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오페라 작곡가 일화

아버지와 아들 음악가

정준극 2016. 5. 18. 20:24

아버지와 아들 음악가

대표적인 다섯 음악가 부자의 이야기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와 아들들인 빌헬름 프리더만 바흐,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고전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위대한 작곡가이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L. v. Beethoven), 요한네스 브람스(J. Brahms)와 함께 독일을 대표하는 3B 음악가로서도 명성을 떨치고 있는 인물이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대표작으로서는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평균율', 'B 단조 미사' 등이 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집안은 대대로 음악가였다. 바흐의 선조들은 추적해 보면 기록상으로는 고조할아버지부터 음악가였던 것을 알수 있다. 고조할아버지인 바이트 바흐(Veit Bach)는 원래 헝가리에 살고 있었으나 여러 이유로 헝가리를 떠나 독일의 튜링기아 지방에 정착해서 살았다. 바이트 바흐는 빵만드는 사람이었지만 아마추어의 경지를 넘어선 작곡가였다. 아무튼 그런 영향 때문인지 바흐 가문에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와 같은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음악가가 탄생하였으며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후손으로서도 수많은 음악가들이 태어났으니 과연 대단하다고 말하지 않을수 없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아버지는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Johann Ambrosius Bach: 1645-1695)였다. 요한 세비스티안 바흐의 아이들만이 음악에 재능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바흐의 아버지인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도 음악인이었다. 궁정 오케스트라에서 트럼펫을 불었으며 마을 음악가 모임의 회장이었다. 요한 암브로시우스 바흐는 여덟 명의 자녀들을 두었다. 그중에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를 포함한 네명의 아이들이 음악가가 되었으니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기는 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키보드 악기에 대한 레슨을 처음 받은 것은 그의 큰 형인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로부터였다. 요한 크리스토프 바흐는 당시에 키보드 연주자 겸 작곡가로서 명성이 높았던 요한 파헬벨(Johann Pachelbel)로부터 정식으로 키보드 레슨을 받았기 때문에 동생을 가르치는 것쯤은 어렵지 않았다. 청년이 된 바흐는 여러 직분을 가지면서 음악적인 재능을 널리 펼치기 시작했다. 바흐는 봐이마르 공국의 빌헬름 에른스트 공작을 위해 오르가니스트 겸 콘서트마스터로서 봉사했고(1708-1717) 이어 쿠텐()의 레오폴드 공자를 위해 음악 감독으로서 봉사를 했으며(1717-1723) 마지막으로는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교회와 성토마스교회가 세운 학교의 칸토 겸 음악감독, 음악교사로서 봉사했다. 바흐는 실로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였다. 오늘날 우리는 바흐라고 하면 위대한 작곡가로만 알고 있지만 그가 활동하던 때에는 작곡가보다는 오르가니스트로 더 높은 명성을 얻었다. 그런데 한가지 특이한 것은 바흐의 작품들은 그의 생전에 거의 출판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악보가 출판되면 더 널리 알려지게 되고 더 많이 연주될 터인데 그렇지 못했다. 예를 들어 바흐의 위대한 작품인 '마태수난곡'의 악보가 출판된 것은 바흐가 세상을 떠난지 한참 후인 1829년에 멘델스존에 의해서였다. 바흐의 작품 세계를 얘기하자면 한이 없기 때문에 이쯤해서 그만하고 그의 가정생활을 잠시 소개코자 한다. 바흐는 21세가 되던 1706년에 뜻한바 있어서 사촌여동생인 마리아 바르바라 바흐(Maria Barbara Bach)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일곱 자녀를 두었지만 몇 명은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 바르바라는 바흐와의 결혼생활 14년만인 1720년에 세상을 떠났다. 바흐는 혼자서 여러 아이들을 데리고 살수가 없어서 이듬해에 평소부터 호감을 가지고 지내던 성악가 안나 막달레나 불켄(Anna Magdalena Wulken)과 재혼하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려 13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하지만 거의 반 이상이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실제로 장성할 때까지 생존한 자녀들은 토털 10명 남짓이 된다. 그리고 그 중에서 몇 명은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뒤를 이어서 참으로 훌륭한 작곡가들이 되었다. 특별히 네명을 소개한다.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아들 빌헬름 프리더만 바흐          아들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

 

아들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


- 빌헬름 프리더만 바흐(Wilhelm Friedermann Bach: 1710-1784). 첫번째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큰 아들이다. 빌헬름은 바이올린과 키보드를 잘 연주했다. 그는 1733년에 드레스덴 어떤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고 1746년에는 할레로 자리를 옮겨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다. 그는 칸타타, 실내악, 키보드 작품, 오페라 등을 작곡했다.

