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60.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

정준극 2016. 9. 10. 14:36

티토의 자비(La clemenza di Tito) - The Clemency of Titus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보헤미아 국왕 레오폴드 2세 대관식 기념...프라하에서 초연


로마 황제 티토(티투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가 어떤 것이냐를 두고 의견들이 있다. '티토의 자비'와 '마술피리'가 논란의 대상이다. 모차르트의 생애에서 어떤 오페라가 가장 마지막으로 공연되었느냐를 두고 본다면 '마술피리'가 마지막 오페라이다. '티토의 자비'는 1791년 9월 6일 프라하에서 초연되었지만 '마술피리'는 1791년 9월 30일에 비엔나에서 첫 공연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곡을 시작한 순번으로 본다면 '티토의 자비'가 마지막이다. 모차르트가 '티토의 자비'를 작곡하기 시작한 것은 대체로 1791년 7월부터이다. 그러나 '마술피리'는 이미 그 전부터 작곡을 추진하고 있었다. 다만, 사정상 '마술피리'의 완성이 늦었을 뿐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티토의 자비'가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모차르트의 전체 작품을 일련번호로 정리한 루드비히 케헬(Ludwig Alois Friedrich Ritter von Köchel: 1800-1877)도 '마술피리'를 K 620로 정리했고 '티토의 자비'는 K 621로 정리했다. 참고로 말하자면 오페라로서는 '티토의 자비'가 마지막 작품으로 간주하지만 모차르트의 작품 모두를 두고 볼 때 사실상 마지막 작품은 레퀴엠이다. K 626번이다.  다 아는대로 모차르트는 '마술피리'의 초연이 있은지 두 달여 후인 12월 5일 세상을 떠났다. 레퀴엠(진혼곡)은 미완성으로 남겨 놓았고 그의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가 완성하였다.


모차르트의 마지막 오페라가 '마술피리'인지 '티토의 자비'인지에 대한 논란이 있다. 사진은 1815년 '마술피리'  공연에서 '밤의 여왕'의 등장 장면


오페라 '티토의 자비'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보헤미아의 왕인 레오폴드 2세의 대관식을 경축하기 위해 작곡된 것이다. 레오폴드 2세는 형인 요셉 2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요셉 2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 보헤미아의 왕, 헝가리의 왕이 되었다. 요셉 2세는 연고가 있는 지역마다 찾아가서 별도의 대관식을 갖는 것으로 자기의 위세를 한껏 보이고자 했다. 레오폴드 2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1790년 9월 30일에 대관식을 가졌으며 헝가리 왕으로서는 그해 11월에 대관식을 가졌다. 레오폴드 2세는 보헤미아의 정세 때문에 보헤미아 왕으로서의 대관식은 즉시 가지지 못했고 이런 저런 사유로 다음해 9월에나 가지기로 했다. 보헤미아의 왕으로서 대관식은 당연히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인 프라하에 가서 갖기로 했다. 프라하는 레오폴드 2세의 대관식을 위해 여러가지로 신경을 쓰는 중에 프라하국립극장도 무언가 해야 했다. 당시 프라하의 국립극장인 에스테이트 극장(Estates Theater)은 오페라 임프레사리오(흥행가)인 이탈리아 출신의 도메니코 과르다소니(Domenico Guardasoni)에게 부탁하여 경축 오페라를 새로 작곡해서 공연토록 했고 이에 과르다소니는 7월 중순에 모차르트에게 새로운 오페라의 작곡을 요청했던 것이다. 당시에 모차르트는 친구 에마누엘 쉬카네더의 부탁으로 '마술피리'를 작곡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갑자기 프라하로부터 새로운 오페라를 하나 작곡해 달라는 요청이 있자 우선 레오폴드 2세의 대관식을 경축하는 것이라고 하니 미상불 새로운 황제와의 관계가 가까워지기를 바라는 입장에서 작곡을 하지 선뜻 그러자고 약속했다. 실제로 모차르트는 프라하로부터 모차르트가 비엔나에서 오페라 작곡료로 받았던 액수의 더블을 받았다. 그러니 별로 돈도 많이 받지 못하는 '마술피리'에 열중할 필요가 없었다. 대관식을 9월 6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임프레사리오인 과르다소니가 내놓은 대본이 '티토의 자비'였다. 원래 로마 출신으로 비엔나에서 활동했던 위대한 극본가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Pietro Metastasio: 1698-1782)가 극본을 쓴 것인데 이것을 이탈리아의 시인이며 대본가로서 당시 비엔나 궁정시인으로 봉사하고 있는 카테리노 마쫄라(Caterino Mazzola: 1745-1806)가 오페라 대본으로 만든 것이다. [에스테이트라는 단어는 영주 또는 귀족이라는 뜻이다.] 한편, 과르다소니는 모차르트에게 오페라의 작곡을 부탁하기 전에 그는 먼저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에게 부탁했었다. 살리에리는 당시 궁정작곡가여서 그에게 부탁하는 것은 당연한 처사였다. 그런데 살리에리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바뻐서 맡지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그래서 결국 모차르트에게 부탁이 갔던 것이다. 살리에리는 바쁘다면서 프라하에서의 레오폴드 2세 대관식에는 참석을 했다.


