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바·디보의 세계/세계의 디바와 디보

20세기 톱 10 소프라노 디바의 유별난 행태

정준극 2015. 8. 1. 17:08

20세기 톱 10 소프라노 디바들의 유별난 행태

천상의 음성을 가졌지만 너무나 세속적인 에고의 주인공들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의 모임인 영국의 신피니 뮤직(Sinfini Music) 선정

 

클래식 음악 팬들이 운영하는 신피니 뮤직은 디바라고 해서 모두 똑같은 디바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천상의 음성을 가졌지만 유명해지자 너무나 인간적인(세속적인) 에고로 변한 디바들의 면모를 참고 삼아서 제시했다. 디바의 요건 중의 하나는 자기 자신만을 아는 에고, 남을 경멸하는 일, 기분내키는 대로의 행동, 절제하지 못하는 감정의 폭발, 교양이 없는 태도, 쓸데 없는 고집인지도 모른다. 무릇 오페라를 하는 사람들은 귀감으로 여겨야 할 일이다. 아래에 열거하는 디바들은 우리가 평소에 모두 존경하고 경탄하는 대가들이다. 그런데 그런 디바들이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행동들을 하여 약간의 실망을 주었다. 디바라고 해서 마음까지도 디바는 아닌듯 싶다. 하기야 그리스와 로마 신화에 나오는 디바(여신)들도 질투하고 시기하고 욕심내고 증오한다. 디바라고 해서 모두 완벽한 선인들만은 아니다.

 

10위. 캐슬린 배틀(Kathleen Battle: 1948-)

캐슬린 배틀은 데뷔 당시에 누구에게나 상냥하고 친절하며 온순했다. 더구나 노래를 예쁘게 부르는 것만큼 외모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이렇듯 매력적인 캐슬린 배틀인데 점점 유명해지자 성격이 점점 이상해졌다. 마치 버릇 없는 못된 디바들의 행태를 앞장서서 대변하는 듯했다. 배틀은 미국 내에서 다른 도시로 순회공연을 가게 되거나 또는 해외 출장을 가게 되면 오페라단의 직원들이 모두 함께 숙박하는 호텔을 싫어하고 혼자서 다른 호텔에 묵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배틀은 공동 승합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고급 전용차를 요구한다. 그리고 자기의 매니저를 마치 하인 부리듯이 한다. 예를 들어서 함께 차를 타고 가면 앞 자리에 있는 매니저에게 에어콘을 켜라, 문을 닫아라 등등의 지시를 한다. 어느날, 메트로폴리탄에서 공연이 있게 되었는데 자기의 전용 분장실에 갔더니 다른 여성 출연자가 모르고 그 분장실에 들어와 있었다고 한다. 배틀은 화를 내면서 그 성악가의 짐들을 직접 들어서 방 밖으로 내던졌다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배틀은 의상 담당자에게 의상에 대한 심부름은 시키지 않고 대신 '먹을 것을 가져와라, 마실 것을 가져와라'고 심부름을 시켰다. 의상 담당자가 '나는 그런 심부름을 하는 사람이 아닌데...'라면서 머뭇거리자 모욕적인 언사로서 비난을 퍼부었다고 한다. 이날 공연의 마지막 부분에는 배틀이 무대를 이러저리 옮겨 다니면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었다. 배틀이 움직일 때마다 조명이 따라 다녀야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조명이 따라 다니면 비추어 주지 않았다. 배틀은 어쩔수 없이 어둠 속에서 노래를 불러야 했다. 알고보니, 조명 담당자는 의상 담당 여자의 남편이었다는 것이다.

 

케슬린 배틀. 우아하고 지성적이지만 한 성질한다.

