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오페라 집중 소개/집중탐구 150편

74. 조지 프레데릭 헨델의 '베레니체'(Berenice)

정준극 2016. 10. 17. 07:19

베레니체(Berenice) - 베레니스 - 베레니케(Berenike)

헨델의 3막 해피엔딩


조지 프리데릭 헨델


'베레니체'는 조지 프리데릭 헨델이 작곡한 3막의 오페라이다. 일찍이 헨델이 이탈리아에 있을 때인 1709년, 즉 그가 23세 때에 완성한 오페라이다. 오리지널 타이틀은 '이집트의 여왕 베레니체'(Berenice, regina d'Egitto)였다. 그것을 무려 28년 후인 1737년에 런던의 코벤트 가든 극장에서 처음 공연할 때에 제목을 간단히 '베레니체'라고 바꾸었다. 이탈리아어 대본은 안토니오 살비(Antonio Salvi: 1664-1724)가 썼다. 안토니오 살비는 의사이면서 시인, 대본가인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메디치가의 페르디난도 공자는 특히 안토니오 살비를 오페라 대본가로서 총애하였다. 수많은 그의 오페라 대본 중에서 '아스티아나트'(Astianatte)가 가장 인기를 끌었다. '아스티아나트'를 조반니 보논치니, 니콜로 좀멜리 등 당대의 여러 작곡가들이 오페라로 만들었던 것만 보아도 알수 있다.'베레니체'도 안토니오 살비의 대표적인 대본 중의 하나이다. 아무튼 안토니오 살비는 이탈리아에서 오페라 세리아의 대본을 개척한 인물 중의 하나로서 기억되고 있는 사람이다. '베레니체'의 런던 초연은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음악이나 스토리가 인기를 끌지 못해서가 아니라 당시 런던에서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사양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이었고 게다가 헨델의 오페라단에 대응하는 라이발 오페라단이 생기는 바람에 사람들의 관심이 흩어졌기 때문이었다.


1837년 런던 코벤트 가든 오페라 극장. '베레니체'의 초연 스케치


잘 아는대로 독일(정확히는 마그데부르크 공국의 할레)에서 태어난 헨델은 젊은 시절 이탈리아로 와서 오페라 등을 작곡하면서 경력을 쌓아갔다. 그러다가 26세 때인 1711년에 뜻한바 있어서 런던으로 건너와서 이탈리아 스타일의 오페라 세리아를 영국에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오페라 세리아의 특징은 스타 비루트오소가 관중들을 열광케하는 아리아를 부르는 것이었다. 발라드 풍의 뮤지컬에 만족하고 있던 영국인들은 기가막하게 멋있는 카스트라토들의 아리아에 푹 빠지고 말았다. 헨델이 런던에서 처음 발표한 이탈리아 오페라는 '리날도'(Rinaldo)였다. 공전의 대성공이었다. 그로부터 헨델의 오페라는 절찬리에 런던의 오페라극장을 석권하였다. 당시 헨델의 오페라에 단골로 출연한 카스트라토는 세네시노(Senesino)였다. 얼마나 인기가 있었던지 그가 출연하는 오페라 공연은 입장권을 사기가 어려워서 고가의 암표가 성행할 정도였다. 아마 역사적으로 극장암표가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는 중에 헨델의 오페라단에 대응하는 라이발 단체로 1733년에 '귀족 오페라단'(Opera of the Nobility)이 생겼는데 세네시노가 그 오페라단으로 자리를 옮기는 뜻밖의 처사가 발생하였다. 헨델은 급한대로 다른 카스트라토를 기용했지만 도대체 관중들의 반응은 시큰둥한 것이었다. 이와 함께 헨델을 그나마 후원하던 귀족들도 새로 생긴 '귀족 오페라단'을 후원하느라고 헨델에게는 무심하기 시작했다. 런던에 두개의 극장에서 오페라가 공연되니 관객들이 분산되기 시작했다. 대부분 관객들은 국왕이 후원하는 헨델의 오페라단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아마도 국왕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헨델은 1736-37년 시즌에 세편의 오페라 세리아를 작곡했지만 이런 저런 사정으로 모두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1737년 시즌에 마지막으로 공연된 헨델의 오페라 세리아가 '베레니체'였다. 성공을 거두기는 커녕 경제적으로 큰 손해만 보았다. 엎친데 덮친다고 헨델의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하프시코드를 그렇게도 잘 연주하던 헨델이었는데 손가락이 네개나 마비되는 바람에 하프시코드 연주는 커녕 제대로 글씨조차 쓰기가 어려워졌다. 1737년 늦여름이 되어서는 헨델의 정신상태마저 이상해졌다는 진단이 나왔다. 무슨 말을 해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고 기억력도 쇠약해 졌다. 아무튼 이러저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 '베레니체'가 초연을 가졌고 예상한대로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데도 '베레니체'를 본블로그의 '집중탐구 100편'에 소개하는 것은 근자에 들어와서 '베레니체'에 대한 재인식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2016년 괴팅겐 공연에서 셀레네를 맡은 콘트랄토 주세피나 브리델리