'티토의 자비'가 초연된 프라하의 에스테이츠 극장


로마제국의 티토(티투스) 황제의 자비를 내용으로 삼은 대본을 오페라로 만들기로 한 것은 당시 보헤미아 왕국과 신임 레오폴드 2세와의 관계를 생각할 때에 적절한 배려였다. 레오폴드 2세의 형인 전임 요셉 2세는 뛰어난 계몽군주였다. 요셉 2세는 보헤미아의 봉건사회를 개혁코자 했다. 그래서 보헤미아의 농노들을 해방시키고 귀족들에게 더 많은 세금을 물리는 일련의 개혁정책을 추진코자 했다. 당연히 봉건 영주들과 귀족들의 반발이 심했다. 심지어는 비엔나 황실에 저항하는 대대적인 봉기가 일어날 기미조차 보였다. 당시는 그러지않아도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귀족들이 위기감을 가지고 무언가 단결된 행동을 보여주고자 하던 때여서 제국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게 하려면 귀족들의 마음을 진정시킬 모종의 조치가 필요했다. 레오폴드 2세는 귀족들을 포함한 제후들이야말로 제국을 떠받치는 기둥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는 중에 요셉 2세가 1790년 2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고 동생인  레오폴드 2세가 새로운 군주가 되었다. 요셉 2세는 보헤미아 귀족들과 화평하게 지내면서도 왕으로서의 권위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우선 농노해방을 없던 것으로 되돌렸다.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그제서야 레오폴드 2세를 환영하였다. 비엔나 당국으로서는 레오폴드 2세가 대단히 자비스러운 군주라는 것을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었다. 대관식 경축 오페라의 내용을 '티토의 자비'로 택한 것은 그런 배경에서였다. 로마제국의 티토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를 아주 간단히만 소개하자면, 그는 기원후 79년부터 81년까지 단 2년 동안만 로마제국의 황제로 재직했던 양반이다. 티토는 39년에 태어났으니까 40이 넘어서야 황제가 된 사람이다. 티토는 용감한 군인이어서 유대의 로마총독이던 아버지를 도와서 7년에 걸친 1차 유대-로마 전쟁에 참전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 티토의 아버지가 황제였던 비텔리오를 추방하고 황제가 되었다. 그래서 티토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티토가 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티토의 동생인 도미티안이 황제가 되려는 욕심으로 형인 티토를 살해한 것이다. 그나저나 티토가 황제로 있을 때에 저 유명한 베스비우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가 재가 되었다.  또한 로마의 랜드마크인 콜로세움은 티토가 황제로 있을 때에 완성한 건축물이다. 티토의 어떤 자비를 보였기에 '티토의 자비'라는 극본이 나오게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나중에 이 오페라의 스토리를 소개한 것을 읽어보면 알수 있다.


