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프란츠 요제프 1세

발레리(Valerie)

정준극 2015. 1. 6. 14:30

프란츠 요셉과 엘리자베트의 망내 딸 발레리

씨씨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헝가리 출생

 

결혼전의 발레리

 

보통 발레리(Valerie)라고 불리는 오스트리아의 마리 발레리 대공녀(공주: Archduchess Marie Valerie of Austria)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씨씨) 황비 사이에서 태어난 망내 딸이다. 격변하는 유럽의 정세 속에서 오빠 루돌프 황태자의 죽음을 보았고 어머니 씨씨의 죽음을 보았으며 1차 대전의 참혹함을 경험하였고 68년동안 대제국을 통치하였던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의 서거도 지켜본 발레리였다. 그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발레리를 소개하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무튼 그는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씨씨) 사이에 태어난 자녀이고 마침내 대단원의 막을 내린 합스부르크의 영고를 지켜본 여인이었기에 그냥 지나칠수가 없어서 소개하는 바이다.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 황비는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 중에서 세계의 관심을 끌었고 지금까지도 끌고 있는 자녀는 아무래도 아들 루돌프이다. 루돌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태자로서 다음번 황제가 될 사람이었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마리아라고 하는 애인과 동반자살을 해서 정말로 세기의 스캔들로서 화제를 모았던 사람이다.

 

어린 시절의 발레리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을 했기 때문에 더 이상 아들이 없는 프란츠 요셉 황제는 둘째 동생의 아들, 즉 조카 프란츠 페르디난트를 다음 황위 계승자로 선정하였다. 그런 페르디난트가 세르비에 갔다가 어떤 국수주의자의 총탄에 맞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1차 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전쟁이 일어났던 것은 세계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프란츠 요셉과 씨씨 사이에서 태어난 네 자녀 중에서 아무래도 루돌프만이 특별한 생애를 살았기 때문에 그것을 콘텐츠로 하여 수많은 문화예술 작품들이 만들어진 것은 잘 아는 사실이다. 영화, 연극, 뮤지컬, 오페라, 발레 등등 루돌프를 주인공으로 삼은 예술작품은 헤어릴수 없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자녀들, 즉 세명의 딸들에 대하여는 누가 누구인지, 있었는지 없었는지, 세간의 관심조차 없었던 것이 숨길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내 딸인 발레리는 다른 자녀들과는 달리 헝가리에서 태어났으며 또한 어머니 엘리자베트(씨씨)가 어릴 때부터 줄곧 길러왔기 때문에 엘리자베트로부터 남다른 사랑을 받고 자랐다는 특별함이 있다.

 

발레리가 태어난 부다페스트 왕궁

 

프란츠 요셉 황제(1830-1916)와 엘리자베트(씨씨) 황비(1837-1898)는 1854년에 결혼식을 올렸다. 프란츠 요셉이 24세였고 씨씨가 17세였다. 첫 딸 조피(Sophie)는 이듬해인 1855년에 태어났다. 그러나 태어난지 2년 후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났다. 둘째 딸 기젤라(Gisela)는 1856년에 태어났다. 장수하여서 76세 때인 1932년에 세상을 떠났다. 셋째가 아들 루돌프였다. 1858년에 태어나서 31세의 젊은 나이인 1889년에 자살하였다. 루돌프 황태자의 자살로 가족들 모두가 충격을 받았지만 어머니 씨씨의 충격이 가장 컸다. 그로부터 씨씨는 비엔나가 싫어서 다른 나라를 여행하면서 지냈다. 그러는 중에 망내 딸 발레리가 1868년에 태어났다. 아들 루돌프가 태어난지 10년이 지나서였다. 미리 말하지만 발레리는 56세로 1924년에 세상을 떠났다. 루돌프는 발레리가 21세 때에 세상을 떠났고 씨씨는 발레리가 30세 때에 세상을 떠났으며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는 발레리가 48세 때에 세상을 떠났다. 씨싸가 제네바에서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의 송곳에 찔려 피살되었다는 소식이 비엔나에 전해지자 제일 먼저 프란츠 요셉을 위로하러 달려간 사람은 발레리였다.