-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Carl Philipp Emanuel Bach: 1714-1788). 바흐의 자녀 중에서는 작곡가로서 가장 널리 알려진 사람이다. 첫번째 부인 마리아 바르바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둘째 아들이다. 그는 원래 법학을 공부했지만 키보드 연주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여서 1740년부터 1767년까지 거의 30년간을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 궁전에서 하프시코디스트로 봉사했고 그 후에는 함부르크에서 음악감독을 지냈다. 작곡가로서 그는 실내악, 협주곡, 종교음악 등을 남겼다. 그는 또한 '키보드 악기 연주의 진정한 예술에 대한 에세이'(Essay on the True Art of Playing Keyboard Instruments)라는 저서도 남겼다. 이 저서는 나중에 모차르트, 베토벤 등 여러 작곡가들이 크게 참고로 삼은 것이었다. 

-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바흐(Johann Christoph Friedrich Bach: 1732-1795). 두번째 부인인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서 서열로 보면 아홉번째 아들이다.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는 '부케부르크 바흐'(Buckeburg Bach)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750년부터 무려 45년 동안 부케부르크 궁전에서 빌헬름 백작을 위해 하프시코디스트로서 봉사했기 때문이다.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는 아버지인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라이프치히 성토마스교회의 학교도 운영하고 있을 때에 바흐의 자녀로서는 첫번째로 학생이 되어 음악공부를 했다. 그런 연유인지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는 아버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사보가(copyist)로서 몇년 동안 봉사한 일이 있다. 요한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의 작품으로서는 키보드 소나타, 교향곡, 종교합창곡 등이 있다. 

- 요한 크리스티안 바흐(Johann Christian Bach: 1735-1782). 두번째 부인인 안나 막달레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막내아들로서 보통 '잉글리쉬 바흐'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바흐가 50세에 얻은 아들이다. 음악은 처음에는 아버지로부터 배웠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형인 칼 필립 에마누엘로부터 배웠다. 요한 크리스티안은 밀라노 대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봉사했으며 아울러 샬로테 왕비 오케스트라의 악장을 지냈다. 그는 칸타타, 실내악, 키보드 작품, 오케스트라 작품 등을 남겼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아들들인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요제프 슈트라우스,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 그리고 손자인 요한 슈트라우스 3세


세상에서 슈트라우스 가족만큼 뛰어난 왈츠 작곡가들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아버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Johann Strauss I)와 세아들이 모두 뛰어난 작곡가들이었다. 여기에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손자까지도 작곡가로서 활동을 했다. 아버지인 요한 슈트라우스 1세(1804-1849)는 비엔나 왈츠의 창시자이다. 그래서 '왈츠의 아버지'라고 불리고 있다. 반면에 아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왈츠 킹'이라고 불리고 있다. 아버지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바이올린을 잘 연주했는데 누구로부터 레슨을 받은 것이 아니라 혼자서 공부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처음에는 요제프 란너와 함께 카페나 무도회장의 댄스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다가 1824년, 즉 20세 때에 자기만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서 비엔나의 무도회장을 누비며 연주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폴카, 행진곡, 왈츠, 기타 춤곡들을 작곡했다. 제국군의 연대를 위한 행진곡들 중에서 가장 유명한 행진곡은 '라데츠키 행진곡'일 것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가정 상황은 복잡하다. 부인은 마리아 안 슈트라임(Maria Ann Streim)였다. 사람들은 보통 두 사람 사이에서 세 아들만 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여섯 자녀를 두었다. 위로 세 아들, 즉 요한, 요제프, 에두아르드를 두었고 그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더 있었다. 페르디난트로서 안타깝게도 돌도 되지 않아서 세상을 떠났다. 딸은 안나와 테레사의 두명이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는 30세 때인 1834년부터 내연의 처를 하나 두었다. 에밀리 트라움부슈라는 여자였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무려 8명의 자녀들이 태어났다. 아무도 작곡가가 되지는 않았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                  요한 슈트라우스 2세(왈츠 킹)