'베레니체'는 코벤트 가든에서 4회 공연을 하고 막을 내렸다. 그후로 상당기간 동안 유럽의 어느 곳에서든지 '베레니스'가 리바이발 되었다는 뉴스는 없었다. 적어도 헨델의 생애 중에는 리바이발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1960년대에 이르러서 역사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오페라의 재발견 프로그램이 생겨서 오랜만에 '베레니체'가 빛을 보게 되었다. 아무튼 다행스럽게도 오늘날 '베레니체'를 비롯하여 헨델의 '잊혀진 오페라들'은 각종 오페라 페스티발이나 오페라극장들의 바로크 재발견 프로그램에 의해서 간간히 공연되기 시작했다. 가장 최근의 '베레니체' 공연은 2011년 비엔나의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 빈강변극장)과 2016년 독일의 괴팅겐에서 이루어졌다. '베레니체'의 음악은 상당히 제한되고 절제된 것이다. 악기 편성도 현악기, 오보에, 콘티누오로만 편성되어 있어서 금관악기와 타악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베레니체'의 재공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베레니체의 미뉴엣'이라고 알려진 서곡의 느린 부분은 상당히 인기가 있어서 연주회에서 별도의 레퍼토리로 연주되는 경우가 있다. 아리아로서는 데메트리오가 2막에서 부르는 Si, tra i ceppi가 유명하다. 또한 3막을 여는 신포니아의 테마는 '왕궁의 불꽃놀이'의 서곡에 인용되었다.


현대적 연출의 '베레니체'. 알레산드로, 베레니체, 데메트리오


주요 등장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1737년 5월 18일 초연의 캐스트가 누구였는지는 말미에 적었다.

- 베레니체(Berenice: S: 베레니케). 이집트의 여왕. 안나 마리아 스트라다(Anna Maria Strada)

- 셀레네(Selene: Cont.). 베레니체의 여동생. 프란체스카 베르톨리(Francesca Bertolli)

- 알레산드로(Alessandro: Soprano Castrato). 로마제국의 왕자. 조아키노 콘티(Gioacchino Conti). 일명 지찌엘로(Gizziello)

- 데메트리오(Demetrio: Alto Castrato). 마케도니아의 왕자. 도메니코 안니발리(Domenico Annibali)

- 아르사체(Arsace: Cont.). 셀레네와 약혼한 사람. 마리아 카테리나 네그리(Maria Caterina Negri)

- 화비오(Fabio). 로마의 사절단장. 존 버드(John Beard)

- 아리스토볼로(Aristobolo). 이집트군대의 장교. 헨리 라인홀트(Henry Reinhold)


  

초연에서 베레니체를 맡은 소프라노 안나 마리아 스트라다 델 포, 알레산드로를 맡은 소프라노 카스트라토 지찌엘로, 데메트리오를 맡은 알토 카스트라토 도메니코 안니발리


오페라의 대강 줄거리를 소개하기 전에 실존인물인 베레니체(베레니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베레니체는 기원전 1세기와 2세기에 톨레미 왕조에 속한 이집트의 여왕이었다. 역사학자들은 보통 베레니체 여왕을 베레니체 3세라고 불렀다. 베레니체 3세는 기원전 120년에 태어나서 기원전 80년에 향년 40세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베레니체 3세는 기원전 81년부터 80년까지 만 1년 동안 여왕이었으며 그 이전에 기원전 101년으로부터 기원전 88년까지 13년간은 삼촌 겸 남편인 톨레미 10세 또는 알렉산더 1세라는 사람과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했었다. 베레니체 여왕은 클레오파트라 베레니체(Cleopatra Berenice)라고도 불린다. 그렇다고 시저와 클레오파트라,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주인공인 클레오파트라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세기의 미인이라는 이 클레오파트라는 기원전 69년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서 기원전 30년에 세상을 떠난 인물이다. 클레오파트라는 이집트에서 자주 볼수 있는 여자 이름이다. 클레오파트라 베레니체는 이집트의 왕인 톨레미(Ptolemy: 프톨레마이오스) 9세 라티로스(Lathyros)와 왕비인 클레오파트라 셀레네 1세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베레니스의 무대. 로열 오페라 하우스. 현대적 연출


