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화제의 300편

안토니오 칼다라의 '올림피아드' - 155

정준극 2015. 8. 5. 10:56

올림피아드(L'Olimpiade)

안토니오 칼다라의 3막 오페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생일 축하 작품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으로 60여 작곡가가 오페라로 만들었다

 

안토니오 칼다라

                     

이탈리아 바로크 작곡가인 안토니오 칼다라(Antonio Caldara: 1670-1736)는 베니스에서 태어났지만 만투아 공작궁에서 활동하다가 북부 이탈리아를 통치하던 프랑스가 철수하자 바르셀로나로 가서 신성로마제국의 샤를르 6세의 궁정 작곡가로서 활동했다. 당시에 합스부르크의 샤를르 6세는 스페인 왕위 계승자라고 주장하여서 바르셀로나에 궁전을 가지고 있었다. 칼다라는 바르셀로나에 있으면서 작곡 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그 중에서 오페라를 작곡한 것은 이탈리아 오페라를 스페인에 처음 소개한 케이스였다. 칼다라는 잠시 로마로 와서 교회 작곡가로서 활동하다가 1716년에 샤를르 6세 황제의 주선에 의해 비엔나로 가서 정착했다. 오페라 '올림피아드'는 칼다라가 비엔나의 샤를르 6세 궁정작곡가로 있을 때에 샤를르 6세 황제의 부인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것이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비는 아들은 낳지 못하고 딸만 둘을 두었다. 큰 딸이 저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이다. 아무튼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비는 아들을 낳지 못했기 때문에 그로 인하여 오스트리아 황위 계승전쟁이 일어났고 합스부르크 가문은 딸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으로 족보를 달리하게 되었다. 그런 중에도 샤를르 6세는 부인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를 매우 사랑하여서 1733년의 생일을 맞이하여 궁정작곡가인 안토니오 칼다라에게 축하 오페라를 작곡하도록 요청했던 것이다.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는 1711년부터 1740년까지 거의 30년간을 신성로마제국의 황비로 있었다.

 

신성로마제국 샤를르 6세 황제의 부인이며 마리아 테레지아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비

 

안토니오 칼다라가 비엔나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비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오페라는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 경기에 대한 내용이었다. '올림피아드'는 소아시아 출신으로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헤로도토스(Herodotus: BC 484-BC 425)가 쓴 '역사서'(The Histories)의 제6권에 나오는 스토리이다. 그 내용을 대본의 귀재 메타스타시오가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 황비의 생일 축하를 위한 오페라의 대본으로 만들었고 따라서 칼다라가 그 오페라 대본을 사용해서 '올림피아드'를 작곡하였다. 당시 메타스타시오는 비엔나에서 궁정시인으로 활동했다. 메타스타시오의 '올림피아드' 대본은 당장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유럽의 여러 곳에서 작곡가들이 오페라로 만드는 작업들을 추진했다. 그래서 메타스타시오의 '올림피아드'는 그 때까지 명성을 떨치고 있던 '데모폰테'(Demofoonte)와 '버림받은 디도네'(Didone abbandonata)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게 되었다. '올림피아드'가 인기를 끌게 되자 메타스타시오는 또 다른 대본인 '니테티'(La Nitteti)를 완성했다. '니테티'는 여러 면에서 '올림피아드'의 콤비라는 얘기를 들었다.

 

영국 가싱턴 공연. 클레이스테네스 왕과 아리스티아 공주, 그리고 아르제나

 