  

요제프 슈트라우스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              요한 슈트라우스 3세


- 요한 슈트라우스 2세(1825-1899). '왈츠 킹'이라고 불리는 작곡가 겸 지휘자 겸 바이올리니스트이다. 슈트라우스 가족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왈츠, 폴카, 콰드리유, 행진곡, 마주르카, 갈롭 등 여러 형태의 춤곡을 무려 5백여 곡이나 작곡했다. 또한 18편의 오페레타와 1편의 발레음악도 남겼다.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이며 오페레타로서는 '박쥐'이다. 그는 19세 때에 아버지의 오케스트라와는 별도로 자기의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서 연주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아버지의 오케스트라를 흡수하여 더 규모가 큰 '요한 슈트라우스 오케스트라'를 만들어서 여러 나라를 순회하는 연주회까지 가졌다. 요한 슈트라우스 2세는 세번 결혼했지만 공식적인 자녀들이 있다는 기록은 없다.


- 요제프 슈트라우스(Josef Strauss: 1827-1870).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둘째 아들이다. 원래 건축기사였다. 1853년에 형인 요한이 신경쇠약으로 오케스트라 지휘를 할수 없게 되자 오케스트라 운영을 중단할수 없다는 어머니의 지시에 따라 '요한 슈트라우스 2세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은 것이 결국은 왈츠 작곡가로서 이름을 남기게 된 인연이었다. 요제프 슈트라우스는 3백여 편에 이르는 무곡과 행진곡을 남겼으며 편곡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여서 다른 작곡가들의 작품 약 5백여 편을 편곡하여 사용토록 했다. 


-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Eduard Strauss: 1835-1916).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셋째 아들이다. 하프를 잘 연주해서 처음에는 큰형인 요한 슈트라우스의 오케스트라에서 하프를 연주하다가 나중에는 지휘도 하고 작곡도 하였다. 큰형 요한이 병으로 요양하는 바람에 둘째 형인 요제프가 오케스트라 지휘를 했으나 요제프도 세상을 떠나자 에두아르드가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아서 1901년 오케스트라가 해산될 때까지 계속했다. 에두아르드도 약 320편에 이르는 춤곡과 행진곡을 작곡했다. 


- 요한 슈트라우스 3세(Johann Strauss III). 에두아르드 슈트라우스의 아들이다. 아버지처럼 처음에는 하피스트로 출발하여 나중에는 지휘도 하고 작곡도 했지만 아무래도 아버지 에두아르드는 물론 삼촌들의 재능에는 미치지 못하였다. 다만, 요한 슈트라우스 3세는 아버지와 삼촌들이 작곡한 춤곡과 행진곡을 처음으로 음반에 취입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버지 레오폴드와 아들 볼프강 모차르트, 그리고 손자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레오폴드 모차르트(Leopold Mozart: 1719-1787)는 우리가 보통 모차르트라고만 부르는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아버지이다. 모차르트의 생애와 작품 활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이다. 레오폴드 모차르트의 풀 네임은 요한 게오르그 레오폴드 모차르트로서 원래 독일 아우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러다가 젊은 시절에 뜻한바 있어서 잘츠부르크로 와서 대주교 궁정 오케스트라의 바이올리니스로 봉사했으며 나중에는 잘츠부르크 궁정 작곡가가 되었고 이어 부지휘자로서 활동했다.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여러 기악곡, 교향곡, 협주곡 등을 작곡했으며 그의 바이올린 교본인 Versuch einer gründlichen Violinschule(기초바이올린학습교본)은 여러 사람에게 도움을 준 저서로서 유명하다. 레오폴드 모차르트는 부인 안나 마리아와의 사이에 일곱 자녀를 두었는데 딸 마리아 안나와 아들 볼프강만이 생존하였다. 난네를이라는 애칭의 딸 마리아 안나는 클라피어(피아노)를 뛰어나게 연주했고 볼피라는 애칭의 볼프강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잘 연주했다. 그래서 아버지 레오폴드는 두 어린 자녀를 데리고 유럽 순회연주를 다녔다. 모차르트라 여섯 살때부터 열세살이 될 때까지였다. 


