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팟푸리

세빌리아의 이발사 2백 주년

정준극 2015. 12. 8. 10:29

2016년으로 2백주년을 맞는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조반니 파이시엘로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도 당시에는 대인기

메르카단테의 ‘두명의 피가로’는 보마르세 3부작의 후속편

 

2016년은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Il barbiere di Siviglia)가 역사적인 초연을 가진지 2백주년을 맞는 뜻 깊은 해이다.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1816년 2월 20일 로마의 아르젠티나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이후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많이 공연되는 오페라 톱 10에 속하는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그런데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로시니의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조반니 파이시엘로가 로시니보다 30여년 전에 똑같은 제목과 똑같은 내용의 오페라를 만든 것이 있다. 당시에는 파이시엘로의 ‘세빌리아 이발사’가 대단한 인기를 끌었지만 30년 후에 나온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그늘에 가려져 있어서 지금은 거의 잊혀 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피가로 3부작’의 첫 번째

 

'죄많은 어머니'에서 케루비노와 백작부인

 

잘 아는 대로 로시니의 걸작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프랑스의 피에르 오귀스탱 캬롱 드 보마르셰(1732-1799)의 피가로 3부작 중에서 1부에 해당하는 것이다.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은 ‘피가로 3부작’ 중에서 2부이다. 그런데 역시 잘 아는 대로 오페라로 작곡되기는 2부인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Le nozze di Figaro)이 1부 ‘세빌리아의 이발사’보다 30년 먼저인 1786년에 작곡되었다. 그러므로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나오자 ‘피가로의 결혼’의 스토리에 익숙해 있던 사람들은 그제야 ‘아하, 그전에 그런저런 일들이 있었구나!’라며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건 그렇고 보마르셰의 3부작 중 3부인 ‘죄 많은 어머니’(La mère coupable: The Guilty Mother)는 어떻게 되었는가? 1부와 2부는 여러 작곡가들이 경쟁이나 하듯 오페라의 줄거리로 삼았지만 3부 ‘죄 많은 어머니’는 별로 관심들을 두지 않았다. 스토리가 점잖지 못할 뿐만 아니라 황당하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다리우스 미요 등 한두 사람이 3부의 스토리를 오페라로 시도했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성공적인 작품이 되지 못했다. 3부의 내용을 결론만 말하자면, 백작부인인 로지나와 케루비노가 마침내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어서 그 결실로서 레옹이라는 아들을 두게 되었으며 한편 백작은 백작대로 타고난 바람기를 주체하지 못해서 어디선가 플로레스틴이라는 딸을 하나 두게 되었는데 일이 이상하게 되느라고 레옹과 플로레스틴이 서로 자기 부모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모른채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결국 레옹과 플로레스틴은 법적으로 남매간이 아니기 때문에 결혼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보마르셰의 연극인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1775년에 파리에서 처음 공연되자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의 기운이 움트던 때였다.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파리 시민들에게 혁명의 사상을 심어준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은 1789년부터 시작되었다. 연극의 주인공인 피가로는 하찮은 이발사이다. 하지만 이발사란 어떤 사람인가? 아무리 돈 많고 지체 높은 귀족이라고 해도 그의 앞에서는 모자를 벗고 하라는 대로 해야 한다. 그러니 얼마나 통쾌한가! 귀족들이 권력을 쥐고 제멋대로 횡포를 부르는 그런 시대에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서민들의 눈에는 이발사의 역할이 더 할수 없이 유쾌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적어도 이러한 내용의 드라마를 보는 일반 서민들은 ‘우리도 인간이다’라는 자각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러한 자각심은 자유, 평등, 박애의 사상을 싹트게 만들었다. 그러므로 프랑스 혁명이 불붙으려던 때에 보마르셰의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파리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곡은 ‘팔미라의 아우엘리아노’의 서곡을 그대로 사용

