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악성 베토벤

베토벤 더 알기

정준극 2017. 12. 9. 18:21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있는 베토벤의 이얘기 저얘기


안톤 쉰들러를 비롯한 친구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베토벤


- 베토벤이 태어난 날은 아직도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현재까지 베토벤의 탄생에 대한 기록은 독일 본에 있는 교회기록이 유일한데 이에 의하면 베토벤은 1770년 12월 17일에 세례를 받았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베토벤이 세례받기 하루 전날인 12월 16일에 태어나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율이 대단히 높아서 아이가 태어나면 즉시로 세례부터 받는 것이 하나의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세례를 받아야 당장 숨을 거두더라도 하늘나라에 갈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베토벤의 탄생일이 며칠인지는 분명치 않다. 베토벤은 1827년 3월 26일 천둥이 치는 가운데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6세였다. 비엔나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에 있는 그의 묘비에는 Ludwig van 등등 다른 말은 모두 필요없고 다만 BEETHOVEN 이라는 이름만 크게 적어 놓았다. 너무나 유명한 인물이었기에 그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짐머링의 첸트랄프리드호프에 있는 베토벤 묘지. 묘비에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이 아니라 베토벤이라는 이름만 적혀 있다.


- 베토벤의 첫 작품은 12세 때에 작곡한 '에른스트 크리스토프 드레슬러의 행진곡에 의한 피아노를 위한 9개의 변주곡 C 단조'(9 Variationen uber einen Marsch von Ernst Christoph Dressler in C major)이다. WoO 63으로 분류된 작품이다. 오른손을 빠르게 움직여야하기 때문에 연주하기에 매우 어려운 작품이다. 장차 위대한 피아노 작품들이 탄생하게 된다는 전조였다.


- 베토벤은 차분하게 앉아서 작곡을 하기 전에 간혹 찬물에 머리를 넣고 한참이나 있는 습관이 있었다.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 베토벤은 피아노 작품을 마치 현악기를 위한 작품처럼 작곡했다고 한다. 베토벤은 작곡가로서 이름이 알려지기 전에 오케스트라에서 3년 동안 비올라를 연주한 일이 있다. 그때의 기억으로 그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비엔나 근교 힐터브륀에 있는 베토벤 기념비


- 베토벤이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는데 걸린 가장 오랜 시간은 피아노 소나타 Op 27의 1번이다. 2년이나 걸렸다. 잘 알려진 '월광 소나타' 바로 이전의 작품이다. 2년이나 걸린 것은 작곡을 시작하려는데 프로메테우스 발레곡을 작곡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래서 발레곡을 우선 작곡하는 바람에 피아노 소나타는 미루어 놓았기 때문이었다.


- 베토벤은 1787년에 어머니가 폐염으로 세상을 떠나자 두 동생들을 책임지는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다. 그런 연유로 베토벤은 나이가 들어서도 가장의 역할을 대단히 신중하게 맡아했다. 그래서 동생들의 결혼문제에 있어서도 상대방 여인이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면 결혼을 반대했다. 아무튼 베토벤은 두 동생들 먼저 결혼을 시켰지만 자기는 정작 결혼을 하지 못했다. 사실 베토벤의 가장역할은 어릴 때부터였다. 어린 베토벤은 11살 때에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다. 생활을 위해서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베토벤은 우리식으로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해서인지 곱셈과 나눗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일리겐슈타트의 숲길을 산책하는 베토벤


- 영국의 유명한 피아노 제작자인 토마스 브로드우드(Thomas Broadwood)는 1818년에 베토벤을 존경하여서 그가 정성껏 만든 피아노를 베토벤에게 선물로 보냈다. 브로드우드는 1817년 여름에 비엔나에서 베토벤을 처음 만났고 이후 베토벤을 깊이 숭모하였다. 브로드우드는 런던에서 활동중인 다섯명의 거장 피아니스트들에게 어떤 피아노를 베토벤에게 증정해야 할지 선택하도록 했다. 이들이 선택한 그랜드 피아노는 해상으로 런던으로 떠나 지브랄타르를 거쳐서 지중해를 지나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에 도착한후 육로로 비엔나에 수송되었다. 7개월이나 걸렸다. 베토벤은 브로드우드로부터 피아노를 선물로 받고서 감사하여서 '나는 이 피아노를 제단으로 간주하렵니다. 나는 이 제단을 통해서 아폴로 신에게 나의 가장 아름다운 정신적인 제물을 바치려합니다'라고 말했다. 베토벤은 브로드우드 피아노를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옆에 두었다. 그후 이 피아노는 비엔나의 음악출판가인 칼 안톤 슈피나가 매입하였고 그는 얼마후에 이것을 봐이마르의 프란츠 리스트에게 기증하였다. 리스트는 이 피아노를 1874년에 부다페스트의 헝가리국립박물관에 헌정하였다. 현재 비엔나의 베토벤기념관에 보관되어 있는 브로드우드 피아노는 오리지널 피아노대로 다시 제작한 것이다.  


