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페라 이야기/오페라 팟푸리

이국적 배경의 오페라 - 터키와 중동

정준극 2015. 12. 9. 00:58

이국적 배경의 오페라 총점검

여행의 계절 가을에 생각해 보는 동양배경의 오페라

터키와 이란과 이락을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들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 로시니의 <마오메토 2세> 등

 

유럽 사람들이 유럽 이외의 다른 나라들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중세 이후부터였다. 사람들의 지식이 확대되고 과학이 발달하면서부터 먼 나라, 즉 이국에 대한 관심이 커졌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이국이란 것은 유럽 이외의 모든 나라를 포함하는 것이었다. 유럽인들이 저 먼 동양에 대하여 깊은 호기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초에 주로 중국에 대한 이야기인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나온 후부터라고 볼수 있다. 그런데 사실상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동양, 즉 오리엔탈이란 것은 이스탄불 건너편으로부터였다.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서부터가 동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터키는 유럽인들이 가장 가깝게 느낄수 있는 동양이었다. 한편, 성서의 나라 이스라엘도 당연히 동양으로 간주하였다. 그런가하면 이집트, 알제리, 모로코와 같은 아프리카 북부지역도 오리엔탈로 간주하였다.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는 당시 터키풍의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알라 투르카]

유럽인들의 동양에 대한 관심은 여러 문화예술의 작품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당연히 음악에서도 나타났다.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서 동양적인 스타일을 도입한 경우는 아무래도 터키음악이 대표적이었다. 터키풍의 음악은 주로 터키의 군악대, 특히 야니사리라고 하는 터키의 정예부대 군악대의 행진곡 스타일의 음악을 말한다. 그런 음악이 유럽으로 흘러 들어와서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 많이 반영되었다. 터키풍의 음악을 유럽에서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할 때에는 바로크음악시대에 보지 못했던 타악기들이 여러 개가 사용되었다. 예를 들면 트라이앵글, 베이스 드럼, 심발 등이다. 이런 악기들은 실제로 터키의 야니사리 군악대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던 것이었지만 유럽에서는 처음 사용하는 것들이었다. 피콜로라는 악기도 터키에서 유래한 것이다. 바로크 시대의 유럽 음악에는 피콜로가 등장하지 않지만 그 이후에는 피콜로가 오케스트라에서 없어서는 안될 악기가 되었다. 피콜로의 높고 날카로운 소리는 멀리까지 들리기 때문에 야외에서의 연주에, 그리고 특히 군악대에서 사용하면 대단히 효과적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해서 유럽의 클래식 음악에는 알라 투르카(alla turca)라는 용어가 유행하게 되었다. 터키 풍으로 연주하라는 뜻이다.

 

알라 투르카 음악은 당시 유럽 음악의 중심지였던 비엔나에서 많이 유행하였다. 비엔나에서 터키풍의 음악이 인기를 끌수 있었던 것은 오토만 터키와의 인연이 깊었기 때문이었다. 비엔나는 16세기와 17세기에 두 번에 걸친 터키의 대대적인 공격을 경험한바 있다. 그로인하여 여러 가지 터키의 문물이 비엔나에 들어오게 되었다. 커피도 그때 비엔나에 처음 소개되었다고 한다. 이국적인 것, 특히 동양적인 것을 선호하였던 비엔나 사람들은 이국적인 터키풍의 문화를 마치 유행처럼 일상생활로 가져왔다. 18세기와 19세기에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위대한 작곡가들인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이 모두 터키풍의 음악을 남겼던 것도 그러한 연유 때문이었다.

 

터키의 음악은 15세기 이후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음악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오페라에서도 터키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들이 더러 있고 또는 터키 풍의 음악을 인용한 작품들도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Die Entführung aus dem Serail)가 있고 로시니의 <마오메토 2세>(Maometto secondo)가 있다. 로시니는 <이탈리아의 터키인>(Il turco in Italia)이라는 오페라도 작곡했지만 이 오페라는 제목만 그렇지 실은 배경이 이탈리아의 나폴리이다. 다만, 터키 사람들이 나폴리까지 와서 겪는 모험과 사랑과 사건들이 내용이기 때문에 흥미를 던져 줄 뿐이다. 하이든은 1775년에 <우연한 만남>(L'incontro improvviso)이라는 오페라를 남겼다. 내용은 <후궁에서의 도주>와 비슷하여서 크게 관심을 끌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터키인'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는 모차르트가 요제프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부탁을 받고 작곡한 독일어 대본의 오페라이다. 요제프 2세 황제는 당시 비엔나에서 이탈리아어에 의한 이탈리아 오페라들이 판을 치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서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대본의 오페라를 작곡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이 오페라에는 당시 비엔나 사회에서 유행하던 터키풍의 의상과 음악과 춤이 화려하게 등장하므로 우선 눈요기로서도 훌륭한 작품이다. <후궁에서의 도주>는 1782년 비엔나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모차르트가 청운의 뜻을 품고 잘츠부르크를 떠나 비엔나에 온지 1년 후의 일이다. 그때 모차르트는 26세의 청년이었다. 로시니의 <마오메토 세콘도>(마오메토 2세)는 바이런 경의 ‘고린트 공성’(The Siege of Corinth)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오페라이다. <마오메토 2세>는 1820년 나폴리의 산 카를로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로시니는 나중에 <마오메토 2세>의 제목을 바이런 경의 원작을 존중하여서 ‘코린트 공성’(Le siege de Corinthe)으로 고쳤고 대본도 프랑스어로 만들었다.