로시니는 스피드 작곡가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극본을 읽어보고는 곧이어 작곡에 착수하여 단 3주만에 그 복잡한 음악을 완성하였다. 다만, 서곡은 시간적 여유가 없어서인지 또는 귀찮아서인지 그가 전에 작곡해 놓은 Aureliano in Palmira(팔미라의 아우렐리아노)의 서곡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저러나 오늘날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세계적 인기 오페라로서 불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만 1816년 로마에서의 초연은 뜻밖에도 실패였다. 로시니로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재앙이었다. 관객들은 공연 내내 야유를 보내며 소란을 피웠다. 게다가 무대에서는 무대장치가 쓰러지는 등의 사고가 발생하기까지 했다. 관객들의 소동은 오페라가 재미없어서가 아니라 로시니의 라이벌이 보낸 야유꾼(Claque)들 때문이었다. 로시니를 질투하고 시기하는 사람이 보낸 야유꾼들은 오페라가 형편없다고 소란을 벌였고 이런 소란은 군중심리와 맞물려서 삽시간에 극장 안이 난리도 아니게 되었다. 원래 이탈리아 사람들은 별 것도 아닌 일에도 흥분하고 소리치기를 좋아하므로 군중심리에 의한 초연에서의 난장판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로시니의 라이발이 누구였는지는 아직도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하지만 두 번째 공연부터는 딴판이었다. 대성공이었다. 신문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실상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초연은 실패가 아니라 성공이라고 말할수 있다. 이같은 성공은 30년전 비엔나에서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의 초연이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던 것에 비하면 상당한 차이가 있다. 30년전만 해도 귀족을 골탕 먹이는 이발사의 얘기는 박수를 받지 못했었다. 관객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귀족들이 좋아할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로시니의 경우는 달랐다. 시대가 그만큼 변했던 것이다. 귀족들이 큰소리를 치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던 것이다. 비엔나의 베토벤조차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높이 평가하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보통 사람들의 따듯한 사랑의 이야기, 지배층에 대한 위트에 넘친 반항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빌리아의 이발사’가 보여준 우아하고 감미로운 멜로디와 반짝이는 위트, 그리고 여기에 밝고 명랑함이 조화를 이루어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의 진수를 보여준 것이 더 큰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오페라 성악가로서 등용문

 

'나는 거리의 만능선수'(라르고 알 팍토툼)을 노래하는 피가로

 

‘세빌리아의 이발사’에 나오는 아리아들은 고난도의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어려운 것들이다. 그 중에서도 피가로의 아리아인 ‘나는 거리의 만능선수’(Largo al factotum)는 가장 부르기 어려운 오페라 아리아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것이다. 타이틀에서 Largo는 ‘장엄하고 느리게’라는 뜻이다. Factotum은 허드레 일꾼, 막일꾼, 잡역부를 말한다. 제목에 라르고라는 단어가 들어갔기 때문에 혹시 이 곡을 장엄하면서도 충분히 느리게 불러야 하는 곡이라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마치 굵은 빗방울이 지붕을 후두둑 두드리듯, 하인들이 잰걸음으로 또닥또닥 거리며 달려가는 듯, 가사를 재빠르게 읽어야 하는 노래이다. 이런 노래를 영어로는 패터 송(patter song)이라고 부른다. 설리반의 사보이 오페라에 그런 패터 송들이 자주 등장한다. 바리톤을 위한 ‘나는 거리의 만능선수’는 스케일에서 대단한 정확성을 필요로 하는 곡이다. 그리고 아르페지오를 능란하게 구사할수 있어야 하며 가사의 발음에 있어서도 분명한 이탈리아어를 구사해야 하는 곡이다. 특히 이 노래의 마지막 파트는 알레그로 비바체로서 Bravo bravissimo...Fortunatissimo per vertia!...Pronto prontissimo...라고 하는 가사를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불러야 한다. 그래서 바리톤으로서 오페라 스타가 되려면 이 노래부터 마스터해야 한다는 얘기가 있다.

 

사실상 지나간 수십년 동안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성악도들이 오페라 성악가로서 성공할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는 관문으로서 관심을 끌었다. 그래서 만일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주역을 맡는 다면 이는 오페라 성악가로서 등용문을 거쳤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특히 이탈리아 벨칸토 오페라 및 오페라 부파에 도전하려면 우선 ‘세빌리아의 이발사’를 감당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에는 한명의 여성 주역과 네명의 남성 주역이 등장한다. 여성 주역이 한명이므로 여성 성악가들로서는 너도나도 이 역할을 맡고 싶어 한다. 로지나(Rosina)의 역할을 맡게 되면 자기의 성악 실력을 과시할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대에서 뭇 남자들로부터 선망의 시선을 받을수 있기 때문이다. 원래 로시니는 로지나를 콜로라투라 메조소프라노 또는 콘트랄토를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 고음이야 장식적으로 적당히 부르면 되지만 중음은 매우 차분하고 안정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로지나의 역할이 너무나 매력적이어서 소프라노들이 로시니에게 한번만이라도 이 역할을 맡도록 해 달다고 조르는 바람에 일부 아리아를 콜로라투라 소프라노가 부를수 있도록 수정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고음에 자신이 없는 메조소프라노나 콘트랄토가 로지나를 맡게 되면 로지나의 주요 아리아가 나올 때에 무대 뒤에 대기하고 있던 콜로라투라 소프라노를 무대로 나오게 해서 아리아만 부르고 들어가도록 하는 진풍경도 볼수 있었다.