 

레오폴드 모차르트(모차르트의 아버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모차르트의 아들)

 

-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 비록 35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역사상 가장 뛰어난 음악가라는 인정을 받고 있다. 세살 때에 누이 난네를이 클라피어를 연주하는 것을 듣고 따라서 연주했다는 기록이 있다. 어린 모차르트는 다섯살 때부터 천부적인 작곡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피아노 이외에도 클라리넷과 바이올린을 뛰어나게 연주했다. 모차르트는 일곱살 때에 베르사이유에 가서 루이 15세의 앞에서 연주했고 같은 해에 비엔나에 가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 연주했다. 이때에 나중에 프랑스의 왕비가 된 마리 앙뚜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도 함께 있었다. 모차르트는 21세 때에 잘츠부르크 궁정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임명되었고 그의 첫번째 정식 오페라인 '미트라다테'(Mitradate)를 작곡했다. 그후 또다시 유럽 순회연주를 떠났으며 얼마후 잘츠부르크로 돌아와서는 궁정 오르가니스트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 직분에 만족하지 못해서 과감히 사임하고 1781년에 비엔나로 떠났다. 아버지 레오폴드의 속이 몹시 상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새로운 경력을 위해 잘츠부르크를 떠났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비엔나에서 콘스탄체 베버를 만나 급기야 결혼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 여섯 자녀를 두었지만 두 아들만 나중까지 생존하였고 나머지 네명은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생존한 두 아들은 칼 토마스와 프란츠 사버 볼프강이었다. 그 중에서 프란츠 사버 볼프강은 아버지 모차르트의 뒤를 잇기나 하려는듯 음악가가 되었으나 크게 성공하지는 못했다. 


-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다섯 달 전인 1791년 7월에 비엔나에서 태어난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는 모차르트와 콘스탄체 사이에서 태어난 여섯 자녀 중에서 막내아들이다. 모차르트의 여섯 명 자녀 중에서 네명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둘째인 칼 토마스 모차르트(1784-1858)와 여섯째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만이 생존하였다. 보통 F.X. 모차르트 또는 모차르트 주니어로 알려진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음악가가 되었다. 프란츠는 작곡가, 피아니스트, 지휘자, 음악교사였다. 그의 풀 네임에서 프란츠 사버는 모차르트의 친구이며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Franz Xaver Süssmayr)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며 볼프강은 아버지를 존경하여서 붙인 이름이다. 쥐쓰마이르는 모차르트의 유작인 진혼곡(레퀴엠)의 마지막 파트를 완성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프란츠는 어릴 때부터 훌륭한 음악교육을 받았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후 콘스탄체는 특별히 프란츠를 안토니오 살리에리와 당대의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에게 보내어 피아노를 배우게 했다. 그후에는 요한 게오르그 알브레헤츠버거와 지기스문트 폰 노이콤에게 보내어 작곡을 배우게 했다. 프란츠는 아버지처럼 어린 시절부터 작곡하기 시작했다. 처음 출판된 곡은 1802년 프란츠가 열 살 때에 작곡한 ‘피아노5중주곡 G 단조 작품번호 1번’이었다. 1805년에는 하이든의 생일을 기념하는 칸타타를 작곡하였으나 악보가 분실되는 바람에 애석하게도 어떤 곡인지 알수 없게 되었다. 프란츠가 피아니스트로서 처음 데뷔한 것은 1805년, 13세 때에 아버지의 친구인 에마누엘 쉬카네더가 운영하는 테아터 안 데아 빈(빈강변극장)에서 협주곡을 연주한 것이었다. 프란츠는 전문 음악인이 되어 음악교사로서 그리고 연주자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아버지와는 달리 내성적이고 겸손하여 자기를 잘 나타내지 않았다. 프란츠는 자기의 작품이 아버지의 작품과 비교되는 것을 두려워했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자기의 재능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1820년대에 프란츠는 안톤 디아벨리의 주제를 가지고 변주곡을 작곡하는 50인 작곡가에 포함될 정도로 인정을 받았다. 1838년 프란츠는 잘츠부르크의 모차르테움 음악감독 및 지휘자로 초빙되었다. 프란츠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고향인 잘츠부르크에서 음악활동을 하게 되어 무척 마음이 흡족하였다. 1841년부터는 칼스바드에서 지냈다. 훗날 유명한 피아니스트가 된 에른스트 파우어는 프란츠가 칼스바드에서 가르친 제자였다. 프란츠는 1844년 향년 53세로 칼스바드에서 세상을 떠났다.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녀가 없다. 바로 위의 형인 칼 토마스는 공무원이 되었다. 그러나 역시 결혼을 하지 않아서 자녀가 없다. 


