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오페라하우스/유명 오페라극장 2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국립극장'

정준극 2015. 2. 12. 21:12

세르비아 국립극장(Serbian National Theater in Belgrade) - Narodno Pozoriste u Beogradu

베오그라드 공화국 광장(트르그 레푸블리케)의 문화유산

 

베오그라드 국립극장의 위용

 

세르비아의 역사는 고통으로 점철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세르비아는 지금도 코소보 문제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한 세르비아인데 오페라 하우스 하나만은 세계적이다. 세르비아 정부는 베오그라드의 오페라 하우스를 국가중요문화재기념물로 지정하고 보호하고 있다. 근년에 이르러 베오그라드는 말할수 없는 전쟁의 참화를 겪었지만 오페라 하우스는 기적적으로 건재하여 있다. 아름답고 웅장한 베오그라드 오페라 하우스는 세르비아의 자랑이며 자부심이 되어 있다. 세르비아는 16세기에 가서야 비로소 독립된 왕국으로 출범하여 세계의 역사무대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언제나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억압을 받아온 운명이었다. 어떤 때는 오토만 제국의 영향을 받기도 했다가 또 어떤 시기에는 합스부르크의 통치를 받는 등 주변 강대국들로부터 끊임없는 억압을 받아 왔다. 그러다가 19세기에 민족자결주의의 물결에 따라 혁명으로 입헌군주국을 수립하여 세르비아 왕국을 지키려고 했다가 세계적인 추세인 공화제의 열망으로 공화국이 되었다. 그후 1차 대전에서는 합스부르크의 보이보디나가 세르비아에 통합되는 경험도 하였다. 그렇게 되자 세르비아는 남부 슬라브의 부족들과 함께 유고슬라비아를 건립하였다. 그후 공산주의 구소련이 붕괴되고 이어 유고슬라비아가 붕괴되자 1992년에는 몬테네그로와 함께 유니온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2006년에 다시 원위치되었다. 그러던 중 2008년에 남부의 알바니아인들이 다수를 점유하고 있는 코소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독립을 선언하는 바람에 세르비아와 코소보 사이에 내전 아닌 내전이 벌어져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세르비아의 수도는 옛 유고슬라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또는 벨그레이드)가 그대로이다.

 

세르비아 국립극장과 미하일로의 기념상. 세르비아 왕국의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가 국립극장의 건설을 주도했다. 스톡홀름 왕립오페라극장의 옆에도 그 극장을 세운 구스타브 3세의 기념상이 있는 것과 흡사한 개념이다.

 

베오그라드의 세르비아 국립극장은 1868년 당시의 군주였던 미하일로 오브레노비치(Mihailo Obrenovic: 1823-1868)가 주도하여 설립했다. 미하일로 공자는 두번이나 군주의 자리에 있었다. 첫번째는 1839년부터 1842년까지였다. 그러나 쿠테타가 있어서 왕좌에서 축출되었다. 절치부심한후 반대세력을 몰아내고 1860년에 다시 왕좌에 올랐다. 그리고 1868년까지 세르비아 왕국을 통치했다. 미하일로 공자는 세르비아에 주둔하고 있던 터키군을 내보낸 일로서 크게 존경을 받았다. 미하일로 공자는 문화예술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 많은 행사들을 후원했다. 1868년 초에 노비 사드(Novi Sad)에 있던 세르비아국립극단이 베오그라드에 와서 연극을 공연한 일이 있었다. 당시에 세르비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해 있는 세르비아 공국이었고 정치행정의 수도는 베오그라드였지만 문화예술의 수도는 세르비아의 아테네라고 불리는 북부 지방의 노비 사드였다. 당시 세르비아 공국의 미하일로 공자는 노비 사드에서 온 극단의 공연을 보고 대단한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노비 사드 세르비아국립극단을 창설한 요반 도르데비치(Jovan Dordevic)에게 베오그라드에 와서 노비 사드와 같은 극단을 창단해 달라고 요청했다. 요반 도르데비치는 노비 사드에 있는 국립극단의 멤버 반수 정도를 이끌고 베오그라드에 와서 별도의 극단을 창설했다.