브로드우드가 베토벤에게 기증한 피아노. 키보드는 6옥타브이다.


베토벤은 브로드우드로부터 귀중한 피아노를 기증받았지만 그 즈음에 베토벤은 귀가 거의 들리지 않아서 사실상 피아노가 필요치 않았다. 베토벤의 청각장애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베토벤 자신은 어릴 때 무슨 일 때문에 크게 놀라서 웅덩이 같은 곳에 쓰러졌던 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베토벤이 어릴 때 병치레를 많이 해서 그 후유증으로 귀가 멀었다고 생각했다. 베토벤은 어릴 때에 장티푸스와 천연두로 고생을 많이 했었다. 베토벤은 전생애에 걸쳐서 병을 달고 살았다. 그래서 걸어다니는 질병이라는 말도 들을 정도였다. 베토벤에게 고통을 주었던 질병들의 리스트를 정리해 보면 가장 심각한 청각장애로부터 비롯해서 대장염, 관절염, 류마티스열, 장티푸스, 종기, 안염, 황달, 만성 간염, 간경변증 기타 등등이다. 정말 대단한 질병인간이었다.


- 베토벤은 술을 자주 마셨다. 그리고 마셨다 하면 많이 마셨다. 취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한 경우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베토벤의 아버지도 알콜 중독자나 마찬가지였다. 그것만이 부전자전인 모양이었다. 베토벤은 어느때 술취한 부랑자로 오인되어서 경찰에게 채포된 일도 있다. 하지만 나중에 지인들이 베토벤인 것을 증언하여서 풀려났다. 베토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간경변증까지 생겼다. 그 사실은 베토벤의 사후에야 발견되었다. 베토벤이 얼마나 술을 좋아했는지는 이런 얘기를 보더라도 알수 있다. 베토벤이 임종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슬프도다, 이젠 늦었도다'였다고 한다. 어떤 악보출판하는 사람이 베토벤에게 선물로 좋은 포도주를 선물했는데 이제 죽음을 앞두고 그걸 마시지 못하니 슬프다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비엔나 베토벤광장의 베토벤 기념상 상단


-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은 일명 '합창교향곡'이라고 부른다. 교향곡에 성악 파트를 넣은 최초의 경우이다. 미국의 작곡가 겸 레코드 제작자인 월터 머피(Walter Murphy: 1952-)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편곡해서 '베토벤의 다섯번째'(A Fifth of Beethoven)라는 제목의 디스코 버전 음악을 만들었다. 이 음악은 영화 '토요일 밤의 열기'(Saturday Night Fever)에 사용되었다. 이 경우에 다섯번째(Fifth)라는 단어는 술집에서 파는 1갈론의 5분의 1짜리 병술을 말한다. 베토벤의 교향곡 7번은 2010년도 아카데미 수상작인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에 사용되었다. 아르 누보의 거장인 구스타브 클림트는 '만일 내가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어떤 모습일까?'라는 생각을 했다. 클림트는 그에 대한 대답으로 비엔나의 제체시온 지하에 '베토벤 프리즈'를 그렸다. 프리즈라는 단어는 천장과 벽사이의 공간에 그린 그림을 말한다. 지하 전시실의 3면에 걸친 '베토벤 프리즈'는 그림의 길이가 34미터에 이른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 지려는 욕망이 있다. 하지만 그러한 욕망을 저해하는 적대적인 세력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질병, 죽음 그리고 탐욕이다. 클림트는 이들의 상관관계를 신화적이고도 비유적인 방법으로 가시화하였다. 클림트가 '환희의 송가'에서 마지막 소절인 '전세계에 보내는 키스'를 어떻게 표현했는지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있는 일이다. 1구 프리드리히슈트라쎄 12번지의 제체시온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매일 오전 10시부터 어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다.


클림트가 그린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비엔나 제체시온 전시장의 베토벤 프리스의 한 파트


-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월광 소나타'(또는 월광곡)일 것이다. 피아노 소나타 Op 27의 2번이다. 하지만 베토벤은 피아노 소나타 14번이라고 불렀다. 월광곡이라는 명칭은 베토벤이 붙인 것이 아니다.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지 몇 년 후에 독일의 시인인 루드비히 렐슈타브(Ludwig Rellstab)가 붙인 것이다. 렐슈타브는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을 듣고 나서 '마치 루체른 호수에 비친 달빛과 같은 음악이다'라고 말한데서 그런 별명이 붙었다.


'월광소나타'를 표현한 컷


- '영웅'(에로이카)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베토벤의 교향곡 3번은 원래 나폴레옹에게 헌정하려던 것이었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의 자유주의 사상을 존경했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대관식을 갖자 나폴레옹에 대한 환상이 깨어졌다. 베토벤은 교향곡 3번의 악보 표지를 찢어 버렸으며 나폴레옹의 이름을 지워버렸다.


