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프란츠 요제프 1세

기젤라(Gisela)

정준극 2015. 1. 9. 11:38

프란츠 요셉 황제와 엘리자베트(씨씨) 황비의 차녀

바바리아의 뮌헨에서 생활

 

 

소녀시절의 기젤라. 누굴 닮았을까?처녀 시절에는 어머니 씨씨를 닮아서인지 승마를 즐겼다.

 

뮌헨에는 기젤라 김나지움(Gisela-Gymnasium)이란 학교가 있다. 우리 식으로 보면 '기젤라 고등학교'이다. 기젤라 김나지움은 주로 수학과 과학을 중점 교육하고 있다. 하지만 외국어 교육도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 이 학교가 특별한 것은 오스트리아의 대공녀(공주)인 기젤라의 후원에 힘입어서서 운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의 이름을 따서 학교 이름은 기젤라 김나지움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기젤라 공주는 프란츠 요셉 황제와 바바리아의 엘리자베트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차녀이다. 기젤라의 위로는 1855년에 태어나서 2년 후인 1857년에 세상을 떠난 언니 조피(Sophie)가 있었다. 남동생은 30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살한 루돌프 황태자이며 망내 여동생이 헝가리에서 태어난 발레리이다. 기젤라는 바바리아의 레오폴드 공자와 결혼해서 뮌헨 인근의 레오폴드슐뢰센(Leopoldschlösschen)에서 가족들과 함께 살았다. 기젤라는 바바리아에 살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의 공주로서, 바바리아의 왕자비로서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상당한 역할을 하였다. 기젤라는 1차 대전 중에 자기의 저택에서 임시후송병원을 운영했다. 남편 레오폴드는 육군원수로서 동부전선에서 참전하였다.

 

 

기젤라와 동생 루돌프. 루돌프가 열살 때에 망내 발레리가 태어났다. 오른쪽은 어린시절 어머니 씨씨와 함께.

 

1918년에 바이마르에서도 공화제를 열망하는 혁명이 일어나자 다른 식구들은 모두 뮌헨을 떠나 시골로 피난을 갔지만 기젤라만은 남아서 사회봉사활동을 하였다. 기젤라는 1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19년, 바이마르 의회 선거에 적극 참여하였다. 선거의 결과, 바이마르 의회는 처음으로 20세 이상의 여성에게도 선거권을 주는 것을 허용했다. 이처럼 기젤라는 여러가지로 사회에 기여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비엔나에서 온 착한 천사'(Good Angel from Vienna)라고 불렀다. 여러 단체가 기젤라를 파트론으로 삼았다. 예를 들면 앞에서 설명한 기젤라 김나지움은 물론이고 잘츠부르크에서 티롤을 운행하는 철도 노선도 기젤라반(Giselabahn)이라고 불렀으며 트라운제(Traunsee)에서 운항되고 있는 증기선의 이름도 아직도 '기젤라호'이다.

 

뮌헨의 기젤라 김나지움. 기젤라의 이름을 따서 붙인 학교이다,

 

기젤라 공주는 1856년 7월 12일 비엔나 근교의 락센부르크 궁전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기젤라 루이제 마리이며 타이틀은 오스트리아 공주 및 대공녀(Erzherzogin von Österreich),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공주, 그리고 나중에 바바리아의 공주(Prinzessin von Bayern)라는 호칭까지 추가되었다. 기젤라가 세례를 받았을 때는 이름을 Gisella 라고 했으나 그 자신은 평생을 Gisela 라고 L 하나를 빼고 썼다. 기젤라라는 이름은 10세기경 합스부르크의 어떤 황비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기젤라도 사회봉사 활동을 열심히 해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기젤라는 바로 위의 언니 조피(어릴 때 세상을 떠남), 그리고 나중에 동생인 루돌프와 마찬가지로 태어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할머니 조피 대공녀의 손에 길러졌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어머니 씨씨로부터는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인지 기젤라는 동생 루돌프와 아주 가깝게 지냈다.

 

기젤라와 레오폴드와 자녀들. 그런데 콘라트라고 부르는 망내 아들은 어린아이가 꼭 술취한 사람의 모습이다.

 

기젤라는 1873년 4월 20일에 비엔나에서 바바리아의 레오폴드 공자와 결혼식을 올렸다. 비엔나의 어디에서 결혼식을 올렸는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짐작컨대 아우구스틴 교회에서 거행했을 것이다. 아우구스틴 교회에서는 기젤라의 아버지 프란츠 요셉과 어머니 엘리자베트(씨씨)가 결혼식을 올렸고 나중에는 루돌프 황태자와 벨기에의 스테파니 공주의 결혼식도 올렸다. 한편, 남편 레오폴드는 기젤라에게 6촌 사촌이 된다. 레오폴드 공자는 당시 유럽에서 몇 안되는 가톨릭 신랑 후보생이었다. 그래서 프란츠 요셉 황제는 레오폴드와의 결혼을 서둘렀다. 결혼후 기젤라는 뮌헨 인근 슈봐빙(Schwabing)의 팔레 레오폴드(또는 레오폴드슐뢰슬)에서 살았다. 팔레 레오폴드의 건너편 길은 1873년에 기젤라를 기념해서 기젤라슈트라쎄라고 명명되었다. 기젤라는 4명의 자녀를 생산했다. 첫번째가 큰 딸인 엘리자베트 마리 공주였다. 둘째도 딸인 아우구스테 마리아였다. 셋째는 아들인 게오르그였으며 넷째도 아들인 콘라드였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율이 높았지만 기젤라의 자녀들은 모두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기젤라와 남편 레오폴드는 1923년에 결혼 50주년을 기념하는 금혼식을 축하하였다. 그정도면 대단히 금슬이 좋은 편이었다. 레오폴드는 1930년에 세상을 떠났고 기젤라는 2년 더 살다가 1932년에 뮌헨에서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의 묘소는 뮌헨의 성미하엘교회(St Michaelskirche)의 콜롤바리움(Columbarium)에 있다. 콜롬바리움은 말하자면 납골당이다.

 

기젤라와 남편 레오폴드가 영면하여 있는 뮌헨의 성미하엘교회 내부

 

 

 

 

ö    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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