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페사로의 로시니

대장장이의 도제 로시니

정준극 2015. 7. 18. 05:44

대장장이의 도제 로시니

 

이탈리아 반도의 북동부, 아드리아해에 면한 지방의 작은 마을 페사로에서 태어난 로시니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당시에 페사로는 교황청이 관할하는 지역이었다. 그나저나 아무리 오페라에 대하여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로시니가 작곡한 '세빌리아의 이발사' 정도는 알고 있다. 그리고 로시니의 '성모애상'(Stabat Mater)! 정말로 아름답고 장엄한 곡이다. '성모애상'에 나오는 테너 아리아 쿠유스 아니맘(Cujus animam)을 들어보라! 아무리 성곡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놀라운 감동에 빠져 들 것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세계인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로시니는 어린 시절을 어떻게 보냈는가? 39편의 오페라와 수많은 성곡, 실내악, 노래, 그리고 기악곡과 피아노곡을 작곡한 세계의 작곡가 로시니가 소년시절에는 음악과 거리가 먼 대장장이의 도제를 지냈었다고 하면 믿겠는가?

 

여름철의 페사로 해변

 

로시니의 풀 네임은 조아키노 안토니오 로시니(Gioachino Antonio Rossini: 1792-1868)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통하게도 로시니는 2월 29일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남들보다는 특별하게 4년마다 생일을 마지하는 생애였다. 로시니는 지금부터 223년 전인 1792년에 태어났다. 1792년이라고 하면 비엔나에서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이며 우리나라에서는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임금이 된지 16년째가 되는 해이다.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나서 루이 16세를 체포한 해이고 오스트리아에서는 레오폴드 2세가 세상을 떠난 해이다. 레오폴드 2세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둘째 아들로서 계몽황제 요제프 2세의 동생이며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뚜아네트의 오빠이다. 레오폴드 2세는 3월 1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로시니의 생일 바로 다음날이며 훗날 1919년에는 우리나라에서 삼일독립운동이 시작된 날이다. 로시니가 태어난 집은 페사로 시내의 비아 로시니(Via Rossini) 34번지에 있다. 물론 비아 로시니라는 거리명은 로시니가 태어날 당시에는 없었던 것이고 나중에 로시니가 유명해지니까 붙인 이름이다. 로시니의 생가는 지금은 기념관으로 되어 있어서 연중 무휴로 관람할수 있다. 물론 1월 1일과 12월 25일은 휴관이다. 6월부터 8월까지는 오전 10시에 문을 열어서 오후 1시에 밥먹기 위해 닫고 다시 4시에 문을 열어서 저녁 7시 반까지 구경할수 있다. 그밖의 달에는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와 다시 오후 3시 반부터 저녁 7시까지 문을 연다. 수, 목, 일요일에는 10시부터 1시까지만 문을 연다. 6월부터 8월까지는 수요일에 한해서 오전 10시부터 오후 1시까지 문을 연다. 복잡하기가 이를데 없으니 찾아 간다면 시간표를 잘 보아야 한다.

 

로시니 생가(카사 나탈레). 현재는 기념관이다.

 

다행하게도 로시니는 음악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날 당시에 페사로 지역은 교황청이 관할하는 이른바 Papal States(교황령: 1870년까지 교황이 다스린 중북부 이탈리아의 지역)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인지 아무튼 로시니도 신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였다. 조아키노 로시니의 아버지 주세페 로시니는 혼 연주자였다. 주세페 로시니는 페사로에서 음악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앙상블을 구성하고 연주를 하였다. 그런데 물론 음악만 해서 먹고 살기가 힘들므로 다른 직업도 가졌는데 다름아니라 도살장 감독관이었다. 당시 페사로에는 가축 도살장이 여러 곳이 있어서 주세페 로시니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위생상태는 제대로 되어 있는지, 또 가축들은 잘 도살되고 있는지를 감독하였다. 그러다보니 고깃근이나 집으로 가져오는 날이 많았다. 어린 로시니는 아버지가 이렇듯 훌륭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바람에 일찍부터 고기맛을 알게 되었고 어른이 되어서는 세상에서 둘도 없는 미식가가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비프 스테이크를 좋아해서 심지어는 '로시니 스테이크'(Tournedos Steak)라는 별도의 음식까지 창안하였으니 알아 모실만하다. 그건 그렇고 로시니의 어머니 안나(Anna)도 음악가였다. 성악가였다. 안나는 빵집 딸이었으나 노래를 잘 불러서 남편 주세페가 조직한 앙상블에서 노래를 부르는 일이 많았다. 아무튼 로시니는 아버지, 어머니가 음악가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분위기에서 자랐고 또한 어릴 때부터 음악훈련을 받았다. 그리하여 로시니는 이미 여섯살 때에 아버지의 앙상블에서 트라이앵글을 땡땡 치는 역할을 하였으니 트라이앵글도 아무나 치는 것이 아니었다.

