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로마제국 집중분석/HRE가 뭐길래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시스 2세 - 2

정준극 2015. 10. 29. 09:13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 프란시스 2세 - 2

오스트리아제국 황제로서는 프란시스 1세

 

오스트리아제국의 프란츠(프란시스) 1세 황제

 

1792년에 프란시스(프란츠)는 아버지 레오폴드 2세(1747-1792)의 뒤를 이어 프란시스 2세로서 다민족 대제국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였다. 당시의 유럽 정세는 1789년에 프랑스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나라마다 사회적, 정치적인 개혁의 기운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지경이었다.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서유럽의 대부분을 영향권 아래에 두고 있는 신성로마제국으로서 프랑스 혁명의 여파는 받아들이기도 어렵고 감당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신성로마제국과 그 우산 아래에 있는 국가들은 왕정을 계속 유지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는 와중에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에 대하여 무척이나 섭섭했던 사건이 하나 터졌다. 프란시스가 황제가 된지 1년 후인 1793년에 프랑스는 프란시스의 고모인 프랑스 왕비 마리 앙뚜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를 파리에서 길로틴으로 처형한 사건이었다. 하기야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프랑스의 왕비가 새로 들어선 정부에 의해 처형을 당했건 말건 상관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처형된 사람이 새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프란시스 2세의 고모였기 때문에 사정을 달라질수 있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 공작인 프란시스 2세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처형을 무관심하게 지켜보고만 있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란시스 2세와 마리 앙뚜아네트는 고모와 조카의 관계이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다. 프란시스로서는 그저 어릴 때에 망내 고모인 마리아 안토니아를 어쩌다 비엔나의 궁전에서 한두번 만난 일이 있을 뿐이었고 그후에는 거의 접촉이 없었던 처지였다. 그러므로 친척이라고 해서 큰 부담을 안고 프랑스의 새로운 공화정부에게 '제발 살려 달라'고 부탁할 처지가 되지 못하였다. 프랑스의 혁명 주도 세력인 조르드 당통이 프란시스 2세 황제에게 연락하여서 마리 앙뚜아네트의 처형을 걸고 모종의 협상을 제안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에도 프란시스 2세는 '당신네들 일이니 당신네들이 알아서 하시오'라면서 어떠한 협상도 응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리하여 마리 앙뚜아네트는 1793년 10월 16일 파리에서 길로틴으로 처형되었다. 그러나 평소부터 프랑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프란시스의 마음 속에는 마리 앙뚜아네트의 처형으로 프랑스 혁명주의자들에 대한 증오와 불쾌감이 더해졌으면 더해졌지 지워지지 않았다.

 

루이 16세의 왕비인 마리 앙뚜아네트는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1793년 10월 16일 파리에서 길로틴으로 처형되었다. 조카인 프란시스 2세가 황제로 취임한지 1년 후의 일이었다.

 

프랑스가 혁명으로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제가 되자 주변에 있는 왕국들은 불똥이 튀지 않을까해서 불안한 입장이었다. 주변국가들은 힘을 모아서 프랑스를 응징하고 왕정을 복구시키고자 했다.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연합군을 이끄는 사령관은 프란시스가 맡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군대훈련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에 전투에 참가하는 것쯤은 별로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황제로서 체통도 있고 할 일도 많으므로 연합군 사령관의 자리는 동생인 샤를르 대공이 대신 맡도록 했다. 오늘날 비엔나 헬덴플라츠(영웅광장)의 한쪽에 있는 기마상이 샤를르 대공이다. 샤를르 대공은 1794년의 플란더스 전투에서 나폴레옹 군에게 패배하였다. 결과 프란시스는 라인지역을 프랑스에게 넘겨주어야 했고 대신 베니스와 달마티아를 관할하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그 후에도 제2, 제3의 연합전선을 만들어서 나폴레옹에게 죽어라고 대항하였으나 그때마자 패배의 신세를 면치 못하였다. 특히 1805년 12월의 오스털리츠 전투에서 나폴레옹군에게 대패함으로서 프란시스는 프레스부르크 조약을 체결할수 밖에 없었다. 나폴레옹에게 패배한 프란시스의 오스트리아 제국은 유럽에서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약화되었다. 반면에 프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력이 부상하게 되었다. 프란시스는 그놈의 나폴레옹 때문에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자 1806년에 용단을 내려서 천년 역사이지만 허울만 좋은 신성로마제국을 해산하였다. 프란시스는 그보다 2년 전인 1804년에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로 칭하고 대관식을 가지자 '제깐 놈이 무슨 황제냐?'는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어차피 허수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는 내려 놓아야 하지만 그래도 황제라는 칭호는 가지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여 새로 제국을 창설하여 황제의 타이틀은 가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신성로마제국의 구성원에 불과하였던 오스트리아 공국을 제국으로 격상시키고 스스로 황제로 등극하였다. 그리하여 프란시스 2세 황제는 1806년 신성로마제국의 종말과 함께 오스트리아제국의 프란시스 1세로서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속은 부글부글 끓었을 것이다.