 

9위. 조앤 서덜랜드(Joan Sutherland: 1926-2010)

조앤 서덜랜드는 유별난 성격의 디바 리스트에 포함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여 의하해 할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조앤 서덜랜드는 다른 사람들과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기 때문이었다. 공연이 끝나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고 집으로 곧장 돌아가기를 좋아했다. 아마 집에 가서 뜨개질을 계속 해야 하기 때문인듯 하다. 그러나 조앤 서덜랜드를 마냥 조용하기만 하고 우아하기만 한 디바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조용한 디바라고 해도 디바는 디바이다. 어느 때 시카고에서 공연이 있었다. 시카고의 음악 팬들은 데임 서덜랜드를 위해서 연주회 후에 대규모의 환영연을 마련했다. 서덜랜드는 팡파레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환영 파티의 장소에 들어섰다. 그런데 서덜랜드는 곧이어 '피곤해서 집에 가겠다'고 말하고는 수많은 사람들의 기대를 뒤로하고 정말로 숙소로 돌아갔다. 서덜랜드는 지휘자와 간혹 의견이 맞지 않아서 다투는 경우가 있었다. 한번은 그대로 무대 밖으로 나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또 한 번은 지휘자를 바꾸라고 요구해서 실제로 지휘자가 교체된 일도 있었다. 하기야 이런 정도의 고집이나 주관이 없다면 어찌 디바라고 할수 있겠는가?

 

데뷔 시절의 조앤 서덜랜드

 

8위. 제랄딘 화라(Geraldine Farrar: 1882-1967)

제랄딘 화라가 1907년에 메트에서 데뷔할 때에는 그를 눈여겨 보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자  메트의 퀸 비(Queen Bee)가 되어 있었다. 화라는 메트의 여왕답게 새로운 계약을 맺을 때에 특별사항들을 요구했다. 과거에 다른 어느 디바와의 계약에서도 볼수 없는 사항들이었다. 화라는 전용 분장실을 요구했다. 전용 분장실에는 다른 사람이 일체 드나들지 못한다는 내용도 계약 사항이었다. 그리고 전용 분장실의 열쇠는 청소부와 자기 자신만이 가지고 있도록 했다. 아무튼 그로부터 1년이 지나서 화라는 지휘자인 토스카니니와 한판의 언쟁을 벌인 일이 있다. 화라는 토스카니니에게 '마에스트로님, 당신은 내가 노래하는 대로 지휘를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스타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한방 날렸다. 토스카니니가 대꾸했다. '스타는 하늘에 있는 것이지 무대 위에 있는 것은 아니오'라고. 그러자 화라는 '그래도 사람들은 내 얼굴을 보려고 돈을 내고 들어옵니다. 당신의 등이나 바라보려고 돈을 내는 것은 아니지요'라고 쏘아 붙였다. 이렇듯 두 사람은 날카로운 언쟁을 벌였지만 이로 인하여 두 사람은 7년 동안이나 연인 관계에 있었다. 마침내 화라가 토스카니니에게 최후의 통첩을 보냈다. '부인과 이혼하지 않으면 우리의 관계도 끝입니다'라는 통첩이었다. 토스카니니는 부인과 이혼할수 없었고 더구나 메트에서의 성공적인 공연을 위해서 화라와 결별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결국 토스카니니는 뉴욕을 떠나 이탈리아로 돌아가는 선택을 했다. 1915년에 화라는 세개의 영화에  출연키로 계약을 맺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영화 제작사로서는 오락이 아닌 클래식 음악을 주제로 삼는다는 것이 리스키한 일이었다. 그런데 화라가 출연한 영화들은 상상 외로 성공을 거두었다. 1920년대에 들어서서 화라의 인기는 마치 밤하늘에 빛나는 찬란한 별과 같았다. 제랄딘 화라가 주연한 영화는 첫 작품인 1915년의 '카르멘'으로부터 1920년의 '여인과 인형'(The Woman and the Puppet)에 이르기까지 15편에 이른다.