고대 그리스에서 올림픽 경기가 열리고 있는 때이다. 1막. 메가클레스(Megacles)가 시시온(Sicyon)에서 열리고 있는 올림픽 경기에 참석하기 위해 도착한다. 메가클레스는 리시다스(Lycidas)라는 이름으로 가장해서 올림픽에 참석코자 한다. 리시다스는 메가클레스의 친구의 이름이다. 리시다스는 얼마전에 메가클레스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다. 시시온의 왕 클레이스테네스(Cleisthenes)는 올림픽 경기를 개최하면서 영광의 우승자는 공주인 아리스티아(Aristaea)와 결혼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한바 있다. 그런데 리시다스는 아리스티아 공주를 홀로 깊이 사랑하고 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메가클레스는 아리스티아 공주와 서로 사랑하는 사이이다. 메가클레스가 시시온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참가하기 위해 달려온 것도 실은 올림픽에서 우승하여서 아리스티아 공주와 결혼하기 위해서이다. 메가클레스는 리시다스에게 이번에 올림픽에 참가한 것은 바로 아리스티아와 결혼코자 하는 이유 때문이라고 말해준다. 메가클레스와 아리스티아 공주가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었던 리시다스는 마음 속으로 큰 충격을 받는다. 얼마후 아리스티아 공주가 등장한다. 아리스티아 공주는 메가클레스와 사랑의 눈빛으로 인사를 나눈다. 순간 리시다스의 표정이 어색해 진다. 메가클레스는 친구인 리시다스도 아리스티아 공주에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낀다. 잠시후에 목동으로 변장한 아르제네(Argene)가 도착한다. 리시다스를 사랑하고 있는 아르제네는 이번 기회에 리시다스의 사랑을 되찾고자 한다.

 

아리스티아 공주와 아르제나

 

2막. 메가클레스가 올림픽 경기에서 우승한다. 클레이스테네스 왕은 아리스티아 공주와 메가클레스의 결혼을 선언한다. 아리스티아 공주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게 되어 행복하다. 그러나 메가클레스는 아리스티아 공주를 별도로 만나서 결혼할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리시다스가 아리스티아 공주를 더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말한다. 메가클레스는 아리스티아 공주에게 리시다스가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일을 얘기하며 리시다스는 생명의 은인임을 말한다. 이말을 마친 후에 메가클레스는 상심해 있는 아리스티아 공주를 뒤에 남겨 둔채 어디론가 사라진다. 잠시후 리시다스가 나타나서 아리스티아 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해 달라고 요청한다. 아리스티아 공주는 그런 리시다스를 크게 비난한다. 이 모습을 본 아르제네도 나타나서 리시다스에게 '사람이 그럴줄 몰랐다'고 하면서 크게 책망한다. 아르제나는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리시다스가 실은 아리스티아 공주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던 것이다. 아르제네의 절망감은 말할수 없을 정도이다. 그때 리시다의 스승인 아민타스가 달려와서 친구인 메가클레스가 호수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한다. 모두들 크게 놀란다. 전후좌우의 사정을 설명들은 클레이스테네스 왕은 리시나스를 크게 책망하고 당장 추방토록 한다.

 

아리스티아와 아르제네

 

3막. 아리스티아 공주는 메가클레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충격을 받아서 자기도 스스로 목숨을 끊어 저 세상에 있을 메가클레스의 곁으로 가고자 한다. 목동인 아르제네가 아리스티아 공주를 가까스로 말린다. 그런데 호수에 뛰어 든 메가클레스는 천만다행으로 죽지 않고 어떤 어부에 의해 구조된다. 한편, 리시다스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 모든 것이 클레이스테네스 왕이 아리스티아 공주를 올림픽 우승자에게 내 준다고 했기 때문에 빚어진 것으로 믿어서 클레이스테네스 왕을 암살할 생각을 한다. 그런 기미를 알아챈 아리스티아 공주는 리시다스에게 제발 아버지 클레이스테네스 왕의 목숨을 빼앗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다. 아르제네는 리시다스에게 클레이스테네스 왕을 죽이느니 자기를 대신 죽이라고 제안한다. 리시다스의 사랑을 얻지 못하는 마당에 살아서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는 생각에서이다. 그러면서 아르제네는 자기는 실은 어떤 나라의 공주인데 사정이 있어서 목동으로 변장하고 있을 뿐이며 실은 리시다스와 앞날을 약속한 사이라고 비로소 밝힌다. 그러면서 클레이스테네스 왕에게 리시다스가 자기에게 약속의 징표로서 준 목걸이를 보여준다. 클레이스테네스왕은 그 목걸이를 보자 크게 놀란다. 클레이스테네스 왕에게는 왕자가 태어났으나 그 왕자가 훗날 아버지인 왕을 죽이게 된다는 예언을 듣고 왕자를 멀리 깊은 산속에 버리도록 한 일이 있다. 그때 왕은 어린 아들에게 왕실의 목걸이를 걸어 주었던 것이다. 이제 리시다스는 클레이스테네스 왕의 잃었던 아들이며 아리스티아 공주의 오빠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리시다스는 다시 왕자로서 인정을 받는다. 메가클레스와 아리스티아가 맺어지며 리시다스와 아르제나 공주가 맺어진다. 해피엔딩이다.