 

요셉 2세(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큰 아들). 레오폴도 2세(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둘째 아들). 모차르트의 '티토의 자비'는 레오폴드 2세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된 오페라이다.  요셉 2세는 모차르트에게 독일어 대본의 오페라인 '후궁에서의 도주'를 작곡토록 의뢰한 사람이다.


사실상 대본을 정할 때에도 사연은 있었다. 임프레사리오인 과르다소니는 프라하국립극장으로부터 대관식 경축 오페라의 부탁을 받고서 자기가 잘 아는 카스트라토를 주역으로 삼은 오페라를 만들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모차르트에게 그런 오페라를 만들어 달라고 귀띰을 해주었다. 과르다소니는 프라하에서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를 무대에 올린 일이 있어서 모차르트와는 무관한 사이가 아니었다. 하기야 과르다소니는 젊은 모차르트의 뛰어난 재능을 익히 알고 있어서 살리에리가 이유를 대고 작곡을 거절하자 다른 사람이 아닌 모차르트에게 작곡을 부탁한 것을 정말로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과르다소니의 그러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는 카스트라토를 주역으로 삼는 것을 별로 내키지 않아했다. 여자 주인공이라면 소프라노가 맡으면 된다는 생각에서였다. 하기야 모차르트는 자기의 오페라에서 여자 주인공을 대신하여 남자 카스트라토를 기용한 일이 거의 없었다. 과르다소니는 모차르트에게 신임 국왕의 대관식에 적합한 대본을 구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마땅한 대본을 구하지 못했다. 과르다소니는 모차르트에게 만일 적당한 대본을 제 때에 구하지 못하면 메타스타시오의 기존 대본인 '티토의 자비'를 사용한다는 약속을 했던 터였다. 결국 늦은 감이 있지만 '티토의 자비'가 최종 대본으로 확정되었다.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은 처음 발표된 이래 내용이 참으로 좋다고 하여서 거의 40명이나 되는 작곡가들이 오페라로 만들었을 만큼 인기있는 대본이었다. 하기야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은 너도나도 오페라로 만들고 싶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원래 메타스타시오의 '티토의 자비'는 1734년에 완성된 것으로 이탈리아의 작곡가 안토니오 칼다라(Antonio Caldara)를 위해서였다. 메타스타시오는 로마제국 시대의 작가인 수에토니우스(Suenonius)의 '황제들의 생애'(The Lives of the Caesars)에서 힌트를 얻어서 '티토의 자비'를 썼다고 한다. 그리하여 안토니오 칼다라의 '티토의 자비'가 나왔으며 그런 이후에도 여러 작곡가들이 제각기 오페라로 만들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1752년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룩이 작곡한 것과 1774년에 프라하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요제프 미슬리베체크(Josef Myslivecek: 1737-1781)가 작곡한 것을 들수 있다. 그것을 다시 모차르트가 오페라로 만들게 되었는데 메타스타시오의 오리지널 대본을 그대로 사용하지 않고 당시 궁정시인이었던 이탈리아 출신의 카테리노 마쫄라가 모차르트의 구미에 맞도록 수정하였다. 모차르트는 마쫄라의 수정본을 크게 흡족해 했다. 예를 들어 마쫄라는 1막에서 원래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에서 레시타티브와 아리아로 되어 있는 부분을 되도록이면 앙상블로 대체한 것이다.


 

'티토의 자비'의 오리지널 대본을 쓴  피에트로 메타스타시오와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을 모차르트의 취향에 맞게 수정한 시인 카테리노 마쫄라. 둘다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서 활동했다.


