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추가로 읽는 366편

354. 이반 자이츠의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

정준극 2016. 5. 4. 19:53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Nikola Subic Zrinski)

이반 자이츠의 3막 역사오페라


크로아티아의 리예카 중심광장에 서 있는 이반 자이츠 기념상


크로아티아라는 나라가 있다. 발칸반도에 있는 공화국이다. 수도는 자그레브이다. 크로아티아의 서쪽은 아드리아해이다. 해안선을 따라서 섬이 1천여개나 흩어져 있어서 아름답다. 동쪽으로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북쪽으로는 슬로베니아, 헝가리와 국경을 유지하고 있다. 인구는 2015년 현재 약 4백30만명이다. 크로아티아는 수많은 영욕의 역사를 지닌 나라이다. 최근만해도 1차 대전 직후인 1918년부터는 신생 유고슬라비아에 속하여 지냈다. 그러다가 1991년에 독립을 선언하였으며 그후 세르비아, 보스니아 등과의 전쟁으로 처참한 피해를 입은 나라이다. 크로아티아라고 하면 우리는 전쟁 이외에 무엇을 연상하는가? 아마 축구를 잘 하는 나라 정도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국기가 참으로 특이하다는 생각을 한다. 서양 장기인 체스의 판처럼 생겼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크로아티아는 풍부한 문화전통을 지니고 있는 나라이다. 그런데 실상 우리는 크로아티아의 문화, 예술, 역사, 민족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에도 크로아티아 나름대로 고유 문화와 예술이 있다. 음악에 있어서는 이반 자이츠(Ivan Zaic: 1832-1914)를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크로아티아 음악의 아버지'로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이반 자이츠인데 글링카와 무소르그스키, 또는 드보르작이나 스메타나처럼 서방세계에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그런데 근자에 이르러 세계적으로 이반 자이츠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있다. 특히 그의 오페라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가 여러 나라로부터 관심을 받고 있다. 크로아티아 음악, 그리고 이반 자이츠에 대한 인식이 새로워지고 있다는 증거이다.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자기 나라를 흐르바츠카라고 부르기를 더 좋아한다. 흐르바츠카!)


크로아티아 처녀들의 춤

우보이, 우보이를 외치는 크로아티아의 병사들


이반 자이츠는 작곡가이면서 지휘자였고 음악감독이었으며 훌륭한 교사였다. 40여년간 음악활동을 하면서 크로아티아의 음악을 주도하였다. 그리하여 20세기에 크로아티아의 음악을 하나의 국민음악으로서 완성한 사람이다. 그만큼 조국 크로아티아를 사랑하였고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크로아티아의 베르디'라고 불렀다. 베르디가 이탈리아의 통일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했던 것을 비유해서이다. 그리고 이반 자이츠의 음악도 실은 베르디 스타일이 가미된 것이다. 이반 자이츠의 아버지는 체코의 후손이었으며 어머니는 독일계였다. 그러나 이반 자이츠에게 있어서 조국은 크로아티아 하나뿐이었다. 이반 자이츠는 이탈리아에서 음악교육을 받았고 비엔나에서 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고국으로 돌아가서 활동해야 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음악적 전통을 부흥시키려고 헌신하였으나 그렇다고 지나친 국수주의자, 또는 국민음악 작곡가는 아니라고 할수 있다. 오히려 차이코브스키처럼 국제적 개념을 가진 작곡가라고 말할수있다. 물론그의 음악에는 크로아티나의 선율이 이곳저곳에 담겨 있다. 그러나 가만히 들어보면 초기와 중기의 베르디 음악을 듣는 것같은 느낌을 준다. 이반 자이츠는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오페라와 오페레타만 20편이 넘게 작곡했다. 그는 오페레타를 뮤지컬 코미디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다. 그는 이밖에도 칸타나, 가곡, 합창곡, 협주곡, 실내악곡 등등을 작곡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실로 1천여편에 이른다. 그렇게 많은 작품을 남겼지만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오페라 '니콜라 수비츠 츠린스키'이다.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의 대본도 작곡자인 이반 자이츠가 만들었다.