 

제랄딘 화라. 카르멘 역을 맡았을 때 사무실의 축음기 앞에서

 

7위. 매릴린 혼(Marilyn Horne: 1934-)

천상의 음성을 가진 매릴린 혼은 미국 동부의 펜실베이니아주에서 태어났으나 어릴 때에 가족들과 함께 캘리포니아주의 로스안젤레스로 이사가서 살았다. 어릴 때부터 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공부도 잘했다. 모범학생이었다. 그런 그가 뜻밖에도 흑인과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1960년에 헨리 루이스라는 음악가(콘트라베이스 연주자 겸 지휘자)와 결혼했다. 매릴린 혼의 어머니는 너무나 기가 막혀서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딸 매릴린 혼에게 '얘야, 네가 그 사람이 그렇게 좋으면 애인으로 지내라, 제발 부인이 되지는 말아라'라고 간청했으나 매릴린 혼의 귀에는 그 말이 들릴리가 없었다. 어머니는 또한 딸 매릴린이 흑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앞으로의 경력에서 사회적으로 큰 불이익을 볼 것으로 예상해서 속상해 했다. 매릴린은 어머니에게 '무슨 엄마가 이래, 우리 엄마 맞아?'라면서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매릴린 혼과 헨리 루이스는 1960년에 결혼하였고 딸 하나를 두었다. 그리고 얼마후 평생을 말도 하지 않고 지낼 것 같았던 어머니와도 화해하였다. 매릴린 혼의 부부는 금슬이 좋기로 유명했으나 무슨 사연이 있었는지 1974년부터 별거하기 시작했고 1979년에 결국 이혼하였다. 매릴린 혼은 성격이 참으로 원만하고 착했다. 그리고 친구들도 많았다. 그런데 매릴린 혼은 보기와는 달리 남의 흉내를 잘 내어서 사람들을 웃기는 재주가 있었다. 엘리자베트 슈봐르츠코프, 루이 암스트롱, 그리고 절친인 조앤 서덜랜드의 흉내를 잘 내었다. 매릴린 혼은 집에서 가족들 간에는 재키 루이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재키라는 남자 이름으로 불린 것은 그의 오빠가 매릴린이 태어나기 전에 남자 동생이었으면 좋겠다고 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을 계속 그렇게 불렸던 것이고 루이스라는 이름은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 남편 루이스의 성을 따서 붙인 것이다. 하지만 매릴린 혼은 평생을 원래의 이름대로 살았다. 매릴린 혼은 1961년에 평생을 우상처럼 여긴 친구 조앤 서덜랜드 등과 함께 뉴욕의 무대에 데뷔했다. 매릴린은 남편 헨리 루이스에게 자기가 출연한 데뷔 음악회가 신문에 크게 보도될 터인데 아마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나오지 않고 자기의 이름만 나올 것이니 그 부분만 읽어 달라고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뉴욕 타임스는 그날 연주회에서 조앤 서덜랜드가 너무 잘해서 대서특필했고 매릴린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이름은 비치지도 않았다. 매릴린은 무척 속이 상했다. 하지만 참았다. 남편 헨리 루이스는 '마드무아젤 혼은 절대로 눈물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재키 루이스는 가끔씩 눈물을 보인다'라고 말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강인한 여자 같지만 가정에서는 눈물도 보이는 여자라는 의미였다.

 

최고의 메조소프라노 디바인 매릴린 혼. 흑인과 결혼했다.

 

6위. 레온타인 프라이스(Leontyne Price: 1927-)