 

베오그라드국립극장의 건설을 주도한 미하일로 공자

 

이와 함께 미하일로 공자는 베오그라드에 극장을 짓도록 주선했다. 설계는 당시 베오그라드에서 가장 활발한 건축가인 알렉산다르 부가르스키(Aleksandar Bugarski)가 맡았다. 원래는 연극공연을 위한 극장을 짓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밀라노의 라 스칼라 극장을 모델로 삼은 르네상스 양식의 극장을 지었다. 그러다가 1922년에 재건축할 때에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바꾸었는데 지금의 모습이다. 그리고 1986년에 또 한번의 재건축이 있었다. 국립극장은 공연업무를 위주로 하지만 19세기에는 자선행사를 위한 무도회나 콘서트 장소로서도 이용되었다. 1888년에 세르비아의회가 저 유명한 세르비아 신헌법을 채택한 곳도 이 곳이다. 베오그라드 국립극장에는 2개의 연주회장이 있다. 메인 스테이지인 그랜드 홀과 라사 플라오비치(Rasa Plaovic) 스테이지이다. 그랜드 홀은 3층 발코니의 규모로서 아랫층만 219석이다. 그랜드 홀에서는 오페라, 연극, 발레가 공연되고 있다. 라사 플라오비치 홀은 281석이지만 발코니가 없다. 그랜드 홀에 비하여 아름답게 장식되지 않았다. 소극장 형태의 연극이 주로 공연되고 있다.

 

베오그라드국립극장의 오디토리움과 무대. 아름다운 샹들리에.

 

세르비아의 근대 역사에 있어서 1999년의 상황은 가장 힘들고 비참한 것이었다. 나토가 코소보 위기 때에 베오그라드에 대한 폭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나토의 공중폭격은 무려 78일간이나 계속되었다. 베오그라드의 주요 건물들이 말할수 없이 크게 파괴되었다. 그러나 국립극장은 폭격대상에서 제외되어 있었다. 국립극장은 시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매일 오페라, 드라마, 발레를 공연하였다. 입장료는 단 1 디나르였다. 공연시간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어후 3시에 시작해서 오후 6시에 끝나는 공연이었다. 그 시간대에는 나토가 공습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휘자인 알베르토 체다(Alberto Zedda)는 당시의 상황을 회상하면서 '세계에서 공중폭격을 받는 기간 중에 오페라를 계속 공연한 경우는 베오그라드 국립극장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베오그라드 국립극장에 오페라단이 생긴 것은 일찍이 1882년이었다. 극장이 완공되고 나서 약 20년이 지난 때였다. 오늘날 베오그라드 오페라단은 세계적으로 높은 명성을 유지하고 있으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베오그라드 오페라단이 설립된 것은 1882년이지만 본격적인 공연을 시작한 것은 여러 사정상 1차 대전이 끝난 후인 1919년부터였다. 1919년 2월 11일 초대 오페라 음악감독인 스타니슬라브 비니키의 지휘아래 푸치니의 '나비부인'을 무대에 올렸다. 그후 벨리니, 베르디 등 주로 이탈리아 오페라들을 공연했으나 근자에는 세르비아 작곡가에 의한 오페라도 공연하고 있다. 대표적인 세르비아 오페라는 스테반 흐리스티치(Stevan Hristic: 1885-1958)의 '일몰'(The Dusk), 페타르 코뇨비치(Petar Konjovic: 1883-1970)의 '제타의 왕자'(Knez od Zete: Prince of Zeta) 등이다.

 

베오그라드 국립극장 오디토리움

 

1924년부터 1933년까지 스테반 흐리스티치가 베오그라드 오페라의 음악감독이었다. 이 기간에 베오그라드의 오페라 레퍼토리는 크게 확장되었고 더구나 해외 순회공연까지 떠날수 있었다. 베오그라드 오페라단의 성악가들은 주로 러시아 출신들이었다. 그러나 세르비아 출신들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즈덴카 지코바(Zdenka Zikova), 멜리니야 부가리노비치(Melanja Bugarinovic), 니콜라 츠베치크(Nkola Cvejic) 등이다. 2차 대전후에 지휘자로 임명된 오스카르 다논(Oskar Danon)은 베오그라드 오페라의 레퍼토리로서 세르비아 작곡가들에 의한 작품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베오그라드 오페라가 국제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54년 스위스에서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를 공연한 것부터라고 말할수 있다. 이어 베오그라드 오페라단은 데카와 협동하여 음반을 취입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이고르 공', '보반스키나'를 1955년 2월에 취입했고 그해 가을에는 '유진 오네긴', '짜르를 위한 삶', '눈 아가씨', '스페이드의 여왕'을 취입했다. 베오그라도 오페라단이 '보리스 고두노프'를 취입한 것은 자그레브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