니콜라와 병사들이 전투를 앞두고 신에게 자기들의 생명을 바치겠다고 기도하고 있다.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는 크로아티아는 물론이고 헝가리에서도 국가적인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서 혹시 크로아티아 사람들을 만나서 얘기를 나눌 기회가 있을 때에 '나는 말입니다.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를 참으로 위대하고 훌륭한 애국자라고 생각합니다'라는 식으로 말한다면 '아니, 당신이 어떻게 우리의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를 안다는 말이요'라면서 크게 감동을 하고 그때부터 더욱 친밀하게 될 것이다. 오페라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는 오토만 터키가 헝가리-크로아티아를 침공했을 때 비록 중과부적이어서 어쩔수 없이 패배하였지만 오토만 터키에게 커다란 타격을 준 1566년의 치게트바르(Szigetvar) 전투에 대한 이야기이다. 크로아티아인들의 터키에 대한 저항은 나아가 합스부르크에 대한 크로아티아의 저항의 불길을 지펴준 것이었다. 말하자면 크로아티아 국민들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보여준 전투였다. 이 오페라는 스토리도 스토리지만 음악도 매우 서정적이면서도 애국적이어서 깊은 감동을 준다. 특히 피날레에 나오는 크로아티아 병사들과 백성들의 합창인 '우 보이, 우 보이'(U boj, u boj!'(전쟁터로, 전쟁터로)는 크로아티아 국민들이라면 당연히 모두 아는 애국적인 노래이다. 우리는 '우 보이, 우 보이'라는 합창에 대하여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세계적으로는 널리 알려진 노래이다. 특히 일본에서는 진작부터 널리 알려져서 일본에서 이름난 남성합창단인 글리클럽은 '우 보이, 우 보이'를 단골 메뉴처럼 부르는 입장이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이반 자이츠가 '우 보이, 우 보이'를 작곡한 것은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를 완성하기 10년 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반 자이츠는그런 애국적인 노래가 필요할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 둔 것이다. 


우 보이, 우 보이. 크로아티아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애국적인 노래이다.


오페라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의 스토리를 자세히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 보다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치게트바르 전투에 대하여 설명하고 아울러 당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 오토만 제국에 대한 배경설명을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이 오페라는 치게트바르 전투를 내용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로맨틱한 장면도 몇번 나오지만 그거야 일반적인 사항이라서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된다. 우선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보자. 헝가리에서는 즈리니 미클로스(Zrinyi Miklos)라고 불리는 니콜라 즈린스키는 크로아티아의 귀족이다. 그래서 헝가리나 마찬가지로 보통 반(ban) 즈린스키라고도 부른다. 반이라는 것은 지체 높은 귀족을 일컫는 호칭이다. 당시는 크로아티아가 독립된 나라가 아니고 합스부르크 왕조에 속한 영토이기 때문에 니콜라도 합스부르크의 장군으로서의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니콜라가 유럽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은 치게트바르 전투의 영웅이기 때문이다. 니콜라는 1508년 자그레브에서 니콜라 즈린스키 3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역시 크로아티아의 지체높은 귀족인 이반 칼로비치의 여동생인 옐레나 칼로비치였다. 합스부르크의 장군이 된 니콜라는 1529년 오토만 터키의 제1차 비엔나 공성 때에 용맹을 떨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어 1542년에는 헝가리의 페스트에서 오토만군의 공격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군을 4백명 크로아티아 용사들을 이끌로 구출하여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래서 크로아티아의 반(가장 지체 높은 귀족: 태수 또는 총독의 직위)의 반열에 들어가게 되었다. 니콜라는 반의 칭호를 받은 다음 해인 1543년에 오잘리의 스테픈 프랑코판 백작의 여동생인 카테리나와 결혼하였다. 카테리나는 그가 상속받은 넓은 영지를 니콜라로 하여금 관장토록 했다. 헝가리의 페르디난드 1세 국왕은 오토만 터키군을 물리친 니콜라의 전공을 크게 치하하여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에 있는 국왕 소유의 영지 중에서 상당 부분을 니콜라에게 하사하였다. 이로써 니콜라는 크로아티아 뿐만 아니라 헝가리에서도 지체 높은 귀족으로서 지내게 되었다. 