모차르트의 자서전 작가인 니메체크(Niemetschek)는 모차르트가 '티토의 자비'를 불과 18일만에 완성했다고 주장했다. 모차르트는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간단한 레시타티브 파트는 다른 사람에게 만들도록 했다고 한다. 모차르트의 제자인 프란츠 사버 쥐쓰마이르일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하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는 증거는 없다. 다른 음악학자들은 18일은 더 걸렸을 것이라는 주장들이다. 어떤 학자는 모차르트가 실은 오페라 작곡을 부탁 받은 1791년보다 2년 전인 1789년부터 누구의 부탁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작곡을 시작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어쨋든 오페라의 역사에서 가장 단시간 내에 완성된 작품의 하나로 거론되고 있기는 하다. 단기간 작곡이라고 하면 로시니를 빼놓을 수는 없다. '알제리의 이탈리아 여인', '세빌리아의 이발사', '라 체네렌톨라' 등 모두 기록적인 단기간에 작곡되었다. '티토의 자비'도 18일이 되었던지 또는 한달이 되었던지 그러한 서열에 들어간다. 레오폴드 2세는 자기의 대관식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된 '티토의 자비'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졌을까? 레오폴드 2세의 형인 요셉 2세는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었다. 심지어 작곡도 했고 피아노 연주도 웬만큼 했다. 그런데 동생인 레오폴드 2세는 음악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레오폴드 2세가 '티토의 자비'에 대하여 코멘트한 내용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의 부인인 스페인의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는 '티토의 자비'를 아주 비하하여서 '독일 돼지같다'라고 표현했다. 독일식의 뒤죽박죽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후세의 모든 음악학자들은 '티토의 자비'를 걸작으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고 있다.


2015년 메트로폴리탄 무대. 비텔리아(바바라 프리톨리)와 세스투스(엘리나 가란차)


프라하에서의 초연은 1791년 9월 6일 레오폴드 2세가 대관식을 가진지 몇 시간 후에 에스테이츠 극장에서 이루어졌다. 레오폴드 2세가 '티토의 자비'의 초연을 참관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다. 아마 참관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일반을 위한 공연은 황제를 위한 초연이 있은지 몇 시간 후에스테이트 극장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티토의 자비'는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상당기간 동안 자주 공연되었다. '티토의 자비'는 모차르트의 오페라로서는 런던에서 처음 공연된 것이었다. 1806년 3월에 런던의 여왕폐하극장에서 공연되었다. 하지만 런던 공연은 단 1회였고 더 이상 공연은 없었다. 런던에서 리바이발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인 1957년 성판크라스 페스티발(St Pancras Festival)에서였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처음 공연된 것은 1818년 12월이었다. 미국 초연은 1952년 8월 탱글우드의 버크셔 뮤직 센터에서였다. 최근에 들어서서 '티토의 자비'는 다행하게도 상당한 인기를 끌고 공연되고 있다. '티토의 자비'는 초기에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어떤 평론가는 '티토의 자비'를 모차르트가 정신이 없는 가운데 서둘러서 작곡한 것이어서 모차르트의 진면목을 찾아 보기 힘든 작품이라고 말했다. 또 어떤 평론가는 주인공인 티토는 관대한 척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고 말하고 그런 의미에서 특성이 없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재평가되고 있다. 그래서 스탠리 새디()와 같은 저명 평론가는 '티토의 자비'를 절제되어 있으며 고귀함과 따듯함이 배어 있는 작품으로 세속적인 다른 오페라들에게 자극제가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스웨덴 드로트닝홀름 페스티발의 무대


주요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세스토는 원래 소프라노 카스트라토를 배역으로 삼았으나 오늘날에는 메조소프라고가 맡는다. 아니오는 바지역할이다. 시기는 기원후 79년이며 장소는 로마이다.


- 티토 베스파시안(Tito Vespasian: T). 로마 황제

- 비텔리아(Vitelia: S). 황제의 자리에서 추방 당한 비텔리오의 딸.     

