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페사로의 로시니

로시니 음악원(Rossini Conservatory)

정준극 2015. 7. 20. 11:08

로시니음악원(Rossini Conservatory)

조아키노 로시니 국립음악원(Conservatorio Statale di Musica 'Gioachino Rossini')

 

페사로의 '로시니음악원'. 팔라쪼 올리비에리 마르키렐리 건물을 음악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탈리아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저명 음악가들을 기념하는 음악원이 거의 60여개나 된다. 예를 들면 토리노, 코모, 밀라노의 베르디음악원, 라 스페치아의 푸치니음악원, 알레산드리아의 비발디음악원, 볼차노의 몬테베르디음악원, 팔레르모의 벨리니음악원, 피렌체의 케루비니음악원, 그리고 페사로의 로시니음악원 등이다. 그중에서도 페사로는 해마다 여름이면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발'이 열리는 등 로시니를 기억하는 사업들이 전개되어 세계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으로 그 중심에는 로시니음악원이 있다. 페사로의 로시니음악원의 정식 명칭은 '조아키노 로시니 국립음악원'(Conservatorio Statale di Musica 'Gioachino Rossini')이다. 1869년에 설립되었으니 2015년으로서 설립 146주년을 기록하는 음악원이다. 설립은 1869년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학생들을 받아 들여서 수업을 시작한 것은 1882년이다. 그때에 들어온 학생은 67명이었지만 오늘날에는 850명이 넘는 학생들이 성악, 기악, 작곡, 음악학, 합창 지휘 뿐만 아니라 재즈 또는 전자음악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규모로 발전하였다. 로시니음악원은 또한 중고등학교 음악교사를 양성하는 과정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저명 음악인들을 초청하여 마스터 클라스를 개최하고 있기도 하다. 아무튼 로시니음악원은 페사로라고 하는 비교적 작은 도시에 있지만 오늘날 세계적인 음악학교로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페사로 중심가의 분수

 

로시니음악원이 처음 문을 열었을 때에는 명칭이 '로시니음악학교'(Liceo musicale Rossini)였다. 리체오라는 것은 고등학교, 즉 김나지움 보다 수준이 높은 학교를 말한다. 로시니음악원은 18세기에 지은 팔라쪼 올리비에리 마키렐리(Palazzo Olivieri-Machirelli)의 건물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당대의 거장 지안안드레아 라짜리니(Gianandrea Lazzarini)가 설계한 건물이다. 팔라쪼 올리비에리 마키렐리는 페사로의 중심지역인 피아짜 올리베리(Piazza Olivieri)에 있다. 페사로음악원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저명 작곡가들이 원장으로 재직하여 학교 발전을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면, 카를로 페드로티(Carlo Pedrotti),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 리카르도 찬도나이(Riccardo Zandonai), 프랑코 알파노(Franco Alfano) 등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작곡가들이다. 마스카니의 오페라 '자네토'(Zanetto)는 1896년에 이 음악원애서 세계 초연을 가졌다.

 

마스카니의 '자네토'. 1896년 페사로의 로시니음악원에서 초연되었다. (메조소프라노 마리암 사르키시안).

 