나폴레옹 대관식. 조세핀에게 황비의 관을 씌워주고자 하고 있다.


- 베토벤은 자기의 청각장애가 고칠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1802년에 두 동생에게 자기의 심정을 밝힌 편지를 썼다. 이 편지를 일명 '하일리겐슈타트 유서'(Heiligenstadt Testament)라고 부른다. 베토벤은 편지에서 청각에 이상이 생겨서 더 이상 들을수 없게 되었지만 아무리 불치의 병이라고 해도 극복하겠다고 천명했다. 그런데 그 편지는 동생들에게 붙여지지 않았고 1827년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직후에야 발견되었다. 베토벤의 청각장애는 그가 25세의 청년일 때부터 시작되었다. 베토벤은 청각을 완전히 상실하기 전에 이명으로 몇년이나 고생을 했다.


베토벤이 쓴 하일리겐슈타트 테스타멘트의 한 파트


- 베토벤은 조금이라도 돈을 벌기 위해서 제자들을 많이 두었다. 그런데 남자 제자는 음악적인 재능이 정말 뛰어나야 받아들였다. 예를 들면 칼 체르니였다. 반면에 여자 제자는 조금만 반반하게 예쁘면 받아 들였다. 여자 제자에게는 음악적 재능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베토벤은 여러 여인에게 사랑을 느꼈고 어떤 여인에 대하여는 결혼까지 생각했으나 여러가지 이유로 단 한건도 성사된 일이 없었다. 여러 여인 중에서 그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아마도 역시 제자였던 요제피네 브룬스비크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베토벤은 '불멸의 여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 일이 있다. 그 '불멸의 여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어 있지만 혹자들은 요제피네 브룬스비크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브룬스비크는 얼마후 어떤 백작과 결혼하였다. 베토벤은 율리라고 하는 소녀를 깊이 사랑한 일도 있었다. 율리는 귀족으로서 백작부인이었다. 율리는 베토벤으로부터 청혼을 받았지만 결혼할수가 없었다. 베토벤이 볼품없는 인상의 서민이기 때문이었다.


하일리겐슈타트를 산책하고 있는 베토벤


- 베토벤은 자연을 사랑했다. 그래서 여름이면 비엔나 숲을 찾아가서 지냈다. 주로 뫼들링과 바덴 바인 빈(Baden bei Wien)에서 지냈다. 베토벤 순례자들이 찾아가는 곳 중의 하나는 뫼들링의 하프너 하우스(Hafner Haus)이다. 베토벤은 르네상스 양식의 이 작은 건물에서 1818년 여름과 1819년 여름, 그리고 아마도 1820 여름에 방 셋을 빌려서 지냈다. 내정은 아름다운 아케이드로 되어 있고 두개의 고틱 베이(내받이 창)이 있어 눈길을 끄는 건물이다. 베토벤은 하프너 하우스에서 피아노 소나타와 장엄 미사곡을 작곡했다. 비록 베토벤 당시의 가구들이 그대로 전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당시의 분위기를 느낄수 있는 곳이다. 뫼들링의 하우프트슈트라쎄 79번지이며 월요일 오전에만 문을 연다. 하지만 전화로 연락하여 예약하면 방문할수 있다.


뫼들링 하우프트슈트라쎄 79번지의 하프너 하우스


- 베토벤은 비엔나 근교의 바덴(바덴 바이 빈)에 가서 온천욕을 하기를 즐겨했다. 바덴의 유황온천은 건강에 좋다고 했다. 베토벤은 1821년, 1822년, 1823년의 여름에 바덴의 라트하우스가세(Rathausgasse) 10번지의 집에서 지내면서 교향곡 9번의 중요 파트를 완성했다. 당시에 이 집의 아랫층에는 구리세공사가 살고 있었으며 베토벤은 2층에서 지냈다. 오늘날 이 기념관의 1층에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심도 있게 감상할수 있는 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음악실의 네개의 대형 스크린이 설치되어 있어서 교향곡 9번의 4악장을 감상할수 있도록 해 놓았다. 첫번째 스크린은 4악장의 스코어이다. 음악이 진행되는 것을 따라서 악보가 움직인다. 두번째는 오케스트라의 악기들을 소개하고 있다. 세번째는 교향악단과 솔리스트들과 합창단의 연주 장면이다. 네번쩨는 이 작품에 대한 관련 정보를 보여주고 있다. 2층의 전시실에는 베토벤의 일상을 살펴볼수 있는 전시품들이 마련되어 있다. 바덴은 베토벤이 사용했던 피아노를 완전복구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2019년 11월에 복구된 피아노로서 콩그레스 카지노에서 연주회가 열렸다. 바덴의 베토벤 기념관은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오픈이다. 다만, 12월 24일과 12월 31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이다.


바덴 바이 빈의 베토벤하우스

바덴 바이 빈의 베토벤하우스 전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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