- 세스토(Sesto: S Castrato: MS). 티토의 친구. 비텔리아를 사랑하고 있는 젊은 귀족(집정관)

- 아니오(Annio: S). 세스토의 친구. 세르빌리아를 사랑하고 있는 젊은 귀족(집정관).

- 세르빌리아(Servilia: S). 세스토의 여동생. 아니오를 사랑하고 있다.

- 푸블리오(Publio: B). 프레토리아니 근위대장(로마 황제를 경호하고 비밀경찰 업무까지 맡아하는 특별 부대의 대장)


브뤼셀 라 모네의 무대


[1막] 비텔리아는 티토 황제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 왜냐하면 티토의 아버지가 황제였던 비텔리아의 아버지를 폐위시키고 추방했기 때문이다. 비텔리아는 어떻게 복수를 할 것인가를 궁리하다가 세스토를 이용하기로 한다. 세스토는 티토의 막역한 친구이다. 하지만 사람이 좀 결단력이 부족해서 무슨 일을 결정할 때에 망설이는 경향이 있다. 그나저나 세스토는 비텔리아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러므로 비텔리아는 세스토가 자기를 사랑한다면 자기의 소원을 들어 주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비텔리아와 세스토의 듀엣이 Come ti piace, imponi 이다. 한편, 비텔리아는 원래 황비가 되고 싶은 야망이 있다. 황비가 되면 그 권한으로 아버지에 대한 복수도 할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티토가 자기와 결혼하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할 생각이다. 그런데 티토와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인이 따로 있다. 예루살렘에서 온 칠리치아의 공주 베레니체(Berenice)이다. 어느날 비텔리아가 소문을 들어보니 티토가 베레니체를 예루살렘으로 돌려 보냈다는 것이다. 비텔리아는 베레니체에 대하여 질투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비텔리아는 티토가 자기를 황비로 선택해 주기를 바란다. 비텔리아의 아리아가 Deh, se piacer mi vuor 이다. 이어 비텔리아는 세스토에게 티토를 제거하는 계획을 연기하자고 말한다.


원로회의 장면. 브뤼셀 라 모네


그런데 티토는 비텔리아의 여동생인 세르빌리아를 황비로 삼을 생각이다. 티토는 그와 같은 내용을 아니오로 하여금 세르빌리아에게 전하도록 지시한다. 티토의 아리아가 Del piu sublime soglio 이다. 세스토의 친구이기도 한 아니오는 세르빌리아와 은밀히 사랑하는 사이이다. 티토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티토가 세르빌리아와 결혼하겠다는 생각은 아니오와 세르빌리아 모두에게 아주 난처한 뉴스가 아닐수 없다. 아니오의 얘기를 들은 세르빌리아는 가슴이 메어지는듯 하다. 아니오와 세르빌리아의 듀엣이 Ah, perdona al primo affetto 이다. 세르빌리아는 티토를 직접 만나서 사실을 얘기하고 황제의 선처를 구할 생각이다. 하지만 황제가 자기와 결혼하겠다고 계속 주장하면 황제의 명령이기 때문에 어쩔수 없다는 생각도 한다. 세르빌리아는 용감하게 티토 황제에게 가서 자기는 아니오를 사랑하므로 황제와 결혼할수 없다고 말한다. 티토는 세르빌라의 용기와 진정성에 감탄하여서 세르빌리아와의 결혼을 생각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티토의 아리아가 Ah, se fosse intomo al trono 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아리아 중에서 가장 고난도의 아리아의 하나이다.