 

어린 시절의 발레리

 

발레리는 1868년 4월 22일에 헝가리 오펜(Ofen)의 왕궁에서 태어났다. 지금의 부다페스트의 부다 지역에 있는 왕궁이다. 발레리 위의 세명이나 되는 언니들과 오빠가 모두 비엔나에서 태어난것과는 달리 발레리는 헝가리에서 태어났다. 헝가리는 어머니 씨씨가 가장 사랑하던 나라였다. 헝가리의 귀족 중에는 씨씨와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구일라 안드라씨(Guyla Andrassy) 백작이 있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의 수상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헝가리가 정치적으로 어려운 상황에 있을 때 씨씨를 무척이나 존경씨고 사모하는 안드라씨 백작이 헝가리 귀족들을 대표하여 중재역할을 잘 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탄생할수 있었다. 씨씨와 안드라씨 백작이 가깝게 지낸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서로가 깊은 우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씨씨가 부다페스트에서 아기를 낳자 이상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발레리의 아버지가 안드라씨 백작이라는 소문이었다. 심지어 그런 소문 때문인지 발레리에게는 '헝가리 아이'(Hungarian Child)라는 별명이 붙어 다녔다. 그런 소문은 나중에 발레리의 귀에도 들어갔다. 발레리는 정말 속이 상해서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의 발레리

 

그러던 차에 어머니 씨씨가 세상을 떠나자 그 소문을 어디에다가 물어보아서 확인할 곳도 없어졌다. 발레리의 고민은 커갔다. 한가지 발레리가 내세울수 있는 것은 '합스부르크 입술'이다. 합스부르크 사람들은 유전적으로 아랫 입술이 두텁고 턱이 긴 특징이 있다. 발레리의 경우에도 그런 모습이었기 때문에 합스부르크의 후손이 틀림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나저나 어머니 씨씨의 오빠의 부인 즉, 올캐 되는 사람이 씨씨로부터 받은 편지를 공개하면서 씨씨는 세상 어느 누구와도 육체적인 사랑을 한 일이 없다고 적었음을 밝혔다. 모든 사람들이 씨씨의 그 말을 진정으로 믿었다. 그 얘기를 들은 발레리는 너무나 기뻐서 '그러면 그렇지 누구 어머니인데'라며 크게 안심하였다. 그 후로는 안드라씨에 대한 소문이 사라졌다. 그렇지만 발레리는 일생을 통해서 헝가리와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싫어하는 생활을 했다. 그런데 어머니 씨씨는 발레리에게 어릴 때부터 헝가리 말로만 대화하였다. 발레리가 독일어를 사용하면 싫어했다. 다만, 씨씨는 발레리가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와 얘기 할 때에는 독일어로 해도 좋다고 허락했다. 발레리는 아버지 프란츠 요셉을 무척 존경했기 때문에 아버지와 독일어로 대화하는 것을 그렇게도 즐거워했다. 발레리는 어학에 재능이 있어서 독일어와 헝가리어는 물론이고 영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를 자유롭게 말하였다. 그리고 예술에도 조예가 깊었다. 발레리는 꽃 그림을 그리기를 좋아했고 연극 구경을 즐겨했다. 발레리는 비엔나 궁정극장(부르크테아터)의 후원자였고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연극 구경을 갔다.

 

꿈많은 소녀시절의 발레리

 

발레리는 씨씨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다. 발레리는 다른 형제자매들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결혼할 때까지 씨씨와 떨어져서 지낸 일이 거의 없었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태어난 후에 곧바로 할머니, 즉 씨씨의 시어머니의 손에 길러졌던 것과는 사뭇 다른 성장이었다. 발레리는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를 대단히 사랑했다. 발레리는 망내 딸이어서 아버지의 사랑도 많이 받았다. 발레리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어색한 관계에 있을 때에 두 사람 사이에서 중재역할을 많이 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황비인 씨씨이지만 단 한가지 흠이 있다면 치아가 고르지 못한 것이었다. 그래서 치아를 내보이면서 웃거나 크게 말을 하는 일은 절대로 없었다. 그러자니 말을 해도 소근소근 중얼거리기 때문에 잘 들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프란츠 요셉은 나이가 들수록 귀가 가늘어져서 남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특히 씨씨가 중얼거리듯 말하는 소리를 잘 알아 듣지 못했다. 그럴 때면 발레리가 중간에서 통역을 해주었다. 그래서인지 프란츠 요셉은 더구나 발레리를 사랑하였다. 이렇듯 발레리는 부모로 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자랐다. 한편, 씨씨는 나중에 장기간 집을 비우고 방랑의 생활을 자주 하였는데 그러면 비엔나에 남아 있는 남편 프란츠 요셉이 적적함을 달래기 위해서 미인 여배우인 카테리나 슈라트와 친교하는 것을 묵인하였다. 하지만 발레리는 카테리나 슈라트를 미워하고 아버지가 그 여자와 함께 다니는 것을 기회 있을 때마다 반대했다.