로시니는 나이가 40도 되지 않아서 오페라 작곡으로 많은 재산을 모을수 있었다. 로시니는 이제 더 이상 시간에 쪼들리고 극장측의 성화에 속상해 할 필요가 없이 있는 재산을 가지고 유유히 먹고 싶은 것이나 먹으면서 지내기로 결심했다. 그때가 1829년으로서 그의 나이가 38세 때였다. 그렇게 한참을 지내다가 나이가 들고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결국 사람이 죽으면 그만인데 재산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로시니는 얼마 안 있으면 세상을 떠난 것으로 생각해서 미리 재산 정리를 시작했다. 부인인 올림프 펠리시에를 위해서 얼마를 남겨두었고 친척들을 위해서도 얼마를 남겨 두었다. 그런 나머지 재산은 모두 페사로 시당국에 기부하는 것으로 유언장을 만들었다. 그렇게하여 로시니 재산의 대부분은 페사로시가 맡아서 운영하게 되었다. 로시니는 유언장에서 자기의 재산으로 음악학교를 세워서 차세대 음악가들을 길러내는데 사용해 달라고 당부했다. 로시니는 1868년에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페사로시는 이듬해인 1869년에 비로소 음악학교 설립을 위한 위원회를 조직하고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것도 말처럼 쉽게 진척되지는 않았다. 학교 설립이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로시니의 부인인 올림프 펠리시에가 세상을 떠난 1878년 이후부터였다. 로시니가 세상을 떠난지 9년 후였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882년에 비로소 로시니가 소망한대로 페사로에 음악학교가 문을 열게 되었다. '로시니 음악학교'(Liceo musicale Rossini)라는 간판이 내걸리게 되었다. 장소는 산필리포 네리(San Filippo Neri)교회와 수도원으로 사용했던 건물이었다. 학생을 모집한 결과 67명이 등록을 했다. 그중에서 25명은 합창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로시니음악원은 로시니의 유지에 따라 오페라와 합창을 위주로 하고 작곡도 강조하였다. 초대 원장은 작곡가인 카를로 페드로티(Carlo Pedrotti)가 맡았다. 페드로티는 17편의 오페라를 작곡했고 페사로에 오기 전에 토리노 오페라극장인 왕립극장(Teatro Regio)의 극장장을 지냈다. 페드로티는 울륭한 성악 교사이기도 했다. 그가 가르친 제자 중에는 테너 프란체스코 타마뇨(Francesco Tamagno)와 알레산드로 본치(Alessandro Bonci) 등이 있다. 페드로티가 로시니음악원장으로 있을 때에 건물을 현재의 팔라쪼 올리비에리 마키렐리로 옮겼다. 이때 연주회장으로 사용할 강당을 새로 만들었다. 이 연주회장에는 페드로티 홀(Sala Pedrotti)라는 이름을 붙였다. 페드로티 홀은 1892년 2월 29일, 로시니 탄생 1백주년을 기념하여 개관되었다. 기념 연주회는 페드로티 자신이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카를로 페드로티는 1893년에 은퇴하였다. 그후 2년 동안은 원장이 없이 지내야 했다. 그러다가 오페라 작곡가로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피에트로 마스카니가 원장으로 부임했다. 로시니음악원은 로시니가 많은 재산을 기증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없었다. 원장으로 부임한 마스카니의 연봉은 1만 2천 리라였다. 이것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이름나 있던 파르마음악원의 원장이 받는 보수보다 두배가 많은 것이었다. 게다가 마스카니는 음악원이 들어 있는 건물에서 방을 두어개자 차지하고 생활하였다. 왕족과 같은 생활이었다.

 

로시니음악원 내에 있는 로시니 사당(템피에토 로시니아노)의 천정 프레스코

 

로시니음악원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없고 교수진에 대한 보수도 넉넉했지만 그렇다고 음악원으로서 높은 명예는 차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밀라노, 로마, 나폴리, 심지어는 파르마에 있는 전통있는 음악원의 명성에 가려서였다. 로시니음악원이 문을 연지 몇해가 지났지만 이렇다할 졸업생을 내지 못하였다. 학생수도 최초의 67명에서 73명으로 늘어났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페사로가 바닷가의 작은 도시였고 문화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저런 사유로 인해서 전국적인 명성을 얻지 못했던 것 같았다. 마스카니는 무언가 변하지 않고는 유명해질수 없다고 생각했다. 마스카니는 우선 교육방식에 있어서 종래의 암기위주의 방식을 지향하고 학생들 스스로가 개발해 나가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학생들과 교수들과 합동으로 오케스트라를 구성하였다. 로시니음악원의 오케스트라는 이탈리아에서 음악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생긴 오케스트라였다. 마스카니 자신이 음악원오케스트라를 지휘하였다. 마스카니는 이탈리아 음악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자체 음악전문지를 발간하였다. La cronaca musicale 라는 타이틀의 저널이었다. 그리하여 마스카니가 원장으로 취임한지 4년만에 학생수가 배가 되었다.

 

로시니음악원 학생들의 음악회

 

그러나 1900년에 들어서서 마스카니와 음악원 이사회와의 사이가 좋지 않게 되었다. 이사회는 마스카니가 음악원 일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출장만 다닌다면서 불만을 표현했다. 하기야 마스카니는 그의 오페라 Le maschere의 공연을 위해 이곳 저곳을 돌아다녀야 했기 때문에 페사로에 묶여 있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스카니는 페사로를 시골로 간주하여서 이사회 사람들도 은근히 얕잡아 보는 경향이 있었다. 음악원 이사들은 그것이 못마땅했다. 1902년에 이사회는 음악원의 재정이 크게 적자인 것을 알아냈다. 이사회는 마스카니가 학교 예산을 멋대로 집행한다고 생각했다. 이사회는 음악원장의 예산 집행 권한을 박탈하고 대신에 이사회가 직접 관리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이번에는 학생들이 들고 일어났다. 학생들은 마스카니 편이었다. 이사회는 학생들이 데모를 하자 1903년의 남은 기간동안 학교를 폐쇄하고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 보냈다. 1903년 1월이 되지 이사회는 마스카니를 해임하였다. 그로부터 2년 동안 음악원은 원장 없이 지내야 했다. 이사장은 발표문을 통해서 다음번 원장은 오페라 작곡가가 아니어야 한다고 천명했다. 오페라 작곡가는 오페라 공연을 위해 바쁘게 돌아다녀야 하기 때문에 음악원장으로서 적격이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니탈리아 정부 발행의 로시니 서거 1백주년 기념우표

