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가곡 왕 슈베르트

소년합창단원 슈베르트

정준극 2017. 1. 22. 21:14

소년합창단원 슈베르트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제자

후기 고전주의와 초기 낭만주의 시기의 위대한 작곡가


빌헬름 아우구스트 리더(Wilhelm August Rieder)가 1875년에 완성한 유화


2017년 1월 31일은 프란츠 슈베르트의 탄생 220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어느새 세월이 그렇게 되었다. 슈베르트는 1797년에 비엔나에서 태어났다. 1797년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에서는 조선조 정조 21년이 된다. 그리고 같은 해에 이탈리아의 도니체티가  태어났고 독일의 하이네가 태어났다. 슈베르트는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고전과 낭만의 시대에 걸쳐 활동했던 가장 위대한 작곡가 중의 하나이다. 슈베르트는 어느 누구보다도 짧은 생애를 살았던 작곡가이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주옥같은 작품들을 많이 남긴 작곡가였다. 슈베르트는 31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 동안에 무려 1천 5백여 곡이나 되는 작품을 작곡했다. 모차르트가 650 여곡, 베토벤이 350 여곡을 작곡한 것에 비하면 대단한 실적이 아닐수 없다. 슈베르트는 위대한 작곡가 중에서 아마 가장 짧은 생애를 살았던 작곡가일 것이다. 향년 31세로서 세상을 떠났다. 모차르트가 35세, 비제가 37세, 멘델스존이 38세에 세상을 떠난 것에 비하면 너무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짧은 생애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가슴으로부터 아름다운 멜로디가 샘솟듯이 올라와서 1천 5백여곡이나 되는 주옥과 같은 작품들을 남겼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즐겁고 아늑하다. 정다운 친구를 만나서 얘기를 나누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음악이다. 그래서 더욱 사랑하게 된다. 슈베르트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어린 시절부터 청년 시절까지의 생애를 살펴보고 아울러 그의 작품세계를 점검해 본다. 그리고 기왕에 슈베르트는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남겼는지도 재점검 해본다.


구스타브 클림트가 그린 '피아노 앞의 슈베르트'. 오스트리아의 슐로스 임멘도르프(Schloss Immendorf)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1945년 독일군이 퇴각하면서 불을 질러서 파손되었다.


슈베르트는 '가곡의 왕'이라는 별명처럼 가곡을 6백여곡이나 작곡했다. 교향곡은 완성한 작품이 7편, 미완성인 작품이 6편이나 된다. 미완성 교향곡 중에는 스케치만 해 놓은 것들도 있어서 사실상 미완성 교향곡이라고 부르기가 민망스런 것들도 있다. 오페라(주로 징슈필), 오라토리아, 극음악은 약 20편이나 된다. 실내악과 피아노 음악도 상당히 많이 남겼다. 그리고 미사곡과 같은 종교음악도 다수 남겼다. 슈베르트의 작품들은 그의 생전에는 별로 알려지지 못했다. 그저 그의 주변에 있는 일부 사람들이나 그의 작품들에 대하여 찬사를 보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사후 10년도 넘기지 않아서 그의 음악에 대한 관심이 높이지기 시작했다. 슈베르트의 작품들이 세상의 찬사를 받게 된 데에는 슈만, 멘델스존, 리스트, 브람스 등 19세기를 풍미한 위대한 작곡가들의 노력이 컸다. 이들은 슈베르트의 미발견 작품들을 발굴해서 연주회를 통해 널리 알렸으며 어떤 이들은 슈베르트의 멜로디를 주제로  변주곡을 만들기도 했다.


비엔나 9구 알저그룬트의 누스도르퍼 슈트라세 54번지 슈베르트 생가. 당시에는 비엔나 교외였다. 평소에는 닫혀 있으나 초인종을 누르면 기념관 관리인이 열어준다.