 

모차르트의 '후궁에서의 도주'

 

[터키의 이웃 페르시아]

터키의 이웃이 이란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이란을 무대로 삼은 오페라들도 유럽에서 관심을 끌었다. 페르시아는 이스라엘과 인접하여 있기 때문에 성서적으로도 무관한 사이가 아니었다. 현재의 이란은 과거에 페르시아(파사)라고 불렀으며 한 때는 아시리아(앗수르) 제국에 속하기도 했다.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페르시아 여왕 팔미라>(Palmira, regina di Persia: 1795)를 작곡했고 헨델은 <페르시아 왕 시로에>(Siroe, re di Persia: 1728), 그리고 성서에서는 아하수에로 왕이라고 불리는 크세르크세스 1세에 대한 이야기인 <세르세>(Serse: 1738)를 작곡했다. 이밖에도 이탈리아의 프란체스코 카발리가 <페르시아 공주 스타티라>(Statira principessa di Persia)를, 미국의 휴고 웨이스갈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에스더>를, 그리고 영국의 아서 설리반이 <페르시아의 장미>(The Rose of Persia)라는 오페라를 작곡한 것이 있다. 독일의 한스 베르너 헨체의 <후푸새와 효행의 승리>(L'Upupa und der Triumph der Sohnesliebe)라는 오페라도 페르시아가 배경이다. 한편, 독일의 디터스 폰 디터스도르프가 오라토리오 <페르시아에서 해방된 유대민족>(La Liberatrice del Popolo Giudaico nella Persia: 또는 L’Esther: 1773)을 작곡했는데 내용은 에스더 왕비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오라토리오는 간혹 무대에서 오페라처럼 의상을 입고 연기를 가미하여 공연하기 때문에 오페라로 간주되기도 한다.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페르시아 여왕 팔미라>(또는 간단히 <팔미라>)는 1795년 비엔나의 캐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처음 공연되었으니 그 이후 스코어가 분실되는 바람에 자취를 감추고 있었으나 그로부터 거의 2백년이 지난 1925년에 독일에서 스코어가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된 작품이다. 헨델의 오페라는 <페르시아 왕 시로에>)는 기원후 약 6백년경 페르시아 사산조의 왕으로서 부왕에게 반기를 들어 부왕을 축출하고 왕좌를 차지한 인물이다. 헨델의 오페라는 시로에(또는 Kavadh 2세, Sheroya)가 왕좌를 차지하기까지의 음모와 갈등, 그리고 사랑을 다룬 내용이다.

 

[헨델의 세르세]

헨델의 또 다른 걸작 오페라인 <세르세>는 기원전 약 5백년에 페르시아를 통치했던 세르세 대왕(크레스크세스: Xerxes: 아하수에로)에 대한 이야기이다. 1738년 런던에서 초연되었다. 헨델은 세르세를 카스트라토를 위해 작곡하였으나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메조소프라노가 맡는다. 이 오페라의 1막에 나오는 세르세의 아리아 Ombra mai fu(나무 그늘 아래에서)는 라르고(Largo)라는 빠르기 지시가 있으므로 보통 ‘라르고’라는 제목으로 알려진 아름다운 곡이다.