 

군인으로 변장한 백작

 

로지나가 무대 위에서 음악교사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성악 레슨을 받는 장면이 있다. 원래 악보에는 단순한 멜로디가 적혀있을 뿐이다. 그러나 내노라하는 소프라노들은 단순 멜로디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원래의 악보를 무시하고 자기의 가장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노래를 대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전설적인 소프라노 넬리 멜바는 이 장면에서 전속 반주자를 별도로 무대에 올라오도록 해서 로시니의 작곡과는 관계없이 자기가 즐겨하는 노래를 불렀다. 음악교사인 돈 바질리오는 같은 베이스인 바르톨로보다 무대에서의 역할이 짧지만 음악적 역할은 어느 누구보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1막에서 돈 바질리오의 아리아 La calunnia(과장된 속삭임)은 자기의 역할을 훌륭하게 나타내 보이는 대표적인 예이다. 처음에는 부드러운 미풍처럼 속삭이듯 시작되다가 나중에는 마치 대포를 쏘듯 힘찬 포효로 연결되는 아리아이다. 오케스트라도 피아노에서 포르테로, 포르테에서 포르테시모로 이어지다가 나중에는 마치 천둥이 치는 듯한 음향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돈 바질리오는 베이스 중에서도 강렬한 성격의 베이스가 맡도록 하고 있다. 부포 베이스, 즉 익살스런 베이스를 말한다.

 

가짜 음악선생인 백작으로부터 노래 레슨을 받고 있는 로지나(조이스 디도나토)

 

알마비바 백작의 역할은 테노레 디 그라치아(Tenore di grazia), 즉 우아한 테너를 위한 것이다. 알마비바 백작의 아리아는 대단히 세련되면서도 민첩하며 그러면서도 위트에 넘쳐 있다. 1막이 시작될 때의 두 곡의 솔로는 대표적으로 우아하고 화려한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아리아인 Se il mio nome(만일 그대가 나의 이름을 알고 싶다면)는 로시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곡이다. 알마비바 백작이 매번 등장할 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변장하여 나오는 것은 보마르셰다운 발상이며 여기에 로시니의 음악이 뒷받침되어 제대로의 코믹한 발명품이 되어 있다. 특히 알마비바 백작이 꼬장꼬장하고 신경이 예민한 듯한 음악교사 노릇을 한 것은 이 오페라의 백미이다. 2막에 나오는 가짜 음악교사(백작)의 아리아 Pace e gioia sia con voi(당신에게 평화와 기쁨이 있기를)는 대단히 신중하면서도 끈기를 가지고 불러야 하는 곡이다. 이 노래는 차라리 위트에 넘친 곡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아무튼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 전편에 흘러넘치는 음악적 위트가 부족했다면 아마 그토록 유명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시뇨르 크레센도

한편, 로시니라고 하면 서곡으로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네 편의 오페라의 서곡이 유명하다. ‘세빌리아의 이발사’, ‘결혼계약서’, ‘탄크레디’, ‘라 체네렌톨라’이다. 오늘날 이들 서곡에 나오는 음악들은 아주 유명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곳저곳 다른 작품에서 가져와서 땜질이라도 하듯 붙인 경우가 많다.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서곡도 다른 오페라의 서곡에서 가져와서 짜깁기한 것이라는 얘기는 이미 언급한바 있다. 그나저나 로시니의 서곡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스타일에 있어서 마치 찻주전자에 물을 끓이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조용히 시작하다가 얼마 지나면 주전자의 뚜껑이 흔들릴 정도로 팔팔 끓는다. 음악용어로서 크레센도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시니를 ‘시뇨르 크레센도’(Signor Crescendo)라고 불렀다. 로시니의 수많은 오페라 중에서 그의 생전에 인기를 끌었던 것은 너댓 편에 불과하고 다른 오페라들은 그저 서랍 속에 들어가서 죽은 듯이 조용히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다가 20세기 중반에 들어와서부터 로시니의 잘 알려지지 않은 오페라들이 하나 둘씩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오리 백작’과 ‘호수의 여인’이다. 이같은 현상을 ‘로시니 르네상스’라고 부른다. ‘로시니 르네상스’는 앞으로도 계속 될 것이다.