슈베르트의 풀 네임은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중간 이름을 부르지 않고 프란츠 슈베르트라고만 부른다. 슈베르트는 1797년 1월 31일 비엔나 교외의 힘멜포르트그룬트(Himmelpfortgrund)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비엔나 9구 알저그룬트(Alsergrund)의 누스도르퍼 슈트라쎄(Nussdorfer Strasse) 54번지이다. 큰길에 면하여 있는 아담한 집이기 때문에 금방 찾을수 있다. 당시에는 '붉은 가재집'(Zum roten Krebsen)이라는 일종의 연립주택이었다. 2층 집이었기에 아랫층에는 다른 사람이 살았고 2층에 슈베르트 식구들이 살았다. 오늘날 전차 37번이나 38번을 타고서 카니시우스가쎄(Canisiusgasse)에서 내리면 길가집이어서 쉽게 찾을수 있다. 이 집에서 슈베르트는 식구들 15명과 함께 살았다. 오늘날 2층의 두 방은 슈베르트 기념관으로 마련되어 있다. 슈베르트 살던 시대의 풍경화, 슈베르트와 관련된 초상화, 슈베르트 악보의 초판 출판물 일부, 슈베르트가 사용했던 기타, 그리고 슈베르트가 썼던 금테 안경도 전시되어 있다. 사람들은 금테 안경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슈베르트는 잘 때에도 안경을 쓰고 잤다고 하는데 자다가 갑자기 악상이 떠오르면 일어나서 당장 멜로디를 오선지에 그릴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슈베르트는 이 집에서 태어난 후 약 5년 동안 식구들과 함께 지내다가 어린 몸으로 비엔나의 다른 곳에 있는 기숙학교 등 여러 곳에서 지내는 바람에 실제로 식구들과 함게 살고 있던 이 집에는 거의 오지 않았다. 슈베르트 가족은 2층의 부엌이 딸린 커다란 방 하나에서 살았다. 부엌에는 불을 지펴서 음식을 만들수 있는 아궁이와 부뚜막이 있다. 슈베르트는 바로 이 부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슈베르트 생가 건물의 다른 두 방은 보헤미아(현재의 체코공화국) 출신으로 비엔나에서 활동하다가 말년에는 린츠에서 지냈던 작가 아달베르트 슈티프터(Adalbert Stifter: 1805-1868)에게 헌정된 장소이다. 아달베르트 슈티프터가 수집한 회화 5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 슈베르트 생가 기념관의 입장료는 2017년 현재 2 유로이며 19세 이하는 무료이다. 매달 첫 일요일에도 무료이다.


슈베르트의 생가를 그린 기념 엽서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역시 프란츠 슈베르트이다. 다만 가운데 이름이 테오도르일 뿐이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지금은 체코 공화국에 속한 지방인 모라비아 출신이다. 그러니까 슈베르트도 순수 오스트리아 사람은 아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비엔나의 힘멜포르트그룬트 교구에 속한 작은 학교의 교장이었다. 예전에는 학교들을 가톨릭 교구에서 관리했다. 슈베르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애칭으로는 비에츠) 역시 비엔나 출신이 아니다. 실레지아 출신으로 친정 아버지는 실레지아에서 열쇠를 만드는 장인이었다. 슈베르트의 어머니인 엘리자베트는 비엔나에 와서 어느 집의 하녀 생활을 하다가 슈베르트의 아버지와 결혼했다. 슈베르트의 부모는 무려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당시에는 무작정 자녀를 많이 두는 것이 관례였다. 워낙 유아사망률이 높으니까 많이 낳아서 그중에서 몇이라도 성장토록 하자는 생각에서였다. 슈베르트의 형제들 14명 중에서 하나는 사생아이다. 슈베르트의 아버지가 학교 교장이었지만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어떤 여인과 좋아 지내면서 자식을 하나 두었던 것이다. 그 사생아도 함께 살았다. 14명의 자녀 중에서 반 이상인 9명은 어릴 때에 이런 저런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어른으로 성장한 자녀들은 5명 뿐이었고 그중에서 아들은 슈베르트를 합해서 3명이었다.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Ferdinandn Schubert)와 이그나즈(Ignaz Schubert)였다. 이로 미루어 보아서 슈베르트의 집안은 그저 서민에 속하는 집안이라는 것을 알수 있지만데 그런 중에 역사에 길이 남은 슈베르트를 배출되었으니 하나님의 크신 섭리가 아닐수 없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비록 바람은 한번 피웠지만 명망있는 선생님이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당시 비엔나의 9구에 속하는 리히텐탈(Lichtental)에서 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작은 학교이지만 선생님들도 좋고 학교도 좋다는 소문이 돌아서 학생들이 많았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사람은 아니지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그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음악적 재능과 지식을 이어 받았으며 특히 슈베르트는 그의 음악활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리히텐탈에 있는 14명 성역보조자 교회. 슈베르트는 이 교회에서 1797년 2월 1일 세례를 받았다. 이 교회는 슈베르트가 어린 시절에 처음으로 음악 교육을 받은 곳이다. 1814년, 슈베르트는 17세 때에 이 교회의 설립 1백주년을 기념하는 F 장조의 장엄미사곡을 작곡했다. 그의 첫 미사곡이다. 17세 소년이었던 슈베르트는 이 장엄미사곡을 1714년 9월 25일 초연을 지휘했다. 슈베르트의 후기 미사곡들인 G 장조, B 플랫 장조, C 장조 미사곡들은 모두 리히텐탈 교회를 위해 작곡한 것이다. 슈베르트는 미사곡 이외에도 여러 곡의 교회음악을 이 교회를 위해 작곡했다.