 

오스털리츠 전투에서의 나폴레옹

 

1809년에 프란시스는 또 다시 나폴레옹과 전투를 벌였다. 이번에는 스페인을 두고 벌인 전투였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먹어치우려고 하자 스페인과 합스부르크는 한 집안이므로 가만히 있을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을 벌였던 것이다. 프란시스는 스페인에서 나폴레옹을 아예 일어서지도 못하게 굴복시키고 싶었다. 그런데 또 패베하였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폴레옹에게 다시는 대들지 않겠다는 서약을 해야 했고 합스부르크 소유의 영토 중에서 일부를 프랑스에게 헌납해야 했다. 이와 함께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평화를 위해 프란시스의 딸인 마리 루이제 공주를 나폴레옹의 재취자리로 들여보내게 되었다. 그 즈음에 나폴레옹은 부인 조세핀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이혼을 하였던 터였다. 하기야 조세핀은 왕족도 아니고 귀족도 아니었으므로 황제가 된 나폴레옹으로서는 체면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조세핀은 1810년 1월에 나폴레옹과 이혼하여 혼자 지내다가 1814년에 향년 50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무튼 나폴레옹에게 부인이 없자 양국의 평화를 위해  정략결혼이 이루어졌다. 결혼식은 1차로 1810년 4월 1일에 프랑스와 독일의 접경지역에 있는 꽁삐에뉴(Compiegne)에서 비공식적으로 이루어졌고 2차로 다음날인 4월 2일에 파리의 루브르궁전 교회에서 정식으로 이루어졌다. 나폴레옹 전쟁은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를 쇠약하게 만들어준 것이었고 프랑스와 함께 상대적으로 프러시아 왕국이 새로운 맹주로서 일어서게 만든 것이었다.

 

1810년 4월 2일 파리 루브르궁전의 교회에서 거행된 나폴레옹과 마리 루이제의 결혼식. 프란시스는 사랑하는 딸 마리 루이제를 나폴레옹의 두번째 부인으로 들여보내야 했다. 속이 상했을 테지만 참을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여튼 프란시스와 프랑스는 악연도 그런 악연이 없었다.

 

프랑스와 어쩔수 없이 평화조약을 맺은 오스트리아는 은인자중하던중 1813년 드디어 프랑스에게 등을 돌리고 전쟁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오스트리아가 외교전을 펼쳐서 영국, 러시아, 프러시아, 스웨덴과 동맹을 맺고 나폴레옹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다. 물론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쳐부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812년에 러시아의 모스크바를 점령했다가 퇴각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나폴레옹은 1813년의 전투에서도 참혹한 패배를 당하였다. 나폴레옹은 재기할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유럽의 강호들은 나폴레옹 실각 이후 유럽의 지도를 어떻게 새로 그리느냐를 두고 1814-15년에 비엔나에서 회의를 가졌다. 프란시스 2세의 재상인 메테르니히가 프란시스 2세를 대신하여 회의를 주관했다. 이 회의가 저 유명한 '비엔나 회의'(Congress of Vienna)였다. '회의는 춤춘다'는 명언으로 역사에서 길이 기억되고 있는 비엔나 회의는 사실상 프란시스의 성과물이라고 볼수 있다. 프란시스는 비밀리에 프랑스에서 왕권이 회복된 루이 18세와 조약을 맺어 더 이상 전쟁을 하지 않기로 하고 신성로마제국의 멤버 중에서 아직 교통정리가 안된 나라들은 어떻게 한다는 합의를 했다. 물론 프러시아와 제정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프랑스의 비밀협약을 알고 반대했다. 결국 프란시스의 오스트리아는 다시한번 강적들인 프러시아와 러시아를 상대해야 했다.

 

1815년의 비엔나회의. 오스트리아 제국의 메테르니히 재상이 주도하였다.