 

아리스티아와 메가클레스

 

[올림피아드 오페라]

 

메타스타시오의 '올림피아드' 대본은 너무나 재미가 있고 극적이어서 바로크 시대는 물론 클래식 시대의 작곡가들이 너도나도 오페라로 만들었다. 그래서 무려 60여편의 '올림피아드'가 오페라로서 작곡되었다. '올림피아드' 대본을 제일 먼저 오페라로 사용한 작곡가는 위에서 설명한대로 비엔나에 살고 있던 안토니오 칼다라였다. 그것이 1733년이었다. 바로 다음 해인 1734년에는 베니스의 안토니오 비발디가 똑 같은 대본을 사용해서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 다음해에는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가 오페라로 만들었다. 페르골레지의 '올림피아드'는 로마에서 그다지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얼마후부터는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에서 그의 '올림피아드'가 자주 공연되었다. 1748년에 나온 발다사레 갈루피의 '올림피아드'는 밀라노에서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 작품은 갈루피의 오페라 세리아 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편, 영국에서는 1765년에 토마스 아느가 자기도 이탈리아 오페라를 만들어서 런던에서 성공을 거두어야지 라는 생각으로 왕립극장장을 설득해서 자기의 '올림피아드'를 무대에 올렸다. 하지만 미안하게도 토마스 아느의 '올림피아드'는 완전 실패로 돌아갔다. 루마니아의 요제프 미슬리베체크는 이탈리아에서 활동하면서 1778년에 '올림피아드'를 발표했다. 미슬리베체크의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간주되고 있는 작품이다. 대중적인 인기를 끈 '올림피아드'는 아마도 1763년 파두아에서 초연을 가진 안토니오 사키니의 '올림피아드'일 것이다. 한편, 독일어로 된 최초의 '올림피아드' 오페라는 요한 네포무크 포이씨가 1815년에 발표한 '올림피아 경기'(Der Wettkampf zu Olympia)였다. 이 오페라는 '친구'(Die Freunde)라는 제목으로도 발표되었다. 모차르트는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사용한 오페라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그 대본에 나오는 클레이스테네스 왕의 마지막 대사인  Alcandro, Io confesso...Non so, d;onde viene를 두 곡의 아리아로 만들었다. 하나는 모차르트의 처형인 알로이지아 베버를 위해서 작곡했고(K 294) 또 하나는 모차르트의 친구로서 베이스인 루드비히 피셔를 위해서 작곡했다(K 512).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에서 오스민은 모차르트가 특별히 피셔를 염두에 둔 역할이었다.

 

안토니오 칼다라 이후, 메타스타시오의 '올림피아드' 대본을 사용하여 작곡된 오페라 중에서 대표적인 것들은 다음과 같다. 초연의 연대별로 정리했다. 모든 오페라의 타이틀은 '올림피아드'(L'Olimpiade)이다.

 

-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베니스. 1734년.

-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 로마. 1735년.

- 레오나르도 레오(Leonardo Leo). 나폴리. 1737년.

- 발다사레 갈루피(Baldassare Galuppi). 밀라노. 1748년.

- 요한 아돌프 하세(Johann Adolf Hasse). 드레스덴. 1756년.

- 토마소 트라에타(Tommaso Traetta). 베로나. 1758년.

- 니콜로 좀멜리(Niccolo Jommelli). 스튜트가르트. 1761년.

- 니콜로 피치니(Niccolo Piccini). 로마. 1761년.

- 빈첸조 만프레디니(Vincenzo Manfredini). 모스크바. 1762년.

- 안토니오 사키니(Antonio Sacchini). 파두아. 1763년.

- 토마스 아느(Thomas Arne). 런던. 1765년.

- 요제프 미슬리베체크(Josef Myslivecek). 나폴리. 1778년.

- 도메니코 치마로사(Domenico Cimarosa). 비첸자. 1784년.

- 조반니 파이시엘로(Giovanni Paisiello). 나폴리. 1786년.

- 요한 프리드리히 라이하르트(Johann Friedrich Reichardt). 베를린. 1791년.

- 게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미완성. 1817년.

 

메가클레스와 아리스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