 

페사로 중심가인 포폴로 광장의 분수와 중세로부터의 건물

 

그런데 로시니의 아버지는 무슨 정치에 그렇게도 관심이 많은지 프랑스 혁명을 적극 지지하였고 얼마후 나폴레옹의 군대가 북부 이탈리아에 진군하자 이들을 앞장서서 환영하였다. 당시 이탈리아 북부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통치하고 있었는데 그만 나폴레옹의 위세에 꺾여서 후퇴하였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얼마후 오스트리아 제국이 다시 세력을 잡게 되자 주세페 로시니의 입장은 대단히 난처하게 되었다. 결국 주세페 로시니는 1799년에 오스트리아 당국에 의해 체포되어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주세페 로시니는 감옥에서 1년을 지낸 후에 석방되었지만 로시니의 어머니는 남편이 감옥에 들어가 있는 동안에 무엇이라도 해서 먹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어린 로시니를 데리고 볼로냐(Bologna)로 가서 여러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며 생활했다. 로시니의 어머니 안나는 볼로냐의 극장에서 노래를 잘 불러서 인기가 많았었다. 얼마후 감옥에서 나온 주세페 로시니는 고향 페사로를 떠나 볼로냐로 와서 가족들과 함께 지냈다. 볼로냐에는 로시니의 할머니가 살고 있었다. 어린 로시니는 아직 아버지가 석방되기 전에 어머니가 공연을 하게 되고 더러는 다른 도시로 연주여행을 가게 되면 할머니에게 가서 지낼수 밖에 없었다. 할머니는 로시니에게 집안 일이라도 시키려고 했지만 로시니는 어느 틈엔가 집을 빠져 나가 밖으로만 돌아다녀서 할머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든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북부 이탈리아의 고도 볼로냐. 로시니가 소년시절을 보낸 곳.

 

볼로냐에 온 로시니의 아버지는 볼로냐에 있는 어떤 극장의 오케스트라에서 혼을 불며 지냈다. 어떤 때는 로시니의 어머니가 오페라에 출연하고 로시니의 아버지는 무대 아래의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혼을 부는 날도 많았다. 그렇게 어머니, 아버지가 돈을 벌기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지내야 할 때에 로시니는 어린 나이에 어떤 돼지 백정의 도살장에 가서 시간제 알바를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페사로에 있을 때에 도살장 감독관이었기 때문에 볼로냐의 도살장 사람들과도 교분이 있어서 어린 로시니를 도살장에 맡겨서 일을 배우도록 했던 것이다. 그런 중에도 로시니는 음악교육을 받았다. 주로 하프시코드를 배웠다. 로시니의 하프시코드 선생님은 노바라에서 온 주세페 프리네티라는 사람이었는데 이 분은 하프시코드를 열 손가락으로 치지 않고 다만 두 손가락만을 사용해서 쳤다. 어린 로시니는 하프시코드라는 것은 원래 두 손가락만 가지고 치는 줄로 알았었다고 한다. 프리네티 선생은 부업으로 맥주 장사를 했다. 그러다보니 심심하면 맥주를 마셔댔고 그러다보니 맥주에 취해서 잠이 많았는데 심지어는 서서도 잠이 들어서 어린 로시니를 놀라게 한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아니, 뭐 이런 얘기까지 기록으로 남기냐고 말할테지만 그래도 이런저런 것이 추후에 모두 로시니의 음악활동에 영향을 준 것이기에 적어 두는 것이다.