슈베르트는 여섯 살 때부터 아버지로부터 시간이 나는대로 음악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일곱살 때에는 아버지의 학교에 입학하여 일반 공부를 시작했다. 슈베르트가 정식으로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한 것도 이때 쯤이었다. 처음에 그는 아버지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웠다. 형인 페르디난트도 동생 슈베르트의 음악교육에 한 몫을 했다. 페르디난트는 슈베르트에게 피아노 레슨을 해 주었다. 슈베르트는 리히텐탈 학교에 입학하고나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음악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리히텐탈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이며 합창지휘자인 미하엘 홀처(Michael Holzer)로부터였다. 그러나 미하엘 홀터의 교육이란 것은 실제로 악기 연주의 기법이나 작곡에 대한 것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음악감상법 등의 내용이었다. 슈베르트는 건반악기를 배우고 싶었다. 마침 슈베르트와 함께 음악교육을 받고 있던 학생이 교회 근처에 있는 피아노(피아노포르테) 보관창고를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곳에 가서 피아노를 마음껏 치며 피아노 연주 기법을 스스로 터득하기 시작했다. 슈베르트는 현악기에도 재능이 있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아이들과 함께 아마추어 현악4중주단을 만들어서 집에서 연주하기를 좋아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첼로를 연주했고 두 형인 페르디난트와 이그나즈는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슈베르트는 비올라를 연주했다. 어린 슈베르트는 가족 앙상블을 위해 현악4중주곡을 작곡하였으니 그것이 아마 첫 작곡활동이었을 것이다.


리히텐탈 교회의 중앙제단. 슈베르트의 숨결을 느낄수 있는 것 같다. 리히텐탈 교회는 일명 '슈베르트 교회'라고 부른다. 9구 알저그룬트 마르크트가쎄(Marktgasse) 40번지이다. 프란츠 요제프 반호프(기차역) 인근이다. 이교회에 있는 오르간은 슈베르트 오르간이라고 부른다.