 

헨델의 '세르세'. 사라 코널리

 

구약성경 ‘에스더’에 나오는 파사(페르시아)제국의 에스더 왕비에 대한 이야기를 미국의 휴고 웨이스갈(Hugo Weisgall: 1912-1997)이 3막 오페라로 만든 것이 있다. 1993년 10월에 뉴욕시티오페라가 초연했다. 유태여인 에스더가 파사제국 아하수에로(크세르크세스)의 왕비가 되기까지의 이야기, 그리고 총리대신 하만이 유태인들을 몰살하려는 음모를 사전에 차단하고 사악한 하만을 징계하는 영웅적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에스더의 용기 있는 행동으로 인하여 파사제국에 살고 있던 유태인들은 그후로도 오래도록 안전하게 살수 있었다. 유태인들은 에스더에 의한 유태인의 해방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부림절(Purim)을 경축하고 있다. 에스더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들은 과거에 더러 있었다. 팔레스트리나, 헨델, 다리우스 미요가 에스더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을 남겼다.

 

'에스더'. 뉴욕시티오페라

 

[하이든의 <우연한 만남>]

하이든의 <우연한 만남>은 하이든이 합스부르크의 밀라노 총독인 페르디난트 대공을 위해 작곡한 코믹 오페라로서 1775년 헝가리에 있는 에스터하지 궁전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당시 비엔나에서 유행하던 터키 주제의 스토리와 알라 투르카의 음악이다. 음악과 스타일은 터키 풍이지만 이집트의 술탄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런데 술탄이 사랑하는 여인이 페르시아의 레지아 공주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집트를 배경으로 한 오페라라고 볼수는 없으며 다만 그저 동양에 대한 호기심으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면 된다. 하이든이 하렘을 주제로 삼은 이른바 ‘하렘 오페라’(Seraglio opera)를 작곡한 것은 예외적인 일이었다. 하이든은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그런 입장에서 이교도의 이야기, 그것도 윤리적으로 문제가 많은 하렘을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를 작곡했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예외적인 일이었다. 하렘 오페라들을 보면 대체로 유럽의 사람들이 하렘의 여인을 구출하는 내용이 보통인데 <우연한 만남>의 경우에는 무슬림이 무슬림을 구출하는 내용이다.

 

사보이 오페라로 유명한 영국의 아서 설리반이 이번에는 전통의 콤비인 윌리엄 길버트의 대본 대신에 베이실 후드의 대본으로 <페르샤의 장미>(The Rose of Persia)라는 오페라를 만들었다. 1899년 사보이극장에서 초연되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부제는 The Story Teller and the Slave(이야기꾼과 노예)이다. 역시 하렘을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이다. 스토리는 마치 토마의 오페라 <마르타>와 흡사하다.

 

독일의 한스 베르너 헨체(Hans Werner Henze: 1926-2012)의 <후푸새와 효행의 승리>는 오페라의 장르에서 동화오페라로 구분되는 작품이다. 페르시아의 민화를 바탕으로 만든 오페라이기 때문이다. 페르시아의 지체 높은 사람(아마 총리대신 정도)이 매일 자기에게 놀러오는 후푸새가 너무 사랑스러워서 만지려 하자 그 다음부터는 찾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세 아들에게 어서 가서 후푸새를 찾아오라고 명령한다. 두 아들은 핑게만 대고 찾으러 가지 않지만 막내아들은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후푸새를 찾았으며 게다가 아름다운 아가씨(실은 공주)도 만나 함께 아버지에게 돌아와 축복을 받는다는 얘기이다. <후푸새와 효행의 승리>는 2003년 8월에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서 처음 선을 보였다. 베를린의 도이치 오퍼와 마드리드의 테아트로 레알이 공동 제작하였다.

 

[코르넬리우스의 <바그다드의 이발사>]

이란의 옆 나라가 이락이다. 이락(바빌로니아)은 이란(페르시아)과 함께 구약시대에 자주 등장하는 나라여서 유럽에서도 많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독일의 페터 코르넬리우스(Peter Cornelius: 1824-1874)가 <바그다드의 이발사>(Der Barbier von Bagdad)라는 오페라를 만든 것이 있다. 아라비안 나이트에 나오는 이야기 한 편을 바탕으로 작곡자 자신이 대본을 썼다. 바그다드의 이발사인 알리는 마치 세빌리아의 이발사인 피가로처럼 거리의 만능선수로서 결국은 우여곡절 끝에 핸섬한 청년 누레딘과 아름다운 마르지아의 결혼을 성사시킨다는 내용이다. 1858년 바이마르에서의 초연은 프란츠 리스츠가 직접 지휘하고 무대 감독을 맡은 것이었다.