베레니체는 기원전 101년에 아버지 라티로스로부터 왕좌를 빼앗았으며 또한 왕좌를 지키는데 걸림돌이 되는 어머니 겸 할머니인 클레오파트라 3세를 살해한후 정식으로 여왕이 되기 위해 자기의 남자 형제인 톨레미 10세 또는 알렉산더 1세와 결혼하였다. 아무튼 아주 복잡한 가정이므로 가족관계를 이해하는데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후 왕위에서 물러난 라티로스가 분해서 베레니체에게 왕좌를 내놓으라고 강력히 요구하자 딸인 베레니체는 아버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수 없어서 여왕의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얼마후 기원전 81년에 부왕인 라티로스가 세상을 떠나자 왕위를 다시 차지하였고 그로부터 6개월간 이집트의 여왕으로서 군림하였다. 이상하게도 이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베레니체는 백성들로부터 상당한 사랑을 받았다. 단독 군주였던 베레니체는 주위에서 그러지 말고 결혼해서 남편과 함께 공동 통치하면 어떻겠느냐는 강요하닌 권고를 받아들여서 기원전 80년에 톨레미 10세의 아들인 톨레미11세 또는 알렉산더 2세와 결혼하였다. 톨레미 11세는 베레니체로 볼때에는 아들이나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이 이집트를 공동으로 통치하는 것도 잠시 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들인 남편 톨레미 11세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머니 뻘로서 부인이 된 베레니체를 결혼한지 19일만에 살해했다. 그러자 베레니체를 사랑하던 백성들이 봉기를 일으켜 결국 톨레미 11세 겸 알렉산더 2세는 베레니체를 죽인지 며칠 후에 백성들의 손에 오히려 죽임을 당했다. 권력무상! 그 베레니체가 헨델의 오페라 '베레니체'의 주인공이다. 이집트의 여왕 베레니체를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는 헨델의 것 이외에도 여러 편이 있다. 대표적인 것 한 편만 소개하면 이탈리아의 카를로 아고스티노 바디아(Carlo Agostino Badia: 1672-1738)가 작곡한 단막 실내오페라인 '베레니체의 희생'(The Sacrifice of Berenice)이란 것이다.


세멜레와 데메트리오


[1막] BC 80년경 이집트이다. 이집트의 여왕 베레니체는 한때 마케도니아의 왕자 데메트리오를 사랑하였고 아직도 사랑의 감정을 간직하고 있다. 그러한 베레니체에게 신하들은 로마와의 동맹을 위해서 로마의 왕자와 결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간청한다. 베레니체는 나라를 위한다는 일이라고 하므로 어쩔수 없이 신하들의 간청을 물리치지 못하고 마지못해 승락한다. 여왕으로서의 의무를 위해 개인감정은 포기한 것이다. 더구나 마케도니아의 왕자 데메트리오는 이집트의 적국인 폰토의 미트라데스 왕과 동맹관계에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로마 왕실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데메트리오와 결혼하겠다는 것은 이집트 여왕으로서 정당한 행동이 아니었다. 베레니체와의 결혼을 추진하기 위한 로마로부터의 사절단장인 화비오가 남편 후보로서 데리고 온 사람은 알레산드로 왕자였다. 알레산드로는 베레니체를 처음 보자마자 그 아름다움에 감탄하여서 깊이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베레니체는 알레산드로에게 큰 호감을 가지지 못한다. 베레니체는 사랑하는 사람을 제쳐두고 정책적으로 강요에 의해서 결혼할수 밖에 없는 자기의 신세를 한탄한다. 베레니체의 그러한 감정을 눈치 챈 화비오는 알레산드로 왕자에게 만일 베레니체가 결혼을 거부하면 베레니체의 여동생인 셀레네와 결혼하면 될 것이라고 넌지시 말한다.