○ 아버지 알레산드로 도메니코와 아들들인 피에트로 필리포 스칼라티와 도메니코 스칼라티


알레산드로 스칼라티(Alessandro Scarlatti: 1680-1725)는 바로크 시대에 활동했던 이탈리아의 작곡가로서 특히 오페라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를 '나폴리오페라 학파의 창시자'라고 부른다. 그의 첫 오페라는 Gli Equivoci nell Sembiante로서 마침 이 오페라를 관람한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이 그를 좋게 보아서 이후 크리스티나 여왕궁의 음악감독으로 있게 되었다. 스칼라티는 오페라의 서곡을 세 파트로 구성하는 기법을 발전시켰다. 알레그로-아다지오-알레그로 스타일이다. 이같은 스타일은 나중에 고전 교향곡의 포맷으로서 자리잡게 되었다. 알레산드로는 주로 스웨덴의 크리스티네 여왕과 메디치의 페르디난도 3세 공자를 위해 오페라를 작곡했다. 알레산드로는 시실리 왕국의 팔레르모에서 태어났다. 아들인 피에크로 필리포 스칼라티와 동생인 주세페 도메니코 스칼라티는 모두 당대에 이름을 떨쳤던 작곡가였다.


칼 알레산드로 스칼라티               아들 도메니코 스칼라티             아들 칼 필리포 스칼라티


- 피에트로 필리포 스칼라티(Pietro Filippo Scarlatti: 1679-1750). 알레산드로 스칼라티의 장남으로서 작곡가, 오르가니스트, 합창지휘자였다. 음악가로서의 경력은 우르비노 대성당의 합창지휘자로서 시작하였다. 그후에는 나폴리 궁정의 오르가니스트로서 봉사하였다. 그는 칸타타, 키보드 토카타 등을 작곡했다. 유일한 오페라인 Clitarco(클리타르코)는 1827년 나폴리에서 초연되었으나 스코어가 분실되는 바람에 어떤 오페라인지는 알수 없게 되었다. 


- 주세페 도메니코 스칼라티(Giuseppe Domenico Scarlatti: 1685-1757). 보통 도메니코 스칼라티라고 하는 그는 '소나타의 왕'이라고 불릴만큼 많은 소나타를 작곡했다. 기록에 따르면 모두 555편의 소나타를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중에서 10편은 바이올린과 콘티누오를 위한 것이고 3편은 오르간을 위한 것이다. 나머지는 하프시코드를 위한 것이다. 도메니코는 당시 로마에 와있던 추방당한 폴란도 왕비의 음악감독 및 작곡가로서 봉사했다. 이어 성베드로 대성당의 음악감독을 지냈으며 포르투갈의 리스본에 가서는 후안 5세 궁정의 음악감독으로 활동했다. 1728년에 도메니코는 그가 가르쳤던 마리아 바르바라가 스페인의 왕위 계승자인 페르디난드 왕자와 결혼하게 되자 이들과 함께 지내기 위해 스페인에 가서 말년까지 보냈다. 