레온타인 프라이스는 1961년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 데뷔하여 한 시즌에만 무려 다섯 역할을 맡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프라이스는 메트에 주역으로 출연한 첫번째 흑인은 아니었다. 1966년에 마리안 앤더슨이 베르디의 '가면무도회'에서 울리카를 맡아 출연한 것이 첫번째였다. 그러나 프라이스는 한 시즌에 주인공으로서 다섯 역할을 맡아함으로서 어느 여성흑인도 이루지 못한 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프라이스는 NBC의 '토스카'에서 타이틀 롤을 맡음으로서 전국 네트워크의 텔리비전에 처음 출연한 흑인이라는 경력을 보였다. 베르디의 '아이다'에서 타이틀 롤인 아이다는 에티오피아의 공주로서 흑인이다. 그러나 '아이다'가 처음 공연된 이래 수십년 동안 아이다는 백인이 흑인처럼 분장하여 맡아왔다. 흑인이 오페라의 주역을 맡지 못한 것은 사람들에게 '흑인이 무슨 재능이 있다고 오페라의 주인공을 맡는다는 말인가'라는 선입감이 있었기 때문인듯 싶었다. 그러나 프라이스가 아이다를 맡고나서 그러한 선입감은 사라졌다. 이후로 프라이스는 미국은 물론 유럽의 유명 극장의 초청을 받게 되었으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출연료를 받는 소프라노가 되었다. 그런 프라이스이지만 자기 때문에 흑인들의 위상이 크게 높아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더구나 자기가 흑인이기 때문에 일종의 동정심으로 오페라의 주역으로 선정되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기의 재능이 인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흑인 소프라노도 백인 이상으로 우아하고 강력하며 위트가 있는 역할을 소화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하였다. 프라이스가 세계적인 디바로서 명성을 떨치기 전에 샌프란시스코 오페라의 '아이다'를 맡게 되었다. 의상 디자이너가 프라이스에게 전화를 걸어서 어떤 색의 드레스를 만들었으면 좋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그 디자이너는 다크 블루이거나 브라운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보였다. 프라이스는 밝은 색의 드레스가 좋겠다고 말했다. 디자이너는 밝은 색의 드레스를 만들어서 입으면 흑인으로 분장하기 위해 사용했던 화장품 등이 드레스에 묻어서 나중에 세탁하는데 힘들다고 말하면서 다시 어두운 색의 드레스를 제시하였다. 한 성질하는 프라이스는 답답하다는 듯이 '그럴 걱정은 없어요. 나는 흑인으로 분장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가 원래 흑인이거든요'라고 쏘아주었다. 디자이너는 프라이스가 흑인인줄 몰랐었다.

 

아이다의 레온타인 프라이스

 

5위. 비벌리 실스(Beverly Sills: 1929-2007)

브루클린 출신의 비벌리 실스는 '버블스'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거품'이라는 뜻도 있지만 '흥분하기를 잘하는 활발한 성격'이라는 의미가 더 컸다. 말하자면 덤벙대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비벌리 실스는 덤벙대기도 잘 해서 핀잔을 받기도 했지만 명랑하고 활달하며 잘 웃어서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았다. 비벌리 실스는 그저 예쁘고 착한 여자였다. 실스가 세계적인 소프라노로 등장하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소프라노 레나타 스코토(Renata Scotto) 덕분이었다. 실스는 1969년에 임신 중인 스코토를 대신하여 급한 연락을 받고 출연했고 이것이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다. 당시에 실스는 미국에서는 잘 알려져 있었지만 유럽 진출은 처음이었다. 실스가 라 스칼라에서 리허설을 하기 시작할 때에 의상 담당자가 스코토를 위해 만들어 놓은 황금색 의상을 그대로 입을 것인지 또는 새로 만들어야 할 것인지를 의논해 왔다. 실스는 황금색 의상이 자기의 밝은 금발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은색 의상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의상 담당자는 문제 없다고 하면서 당장 만들어 놓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다음 리허설 때에도 새로운 의상이 마련되지 못했다. 실스는 의상 담당자에게 어떻게 되었느냐고 재촉했지만 그럴 때마나 의상 담당자의 대답은 '아 깜빡했네요. 당장 내일까지 만들어 놓겠습니다'였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했다. 마침내 최종 드레스 리허설 시간이 되었다. 역시 은색 의상은 마련되지 않았다. 의상 담당자가 예의 황금색 의상을 그대로 들고 왔다. '착한표' 실스는 그 의상 담장자가 보는 앞에서 가위를 들고 황금색 의상을 갈기갈기 찢었다. 한 성질 부리는 실스였다. 그 모습을 지켜본 합창단원들이 실스의 결단에 박수를 보냈다. 다음날, 실스는 반짝이는 눈부신 은색 의상을 입고 마치 개선장군처럼 라 스칼라 데뷔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쳤다.

