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페사로의 로시니

로시니의 유산

정준극 2015. 7. 18. 23:35

로시니의 유산

 

페사로의 로시니음악원 정원에 있는 로시니 기념상

 

로시니는 작곡가로서 돈을 상당히 벌었다. 1968년에 로시니 자서전을 펴낸 허버트 봐인슈토크에 의하면 로시니가 1868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그가 남긴 재산은 약 2백 50만 프랑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는 당시 미화로 1백 40만 달러에 해당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 다른 어떤 자료에 따르면 로시니는 세상을 떠난 시기에 그가 가지고 있던 재산으로부터 1년에 15만 프랑의 수입을 올렸다고 한다. 아무튼 대단하다. 모차르트도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고 베토벤도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났는데 로시니는 무슨 팔자가 그렇게도 좋은지 유명 여인들과 두번이나 결혼을 했고(첫번째 부인은 유명 소프라노, 두번째 부인은 파리의 모델) 재산도 많이 남겼다. 로시니는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에 뜻한바 있어서 유언으로 자기의 재산 중 일부를 두번째 부인인 올림프 펠리시어에게 주어서 먹고 살도록 했고 또 직계 자녀는 없지만 친척들이 있어서 은근히 손을 벌리는 것 같아서 그들에게도 아예 조금씩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나머지 재산은 몽땅 페사로 시당국에 헌납하였다. 페사로 시당국은 로시니로부터 기부금을 받아서 리체우 무지칼레(Liceu Musicale), 즉 음악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는 1940년에 국가기관이 되었고 명칭도 Conservatorio Statale di Musica 'Gioachino Rossini'(국립 조아키노 로시니 음악원)이라고 변경되었다. 극립조아키노로시니음악원은 '로시니 재단'(Fondazione G. Rossini)이 운영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로시니 재단'은 로시니가 페사로에 기증한 기금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이 재단은 또한 매년 개최되는 '로시니 오페라 페스티발'의 주요 후원자이다.

 

페사로의 로시니음악원

 

이렇듯 로시니는 고향 페사로를 위해 많은 재산을 헌납하였지만 제2의 고향인 파리를 위해서도 무언가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로시니상'(Prix Rossini)을 만들어서 주도록 했다. '로시니상'은 프랑스의 젊고 유능한 작곡가와 대본가에게만 주도록 되어 있다. '로시니상'이 처음 주어진 것은 로시니가 세상을 떠난지 10년 후인 1878년으로서 그때 마침 로시니의 두번째 부인인 올림프 펠리시어가 세상을 떠났기에 이런저런 일들을 기념하기 위해 '로시니상'을 주기 시작했다. '로시니상'은 프랑스예술원(Academie des Beaux-Arts)이 주관토록 했다. '로시니상'을 받은 사람의 작품들은 1885년부터 프랑스 콘서트협회(Societe des Concerts)와 프랑스연구원(Institut de France)이 공동으로 주관하여 연주회를 가지도록 했다. 그러나 이 연주회는 1911년에 여러 사정으로 중단되었다. 로시니는 로시니상의 수상자에 대하여 두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작곡가들은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사람을 우선 수상자로 삼았다. 로시니는 '지금은 그들이 만들어 내는 멜로디가 별로 관심을 끌지 못할 것이지만 언젠가는 나중에 중요한 멜로디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본가와 관련해서는 그들의 작품 내용이 무엇보다도 도덕적이어야 했다. 로시니는 오페라의 스토리들이 자꾸 비도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못내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대본가들로서 도덕적이고 교육적인 스토리를 쓰는 사람을 우선 수상자 후보로 삼았다.

 

피렌치(플로렌스)의 바실리카 디 산타 크로체(성십자교회)에 있는 로시니의 묘지

 