 아버지 리하르트 바그너와 아들 지그프리트 바그너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만큼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바그너라고 하면 대서사시적 오페라인 '링 사이클'로서 유명하다. 전4편의 오페라를 계속 공연한다면 무려 18시간이나 걸린다. 바그너는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악극(Music drama)라는 대단히 특별한 장르의 작품을 발전시킨 사람으로서 오래오래 기억되고 있는 인물이다. 그렇지만 모차르트나 멘델스존처럼 어려서부터 음악적인 재능을 보인 것은 아니었다. 바그너의 생부는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Carl Friedrich Wagner)라는 사람이었다. 라이프치히에서 경찰서 직원으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바그너가 태어난지 6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되자 어머니인 요한나는 얼마후 남편 칼 프리드리히 바그너의 친구로서 평소부터 잘 알고 지내던 루드비히 가이어(Ludwig Geyer)와 동거하기 시작했고 나중에는 정식으로 결혼신고를 해서 살았다. 어린 바그너는 계부인 가이어가 친아버지인줄 알고 자랐다. 이름도 리하르트 가이어라고 바꾸어서 초등학교에 다녔다. 그러다가 열살 쯤해서 가이어가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청년이 된 바그너는 가이어 대신에 원래 성인 바그너를 되찾아서 사용하기 시작했다. 


바그너는 오린 시절에 오히려 계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연극에 치중했었다. 그래서 11살 때에 첫 드라마를 써서 주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받았다. 바그너가 처음으로 작곡에 손을 댄 것은 16세 때였다. 그리고 음악가로서의 첫 경력은 1834년 뷔르츠부르크 극장의 합창지휘자로 임명을 받은 때부터였다. 그리고 이때에 첫 오페라인 '요정들'(Die Feen)을 작곡했다. 바그너가 21세 때였다. 바그너는 합창지휘를 하고 작곡만 한 것이 아니라 연애에도 몰두했다. 4살 연상의 여배우인 민나 플라너를 죽자고 따라다니며 결혼하자고 하는 바람에 민나 플라너는 결혼을 해주지 않으면 무슨 사단이 날 것 같아서 결혼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결혼은 순탄하지가 않았다. 우선 빚이 많아졌다. 두 사람 모두 사치라면 한 사치하는 사람들이어서 느느니 빚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었다. 이윽고 바그너는 동료이면서 제자라고 할수 있는 지휘자 한스 폰 뷜로브(Hans von Bullow: 1830-1894)와 결혼해서 이미 딸을 둘이나 둔 코지마(Cosima)와 대단한 염문을 뿌리기 시작했다. 한스 폰 뷜로브로 말하자면 바그너를 무척 존경하여서 그의 오페라인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초연을 지휘하기도 했다. 


코지마가 누구냐하면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의 딸이었다. 리스트도 연애라고 하면 한가닥 하는 인물이어서 마리 다구(Marie d'Agou)라고 하는 기혼의 귀부인과 죽자사자하여서 코지마가 태어난 것이다. 코지마는 바그너보다 무려 24세 연하였다. 하여튼 코지마는 남편 한스 폰 뷜로브와 별거하면서 바그너와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 남편 한스 폰 뷜로브가 겨우 이혼을 허락해 주는 바람에 바그너와 정식으로 결혼할수 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1869년, 그러니까 바그너가 56세의 노인이고 코지마가 32세의 한창일 때에 아들 지그프리트가 태어났다. 바그너와 코지마는 공식적으로 1870년에 결혼신고를 했으므로 사실상 지그프리트는 결혼식을 올리기도 전에 태어난 셈이다. 바그너와 코지마는 지그프리트를 생산하기 전에 딸 둘을 두었다. 이졸데와 에바이다. 잘 아는대로 이졸데라는 이름은 '트리스탄과 이졸데'에 나오는 주인공의 이름을 따온 것이며 에바는 '뉘른베르크의 명가수'에 나오는 여주인공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그리고 아들 지그프리트의 이름은 바그너 최대의 걸작인 '링 사이클'의 주인공인 지그프리트의 이름에서 가져온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                    아들 지그프리트 바그너