 

로시니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어린 로시니가 맥주만 마시고 잠만 자는 프리네티로부터는 아무것도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음악공부는 접어 두고 볼로냐의 대장장이의 도제로 들어가서 기술을 익히도록 했다. 만일 그때 로시니가 계속 대장장이의 일에 취미를 붙여서 열심히 일을 해서 대장장이가 되었다면 그럭저럭 밥은 벌어 먹는 대장장이가 되었을지는 모르지만 세계적인 위대한 작곡가는 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이 로시니를 대장장이로 지내도록 그대로 두지 않았다. 로시니는 우연히 안젤로 테세이(Angelo Tesei)에서 마음에 맞는 음악선생을 만날수 있었다. 그 양반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좋은 사람임에는 틀림 없어서 로시니는 비로소 음악에 바짝 매달리게 되었다. 어린 로시니는 새로운 선생으로부터 악보를 보는 법, 피아노 반주를 하는 법, 노래부르는 법 등을 배웠다. 그래서 열살 때에 교회 찬양대에서 솔로 파트를 맡기도 했다. 로시니는 이미 열두살 때에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두대의 바이올린, 첼로와 더블 베이스를 위한 현악 소나타였다. 이 작품은 마치 하이든이나 모차르트가 소년 시절에 작곡에 대한 재능을 보여주어 앞날에 대성할 인물이라는 것을 예견토록 했던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로시니는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멜로디와 정확한 리듬을 구사하였으니 과연 천재는 천재였다. 로시니는 노래도 잘 불렀다. 열세살 때에 볼로냐에서 오페라에 출연한 일이 있다. 페르디난도 파에르의 '카밀라'(Camilla)라는 오페라에 출연해서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아마 로시니가 성악가로서 오페라에 출연했던 것은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을 것이다.

 

로시니는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혼을 잘 불었다. 그래서 볼로냐의 어떤 오케스트라에서 혼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케스트라 멤버로서는 너무 나이가 어려서 얼마 후에 그만 두었다. 그로부터 로시니는 작곡에 비상한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날 빈첸자 몸벨리(Vincenza Mombelli)라는 사람이 어린 로시니에게 오페라 대본을 하나 주고서 한번 작곡해 보라고 말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로시니의 첫 오페라인 '데메트리오와 폴리비오'(Demetrio e Polibio)였다. 그때 로시니는 13세였던가 또는 14세였으니 주위 사람들은 그저 놀라 자빠지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이 오페라는 로시니가 스므살이 될 때까지 공연되지 않았다. '데메트리오와 폴리비오'는 공식적으로는 로시니의 여섯번째로 초연된 오페라로 기록되고 있다. 비록 맨 처음에 작곡한 오페라였지만 그후 작곡한 다른 오페라들이 먼저 초연되었기 때문이었다. 로시니는 열 네살 때에 볼로냐음악원(Conservatorio di Bologna)에 들어가서 이번에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첼로를 전공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 다음 해에는 스타니슬라오 마테이 신부가 운영하는 대위법 교실에 들어가서 그때부터 본격적인 작곡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로시니의 작곡기법은 당연히 마테이 신부로부터 영향을 받았지만 실상 엄격한 규칙에 의한 작곡보다는 자유스러운 작곡기법을 더 선호하였고 그러한 자유기법은 아마도 하이든이나 모차르트의 작품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짐작되고 있다. 로시니는 특히 모차르트를 매우 존경하였다. 그래서인지 로시니는 볼로냐에서 '작은 독일사람'(Il Tedeschino)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작은 모차르트라는 의미였다. 하기야 로시니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에 태어났으니 미신을 믿는 사람이라면 모차르트가 사망한지 1년 후에 이탈리아에서 환생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사람은 성공하려면 자기를 후원해주는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 로시니는 20세가 되기도 전에 카발리 후작이라는 귀족을 알게 되어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받았다. 로시니는 카발리 후작의 주선으로 18세 때에 베니스에서 자작 오페라를 처음 선보였다. '결혼 계약서'(La cambiale di matrimonio)라는 코믹 오페라였다. 대성공이었다. 로시니의 이름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보다 2년 앞서서 로시니는 볼로냐 음악원에서 우수 작곡상을 받았다. 칸타타 '오르페오의 죽음에 대한 아르모니아의 눈물'(Il pianto d'Armonia sulla morte d'Orfeo)이라는 작품이었다. 그후 로시니는 1810년부터 1813년에 이르는 동안 볼로냐, 로마, 베니스, 밀라노에서 오페라들을 발표하여서 성공을 거두었다. 모두들 '아니, 로시니라는 청년이 도대체 누구야? 참 아름다운 음악이네'라면서 감탄했다. 이 기간에 발표한 오페라는 '시금석'(La pietra del paragone), '시뇨르 브루스키노'(Il signor Bruschino) 등이었다. 로시니의 오페라들은 서곡(오버추어)이 찬란하도록 독특하다는 얘기를 들었다. 사실이 그러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도둑까치', '윌리엄 텔' 등의 서곡을 들어보면 금방 알수 있다. 그건 그렇고 로시니가 21세에 불과한 1813년에 발표한 '탄크레디'(Tancredi)와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L'italiana in Algeri)은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모두들 '어떻게 저런 젊은이가 저런 대단한 음악을 만들어 낼수 있단 말인가?'라면서 감탄했다. 이제 로시니의 이름은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전유럽에 서서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탄크레디가 조국 시라큐스에 돌아와서 비잔틴제국의 침략을 물리치고 기뻐하고 있다.