 

'바그다드의 이발사'

 

구약성서 창세기에 나오는 바벨탑은 현재의 이락에 있었다고 한다.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 있던 시나르 왕국에 있었다는 것이다. 바벨탑을 세운 사람은 시나르 왕국의 님로드 왕이었다고 한다. 님로드는 노아의 증손자이며 함의 손자가 된다. 바벨이라는 말은 ‘신의 문’(Gate of God)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바벨탑에 대한 이야기를 러시아의 안톤 루빈슈타인(Anton Rubinstein: 1829-1894)이 2막의 오페라로 만들었다. 루빈슈타인의 <바벨 탑>(Der Thurm zu Babel)은 1870년 독일의 쾨니히스버그에서 처음 공연되었다. 루빈슈타인은 이 오페라를 종교 오페라(Geistliche Oper)라고 불렀다. 님로드 왕은 하늘에 닿을수 있는 높은 탑을 짓기로 한다. 아브라함이 님로드를 크게 책망하자 분노한 님로드는 아브라함을 타오르는 용광로 속에 던져 넣도록 한다. 사람들이 탑을 거의 완성하고 바알신을 찬양하자 하늘에서 천사들이 내려와서 탑을 부셔버린다. 님로드와 백성들은 큰 혼란에 빠진다. 천사와 악마들이 서로 승리했다고 주장한다는 내용이다. 구약의 창세기에 기록된 내용과는 차이가 있지만 일종의 종교교육적인 목적이므로 크게 탓할 바는 안된다. 루빈슈타인은 이밖에도 종교오페라로서 <마카베우스>, <그리스도>를 작곡했다.

 

루빈슈타인의 '바벨 탑'

 

로시니의 <세미라미데>(Semiramide)도 이락(바빌로니아)을 배경으로 삼은 오페라이다. 세미라미데는 주전 2천년 경 바빌로니아 니노 왕의 왕비로서 왕이 서거하자 후계자를 지정해야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던 여인이었다. 1823년 베니스의 라 페니체에서 초연되었다. 초연에서는 1년 전에 로시니와 결혼한 소프라노 이사벨라 콜브란이 세미라미데의 이미지를 창조했다. 대본은 볼테르의 ‘세미라미스의 비극’(La tragédie de Sémiramis)을 바탕으로 했다. 이 오페라에는 아시리아군 사령관인 아르사체도 나오고 인도왕 이드레노도 나온다. 그리고 무대에는 바알 신전과 바빌론 궁전, 그리고 전설적인 바빌론의 공중정원도 등장한다.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그랜드 오페라이다. <세미라미데>는 로시니의 마지막 이탈리아 오페라이다. 그후 로시니는 프랑스로 가서 지내며 파리의 관중들을 위한 오페라를 작곡하다가 홀연히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고 유유자적하는 여생을 즐기다가 세상을 떠났다.

 

'세미라미데'의 피날레 장면

 

[베르디의 '나부코'는 바빌로니아 느브갓네살 대왕의 이야기]

 

나부코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이다. 느브갓네살의 이탈리아어 표기가 나부코도노소르인데 이를 줄여서 나부코라고 부른 것이다. 나부코는 세상에서 가장 교만한 왕으로 이름나 있다. 나부코는 이집트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이어 유대 왕국을 공격하여 수도 예루살렘을 함락하였다. 나부코는 솔로몬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을 약탈하고 파괴하였다. 히브리 민족에게 솔로몬 성전은 여호와 하나님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런 성전을 이교도인 나부코가 파괴하였으며 나아가 그는 자기야 말로 왕이 아니라 유일신이라고 내세우고 만백성들에게 경배를 강요하였다. 그러하므로 나부코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교만한 인간이었다. 나부코에게는 두 딸이 있다. 큰 딸 아비가일은 실은 사생아로서 정통성이 없는 우상숭배자였다. 둘째 딸 페네나가 나부코의 정통성 있는 딸이다. 교만에 빠진 나부코는 아비가일의 간계에 빠져 왕좌를 빼앗기고 실성한 사람이 된다. 마침내 자기의 교만함을 깨우친 나부코는 자기가 무너트리고자 했던 히브리인들의 신 여호와에게 용서를 빌며 자기가 파괴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겠다고 약속한다. 나부코가 진심으로 참회하자 하나님의 능력이 나부코에게 임재한다. 나부코는 아비가일을 몰아내고 다시 바벨론 제국의 왕이 되며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이 된다. 오페라 '나부코'의 무대는 바벨론 제국과 예루살렘이다. 바벨론은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한다. 바벨론에 흐르는 강이 유브라데스 강이다. 유대 땅에서 바벨론으로 포로로 끌려온 히브리 사람들이 유브라데스 강가에 모여서 언제자 조국으로 돌아가서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할수 있을지를 노래하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외세의 압박을 받고 있는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커다란 용기를 불어 넣어주는 곡이 되었다.

 

바벨론의 왕좌에 오르는 아비가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