베레니체(로지 존스)와 세멜레(안느 마리 더프)


그런데 셀레네에게는 언니인 베레니체 여왕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하나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별도로 있는 것이다. 그것도 다름아니라 언니 베레니체 여왕이 짝사랑하던 데메트리오이다. 사실 데메트리오와 셀레네는 그동안 남들이 알지 못하게 사랑의 감정을 키워왔었다. 셀레네는 베레니체가 데메트리오를 사랑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데메트리오와 사랑하는 사이였다. 뿐만 아니라 야심이 많은 셀레네는 데메트리오를 통해서 폰토의 왕 미트라다테스에게 부탁하여 군대를 이끌고 와서 베레니체를 여왕의 자리에서 내쫓고 자기가 여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런줄 모르고 있는 베레니체는 동생 셀레네가 아르사체 왕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해서 아르사체 왕자와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말한다. 여왕의 말은 곧 명령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아르사체 왕자는 실은 오래전부터 셀레네를 사랑하고 있었다. 다만, 셀레네는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르사체에게 관심이 없었을 뿐이었다. 한편, 어느날 왕궁에서 데메트리오를 암살하려는 시도가 일어난다. 데메트리오가 이집트의 적국인 폰토와 동맹을 맺고 있기 때문에 어떤 애국적인 이집트 용사가 데메트리오를 암살코자 했던 것이다. 위기일발에서 알레산드로가 데메트리오를 구해준다. 베레니체는 데메트리오가 자기 때문에 죽음의 위기에까지 빠졌었다고 믿어서 데메트리오에 대한 생각을 다시하게 된다. 베레니체는 데메트리오가 비록 적국 폰토의 동맹이지만 자기를 간절히 사랑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누가 무어라해도 데메트리오와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결심한다.


알레산드로와 데메트리오. 현대적 연출


[2막] 로마는 베레니체가 알레산드로와의 결혼을 거부했다고 믿어서 그렇다면 셀레네 공주와 알레산드로의 결혼을 서두르자고 압박한다. 베레니체는 셀레네가 아르사체 왕자와 결혼키로 되어 있기 때문에 알레산드로 왕자와의 결혼은 말도 안된다고 일축한다. 그러자 여왕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베레니체에게 일이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로마와의 전쟁을 의미한다면서 경고한다. 셀레네는 데메트리오에게 '아르사체와 결혼할 생각은 하나도 없지만 여왕의 명령이므로 따를수 밖에 없다'면서 눈물로서 현실을 받아 들이고자 한다. 데메트리오는 만일 아르사체가 죽는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한다. 한편, 아르사체는 셀레네를 사랑하고 있지만 로마와 이집트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세멜레를 알레산드로에게 양보하겠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레산드로는 어느 누구에게도 관심이 없고 오직 베레니체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는 중에 베레니체는 우연히 자기가 사랑하는 데메트리오가 어떤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듣는다. 그 사람은 데메트리오에게 여왕이 데메트리오를 사랑하는 것 같으니 여왕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한다. 그러자 데메트리오는 오히려 여왕을 비난하면서 실은 셀레네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한다. 더구나 베레니체는 두 사람이 나누는 얘기를 통해서 데메트리오가 음모를 꾸며서 여왕을 몰아내려고 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분노한 베레니체는 당장 데메트리오를 지하감옥에 가둔다.


번민하고 있는 알레산드로


[3막] 베레니체는 데메트리오에 대하여 한없는 배신감과 증오심을 갖게 된다. 너무나 충격이 커서 마치 정신을 잃은 사람과 같다. 베레니체는 결심이나 한듯 로마의 사절단장인 화비오를 불러서 손에 끼고 있던 여왕의 반지를 내어 주면서 로마가 생각하기에 이집트의 여왕과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되는 남자에게 이 반지를 주면 그대로 알고 따르겠다고 언명한다. 화비오는 베레니체의 반지를 알레산드로에게 전한다. 셀레네는 감옥에 갇힌 데메트리오를 석방해야 했다. 결국 셀레네는 베레니체에게 데메트리오를 석방 될수만 있다면 아르사체 왕자와 결혼하겠다고 약속한다. 아르사체로서는 셀레네와 결혼하기 위해 데메트리오가 석방되어야 했다. 아르사체는 알레산드로를 찾아가서 데메트리오의 석방을 위해 도와 달라고 간청한다. 이와 함께 아르사체는 베레니체를 만나서 베레니체에 대한 알레산드로의 사랑이 진실한 것임을 인식시켜 주기로 한다. 하지만 베레니체는 아직도 분노하여서, 그리고 여러 감정이 소용돌이처럼 감돌고 있어서 데메트리오를 석방할 생각이 없다. 베레니체는 마침내 마음의 결심을 하여 이집트에 반역을 꾀한 데메트리오를 참수형에 처하고 그 머리를 자기에게 가져오라고 명령한다. 베레니체는 그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생각이다.