슈베르트는 일곱살 때인 1804년 당시 비엔나 음악계에서 대단한 영향력이 있던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의 관심을 받았다. 궁정작곡가인 살리에리는 궁정소년합창단원을 모집 중에 있었는데 슈베르트가 우연히 눈에 띠었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어릴 때부터 노래를 잘 불렀었다. 살리에리는 슈베르트를 조금 더 가르쳐서 궁정소년합창단의 멤버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일반 소년으로서 대단한 영광이 아닐수 없는 일이었다. 당분간은 생활이 보장되며 아울러 지체 높은 황족이나 귀족들 앞에서 노래를 부를수 있으니 잘하면 후원자도 생길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슈베르트는 몇 년후인 1808년, 그가 11살 때에 살리에리의 주선에 의해서 황실에서 운영하는 슈타트콘빅트(Stadtkonvikt: 제국학교: 일종의 신학교)에 어린 나이지만 합창단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슈타트콘빅트는 현재 1구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Dr. Ignaz-Seipel Platz)에 있는 구비엔나대학교 건물이며 건물의 외벽에 슈베르트가 이 곳에서 공부하고 기숙했었다는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슈베르트는 슈타트콘빅트에서 모차르트의 서곡들과 교향곡들, 그리고 요제프 하이든과 그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의 교향곡들에 대하여 지식을 높이기 시작한다. 슈베르트는 청소년에 불과하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오페라를 보기 위해 갔다. 슈타트콘빅트에서의 음악교육과 오페라 관람 등은 훗날 슈베르트의 작곡 활동에 폭넓은 참고가 되는 것이었다. 이 시기에 슈베르트에게 음악적으로 깊은 영향을 준 작곡가는 아름다운 가곡들을 작곡한 요한 루돌프 춤슈테크(Johann Rodulf Zumsteeg)였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너무나 형식에만 충실한 춤슈테크의 가곡 스타일을 현대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제국학교의 친구인 요제프 폰 슈파운(Joseph von Spaun)과 협의하여 새로운 스타일의 예술가곡들을 만들어 보기로 했다. 폰 슈타운은 그때부터 슈베르트와 친구가 되어서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우정을 계속하였다. 폰 슈타운은 귀족 집안의 자제로서 생활에 여유가 많았다. 그래서 궁핍한 슈베르트를 경제적으로 도와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오선지를 전담해서 공급한 것이다. 폰 슈파운의 도움이 없었다면 그렇게도 많은 가곡들이 빛을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 19세기 말. 왼쪽 건물의 벽면에 슈베르트가 이곳에서 기숙했었다는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아무튼 슈베르트는 슈타트콘빅트(시립학교: 아카데미센 김나지움)에 다니던 시절부터 작곡에 천부적인 재능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슈베르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슈타트콘빅트 오케스트라를 지도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궁정음악감독(호프카펠마이스터)인 살리에리는 그런 슈베르트를 기특하게 여겨서 그때부터 정식으로 음악이론과 작곡을 가르치기로 결심했다. 슈베르트는 살리에리의 지도를 받고 한편으로는 스스로 공부를 하여서 여러 작품들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슈타트콘빅트의 오케스트라를 위한 실내악 작품을 만든 것을 물론이고 노래들과 피아노 소품들도 작곡했다. 이어서 종교음악들도 작곡했다. Salve Regina(살베 레지나: D 27), Kyrie(키리에: D 31), '목관악기를 위한 8중주곡'(D 72), 남성 성부와 오케스트라를 위한 칸타타인 Wer ist gross?(누가 더 높으냐?: D 110), 그리고 첫번째 교향곡(D 82)도 이 즈음에 작곡한 것이다. 그 중에서 '목관악기를 위한 8중주곡'은 1812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것을 애도하여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칸타타 '누가 더 높으냐?'는 1813년 아버지의 생일을 축하하여서 작곡한 것이라고 한다. 슈베르트는 1808년부터 1813년까지 5년 동안 궁정소년합창단원(Hofsängerknabe)였다. 궁정소년합창단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나소년합창단(Wiener Sängerknaben)의 전신이다.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에 있는 구비엔나대학교 건물. 그 전에는 슈타트콘빅트(왕립기숙학교)였다. 슈베르트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왼쪽으로는 예수회교회가 서 있다.

슈타트콘빅트 건물에 설치되어 있는 기념 명판. 프란스 슈베르트가 1808-1813년 기간동안 어커데미세 김나지움에서 궁정소년합창단의 기숙학생으로 이 집에서 기거했었다고 적혀 있다. 1924년에 비엔나 남성합창연맹이 제작한 명판이다.

프란츠 슈베르트가 1808년부터 1813년까지 아카데미셴 김나지움의 학생으로 있었다는 내용이다. 현재 베토벤플라츠 1번지에 있는 아카데미세 김나지움 건물로서 당시에는 베커슈트라쎄 20번지였다. 오스트리아 음악협회 및 연방교육-예술성이 공동으로 설치했다.