 

프란시스 2세는 다른 사람들을 크게 믿지 못하는 습성이 있었다. 하기야 믿었던 프랑스와 프러시아 등등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고 손해를 입은 경우가 한두번이 아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나폴레옹이 모든 권세를 잃고 1813년 11월에 저 멀리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를 가자 나폴레옹 전쟁은 실질적으로 막을 내렸지만 유럽의 열강들은 서로 유리한 입장을 차지하기 위해 별별 정치적, 외교적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제국의 프란시스 1세는 더 이상 위축될수는 없다고 생각하여 현상대로의 체제유지에 안간힘을 썼다. 프란시스 1세는 그 방법의 하나로 비밀경찰을 기가막히게 운영하였다. 이와함께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검열과 감독을 강화하였다. 따지고 보면 그러한 전략을 프란시스 1세가 아버지인 레오폴드 2세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라는 의견이다. 레오폴드 2세는 투스카니 공작으로 있을 때에 유럽에서 가장 효과적인 스파이기구로 명성이 자자했던 비밀경찰을 운영했었다. 프란시스 1세는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들을 감찰 대상으로 삼았다. 심지어는 자기 가족들도 감찰의 눈길에서 피할수가 없을 정도였다. 프란시스 1세는 동생들인 샤를르 대공과 요한 대공이 모임을 갖는 다는 기미만 있으면 비밀경찰을 동원해서 무슨 얘기들을 하는지 일일이 체크했다. 언론이나 공연에 대한 검열도 극심했다. 극작가로 유명한 프란츠 그릴파르처도 당국의 지나친 검열 때문에 신경질이 나서 모든 활동을 집어치우겠다고 선언할 정도였다. 그릴파르처는 원래 합스부르크 충성파였다. 그런데도 그의 연극 중에서 한 작품이 불온한 내용이라는 지적을 받고 공연이 금지된 일이 있었다. '오토카르 왕의 행운과 종말'(König Ottokars Glück und Ende)이라는 연극이었다.

 

프란츠 그릴파르처의 연극 '오토카르 왕의 행운과 종말'의 무대. 비엔나 궁정극장 1955. 프란시스 2세 황제는 이 연극이 불온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당시에 공연금지의 조치를 내렸다.

 

군사문제와 관련하여 프란시스 1세는 동생 샤를르 대공에게 전권을 맡겼다. 샤를르 대공은 나폴레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군의 사령관으로 많은 활동을 했다. 그런데 프란시스 1세는 어느 한 사람에게 너무 많은 권력을 주는 것을 극도로 경계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래서 프란시스 1세는 제국전쟁위원회와 야전사령관들간의 임무를 최대한으로 분리하여서 어느 한사람이 전권을 쥐는 것을 예방했다. 프란시스 1세는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국가의 재정을 고려하여 군사예산을 가능하면 삭감하였다. 그래서 1830년대에 들어와서는 1년 군사예산이 4천만 플로린을 초과하지 않도록 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으로 사실상 군사예산은 4분의 1이나 삭감된 것이었다. 그것으로는 제국의 군대를 유지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프란시스 1세에 대한 군대의 불만이 커져갔다. 그러다가 1835년에 프란시스 1세가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페르디난트 1세가 황제가 되자 사정은 나아져서 커다란 불만은 없게 되었다. 프란시스 1세는 아버지인 레오폴드 2세가 세상을 떠난지 43년만인 1835년에 비엔나에서 갑자기 고열이 나더니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다. 1835년 3월 2일이었다. 장례식은 호프부르크의 궁정교회에서 거행되었다. 대단히 장엄한 장례식이었다. 프란시스 1세는 합스부르크의 다른 황실 사람들도 영원히 안식을 취하고 있는 카푸친교회 지하의 황실납골당(Kaisergruft)에 안치되었다.

 

비엔나 카이저그루프트의 프란시스 1세 관. 생전의 그 위엄과 권세도 죽으면 한 평도 안되는 관에 들어가야 했다.

 

프란시스 1세의 공식 타이틀은 다음과 같다. 1806년부터 사용하기 시작한 타이틀이다.

 

- 오스트리아 황제(Emperor of Austria)

- 예루살렘, 보헤미아, 달마티아,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 갈리시아, 로도메리아의 왕(King)

- 오스트리아 대공(Archduke)

- 로레인, 잘츠부르크, 뷔르츠부르크, 프랑코니아, 슈티리아, 카린티아, 카르니올라의 공작(Duke)

- 크라코브 대공(Grand Duke)

- 트란실바니아 대군주(Grand Prince)

- 모라비아 변경백(Margrave)

- 산도미르, 마소비아, 루블린, 오베르-니더 실레지아, 아우슈비츠, 차토르, 테센, 프리울레의 공작(Duke)

- 베르흐테스가덴, 메르겐타인의 군주(Prince)

- 합스부르크, 고리치아, 그라디스카, 티롤의 백작 영주(Princely Count)

- 오베르 및 니더 루사티아, 이스트리아의 변경백(Margrave)

 

1846년, 호프부르크의 인 데어 부르크에서 거행된 프란시스 1세 기념상 제막식. 프란시스 1세 서거 10주년 기념으로 세워졌다.

호프부르크 내정의 프란시스 1세 오스트리아 제국 황제 기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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