- 지그프리트 바그너(Siegfried Wagner: 1869-1930)는 어려서부터 보고 들은 것이 오페라이고 무대이므로 오페라 작곡가가 되지 않을수가 없었을 것이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유일한 아들인 지그프리트 바그너는 기록상으로 18편의 오페라를 작곡했다. 뿐만 아니라 오케스트라 작품들과 성악작품(주로 가곡)들도 남겼다. 오페라의 수량으로만 본다면 아들 지그프리트는 아버지 리하르트 바그너보다 더 많은 오페라를 작곡한 셈이다. 그렇게 여러 편의 오페라들을 작곡했는데도 오늘날 알려진 것은 미안하지만 거의 없다. 지그프리트의 오페라가 각광을 받지 못한 것은 솔직히 말해서 작품이 신통치 않아서이기도 했지만 아버지인 리하르트 바그너의 커다란 그늘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건 그렇고 지그프리트는 청년시절에 갑자기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건축을 공부하고 싶다고 주장했다. 아버지 리하르트 바그너는 아들 지그프리트가 기왕이면 작곡가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다고 강요할수는 없는 문제여서 그대로 건축공부를 하도록 했다. 그리하여 지그프리트는 베를린과 칼스루에에 가서 건축공부를 했다. 어머니 코지마가 그러지 말라고 말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던 중 지그프리트는 23세가 되던 해인 1892년에 독일에서 만난 영국인 친구인 클레멘트 하리스와 함께 아시아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클레멘트 하리스는 지그프리트보다 2살 아래로서  독일에서 피아노와 작곡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그리고 나중의 일이지만 클레멘트 하리스는 그리스-터키 전쟁에 참전했다가 1897년에 전사했다. 지그프리트는 그를 추모하여서 교향시 '행운'(Glück)을 작곡했다. 그건 그렇고, 친구 하리스와 함께 아시아를 여행하던 지그프리트는 이번엔 또 무슨 변덕인지 건축을 포기하고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아마 친구인 하리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가 조금 빗나간것 같지만, 지그프리트는 이건 또 무슨 일인지 양성연애자였다. 그래서 40이 넘도록 여자에게 관심이 없어서인지 결혼을 하지 않고 있었다. 지그프리트가 동성연애의 감정을 처음 충동적으로 가지게 된 대상자는 친구인 하리스였다고 한다. 아버지 리하르트 바그너는 치마만 둘렀다하면 쫓아다니는 돈 후안 사촌쯤 되었는데 아들 지그프리트는 동성애자 또는 좋게 보아주어서 양성애자였으니 흥미로운 일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어머니인 코지마는 지그프리트에게 어서 결혼해서 바그너 다이내스티의 후계자를 생산해야 한다고 강요했다. 그럴때마다 지그프리트는 이핑게 저핑게를 대며 결혼을 미루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코지마도 아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었다. 발없는 말이 천리간다고 지그프리트가 동성연애자리는 소문이 상당히 퍼졌다. 다행한 것은 지그프리트가 완전히 동성연애자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1913년쯤해서 지그프리트는 이른바 하르덴-오일렌부르크 사건으로 덩달아서 입장이 난처하게 되었다. 하르덴-오일렌부르크 사건(또는 간단히 오일렌부르크 사건)이란 것은 저널리스트인 막시밀리안 하르덴이 카이저 빌헬름 2세 내각에 있는 사람들이 동성연애에 빠져 있는 것을 고발한 사건이다. 그 중에는 빌헬름 2세의 친구인 오엘렌부르크-헤르테펠트의 공자 필립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으로 독일에서 동성연애는 사회적으로 커다란 지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만일 지그프리트가 동성연애자라는 사실이 확인된다면 바그너 가문에 큰 망신을 주는 것이 아닐수 없었다. 지그프리트는 자기도 이성을 사랑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했다. 지그프리트는 더 이상 결혼을 회피할수 없었다. 코지마는 영국 출신 비니프레트 클린드워스를 지그프리트의 신부감으로 작정했다. 비니프레트는 당시 17세였고 지그프리트는 45세였다.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아무튼 지그프리트와 비니프레트는 현저한 나이차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1915년 9월 22일에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후 지그프리트와 비니프레트는 열심히 노력하여서 네 자녀를 두었다. 빌란트, 프리들린데, 볼프강, 베레나였다. 그중에서 장남인 빌란트 바그너는 할아버지 리하르트 바그너가 시작한 바이로이트 페스티발을 주관하는 역할을 감당하였다. 하지만 작곡가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