 

'탄크레디'의 대본은 볼테르 원작의 비극인 '탄크레드'(Tancrède)를 바탕으로 게타노 로시(Gaetano Rossi)라는 사람이 쓴 것이다. '탄크레디'의 음악은 페르디난도 파에르와 조반니 파이시엘로의 흔적을 찾아 볼수 있을 정도로 이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의 음악을 참고로 했던지, 또는 어떤 극본을 대본으로 삼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페라 '탄크레디'에 나오는 탄크레디의 아리아 '이처럼 설레이는 마음...나의 조국이여 다시 돌아왔도다'(Di tanti palpiti...Mi rivedrai, ti rivedro)의 멜로디는 너무나 유명해서 사람들은 거리에서나 집회에서나 이 노래를 부르며 외세의 압력을 받고 있는 조국 이탈리아의 독립을 은연중에 표시하였다. 이로써 로시니는 21세밖에 안되는 젊은 나이에 이미 이탈리아 국민들로부터 오페라의 우상으로 인기를 끌었다. 로시니는 자기의 오페라들이 뜻밖에도 커다란 호응을 받으며 인기를 끌자 계속 작곡에 전념하여 몇년동안 베니스와 밀라노를 위해 여러 작품들을 완성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탄크레디'만큼 갈채를 받지는 못했다. 약간 의기소침해진 로시니는 1815년에 제2의 고향인 볼로냐로 돌아왔다. 그러자 나폴리에서 활동하고 있는 임프레사리오인 도메니코 바르바이아(Domenico Barbaia)가 로시니를 찾아와서 계약을 맺자고 졸랐다. 그렇게하여 로시니는 나폴리의 테아트로 산 카를로(Teatro San Carlo)와 테아트로 델 폰도(Teatro del Fondo)의 음악감독을 맡게 되었다. 로시니는 매년 한편씩의 오페라를 완성하며 기염을 토했다. 로시니가 극장측으로부터 받은 급료는 매달 200 듀카 정도였다. 하지만 극장에 마련된 도박판으로부터의 수입도 챙길수 있었다. 당시에는 극장에서 오페라를 공연할 때에 휴게시간 등을 이용해서 사람들이 도박을 할수 있었다. 물론 극장측은 도박판을 마련해주고 콤미션을 받아 챙겼다. 로시니는 극장의 음악감독으로서 도박판으로부터의 수익으로부터 매년 1천 듀카를 받았다. 이러한 예외수입은 당시 음악가들로서는 기대하지 못했던 특별배려였다.