 

 

헝가리 왕비 대관식 후의 씨씨. 발레리의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

 

발레리는 1890년 7월 31일, 즉 22세 때에 프란츠 살바토르(Franz Salvator) 대공과 바드 이슐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프란츠 살바토르는 합스부르크 투스카나 지파의 사람으로서 발레리와는 사촌간이다. 발레리가 프란츠 살바토르를 처음 만난 것은 결혼으로부터 4년 전인 1886년 어느 무도회에서였다. 1886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첫 근대적 교육기관인 배재학당이 문을 연 해이다. 프란츠 살바토르는 발레리보다 두 살 위였다. 무도회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촌간이기도 했지만 서로 끌렸다. 그러나 발레리로서는 과연 이 사람이 자기의 남편으로서 합당한지를 생각하느라고 많은 시간을 보냈다. 더군다나 황실에서는 발레리가 작소니의 황태자 또는 브라간자 공작과 결혼하게 되기를 바랬었다. 한편, 바바리아의 알폰스 왕자는 직접 청혼을 하기도 했다. 씨씨는 딸 발레리가 비록 굴뚝청소부라고 해도 자기가 원하는 사람과 결혼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씨씨의 다른 자녀들과는 생판 다른 처사였다. 둘째 딸 기젤라, 아들 루돌프는 모두 정책적인 결혼을 했기 때문이다. 결국 발레리는 재산도 넉넉하지 않고 사회적으로 뛰어난 인물도 아닌 프란츠 살바토르를 선택했다. 어머니 씨씨는 자기가 선언한 말도 있기 때문에 발레리가 결정한 대로 따르기로 했다. 씨씨가 그렇게 나오자 언니인 기젤라와 오빠 루돌프가 발레리의 처사를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형제자매들 사이에 냉랭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결국 '어째서 너만 어머니의 사랑을 받고 결혼하고 싶은 사람과 결혼하느냐?'는 일종의 질투였다. 그러나 얼마 후에 기젤라와 루돌프는 발레리의 선택을 지지하였다. 발레리와 살바토르는 1888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날에 호프부르크에서 약혼하였다.

 

발레리와 남편 프란츠 살바토르

 

발레리는 프란츠 살바토르와 결혼하면서 혹시도 있을지 모르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위계승권에 대하여는 모든 것을 포기한다고 서약했다. 결혼 전에 이에 대한 의식도 치루었다. 1890년 7월에 헤르메스빌라에서였다. 결혼식은 7월 31일 바드 이슐의 교구교회에서 거행되었다. 신랑신부는 이탈리아, 스위스, 바바리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발레리와 프란츠 살바토르는 무려 10명의 자녀를 두었다. 별로 할 일도 없으므로 열명의 자녀들을 소개코자 한다. 4남 6녀였다. 가만히 보면 발레리는 결혼후 계속 임신 상태였다.

 

발레리와 살바토르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 '엘라'(Elisabeth Franziska 'Ella'). 1892-1930. 발트부르크 차일 트라우흐부르크의 게오르그 백작과 결혼

- 프란츠 카를 살바토르(Franz Karl Salvator). 1893-1918. 스페인 독감으로 미혼으로 사망

- 후베르트 살바토르(Hubert Salvator). 1894-1971. 잘름-잘름의 로즈마리 공주와 결혼

- 헤드비히(Hedwig). 1896-1970. 슈톨베르크-슈톨베르크의 베르나르드 백작과 결혼

- 테오토르 살바토르(Theodor Salvator). 1899-1978. 발트부르크 차일 트라우흐부르크의 마리아 테레자 백작부인과 결혼

- 거르르트(Gertrud). 1900-1962. 발트부르크 차일 트라우흐부르크의 게오르그 백작과 결혼. 큰 언니 엘리자베트(엘라)가 세상을 떠나자 형부와 결혼한 것임

- 마리아 엘리자베트(Maria Elisabeth). 1901-1936. 미혼으로 사망

- 클레멘스 살바토르(Clemens Salvator). 1904-1974. 미르몽의 엘리사베스 르쎄귀에 백작부인과 결혼하여 알텐부르크 공자라는 호칭을 가짐

- 마틸데(Mathilde). 1906-1991. 에른스트 호펠이라는 평민과 결혼.