슈베르트는 13세 때에 슈타트콘빅트를 나왔다. 나이가 들어서였다. 집에 돌아온 그는 교사가 되기로 마음 먹고서 노르말하우프트슐레(Nornalhauptschule: 일종의 교사양성학교)에 들어갔다. 그리고 1년 후인 1814년에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리히텐탈학교의 선생으로 들어가서 초급반 아이들을 가르쳤다. 슈베르트는 2년 동안 지겹고 고되며 단조로운 교사생활을 견디며 지냈다. 비록 그런 교사생활이었지만 일종의 보상도 있었다. 교사로 얽매여 있으면서도 개인적으로 음악공부를 더 할수 있었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살리에리로부터 집중적인 작곡교육을 받았다. 살리에리는 다른 어느 선생들보다 더 집중적으로, 더 자세히게 슈베르트를 가르쳤다. 그러기를 3년동안 했다. 1814년, 슈베르트는 테레제 그로브(Therese Grob)라는 젊은 소프라노를 만났다. 당시에 슈베르트는 17세의 청년이었다. 테레제 그로브는 비엔나에서 중소기업인 비단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사람의 딸이었다. 슈베르트는 테레제 그로브가 마음에 들어서 그를 위해 몇 개의 곡을 작곡했다. 예를 들면 교회음악인 '살베 레지나'(Salve Regina)와 '탄툼 에르고'(Tantum Ergo)였다. 테레제 그로브는 1814년 9월에 슈베르트의 첫 미사곡인 제1번 D 장조 미사곡의 초연에서 솔리스트로서 연주를 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인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 슈베르트와 결혼할뻔 했던 소프라노 테레제 그로브(1798-1875)


슈베르트는 테레제 그로브와 결혼하고 싶었다. 그러나 1815년에 결혼법이 바뀌어서 신랑은 결혼하고나서 부인과 자녀들을 부양할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슈베르트는 안정된 직장을 구해서 가족을 부양할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슈베르트는 라이바흐(오늘날 슬로베니아의 류블리아나)에서 직장을 구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으나 사정이 바뀌어서 구하지 못했다. 결국 테레제 그로브와의 결혼은 유야무야되었다. 물론 슈베르트는 계속적으로 그로브와 연락을 하며 다시 기회를 얻고자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얼마후 테레제 그로브가 다른 남자와 결혼했기 때문이었다. 슈베르트는 여러 곡의 노래를 작곡해서 악보를 테레제 그로브의 오빠인 하인리히에게 보내어서 아직도 테레제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제스추어를 보였으나 그 집에서는 슈베르트의 악보를 그대로 설합 속에 넣어두었고 몇십년이 지나서야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공개해서 그나마 슈베르트의 아름다운 가곡들이 빛을 보게 되었다. 돌이켜보건대 슈베르트가 가장 활발한 작곡활동을 했던 때는 그가 16세 때인 1815년이었다. 주로 오케스트라 곡이었고 교회를 위한 작품도 아홉곡이나 작곡했다. 그리고 교향곡을 하나 작곡했고 가곡은 140여곡이나 만들었다. 슈베르트는 이른바 아그노스틱, 즉 불가지론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종교음악은 계속 작곡했다. 불가지론이란 것은 인간의 경험만 가지고는 사물의 본질이나 실재의 참모습을 인식할 수 없다는 이론이다. 슈베르트는 그 해에 또한 안젤름 휘텐브렌너(Anselm Hüttenbrenner)와 프란츠 폰 쇼버(Franz von Schober)를 알게 되어 친교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 두 사람은 슈베르트와 평생친구로서 지냈다. 또한 슈타트콘빅트부터의 친구인 요한 폰 슈파운이 슈베르트에게 요한 마이르호퍼(Johannn Mayrhofer)를 소개하여 그 역시 평생친구로서 지냈다. 이들 슈베르트의 친구들은 나중에 슈베르트동아리인 슈베르티아데를 추진한 동력이었다. 청년 슈베르트는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인물로 알려졌는가? 물론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로 알려졌지만 곱상하게 생긴 모습, 수줍고 부끄러운 듯하면서도 이지적인 자세로 사람들의 동정심을 받기에 충분한 인물이었다는 평가였다. 슈베르트는 여자들이 줄을 서서 따라다닐 정도로 매력적인 남자였지만 같은 남자들로부터도 성적으로 매력을 느낄수 있는 남자였다는 주장도 있었다.