 

실스는 팬 레터가 올 때마다 일일히 친필로 답장을 보내는 것으로 유명했다. 친구들에게도 그저 시간만 있으면 펜을 들어서 이런 저런 얘기를 써서 편지로 보내기를 좋아했다. 어느때 가장 친한 친구에게 그저 별 생각없이 보낸 편지가 화제가 된 일이 있다. '착한표' 실스가 속으로는 얼마나 욕심이 많은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재미난 내용이었다. 실스는 편지에 이렇게 썼다. '난 여왕이야, 난 빌어먹을 여왕이란 말이야. 그래서 하나님께 빌었지. 우선 4명의 보디 가드가 있어야 해. 선물도 많이 받아야 해. 호텔에 가면 대통령이 묵는 방에서 묵을거야. 하녀들이 있고 비서들이 있고 헤어 드레서가 있고. 그리고 전용 기사가 있는 리무진을 탈것이야. 또 멋진 파티를 자주 열어야지....너무 욕심이 지나친 것일까?'. 오히려 애교스러운 실스의 단면이었다.

 

버블스라는 별명의 비벌리 실스

 

4위. 마리아 예리차(Maria Jeritza: 1887-1982)

체코 출신의 마리아 예리차는 대단히 매력적인 금발미인이었다. 얼마나 매력적이냐하면 그의 세번째 남편이 된 사람은 마리아 예리차와 결혼하기 위해 무려 38년을 결혼을 하지 않고 기다렸다가 마침내 결혼에 골인한 사람이라는 것만 보아도 알수 있는 노릇이었다. 마리아 예리차에게는 숭배자들과 팬들과 후원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마리아 예리차에게 보석 선물을 많이 하였다. 예리차가 보석 수집이 취미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너도나도 보석 선물을 했던 것이다. 예리차는 '나를 숭배한다고 하면서 선물로 꽃다발만 보낸다면 그 사람의 얼굴에 꽃다발을 던져 주겠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만큼 보석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성질 또한 대단했다. 그러다보니 동료 성악가들과 언쟁을 벌이는 일이 많았는데 한번도 지지 않을 만큼 악명이 높았다. 어느날 저녁에 예리차가 '발퀴레'를 공연하고 있는 중에 무대의 한쪽에 있던 메조 소프라노 마리아 올체브스카가 다른 사람들과 킥킥 거리거나 속삭이면서 얘기를 나누는 일이 있었다. 무대 뒤로 나온 예리차는 마리아 올체브스카에게 다가가서 다짜고짜로 뺨을 때렸다. '네가 무언데 감히 주인공처럼 떠들고 난리냐?'는 뜻에서였다. 마리아 올체브스카도 보통 성질이 아니었지만 감히 예리차에게 대들지는 못하고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의 뺨을 때려서 자기의 심정을 표현했을 뿐이었다. 예리차는 커튼 콜에 대해서도 예민했다. 누가 먼저 나가서 박수를 받느냐는 것 때문에 신경질을 부린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위대한 테너 베냐미노 질리와 공연한 일이 있었다. 명성으로 보아 당연히 질리가 먼저 나가서 커튼 콜을 받아야 했는데 예리차는 그것을 참지 못하고 먼저 나가겠다고 우겼다. 한 성질 하는 질리가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질리는 예리차의 발을 걷어 차면서 저리 비키라고 소리쳤다. 예리차로서는 굴욕적인 순간이었지만 어쩔수 없었다.