 

나폴리의 유서깊은 산 카를로 극장

 

어느날 로시니는 나폴리음악원을 방문한 일이 있다. 로시니는 당시 나폴리음악원의 학생이던 사베리오 메르카단테(Saverio Mercadante)의 작품을 우연히 보고 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로시니는 음악원장인 니콜로 칭가렐리(Niccolo Zingarelli)에게 '원장님, 저 젊은 학생인 메르카단테는 우리의 시대가 끝나면 그의 시대가 시작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로시니는 메르카단테보다 고작 4살 위였지만 메르카단테를 크게 치하하고 그가 많은 업적을 남길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나폴리에서 내노라하던 고참 작곡가들, 예를 들면 칭가렐리 또는 파이시엘로는 사람들이 그러면 안되는데 젊은 로시니에 대한 인기가 날로 높아지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로시니를 깍아 내리려고 이런저런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후 로시니의 '영국 여왕 엘리사베타'(Elisabetta, regina d'Inghilterra)를 보고나서는 감탄과 함께 로시니를 시기하던 마음들을 접어 두었다. '저런 뛰어난 재능을 우리가 무슨 수로 막겠느냐?'는 생각에서였다. '영국 여왕 엘리사베타'가 초연되었을 때 타이틀 롤의 이미지는 소프라노 이사벨라 콜브란(Isabella Colbran)이 창조하였다. 나중에 이사벨라 콜브란은 로시니의 부인이 되었다.

 

 나중에 로시니의 부인이 된 소프라노 이사벨라 콜브란. 스페인 출신이다.

 

로시니의 최대 걸작인 '세빌리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는 그가 불과 24세의 청년일 때에 완성한 것이다. 1816년 2월 20일 로마의 아르젠티나극장(Teatro Argentina)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대본은 피에르 보마르셰의 극본인 '세비유의 이발사'(Le Barbier de Séville)를 원작으로 삼아서 체사레 스테르비니(Cesare Sterbini)가 만들었다. 조반니 파이시엘로가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보다 훨씬 전에 '이발사'(Barrbiere)라는 오페라를 만들어서 이탈리아 뿐만 아니라 유럽의 거의 전역에서 인기를 끈 것이 있는데 그것과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줄거리가 같지만 내용은 조금 차이가 있다.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참으로 뛰어난 음악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학자들의 주장에 따르면 로시니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불과 2-3주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나중에 로시니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12일 만에 완성했다고 밝힌바 있다. 로시니의 스피디한 작곡 실력을 말해주는 얘기다. 그런데 오늘날 불멸의 걸작으로 여겨지는 '세빌리아의 이발사'도 첫 공연에서는 실패였다. 첫 공연 때에는 제목이 '알마비바'였다. 주인공인 백작의 이름을 제목으로 사용했다. 문제는 제목이 아니라 로시니를 시기하는 파이시엘로 추종자들이 '알마비바'의 초연에 극장에 들어와서 소리지르고 휘파람을 부는 등 별별 소란을 다 떠는 바람에 결국 '알마비바'는 실패로 끝이 나고 말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두번째 공연 이후부터는 서서히 인기를 끌기 시작해서 파이시엘로의 '이발사'는 점점 잊혀지고 대신에 로시니의 오페라만이 사람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게 되었다. 그때에 로시니는 이미 제목을 '세빌리아의 이발사'로 바꾼 후였다.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822년에 로시니는 비엔나에서 위대한 베토벤 선생님을 만나는 기회를 가졌다. 당시에 로시니는 30세 였고 베토벤은 51세였다. 베토벤은 귀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고 건겅도 극도로 나쁜 상태였다. 로시니와 베토벤은 서로 필담을 나누었다. 베토벤은 '아, 로시니. 그대가 바로 그 유명한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작곡한 사람이구려. 축하하오. 이탈리아 오페라가 존속하는 한 그대의 그 오페라도 영원히 공연될 것이요. 오페라 부파 이외에 다른 작품을 쓸 생각은 하지 마시오. 다른 스타일의 오페라를 작곡한다면 그대의 성격에 맞지 않을 것이요'라고 썼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로지나(디아나 담라우), 백작(후안 디에고 플로레즈), 피가로(페터 마테이). 메트로폴리탄

 

