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페사로의 로시니

로시니 더 알기

정준극 2020. 4. 28. 10:07

로시니 더 알기


우리가 로시니에 대하여 잘 알고 있는 사항들을 다시 정리해 보았다. 기왕 정리하는 김에 우리가 로시니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지낸 사항들도 곁들인다.  모두 열가지로 정리했다.


조아키노 로시니


로시니만큼 오페라로 성공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오페라로서 막대한 성공을 거두어 부유하게 되었다. 파리의 근교인 파시에 넓은 정원이 딸린 커다란 빌라를 구입해서 안락하게 지냈고 로마에도 빌라를 마련했다. 그리고 물론 고향인 페사로에도 집이 있다. 비슷한 시기의 다른 위대한 작곡가들, 예를 들면 모차르트 또는 베토벤의 경우에는 잘 아는 대로 작품으로 먹고 살기 위해 무던히도 고생하였다. 모차르트는 생애를 마감하면서 빚까지 지고 있었고 베토벤 역시 이렇다할 재산을 남기지 못했다. 하지만 로시니는 먹고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고 상속할 재산도 넉넉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오페라 작곡에서 은퇴하고 말년에는 오페라 작곡에 따른 수입으로 아주 풍족한 생활을 한 작곡가는 흔치 않은데 로시니가 바로 그런 경우이다. 그렇다고 로시니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 역시 어려운 생활을 했다. 로시니의 아버지 주세페 로시니는 마을 악단에서 트럼펫과 혼을 부는 사람이었다. 어머니 안나는 원래 재봉으로 옷만드는 사람이었으나 음악적인 재능이 있어서 나중에는 간단한 오페라에서 노래도 부르는 사람이었다. 그나저나 아버지는 사람이 멋있고 좋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 성미가 급하고 무기력해서 식구들을 돌보는 일에는 무관심했다. 그래서 어머니가 옷가게 일을 하면서 살림을 책임져야 했다. 다행히 로시니의 외할아버지가 빵가게를 하면서 돈을 벌어 놓은 것이 있어서 외할머니를 통해서 도움을 받기도 했다. 외할머니 슈텐달은 로시니가 세상을 떠난 후인 1824년에 '로시니 전기'를 출판하기까지 했다.


페사로의 로시니 극장. 매년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발이 열린다.


로시니는 1792년 2월 29일에 태어났다. 마침 그해가 윤년이어서 2월이 29일까지였다. 그러다보니 4년마다 한번의 생일을 맞아야 했다. 그러므로 로시니는 76세에 세상을 떠났지만 생전에 19번의 생일만 축하했을 뿐이다.


페사로의 로니시 기념상


로시니의 오페라들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리스트에 들어가는 것들이다. 푸치니, 베르디, 모차르트의 오페라가 로시니보다 조금 더 공연되고 있을 뿐이다. 가장 많이 공연되고 있는 로시니의 오페라는 '세빌리아의 이발사'이다. 그런데 잘 아는 대로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후편인 '피가로의 결혼'이 '세빌리아의 이발사'보다 무려 30년 먼저 발표되었다.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면 세기의 걸작들인 두 오페라는 모두 작곡자들이 30세도 되지 않은 젊은 시절에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은 그가 29세 때에 완성했고 30세 때에 비엔나의 부르크테아터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그가 23세 때에 완성했다. 그것도 단 3주만에 완성했다. 로시니는 3주가 아니라 12일에 완성했다고 말했다. 아무튼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이듬해에 로마의 아르젠티나극장에서 초연되었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걸작 중의 걸작이 되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로지나 역의 조이스 디도나토. 2009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유별나게도 초연에서 야유를 받았지만 결국은 로시니의 대표작이 되었다. 예를 들어 2019년만 해도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세계 각자에서 534번의 공연이 있었다. 푸치니의 '라 보엠'과 '나비부인' 그리고 베르디의 '라 트라비아타'에 이서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한 장면. 음악교사로 변장한 알마비바 백작이 로지나의 후견인인 독토르 바로틀로와 티격태격하고 있다.