셀레네가 베레니체에게 데메트리오를 살려 달라고 간청한다. 알레산드로와 아르사체도 청원서를 내고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알레산드로는 베레니체가 화비오에게 준 반지를 자기가 간직하고 있다고 털어 놓는다. 그러면서 비록 베레니체가 전해 준 반지를 가지고 있지만 자기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결혼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베레니체가 드디어 마음에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이제 알레산드로의 고귀한 마음을 알았으니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어 베레니체는 데메트리오를 용서한다고 말하고 석방하라고 명령한다. 베레니체는 셀레네와 데메트리오의 결혼을 허락하며 아울러 자기는 알레산드로를 남편으로 받아들이겠다고 선언한다.



베레니스. 한나 클라크. 파리 오페라


[베레니스는 누구?]


베레니스 4세는 그리스의 공주로서 이집트 톨레미 왕조의 여왕이 된 여인이다. 그리스 출신이기 때문에 그의 풀 네임은 베레니체 에피파네이아(Berenice Epiphaneia)이다. 기원전 77년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서 22세라는 젊은 나이에 역시 알렉산드리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집트 여왕으로서는 기원전 58년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3년 동안 있었다. 베레니스의 아버지는 톨레미 7세 아울레테스이며 어머니는 아마도 클레오파트라 5세 트리피나라고 한다. 베레니스는 유명한 파라오인 클레오파트라(시저의 정부였으며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의 부인)의 누이이며 이밖에 아르시노에 4세, 톨레미13세 테오스 필로파토르, 톨레미 14세 등의 누이였다. 기원전 58년에 톨레미 12세와 클레오파트라 7세가 로마로 피신했는데 이는 베레니스의 큰 언니인 클레오파트라 6세 트리피나(Cleopatra VI Tryphaena)에 대항하기 위해서 로마로부터 정치적 및 군사적 도움을 청하기 위해서였다. 클레오파트라 6세 트리피나가 죽은 후 베레니스는 20세라는 젊은 나이에 이집트의 총치자가 되었다. 아버지 톨레미 12세 아울레테스가 부재중일 때였다. 일설에 의하면 베레니스가 언니인 클레오파트라 6세를 독살했다고 한다. 베레니스는 미혼이었기 때문에 이집트의 통치자로서 결혼해야 했으며 남편을 섭정으로 두어야 했다.


베레니스 이집트 여왕


베레니스가 결혼할 생각이 없다고 하자 자문관들은 셀레우쿠스 7세 필로메토르와 결혼할 것을 강력히 주청했다. 그러자 베레니스는 셀레우쿠스를 목졸라 죽이고 독신 통치자로서 남아 있었다. 백성들은 베레니스가 결혼을 하지 않자 톨레미 왕조의 대가 끊어질 것 같아서 깊이 우려했다. 한편, 베레니스는 사치한 생활을 즐겼다. 그래서 국고를 탕진할 정도가 되었다. 베레니스는 얼마후 아르켈라우스와 결혼하였으나 섭정의 권세는 결코 주지 않았다. 대신에 아르켈라우스는 터키 카파토키아에 있는 코마나에서 사제의 생활을 하도록 했다. 아르켈라우스는 자기가 폰투스의 왕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미트리다테스의 부하 장군인 아르켈라우스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아르켈라우스 장군은 1차 마스티다테 전쟁에서  로마군을 물리친 혁혁한 전공의 인물이다. 베레니스의 통치는 3년으로 막을 내렸다. 그의 아버지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의 도움을 받아 이집트의 왕좌를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베레니스는 참수되었다. 베레니스와 결혼한 아르켈라우스는 이집트롤 점령한 로마군에 대항하여 전투를 벌였으나 아울루스 가비나우스 장군이 이끄는 로마군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아르켈라우스와 아울루스 가비니우스는 오랜 친구 사이였다. 오페라 대본의 오리지널 텍스트에 나오는 베레니스의 경력과 역사상의 경력은 차이가 있다.


모차르트의 '티토의 자비'의 피날레 장면. 이 오페라에 베레니스가 나오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모습이 나오지는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