티의 '안나 볼레나'의 타이틀 롤을 맡아 대성공을 거둔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이탈리아는 물론 전세계가 마치 '도니체티 르네상스'를 맞이한 것처럼 도니체티의 오페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도니체티의 오페라가 재평가를 받게 된 데에는 마리아 칼라스의 공로가 컸지만 이밖에도 조앤 서덜랜드(루치아), 몽세라 카바예(루크레치아 보르지아), 루치아노 파바로티(사랑의 묘약), 그리고 최근에는 나탈리 드사이와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연대의 딸) 등 쟁쟁한 성악가들이 도니체티의 오페라를 부활시키는데 커다란 기여를 했다.  

 

 

1957년 라 스칼라에서의 '안나 볼레나'에서 타이틀 롤을 맡은 마리아 칼라스. 이 공연으로 세계는 '도니체티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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