 

예리차는 연기에 있어서도 대단히 센스가 있었다. 한번은 '토스카'에서 '노래에 살고, 사랑에 살고'를 마루에 엎드려서 불렀다. 지금까지 '토스카' 공연에서는 토스카를 맡은 사람으로서 어느누구도 엎드린채 얼굴을 바닥에 향하고 이 노래를 부른 일이 없었는데 예리차가 그 기록을 깨트린 것이다. 마침 이 장면을 본 푸치니는 '아니, 어떻게 저런 연기를 생각해 낼수 있단 말인가? 참으로 신으로부터 받은 영감이 아닐수 없다'라면서 대단한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실상은 예리차가 무대에서 실수로 미끌어져서 바닥에 쓰러졌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엎드려서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사람들은 '진정한 디바만이 우연한 사고를 마치 신이 정해준 행동으로 바꿀수 있다'고 말했다.

 

체코 출신의 마리아 예리차

 

3위. 비르지트 닐슨(Birgit Nilsson: 1918-2005)

당대에 가장 위대한 바그너 소프라노인 비르지트 닐슨은 성악 공부를 다른 사람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이룩한 것으로 유명하며 마찬가지로 공연과 관련된 모든 업무를 혼자서 관리했던 것으로도 유명했다. 닐슨은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는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은 그가 '나는 너무나 독립적이어서 그러면 안되겠구나 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하지만 나에게 매니저가 왜 필요한지 잘 모르겠어요. 매니저가 있으면 나를 마치 비행기에 짐짝을 던져서 싣는 것처럼 대할 것 같아요'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닐슨은 스톡홀름의 왕립음악원에 입학할수 있었다. 하지만 입학하자마자 성악 레슨 선생이 필요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레슨 선생이 오히려 자기의 음성을 망가트릴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학교를 당장 그만두고 혼자서 성악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닐슨은 평생을 통해서 성악 코치를 옆에 둔 일이 없었다. 그리고 새로운 역할에 도전하게 되면 혼자서 공부하여 마스터하였다. 닐슨은 레온타인 프라이스처럼 어느 극장에서 공연을 하던지 최고의 출연료를 요구했다. 닐슨은 언제나 조그마한 검은 색의 수첩을 가지고 다녔다. 닐스는 수첩에 3년 후의 공연 스케줄까지 자세히 적어 놓았고 또한 수입과 지출에 대하여도 깨알 같이 적어 놓았다. 그래서인지 닐슨은 약속 시간을 어긴 일이 거의 없지만 단 한번 비엔나에서 페르시아 양탄자 때문에 공연시간에 늦은 일이 있었다. 닐슨은 페르시아 양탄자에 대하여는 마음이 약했다. 그래서 비엔나의 도로테움에서 페르시아 양탄자 경매가 있자 그곳을 기웃거리느라고 공연 시간에 늦었다는 것이다.

 

닐슨은 이탈리아에서 인기가 대단했다. 그런데 이탈리아에서의 별명은 '복수의 음성'(la voce di vendetta)였다. 닐슨은 무대에서 자기보다 더 우수한 음성으로 더 뛰어나게 노래를 부르면 그걸 참지 못하고 복수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때 테너 프랑코 코렐리와 함께 공연한 일이 있었다. 코렐리는 닐슨의 이같은 성격을 알지 못하고 듀엣인 In questa reggia를 부르는 중에 닐슨보다 더 오래동안 하이 C 음을 내었다. 다음날 공연에서 닐슨은 코렐리가 끈 시간보다 더 오래동안 하이 C 음을 내어서 결국 코렐리가 힘이 들어서 중단할수 밖에 없도로 만들었다. 닐슨이 박수를 더 받았음은 물론이었다. 한번은 지휘자 칼 뵘이 닐슨에게 '당신은 내가 지나간 40년 동안 들었던 브륀힐데 중에서 정말 가장 위대한 브륀힐데 올시다'라고 말했다. 닐슨은 곧바로 '그러세요? 그럼 40년 전에 들었던 브륀힐데는 누구였어요?'라고 되받아 말했다. 아무튼 대단한 비르지트 닐슨이었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이졸데를 맡은 비르지트 닐슨. 스웨덴의 국보이다.