잉글리쉬 투어링 오페라. 세스토와 아니오


한편, 비텔리아는 티토가 자기의 여동생인 세르빌리아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금 질투심이 끓어 오른다. 그래서 세스토에게 어서 속히 티토를 암살하라고 다그친다. 세스토는 어쩔수 없이 비텔리아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한다. 세스토의 아리아가 이 오페라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다. Parto, parto, ma tu, ben mio 이다. 바셋 클라리넷의 오블리가토가 훌륭한 곡이다. 세스토가 황궁으로 떠나자 뒤를 이어 아니오와 황궁 수비대장인 푸블리오가 비텔리아를 티토에게 데려 가려고 찾아 온다. 티토는 새로운 황비로서 비텔리아를 선택했다는 것다. 비텔리아는 자기가 티토를 증오하고 죽이려고까지 한 것에 대하여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면서 방금 전 티토를 암살하려고 세스토를 보낸 것이 어떻게 되었는지 걱정이 되어서 죽을 지경이다. 한편, 주피터 신전에 도착한 세스토는 어떻게 하는 것이 양심을 따르는 것인지 갈등한다. 세스토의 레시타티브가 Oh Dei, che smania e questa 이다. 세스토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우선 주피터 신전에 불을 놓는다. 티토와 다른 사람들이 신선에 도착해서 보니 신전이 불에 타고 있어서 크게 당황한다. 혼란 중에 세스토가 다시 나타나서 티토가 칼에 찔려 죽임을 당했다고 발표한다. 그러자 비텔리아가 급히 세스토를 가로 막으며 그런 얘기를 떠들면 황제를 암살한 장본인으로 오해를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티토의 죽음을 슬퍼하는 중에 막이 내린다.


잉글리쉬 투어링 오페라. 세스토


[2막] 아니오가 세스토에게 티토 황제가 실은 죽지 않고 살아 있다고 말한다. 신전이 불에 타고 있는 혼란 중에 세스토가 죽였다는 사람은 티토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던 것이다. 일이 크게 잘못된 것을 안 세스토는 당장 로마를 떠나고자 한다. 그러자 아니오가 세스토를 말리면서 아무리 도피하더라도 티토 황제의 손에서 벗어날수는 없으니 그대로 명예롭게 운명을 받아 들이는 것이 좋겠다고 설득한다. 두 사람의 듀엣이 Toma di Tito a lato 이다. 곧이어 근위대장 푸블리오가 세스토를 체포하러 나타난다. 그런데 전하는 소식을 들으니 세스토의 부하 한사람이 무슨 생각을 했던지 티토의 복장을 하고 있어서 세스토가 그 사람이 티토인줄 알고 죽이고자 했는데 실제로 그 사람은 죽지는 않고 부상만 입었다는 내용이다. 체포된 세스토는 원로회의 앞에 서서 재판을 받는다. 티토는 친구인 세스토의 혐의가 벗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푸블리오는 세스토의 반역죄는 당연하다고 말하면서 원로회로 증언을 하기 위해 떠난다. 푸블리오의 아리아가 Tardi s'avvede d'un tradimento 이다. 아니오는 티토에게 세스토는 친구이니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간청한다. 아니오의 아리아가 Tu fosti tradito 이다. 푸블리오가 나타나서 세스토에게 유죄판결이 났다로 전하며 이제 세스토의 처형을 허락하는 황제의 서명만이 남아 있다고 말한다.