로시니의 묘지는 두 군데에 있다. 하나는 파리의 페르 라셰이스 공동묘지에 있고 또 하나는 플로렌스의 성십자교회에 있다. 하지만 파리의 묘지는 겉모양만 있고 실제로 유해는 없다. 묘지가 두 군데에 있는 음악가는 더러 있다. 모차르트의 경우에도 비엔나의 장크트 마르크스 공동묘지에 아직도 묘지가 있고 비엔나의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도 묘지가 있다. 그러나 잘 아는대로 두 군데 모두 모차르트의 유해는 없다. 베르디는 로시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여러 작곡가들에게 연락을 해서 공동으로 진혼곡을 만들어서 추도모임 때에 연주하자고 제안했다. 12명의 작곡가들이 베르디의 제안에 찬동하였다. 그리하여 '로시니 진혼곡'이 완성되었다. 지휘는 당대의 지휘자인 안젤로 마리아니가 맡기로 했다. 로시니 서거 1주기를 맞이해서 연주키로 했다. 그러나 예정되어 있던 초연은 무슨 연유인지 모르지만 바로 직전에 취소되고 말았다. 베르디는 '로시니 진혼곡'을 위해 작곡하였던 '주여 나를 자유롭게 하소서'(Libera me, Domine)를 1872년에 자기의 '만초니 진혼곡'에 다시 사용하였다. 기왕에 완성되어 있던 '로시니 진혼곡'은 1989년에 헬무트 릴링(Helmuth Rilling)의 지휘로 음반으로 취입되어 세계 초연을 기록하였다.

 

로시니아나(Rossiniana)라는 말은 로시니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을 말한다. 이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로시니보다 훨씬 먼저 세상을 떠난(1829) 마우로 줄리아니(Mauro Giuliani)였다. 줄리아니는 6세트의 변주곡을 작곡했는데 로시니아나라는 말은 각 세트의 음악을 부르는 말이었다. 각 세트의 음악을 집합적으로는 로시니아네(Rossiniane)라고 부른다. 아무튼 작곡가의 이름 뒤에 ana 라는 접미어를 붙여서 그 작곡가의 주제에 의한 변주곡이라는 것을 표현한 것은 줄리아니의 로시니아나가 처음이다. 1925년에 오토리노 레스피기는 로시니의 Peches de vieillesse 에서 네 곡을 오케스트라 곡으로 만들었다. 이것도 역시 로시니아나라고 부른다. 로시니라고 하면 표절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저 작품에 있는 음악을 가져와서 이 작품에 쓰는 것이다. 가져와서 그대로 쓰는 경우도 있고 조금 변형해서 쓰는 경우도 있다. 다른 사람의 작품에서 가져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런 경우는 거의 없고 자기의 다른 작품에서 음악을 가져와서 짜집기처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어찌 되었던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모두 표절이지만 당시에는 그것도 하나의 패션이어서 아무런 탓도 듣지 않았다. 예를 들어서 '세빌리아의 이발사'에는 Cessa di piu resistere 라는 백작의 아리아가 있다. 오늘날에는 어쩐 일인지 이 아리아를 삭제하고 공연하는 경우가 많지만 당시에는 있었다. 이 아리아는 로시니가 자기의 칸타타 Le Nozze di Teti e di Peleo에서 사용했던 것을 가져와서 가사만 바꾼 것이다. 로시니는 칸타타의 멜로디를 '라 체네렌톨라'에도 사용했다. 안젤리나의 론도를 위한 카발레타로서 음표 하나 고치지 않고 그대로 사용했다. 로시니라고 하면 서곡으로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네 편의 오페라의 서곡이 유명하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결혼계약서', '탄크레디', '라 체네렌톨라'이다. 이들 서곡에 나오는 음악들은 서로 이곳저곳에서 가져와서 붙인 경우가 많다.

 

로시니의 서곡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스타일에 있어서 마치 찻주전자에 물을 끓이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조용히 시작하다가 얼마 지나면 주전자의 뚜껑이 흔들릴 정도로 팔팔 끓는다. 말하자면 음악용어로서 크레센도이다. 그래서 로시니를 '시뇨르 크레센도'(Signor Crescendo)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았다. 로시니의 수많은 오페라 중에서 그의 생전에 인기를 끌었던 것은 너댓 편에 불과하고 다른 오페라들은 그저 설합 속에 들어가서 죽은 듯이 있었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에 들어와서부터 로시니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들이 하나 둘씩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오리 백작'도 사랑을 받았고 '호수의 여인'도 사랑을 받았다. 이같은 현상을 '로시니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로시니 자신은 생전에 그의 여러 오페라 중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 하나만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공연될 것으로 예견했다. 이어서 '구글리엘모 텔'의 2막, '오텔로'의 3막도 아름답기 때문에 계속 사랑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파리의 페르 라셰이스 공동묘지에 있는 로시니의 관을 이탈리아로 이장하기 위해 꺼내어 확인하고 있는 모습의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