로시니는 작곡 기계였다. 1812년 첫 오페라인 '데미트리오와 폴리비오'(Demetrio e Polibio)를 완성한 이래 1822년 '첼미라'(Zelmira)를 발표할 때까지 고작 10년 동안 30편의 오페라를 작곡했으니 과연 대단했다. 로시니가 전생애에 걸쳐 만든 오페라의 대부분은 바로 이 10년에 집중되어 있었다. 천재라는 말을 들을만했다. 그의 마지막 오페라는 그가 37세인 1829년의 '귀욤 텔'(Guillaume Tell)이었다. 그리고 나서 과감하게 오페라 작곡의 펜을 내려 놓았다.


'귀욤 텔'의 한 장면. 귀욤 텔이 아들의 머리 위에 사과를 올려 놓고 활을 쏘려고 하고 있다.


로시니는 미식가 겸 재능있는 요리사였다. 그의 이름이 붙은 음식이 서너가지나 있어서 오늘날 세계의 유명 식당에서 서브되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투르네도스 로시니(Tournedos Rossini)라는 것이다. 둥글게 썰어 놓은 쇠고기(이를 Eye fillet라고 부른다)에 푸아 그라(Foie gras)로 드레싱하고 여기에 트뤼플(Truffle)로 간을 맞추며 마데이라(Madeira)로 마무리하는 요리이다. 푸아 그라는 거위 간으로 만든 것이며 트뤼플은 송로버섯의 일종으로 신선한 맛을 나게 하는 것이다. 마데이라는 포르투갈령 마데이라 섬에서 나는 백포도주를 말한다.


두터운 스테이크인 '투르네도스 로시니'


로시니의 첫번째 부인은 유명한 소프라노 이사벨라 콜브란(Isabella Colbran)이었다. 로시니는 오페라를 작곡할 때에 이사벨라가 소프라노 파트를 맡을 것으로 짐작하여서 특별히 여러 아리아를 만들었다. 그런가하면 이사벨라를 프리마 돈나로 예정하여 만든 오페라들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세미라미데'(Semiramide)이다. 


이사벨라 콜브란과 로시니


로시니는 그랜드 오페라인 '귀욤 텔'(Guillaume Tell)을 마지막으로 37세에 현역에서 은퇴하였다. 그래서 혹시 로시니가 모은 작곡을 중단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오페라 작곡만을 그만 둔 것이며 다른 작품들은 시간 나는대로 썼다. 가곡이나 종교음악, 또는 피아노 소품등을 주로 작곡하면서 소일했다. 종교음악으로서 그의 걸작 중의 하나인 '성모애상'(스타마트 마테르)는 후반의 한가한 시기에 완성한 것이다.


로시니의 파시 빌라


'성모애상'(Stabat Mater)은 로시니의 마지막 대작이다. 스페인의 어느 유명한 성직자의 부탁으로 작곡한 것이다. 1831년에 작곡을 시작하여 1833년에 마드리드의 산 펠리페 엘 레알(San Felippe el Real) 교회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그러나 로시니는 작품이 미진하다고 생각하여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지만 1841년까지도 완성하지 못했다. 아무튼 로시니의 '성모애상'은 수많은 종교음악 중에서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그의 명성을 불멸의 것으로 만들어 준것은 '성모애상'과 같은 종교음악 때문이 아니라 '세빌리아의 이발사', '라 체네렌톨라',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 '세미라미데' 등 오페라로 인한 것이다.   


파리 페레 라셰스에서의 로시니 장례식


로시니는 1868년 11월 13일에 파리 교외의 파씨에 있는 그의 빌라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하여 저 유명한 파리의 페레 라셰스 공동묘지에 장엄하게 안장되었다. 그러나 파리의 묘지는 비어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유해는 약 20년 후인 1887년에 그의 두번째 부인인 올림프 펠리시에(Olympe Pelissier)가 이탈리아 플로렌스의 산타 크로체(Santa Croce) 성당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산타 크로체(성십자가) 교회. 로시니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