 

1905년에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아밀카레 차넬리(Amilcare Zanelli)가 새로운 음악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차넬리는 그로부터 무려 35년간 로시니음악원장을 지내면서 오로지 음악원 발전만을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차넬리가 은퇴하자 다음 원장으로서는 작곡가인 리카르도 찬도나이(Riccardo Zandonai)가 임명되었다. 찬도나이는 오페라 '리미니의 프란체스카'로 유명한 작곡가였다. 찬도나이는 로시니음악원 출신으로 마스카니의 제자였다. 찬도나이는 나중에 페사로의 명예시민이 되었다. 찬도나이의 시기에 로시니음악원은 페사로 시당국의 관할로부터 이탈리아 정부의 문교부 산하의 기관이 되었다. 찬도나이의 뒤를 이어서는 역시 오페라 작곡가인 프랑코 알파노(Franco Alfano)가 원장이 되었다. 알파노는 1947년부터 1950년까지 3년 동안 원장으로 있었다. 1999년에 로시니음악원은 이탈리아 정부로부터 '고등음악교육기관'(Instituto Superore di Studi Musicali)으로 지정되었다. 로시니음악원은 일반 대학교와 같은 수준의 교육기관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로시니음악원의 졸업생들은 대학교 졸업생과 같은 학위를 받게 되었다. 로시니음악원은 20세기에 들어와서 자체적으로 오페라를 제작하여 공연하므로서 일반 오페라극장에 버금가는 수준을 자랑하게 되었다. 그동안 로시니음악원이 제작한 로시니의 오페라로서는 '세빌리아의 이발사'(1916), '도둑까치'(1941), '오리 백작'(1942) 등이 있고 이밖에도 '오르페오와 유리디체'(글룩), '수녀 안젤리카'(푸치니), '자니 스키키'(푸치니), '디도와 이니아스'(헨리 퍼셀) 등이 있다.

 

로시니음악원의 연습실

 

피아니스트 루도비코 브라만티가 2014년에 새로운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전에는 역시 피아니스트인 마우리치오 타르세티(Maurizio Tarsetti)가 2008년부터 원장으로 있었다. 현재 학생수는 850명이 넘고 있다. 그 중에서 820여명이 이탈리아 학생들이며 나머지는 외국 학생들이다. 로시니음악원은 세개의 특별 연구소를 가지고 있다. 20세기 및 현대음악 연구소, 초기음악 연구소, 전자 및 실험음악 연구소(LEMS)이다. 전자 및 실험음악 연구소는 1971년에 작곡가인 알도 클레멘티가 주도하여 설치하였다. 로시니음악원에는 몇 개의 연주단체가 있다. 전통적으로 학생과 교수가 함께 활동하는 심포니 오케스트라, 목관 오케스트라, 재즈 오케스트라, 색스폰 앙상블, 그레고리안 성가단 등이다. 로시니음악원의 앙상블들은 페사로와 주변 도시에서의 특별행사에 참가하여 연주활동을 벌이고 있다. 예를 들면 산타 체칠리아 축일, 공화국 경축일, 부활절, 성탄절 등이다. 로시니음악원은 국가적 음악경연대회인 하프시코드 경연대회와 바순 경연대회를 운영하고 있다. 로시니음악원은 도서실과 희귀악기 전시실로 유명하다. 도서실에는 4만 5천권 이상의 중요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다. 아마 전 이탈리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음악도서실일 것이다. 1500년대의 음악 자료들도 보관되어 있다. Tempietto Rossiano(로시니에게 헌정된 작은 사당)의 천정은 폼페이의 장면으로 장식되어 있어서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도서실에는 상당수 로시니의 친필 악보들이 보관되어 있다. 예를 들면 '영국 여왕 엘리사베타', '오텔로', '아르미다', '호수의 여인', '마오메토 2세', '아디나' 등이다. 음악원 건물 내의 내정에는 당대의 조각가 카를로 마로케티(Carlo Marochetti)가 제작한 로시니의 대형 청동 기념상이 설치되어 있다.

 

페사로의 로시니음악원 구내에 있는 로시니 기념상

 

로시니음악원의 동창생 몇 명만 소개코자 한다. 테너 프랑코 코렐리(Franco Corelli), 테너 마리오 델 모나코(Mario del Monaco), 소프라노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 피아니스트 주세페 알바네세(Giuseppe Albanese) 등등. 음악원장을 지냈던 유명 인사들: 피에트로 마스카니(1895-1902), 아밀카레 차넬리(1905-1940), 리카르도 찬도나이(1940-1944), 프랑코 알파노(1947-1950)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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