 

로시니보다 먼저 나온 파이시엘로의 ‘세빌리아의 이발사’

돌이켜 보면, 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 중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스토리가 가장 재미있기 때문에 로시니 이외에도 여러 작곡가들이 오페라로 만들었고 실제로 몇편은 상당한 인기를 얻기도 했다. 그 중에서도 이탈리아의 조반니 파이시엘로가 작곡한 ‘세빌리아의 이발사’는 다른 어느 시도보다도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었다. 1782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초연된 이후 유럽의 여러 도시에서 경쟁이나 하듯 공연된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 파이시엘로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의 스토리는 거의 같다. 차이가 있다면 파이시엘로의 것은 코믹한 내용보다는 백작과 로지나의 사랑 이야기에 중점을 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메르카단테의 ‘두 명의 피가로’

 

'두명의 피가로'에서 춤을 추고 있는 레옹과 플로레스틴

 

보마르셰의 ‘피가로 3부작’ 중에서 모차르트가 2부인 ‘피가로의 결혼’을 오페라로 만들자 피가로의 이름은 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모차르트 이외에도 피가로의 이름을 널리 알리는데 일조한 사람이 있다. 이탈리아의 사베리오 메르카단테(Saverio Mercadante: 1795-1870)이다. 메르카단테는 거의 60여편에 이르는 오페라를 작곡했다. 그 중에 ‘두 명의 피가로’(I due Figaro)라는 것이 있다. 1826년에 작곡했으나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거의 10년 후인 1835년에 처음 공연된 오페라이다.

 

‘두 명의 피가로’의 대본은 유명한 대본가인 펠리체 로마니가 쓴 것이다. 로마니의 극본인 ‘두 명의 피가로’는 상당한 환영을 받아서 이를 대본으로 삼아 19세기 초반에 여러 명의 작곡가들이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 중에서도 아무래도 메르카단테의 ‘두 명의 피가로’가 그나마 가장 많이 알려진 작품이다. 메르카단테의 ‘두 명의 피가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차르트와 로시니의 오페라에 등장했던 인물들과 대동소이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런 성격의 인물들과는 아무래도 차이가 있다. 그리고 두어명의 새로운 인물들도 등장한다. 물론 백작부인의 딸인 이네즈가 등장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고 토리비오(Torribio)와 플라지오(Plagio)라는 못 보던 사람들도 등장한다. 토리비오는 옛날에 케루비노를 섬기던 하인이다. 그런 토라비오인데 이번에는 돈 알바로라는 귀족 행세를 하며 이네즈에게 프로포즈하고자 한다. 플라지오는 백작의 집을 방문하여 머물고 있는 작가이다. 그런데 플라지오라는 말은 ‘표절’(plagiarism)이라는 말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플라지오는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인물이다.

 

피가로는 로시니의 ‘세빌리아의 이발사’에서처럼 자신에 넘쳐 있는 만능선수가 아니다. 이 오페라에서는 어리둥절하고 무슨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서 당황해 하는 사람으로 묘사되어 있다. 백작은 예나 지금이나 영주로서, 그리고 잘난 남자로서 기고만장하고 있다. 그런데 백작과 백작부인 사이에 딸이 하나 생겼다. 이네즈이다. 어느덧 세월은 흘러 이네즈는 아름다운 아가씨로 성장했다. 이네즈는 편의와 기분에 의해서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진정 사랑하는 청년과 결혼하고 싶어 한다. 여기에 케루비노가 다시 등장한다. 케루비노는 이제 더 이상 소년이 아니다. 장성한 청년이 되어 있다. 더구나 ‘피가로의 결혼’에서 보는 것처럼 천방지축으로 치맛자락을 쫓아 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성숙하고 신중한 남성이 되어있다. 케루비노는 이제 높은 지위의 장교이지만 자기의 정체를 일부러 감추고 피가로라는 가명으로 백작의 비서로 들어간다. 케루비노는 백작부부에게 이네즈라는 딸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호기심에서 은근히 알아보았더니 백작이 이네스를 어떤 귀족 집안의 아들과 정략 결혼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케루비노는 이네즈를 구원해 주어야 겠다는 일종의 사명감이 생겨서 이네즈에게 접근하기 위해 백작의 비서로 들어간 것이다. 케루비노가 왜 하필이면 피가로라는 가명을 썼느냐고 궁금해 할지 모르지만 피가로라는 이름은 흔한 것이기 때문에 굳이 문제로 삼을 필요가 없다. 아무튼 케루비노가 피가로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오리지널 피가로와 함께 두 명의 피가로가 된 것이다.

 

[2016년에 기념해야 할 오페라의 연혁들을 살펴보면, 2016년으로 스메타나의 ‘팔린 신부’(Prodana Nevesta)가 150주년을 기념한다. 오펜바흐의 ‘파리인의 생활’(La vie Parisennne)도 2016년으로 150주년이 된다. 앙브루아즈 토마의 ‘미뇽’(Mignon)이 파리에서 초연된 것도 150년 전의 일이다. 스페인의 엔리크 그라나도스의 ‘고야의 사람들’(Goyescas)이 뉴욕 초연을 가진 것은 1차 대전 중인 1916년이므로 올해로서 1백주년을 기념한다. 슈베르트의 노래와 사랑이야기를 다룬 하인리히 베르테의 ‘세 아가씨의 집’이 비엔나에서 초연된 것도 1916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