로시니는 1817년부터 1823년까지 6년 동안 20편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이 기간동안에 로시니는 주로 비극적인 내용의 순수오페라(serious opera)를 만들었는데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 '오텔로'였다. 로시니의 '오텔로'는 그 다음에 나올 베르디의 '오텔로'를 예비해 준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그만큼 드라마틱한 면에서 뛰어나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당시의 오페라들은 아무리 비극적인 스토리라고 해도 돈내고 들어온 관중들을 생각해서 나중에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것을 하나의 패션으로 삼고 있었다. 그래서 로시니도 '오텔로'를 해피엔딩으로 만들었다. 데스데모나와 오텔로가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내용으로 방향전환을 한 것이다. 그 다음에 로시니는 '라 체네렌톨라'(신데렐라)를 만들었다. 라 체네렌톨라에는 미신적인 내용이 나온다. 호박이 마차가 되고 쥐가 마부가 되는 따위의 초자연적인 내용을 말한다. 당시 로마 교황청은 어떤 공연이던지 미신적인 요소가 있으면 안된다고 내세우고 만일 그런 작품이 있으면 공연금지하겠다고 선언했다. 로시니로서도 어쩔수 없이 '라 체네렌톨라'에서 초자연적인 내용을 삭제하고 두루뭉수리로 줄거리를 만들었다. '라 체네렌톨라'도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집트의 모세'도 어려움이 많았다.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무대에서 연출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위해서는 무대를 변경해야 했다. 로시니는 그 작업을 위한 충분한 시간을 주고 주위를 분산하기 위해 '하늘의 빛난 보좌에서'(Dal tuo stellato soglio)라는 기막히게 감동적인 노래를 만들어 넣었다.

 

'라 체네렌톨라'의 한 장면. 테너 후안 디에고 플로레스.

 

로시니는 '이집트의 모세'를 무대에 올린지 4년 후인 1822년에 이사벨라 콜브란과 결혼하였다. 그때 로시니는 30세였고 이사벨라는 23세였다. 이사벨라는 1845년에 세상을 떠났다. 로시니는 이듬해인 1846년에 프랑스의 모델인 올림프 펠리시에(Olympe Pelissier: 1797-1878)와 재혼하였다. 그건 그렇고, 로시니는 이사벨라와 결혼한 그 해에 비엔나로 가서 잠시 지냈다. 1822년 3월 22일부터 그해 7월 24일까지 약 4개월동안 비엔나에 머물렀다. 비엔나에서는 로시니의 오페라가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오페라의 제작을 돌보기 위해 갔던 것이다. 어느정도로 열광적이었는가 하면 비엔나 사람으로서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모르면 말도 되지 않았을 정도이다. 신문은 그런 로시니 열광을 '로시니 열병'(Rossini Fever)라고 표현했다. 로시니는 비엔나에서 '라 체네렌톨라'(La Cenerentola)의 제작을 감독했고 이어 '젤미라'(Zelmira)의 공연에도 관여했다. '젤미라'는 모차르트의 '티토의 자비'의 또 다른 버전이라고 할 만큼 비엔나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내용이었다. 그후 로시니는 곧바로 볼로냐로 돌아왔으나 오스트리아의 메테르니히 재상이 로시니에게 직접 사람을 보내어 비엔나에서 각국 군주들의 회의가 열릴 예정이니 제발 와서 오페라의 제작을 도와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에 다시 비엔나를 방문했다. 나폴레옹 실각 이후의 유럽의 지도를 어떻게 새로 그리느냐를 협의하는 저 유명한 '비엔나회의'는 1822년 10월 20일에 시작되었고 로시니는 비엔나에서 그의 오페라들의 공연을 지켜보았다. 이때 로시니는 프랑스의 영향력있는 인사들인 샤토브리앙과 도로테아 리벤(Dorothea Lieven)과 친교를 맺었으며 이로써 이들로부터 훗날 파리에 가서 활동하는데에 많은 도움을 받았다.

 

화가의 모델이었던 올림프 펠리시에. 로시니의 두번째 부인

 

로시니는 1823년에 런던 왕립극장(King's Theatre)의 초청으로 영국으로 건너갔다. 로시니는 영국의 조지 4세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5개월 동안 왕립극장에서 활동하면서 7천 파운드의 사례금을 받았다.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57만 파운드에 해당하며 이를 현재의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10억원이 넘는다. 로시니는 그만큼 대단한 대우를 받았다. 로시니는 이듬해인 1824년에 파리의 이탈리아극장(Theatre des Italiens)의 음악감독으로 임명되었다. 파리에서는 연봉을 현재의 우리 돈으로 환산하여 1억 2천만원을 받았다. 파리에서 로시니의 인기는 하늘 높은줄 몰랐다. 샤를르 10세는 로시니와 1년에 다섯 편의 신작 오페라를 만든다는 계약을 맺었다. 그리고 이 계약이 끝나면 평생 연금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무튼 로시니는 돈 걱정 없이 지낼수 있었다. 로시니는 파리에 있으면서 '오리 백작'(Le comte Ory), '렝스로의 여행'(Il viaggio a Reims), 그리고 저 유명한 '귀욤 텔'(Guilaume Tell: William Tell)을 작곡했다. '귀욤 텔'은 1829년에 초연되었다. 로시니는 '귀욤 텔'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오페라를 작곡하지 않고 지내겠다고 선언했다. 이때 로시니는 이미 38세였고 그때까지 38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로시니의 마지막 오페라인 '귀욤 텔'(구글리엘모 텔). 아들 예니와 함께.