술레이만의 하렘에서 무회들이 술레이만을 위로하기 위해 춤을 추고 있다.


니콜라 즈린스키는 1556년에도 오토만 터키와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때에 오토만 터키로부터 함락당할 뻔했던 치게트바르 요새를 무사히 방어하였다. 1563년에는 합스부르크의 막시밀리안 황제가 헝가리의 왕으로 대관식을 가졌다. 이때 니콜라는 크로아티아와 헝가리의 귀족으로 구성된 3천명 기병대를 이끌고 막시밀리안의 대관식에 참석했다. 니콜라는 막시밀리안 황제가 자기를 높이 평가하여 변경백의 직위를 줄 것으로 희망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콜라는 합스부르크에 충성키로 했다. 니콜라의 첫번째 부인인 카테리나가 세상을 떠나자 얼마후 그는 보헤미아의 귀족인 로젠버그의 에바와 재혼하였다. 그때 오토만 터키가 또 다시 크로아티아의 국경을 침공하자 니콜라는 군대를 이끌고 가서 체게드(Szeged)에서 오토만을 물리쳤다. 니콜라는 1566년 8월 5일부터 9월 7일까지 한달이 넘도록 2천 3백명 병사들과 함께 치게트바르를 함락코자 하는 오토만의 군대에 대하여 항전을 계속하였다. 그때 오토만의 군대는 무려 10만이 넘는 대군이었다. 더구나 오토만군은 술레이만이 직접 이끄는 것이었다. 니콜라는 병사들과 함께 한달이 넘게 항쟁했지만 결국은 중과부적이어서 치게트바르를 오토만의 수중으로 넘겨주었다. 이때 니콜라가 전사했으며 그가 이끄는 병사들은 단 한명 까지 모두 전사하는 위대한 전투를 치루어서 비록 치게트바르가 함락되었지만 오토만에게 말할수 없는 타격을 주었다. 오토만의 술레이만 대제는 치게트바르가 함락되기 하루 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니콜라의 마지막 전투인 비극적인 '치게트바르 전투'는 크로아티아 문학의 주제로서 자주 다루어졌다. 예를 들어서 독일의 시인인 테오도르 쾨르너(Theodor Korner: 1791-1813)는 Zrinyi: Ein Trauerspiel을 남겼다.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 훈장'은 크로아티아 최고의 국가훈장이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에는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 공원'(Trg Nikole Subica Zrinskog)가 있다. 17세기 헝가리-크로아티아의 지체 높은 귀족(반)이며 시인인 니콜라 즈린스키(1620-1664: 동명이인)가 '치게트 함락'(Peril of Sziget)라는 대서사시를 쓴 것이 있다. 이 작품에는 물론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의 전공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이 대서사시는 오늘날에도 헝가리문학의 랜드마크로 알려져 있다. 



니콜라가 사랑하는 부인과 딸과 작별을 고하고 있다.