안젤름 휘텐브렌너와 함께


그러는 중에 1816년, 슈베르트가 17세의 청년일 때에 슈베르트는 친구 요제프 폰 쇼버의 집에 가서 기거하게 되었다. 마침 그때 슈베르트는 라이바흐 교회의 카펠마이스터에 응모했다가 실패한 일이 있었다. 슈베르트는 그렇다고 아버지 학교로 다시 돌아가서 답답한 교사 생활을 하기는 싫었다. 슈베르트는 친구 쇼버의 집에 방값도 내지 않고 지내는 것이 미안해서 피아노 레슨을 해서 돈이라도 벌어서 인사치레를 하였으나 얼마후 그마저도 그만두고 오직 작곡에만 전념하였다. 그때 슈베르트는 '나는 매일 아침마다 작곡을 합니다. 그리고 작곡을 마치면 또 새로운 작곡을 합니다.'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얼마나 작곡에 전념하였는지를 알수 있다. 슈베르트는 친구 쇼버의 집에 기거하면서 주로 오케스트라곡과 합창곡을 작곡했다. 물론 리더(가곡)도 계속 작곡하였다. 이 때에 작곡한 작품들은 당장 악보가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슈베르트의 친구들을 악보를 서로 돌려보며 즐거워했고 슈베르트에 대하여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817년 말에 쇼버는 슈베르트에게 바리톤 요한 미하엘 포글(Johann Michael Vogl)을 소개해 주었다. 포글은 슈베르트보다 20년이나 위였지만 두 사람은 깊은 친분을 갖게 되었다. 슈베르트는 포글을 위해 여러 가곡들과 성악곡들을 작곡했다. 포글은 포글대로 슈베르트 작품을 비엔나에 전파하는 일을 맡아했다. 그래서 슈베르트는 비록 갖 20세에 불과한 약관이었지만 비엔나 사회에서 서서히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슈베르트는 또한 요제프 휘텐브렌너를 만났다. 안젤름 휘텐브렌너의 동생이다. 이들 형제는 슈베르트의 음악을 널리 알리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다행하게도 어려운 형편의 슈베르트에게는 따듯한 친구들이 많았다. 이들 친구들이 슈베르트의 음악을 널리 알리고 수집하며 무엇보다고 슈베르트의 사후 그의 음악을을 보전하는 일에 열중한 사람들이었다.


슈베르트와 친구들. 슈배르트가 새로 작곡한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있다. 슈베르트의 친구들은 스스로를 슈베르티아데라고 불렀다. 슈베르트동아리라는 의미이다.


1817년에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학교를 옮겼다. 리히텐탈로부터 멀지 않은 곳인 로사우(Rossau)에 있는 학교로 옮겼다. 슈베르트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어쩔수 없이 로사우 학교의 선생님이 되었다. 그래도 작곡활동은 계속하였다. 이제 비엔나 사회에서 슈베르트의 이름은 널리 알려진 것이 되었다. 1818년에 슈베르트는 당시 설립된 비엔나 악우회(Gesellschaft der Musikfruende)의 멤버가 되기를 원해서 가입신청을 했다. 음악활동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러나 나이가 좀 그렇다고 해서 악우회 가입이 거절되었다. 그때 슈베르트는 겨우 21세였다. 비록 악우회에 가입은 하지 못했지만 슈베르트의 이름은 신문에도 소개되는 등 주목을 받았다. 그때 슈베르트가 새로 작곡한 서곡이 연주되었는데 비엔나의 신문들 뿐만 아니라 보헤미아와 독일의 신문들까지 그의 음악이 훌륭하다는 찬사를 받았다. 슈베르트는 1818년 여름에 첼리츠(Zseliz: 독일어로는 Zelis)에 있는 요한 칼 에스터하지(Johann Karl Esterhazy) 백작의 장원(Manor)에서 백작의 예쁘고 명랑한 두 딸인 마리와 카롤리네의 음악교사로서 지냈다. 사례도 넉넉하게 받았다. 첼리츠는 오늘날 슬로바키아의 첼리초브체(Zeliezovce)이다.