 

로시니는 1829년에 볼로냐로 돌아왔다. 어머니 안나가 2년 전에 세상을 떠났는데 아버지 혼자 지내는 것이 안타까워서 볼로냐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샤를르 10세와의 계약을 위해서는 다시 파리로 가야했다. 하지만 1930년에 프랑스 7월 혁명이 일어나서 샤를르 10세가 폐위되자 파리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로시니는 새로 '파우스트'를 작곡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일단 그해 11월에 파리로 돌아갔다. 로시니는 파리에서 새로운 오페라를 작곡하지는 않고 대신 '성모애상'(스타바트 마테르)을 완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32년에 완성한 '성모애상'은 사실상 로시니의 마지막 작품이었다. 그후 로시니는 은둔자와 같은 생활을 하며 지냈다. 몇년 후인 1845년에 부인 이사벨라 콜브란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60세였다.  이듬해인 1846년에 로시니는 모델인 올림프 펠리시에와 재혼하였다. 올림프 펠리시에는 베르네의 모델로서 베르네가  올림프를 모델로 하여 그린 '유디스와 홀로페르네스'는 유명하다. 로시니는 볼로냐로 돌아가서 잠시 지내다가 이어서 플로렌스로 가서 살다가 1855년에 파리에 정착했다. 파리에서 로시니는 문화예술계의 여러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지냈다. 로시니가 유명한 미식가이면서 뛰어난 요리사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로시니는 작곡생활을 접어 두고나서 음식에 더욱 관심을 쏟았다. 로시니가 개발한 메뉴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투르네도스 로시니일 것이다. 두터은 비프 스테이크이다. 이밖에도 파리와 볼로냐의 식당에서는 '알라 로시니'(alla Rossini: 로시니 스타일로)라는 수식어가 붙은 음식들을 찾아 볼수 있다.

 

로시니가 세상을 떠난 파리 근교 파시의 빌라 보세주르(Villa Beau Séjour)

 

한편, 로시니는 파리에서 지내면서 점차 몸이 쇠약해 졌고 정신적으로도 어려움이 있었다. 로시니는 다시는 작곡을 하지 않겠다고 철석같이 선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말년에 이르자 무언가 자기를 위한 작품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가졌다. 그리하여 몇개의 작품을 썼는데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노년의 죄악'(Peches de vieillesse)이라는 작품이다. 모두 14곡으로 구성된 이 작품은 주로 솔로 피아노곡으로 되어 있고 간혹 성악과 실내악을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비록 말년의 로시니가 편안한 심정으로 작곡한 것이지만 이 작품에는 로시니의 천부적인 작곡 재능이 아름다운 멜로디와 함께 담겨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작품이 베토벤과 쇼팽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작품은 또한 로시니가 뛰어난 피아니스트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프란츠 리스트, 지기스몬트 탈버그(Sigismond Thalberg), 카미유 생 상스, 루이 디에머(Louis Diemer) 등은 로시니의 '노년의 죄악'에 나오는 피아노 곡들을 크게 찬양하였다. 로시니는 1868년 11월 13일 파시(Passy)에 있는 자택에서 폐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76세였다. 로시니는 파리의 페르 라셰스(Pere Lachaise)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그후 1887년에 이탈리아 정부의 간곡한 요청으로 파리에 있는 로시니의 유해는 플로렌스로 옮겨져 성십자가교회(Basilica di Santa Croce di Firenze)에 이장되었다.

 

로시니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피렌체(플로렌스)의 바실리카 디 산타 크로체(성십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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