- 아네스(Agnes). 1911-1911. 생후 8시간 만에 사망

 

발레리와 프란츠 살바토르가 결혼후 살았던 니더외스터라이히주 암슈테텐의 슐로스 발제

 

발레리와 프란츠 살바토르는 결혼 후 슐로스 리흐테네그(Schloss Lichtenegg)에서 지냈다. 5년 후에 이들은 도나우가 내려다 보이는 슐로스 발제(Schloss Wallsee)를 매입하여 그곳에서 살았다. 두 사람은 슐로스 발제를 사서 대대적인 수리를 했다. 1897년 9월 초에 오픈 하우스를 했을 때에는 발레리의 인기 때문에 집들이 축하 행사가 크게 있었다. 수백명이 모여든 파티였다. 발레리는 지역사회를 위해 많은 헌신을 했다. 특히 자선활동에 앞장 섰다. 1900년에는 적십자의 대후원자가 되었다. 1차 대전 중에는 자기의 저택에 임시병원을 마련해 놓고 부상병들을 치료토록 했다. 발레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래서 성당에서의 자선행사들을 적극 후원하였다. 사람들은 그런 발레리를 사랑하고 존경하였으며 '발제의 천사'라고 불렀다. 1889년 1월에 오빠 루돌프가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발레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런 중에도 발레리와 언니 기젤라는 아버지 프란츠 요셉 황제와 어머니 씨씨 황비를 위로하느라고 잠도 자지 못하였다.

 

아들 루돌프 황태자의 시신을 보고 애도하는 어머니 씨씨

 

발레리의 결혼 생활은 처음에는 별 문제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남편 프란츠 살바토르는 바람을 피기 시작했다. 무슨 재주가 그렇게 좋은지 하여튼 프란츠는 여러 애인을 두었다. 그 중 하나는 호엔로에의 스테파니 공주였다. 스테파니 공주는 2차 대전 중에 히틀러를 위해 첩자 활동을 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스파이 공주'라는 별명을 들었던 여인이다. 1914년, 1차 대전이 일어나던 해에 프란츠와 애인 스테파니 공주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태어난 아이의 이름은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란츠 요셉이라고 붙였다. 처음에 발레리는 남편에게 숨겨 둔 아들이 있는지 몰랐다가 나중에 남편이 털어 놓는 바람에 알게 되었다. 발레리는 허탈했지만 어쩔수 없이 참고 지냈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종말을 고하자 발레리는 새로운 공화국에게 합스부르크로서의 모든 권리를 포기한다는 서약을 했다. 발레리는 자기뿐만 아니라 자기의 자녀들과 그 후손들도 모두 합스부르크 황실의 멤버라는 권리를 포기한다고 서명했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발레리는 저택과 소유물들을 정부에 반환하지 않고 그대로 가지고 있을수 있었다.

 

발제의 진델부르크 교구교회에 있는 마리 발레리의 묘. 남편 프란츠 살바토르도 함께 있다.

 

발레리는 1924년 9월 6일에 슐로스 발트제에서 림프종으로 세상을 떠났다. 발레리는 진델부르크(Sindelburg) 교구교회 중앙제단 아래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장례식 때에는 수천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모여서 조문을 했다. 발레리가 세상을 떠난지 10년 후인 1934년에 남편 프란츠는 비엔나에서 재혼하였다. 프란츠는 재혼 후 멜라니의 저택인 슐로스 자이젠네그(Schloss Seisenegg)에서 살았다. 발레리의 남편인 프란츠 살바토르는 1939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이듬해에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프란츠 살바토르는 유언에 따라서 진델부르크 교구교회의 발레리 묘소에 함께 안장되었다. 헝가리의 에츠테르곰(Esztergom)과 슬로바키아의 스투로보(Sturovo)를 연결하는 도나우 강의 마리아 발레리 다리는 마리 발레리를 기념하여 1895년에 개통된 것이다.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를 잇는 도나우 강의 마리아 발레리 다리.

 

 

 

'합스부르크 > 프란츠 요제프 1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젤라(Gisela)  (0) 2015.01.09
발레 '마이엘링'  (0) 2015.01.03
루돌프의 딸 엘리자베트  (0) 2015.01.03
루돌프와 동반자살한 마리아 베체라  (0) 2015.01.03
비운의 루돌프 황태자  (0) 2015.0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