액상 프로방스 페스티발 공연


티토는 우선 세스토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사람을 보낸다. 세스토는 모든 것을 자기의 혼자의 책임으로 돌리고 그러므로 처형 당해야 마땅하다고 말한다. 세스토의 론도가 Deh, per questo istant solo 이다. 티토는 세스토가 자기의 책임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에 어쩔수가 없는 심정이다. 그렇지만 마음 속으로는 친구를 죽여야 하는 갈등 때문에 괴로워한다. 티토는 마침내 세스토를 사형에 처한다는 문서를 찢어 버린다. 티토는 세스토에게 잘못이 있다면 자기에게도 잘못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세스토를 비난하기 전에 자기를 비난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티토는 원로회가 세스토의 처형을 결정했기 때문에 아무리 황제라고 해도 거부하기가 어렵다는 것도 알고 있다. 티토는 복수의 마음을 갖는 것보다는 자비의 마음을 갖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티토의 유명한 아리아가 Se all'impero 이다. 이 지경에 이르러 비텔리아의 마음은 후회로 넘친다. 비텔리아의 그런 모습을 본 세르빌리아가 비텔리아에게 눈물만 흘리면서 슬퍼한다고 해서 세스토를 구원할수는 없다고 말한다. 세르빌리아의 아리아가 S'altro che lagrime 이다. 마침내 비텔리아는 모든 것을 티토에게 고백하기로 결심한다. 비텔리아는 황후가 되어 아버지의 제국을 다시 일으키려는 희망을 포기한다. 비텔리아의 론도가 Non piu di fiori 이다. 역시 바세트 혼의 오블리가토가 아름다운 곡이다. 세스토를 비롯해서 반역에 가담했던 장교들이 원형극장으로 끌려 온다. 맹수들에게 던져 먹히도록 할 계획이다. 이제 남은 것은 마지막으로 황제의 결정이다. 그때 비텔리아가 황제의 앞에 나와서 세스토의 반역은 모두 자기가 꾸민 것이라고 고백한다. 그 말을 들은 티토가 크게 충격을 받지만 이내 자비의 마음으로 비텔리아에게도 자비를 베풀기로 한다. 티토의 레시타티브가 Ma che giorno e mai questo? 이다. 오페라는 모든 신하들이 티토 황제의 자비를 높이 치하하는 중에 막을 내린다.


피날레 장면. 메트로폴리탄 무대


'티토의 자비'가 처음 음반으로 나온 것은 1967년이다. 베르너 크렌(Werner Krenn), 마리아 카술라(Maria Casula), 테레사 베르간사(Teresa Berganza), 브리기트 화쓰밴더(Berigitte Fassbaender), 루치아 폽(Lucia Popp), 투고미르 프랑크(Tugomir Franc) 등이 주역을 맡았으며 이스트반 케르체츠(Istvan Kertesz)가 지휘하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의 연주였다. 최근의 음반으로서는 2005년에 세개나 출반된 것이 있다. 하나는 챨스 맥케라스(Charles Mackerras)가 지휘하는 스코틀란드 실내 오케스트라와 스코틀란드 바로크 합창단의 연주, 그리고 라이너 트로스트(Rainer Trost), 힐레비 마르틴펠토(Hillevi Martinpelto), 마그달레나 코체나(Magdalena Kozena), 크리스틴 라이스(Christine Rice), 리사 밀네(Lisa Milne) 등이 주역을 맡은 것으로 도이치 그라마폰이 제작한 것이다. 두번째는 르네 야콥스(Rene Jakobs)가 지휘하는 프라이부르크 바로크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리아스(RIAS) 실내 합창단의 연주, 그리고 마크 파드모어(Mark Padmore), 알렉산드리나 펜다챤스카(Alexandrina Pendatchanska), 베르나르다 핑크(Bernarda Fink), 마리 클로드 샤푸이스(Marie-Claude Chappuis), 임선해(Sunhae Im) 등이 주역을 맡은 것이다. 마지막은 실뱅 캠브렐링)Sylvain Cambreling)이 파리 국립오페라의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지휘한 것으로 크리스토프 프레가르디앙(Christoph Pregardien), 캐서린 네글슈타드(Catherine Neglestad), 수잔 그레이엄(Susan Graham), 에카테리나 시우리나(Ekaterina Siurina), 한나 에스터 미누티요(Hannah Esther Minutillo) 등이 주역을 맡은 것이다.


파리 오페라. 티토에 사이미르 피구르


* 프라하의 에스테이츠 극장에서는 1787년 모차르트의 '돈 조반니'가 모차르트의 지휘로 초연되었다. 이 극장을 거친 지휘자들로서는 칼 마리아 폰 베버, 러시아의 안톤 루빈슈타인, 헝가리 출신의 칼 골드마크, 구스타브 말러 등이 있다. 물론 모차르트도 포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