치게트바르 전투(Battle of Szigetvar: Battle of Szige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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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에 대제국을 이룬 오토만 터키는 유럽 중심지까지 영토로 삼고 싶어서 자꾸 서진을 계속하였다. 그러다가 헝가리에 와서 우선 길이 막혔다. 당시 헝가리 왕국은 합스부르크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지만 마치 별도의 독립왕국처럼 행세하고 있었고 또한 남쪽의 크로아티아까지 헝가리 왕국에 포함시켜 놓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본거지인 비엔나부터 점령하고 싶었던 오토만 터키는 우선 헝가리부터 집어 삼켜야 했다. 당시 헝가리 왕은 루이 2세였다. 루이 2세가 이끄는 헝가리군과 술레이만이 이끄는 오토만군은 헝가리의 모하츠에서 일전을 치루게 되었다. 1526년 8월의 일이었다. 루이 2세는 모하츠 전투에서 오토만 군대를 물리쳤지만 안타깝게도 전사했다. 그러나 후사가 없어서 결국 루이 2세의 헝가리 왕국은 종말을 고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이제 헝가리와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와 오토만 터키가 서로 연고권을 주장하는 분쟁지역으로 남게 되었다.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귀족들은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드 1세를 새로운 헝가리 국왕으로 선출하였다. 페르디난드 1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샤를르 5세의 동생이었고 더구나 모하츠 전투에서 전사한 루이 2세의 여동생과 결혼한 상황이었다. 그러므로 헝가리 왕국으로서는 그나마 가장 연고권이 있는 인물로서 페르디난트 1세를 새로운 국왕으로 선출한 것이다. 그러자 헝가리 왕국의 일부 지역인 트란실바니아의 존 자폴랴(John Zapolya)가 자기야 말로 헝가리왕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면서 이의를 제기했다. 그냥 이의만 제기하면 별다른 문제가 없이 서로 협의하여 해결점을 찾으면 되는데 언제나 그렇듯이 왕위계승문제가 걸리면 전쟁을 해서 결판을 내는 실정이었다. 헝가리의 왕위를 두고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드와 트란실바니아의 자폴랴도 건곤일척의 전쟁을 마다하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는 차에 오토만 터키의 술레이만이 자폴랴를 지원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페르디난드는 헝가리의 왕권을 수호한다는 명목아래 군대를 이끌고 자폴랴가 점거하고 있는 부다를 공격하여 1527년에 자폴랴로부터 부다를 탈환하였다. 그러자 잠시후에는 자폴랴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오토만의 술레이만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헝가리 영토에서 페르디난드를 축출하였다. 술레이만은 내친 김에 합스부르크의 거점인 비엔나를 공략하여 수중에 넣고자 했다. 그것이 저 유명한 1529년의 제1차 비엔나 공성이었다. 오토만 제국의 비엔나 공성은 오토만 세력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오토만은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를 함락하면 그로부터 중부유럽을 점령할수 있는 발판이 된다고 믿었다. 그러나 역병과 기후 등 여러 이유로 인하여 오토만은 비엔나를 함락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니콜라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오토만 터키의 술레이만은 1566년에 또 다시 비엔나를 공략키로 결정하였다. 그런데 비엔나로 가려면 치게트바르 요새를 거쳐야 했다. 치게트바르 요새는 과거에 여러번이나 오토만 터키군을 곤경에 빠트렸던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 장군이 지휘를 하였다. 전투는 1566년 8월부터 한달간 계속되었다. 합스부르크 측은 헝가리 왕국과 크로아티아 왕국의 군대로 편성되었다. 오토만제국은 자체 군대와 몰다비아의 군대로 편성되었다. 오토만측의 병력은 10만이었다. 오토만 터키군이 8만이고 타타르 병사가 1만 5천이었으며 몰다비아 병사가 7천이었다. 반면에 합스부르크 측은 3천도 되지 않는 병력이었고 한달 후에는 그동안 많은 병사가 죽거나 부상을 당해서 싸울수 있는 병사가 6백명도 채 안되었다. 합스부르크 측은 한달이 넘도록 요새를 방어하면서 오토만 군대에게 많은 타격을 주었다. 오토만의 병사들은 무려 2만 내지 3만이 전투 중에 죽었으며 또한 상당수가 전염병에 걸려 죽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합스부르크 측은 3천 병사가 결국 모두 옥쇄했다. 그리고 오토만 제국이 결국은 치게트바르 요새를 함락하였다. 하지만 씁쓸한 승리였다. 오토만 제국은 치게트바르 요새 일대를 부딘 에야레트(Budin Eyalet) 지역에 속하도록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전투의 마지막에 합스부르크군의 사령관인 니콜라 수비츠 즈린스키가 전사했다. 한편, 오토만 측에서는 술레이만이 치게트바르 요새를 함락하기 하루 전에 뇌출혈로 사망했다. 



술레이만의 병세가 악화되자 신하들이 걱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