슈베르트가 1818-1819년을 지낸 슬로바키아 첼리초브체(첼리츠)의 에스터하지 백작 장원


슈베르트는 에스터하지 백작 장원의  안락한 환경에서 계속 작곡에 전념할수 있었다. 아마도 슈베르트의 생애 중에서 첼리츠에서 보낸 시간이 가장 편안하고 여유있었던 때라고 할수 있다. 슈베르트가 에스터하지 장원에서 백작의 두 딸(마리와 카롤리네)을 위한 피아노 레슨용으로 작곡한 작품 중에는 네손을 위한 피아노 소나타 C 장조인 '그랜드 듀오'(Grand Duo: D812)와 '군대행진곡'(Marche militaire: D733 No 1)이 있다. 군대행진곡은 세곡을 작곡했는데 그 중에서 첫번째 곡이 오늘날 세계적으로 알려진 뛰어난 작품이다. 오늘날 첼리초브체의 에스터하지 장원에는 슈베르트가 머물렀던 것을 기념하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마을 중심지역에는 슈베르트 펜션도 있어서 슈베르트가 이 마을에서 지낸 것을 기억하게 만들고 있다. 슈베르트는 첼리츠에서 지내다가 비엔나로 돌아와서 오랜 친구인 요한 마이르호퍼의 집에거 기거했다.


슬로바키아 첼리초브체의 에스터하지 장원에 있는 슈베르트 기념 전시


1820년대 초반에 비엔나의 슈베르트 친구들은 슈베르트의 음악을 즐기고 또 훗날을 위해 정리하는 일을 하기 위해 슈베르티아덴(Schubertiaden)이라는 말하자면 동아리 모임을 만들어서 자주 모이며 지냈다. 주로 예술가들과 학생들이 이 모임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청년 예술가들과 젊은 학생들이 자주 모여서 지내다보니 공연히 당국의 눈총을 받게 되었다. 당시에는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 이후에 유럽에서 혁명의 기운이 만연해 있던 관계로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조금이라도 불온한 기운이 보이면 사정없이 제재를 하였다. 결국 어느날 슈베르트를 비롯해서 친구 너댓명이 오스트리아 경찰에 체포되었다. 불온한 모임을 갖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슈베르트의 친구 중에 시인 요한 젠(Johann Senn)은 당국을 무례한 언어로 통열하게 비난했다고 해서 재판에 붙여져 1년 동안의 감옥소 생활을 해야 했고 그 후에는 비엔나에서 추방되어 다시는 비엔나에 돌아오지 못하는 처벌을 받았다. 실제로 슈베르트는 생전에 요한 젠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 사실상 슈베르트도 자유민주주의 사상을 가졌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슈베르트가 가장 존경하는 베토벤이 군주제를 배격하고 공화제를 열망하였기 때문이다. 슈베르트는 요한 젠을 존경하여서 그의 시로 몇 곡의 가곡을 만들었다. 예를 들면 '행복한 세상'(Selige Welt: D743)과 '백조의 노래'(Schwanengesang: D744)가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슈베르트와 마이르호퍼는 조금 서먹서먹한 사이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생 친구로서 지냈다. 슈베르트는 친구들 사이에서 '슈밤베를'(Schwammerl: 작은 버섯)이라는 별명으로 불려졌다. 슈베르트가 작은 키여서 그런 별명이 붙었던 것 같다. 슈베르트는 키가 1미터 52센티였다. 남자로서는 작은 키였다. 슈밤(Schwamm)이라는 단어는 버섯을 말하며 메를(-merl)은 오스트리아어에서 작고 귀엽다는 뜻의 어미이다.


비엔나의 1848년 혁명. 1848년 혁명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에서 별도로 다루었으므로 참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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