 

2위와 1위. 마리아 칼라스(Maria Callas: 1923-1977)와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 1922-2004)

마리아 칼라스와 레나타 테발디는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수 없는 사이여서 2위와 1위를 공유하게 되었다. 1950년대에 두 사람은 똑같이 정상의 자리를 서로 밀고 당기면서 유지했다. 당시 오페라의 세계에서 두 사람의 라이발이 커다란 화제가 되었지만 실은 그것과는 상관 없이 두 사람의 우정어린 관계는 상당 기간동안 지속되었다. 테발디는 칼라스처럼 화려하면서도 비극적인 경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점만이 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서로가 번갈아서 정상을 차지하며 세계의 오페라 무대를 압도했다. 처음에는 테발디가 정상이었다. 전쟁이 끝난후 라 스칼라가 다시 오픈하게 되었을 때 토스카니니는 테발디를 우선 기용하였다. 칼라스는 테발디가 아프거나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공연을 하지 못하게 되면 대신 그 자리를 메꾸었다. 그러다가 칼라스가 라 스칼라에게 별도의 계약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아마 그때부터 두 사람의 라이발 관계는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두 사람의 라이발 관계가 씩트기 시작한 것은 1951년 리오 데 자네이로 공연에서 부터였다. 두 사람은 앙코르가 있으면 한곡씩만 하자고 약속했다. 그러다가 테발디가 관중들의 성화에 이기지 못해서인지 아무튼 두 곡의 앙코르를 불렀다. 칼라스는 약속이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 불쾌감을 표시했다.

 

라 스칼라는 1952-53년 시즌에 두 사람의 전쟁터였다. 칼라스가 시즌의 전반부에 노래를 불렀고 테발디가 시즌의 후반부에 노래를 불렀다. 그때부터 두 사람의 팬들이 형성되어 극성을 부리기 시작했다. 팬들은 자기들의 디바가 등장하면 박수갈채를 보냈고 자기들이 싫어하는 디바가 나오면 야유와 비난을 퍼부었다. 이런 팬들의 극성 결과 칼라스가 승세를 굳히는 듯했다. 칼라스는 테발디가 공연할 때에 가서 보며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테발디는 칼라스의 공연에 한번도 가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55년에 테발디는 결국 라이발인 칼라스가 무대를 압도하고 있는 라 스칼라를 떠나고 말았다. 두 사람은 서로 절친한 사이였다고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반드시 그랬던 것만은 아닌 것 같았다. 칼라스는 테발디에게 '줏대가 없는 사람'이라고 비난의 화살을 날렸다. 이에 대하여 테발디는 칼라스가 '심장이 없는 사람'이라고 받아쳤다. 어느날 사람들이 칼라스에게 두 사람의 음성에 대하여 비교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칼라스는 '그것은 마치 샴페인과 코카 콜라를 비교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물론 테발디의 음성을 코카 콜라에 비유한 것이었다. 세월이 흘렀다. 칼라스는 스캔들 때문에 유명세를 톡톡히 치루고 있었으나 테발디는 레이다에도 포착되지 않게 잠수해 있었다. 1958년에 이르러 칼라스는 라 스칼라로부터 소외를 당하기 시작했다. 음성에 변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때로부터 테발디가 서서히 모습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테발디가 자신 있게 한 말이 있다. '나는 칼라스가 나와 같은 시즌에 노래를 부르지 않는한 라 스칼라의 무대에 서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두 사람의 라이발 관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하늘이 두 사람에게 준 세기적인 음성에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리아 칼라스와 레나타 테발디. 두 사람은 아주 친밀했다고 한다. 다만, 이들의 팬들이 극성스러워서 서로 비방을 일삼은 행동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