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가곡 왕 슈베르트

비엔나의 슈베르트 발자취

정준극 2017. 1. 27. 08:39

비엔나의 슈베르트 발자취

슈베르트 애호가들을 위한 순례 가이드


비엔나 9구 누스도르퍼슈트라쎄 54번지 슈베르트 생가의 내정(호프). 1900년대 초반의 모습. 요제프 뮐너 교수가 제작한 송어분수(Forellenbrunnen)가 있었다. 조각가인 요제프 뮐너(Josef Mullner: 1879-1968)는 칼 루에거 플라츠의 독토르 칼 루에거 기념상도 제작하였다.


음악의 도시 비엔나는 수많은 위대한 음악가들의 영고에 점철된 발자취가 남아 있는 곳이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비발디, 글룩, 요한 슈트라우스 1세와 2세, 브람스, 바그나, 베르디, 리스트, 쇼팽, 슈만, 살리에리, 안톤 베베른, 구스타브 말러, 드보르작, 안톤 브루크너, 알반 베르크, 아놀드 쇤버그, 프란츠 레하르, 프란츠 폰 주페, 로베르트 슈톨츠, 요제프 란너 등등 시대를 초월하여 실로 헤아릴수 없이 많은 작곡가들이 비엔나에 그들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중에서 가곡의 왕 슈베르트의 발자취를 찾아 볼수 있는 장소들을 소개한다. 슈베르트를 존경하는 사람들이라면 성지를 순례한다는 심정으로 이들 장소들을 찾아보고 깊은 감회에 젖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 곳에 설명되지 못했던 장소에 대하여는 본 블로그의 '비엔나의 슈베르트 기념명판 탐방' 편에서 다룬다.


슈베르트가 태어난 집. 누스도르퍼슈트라쎄 54번지


슈베르크가 태어난 집(Gebursthaus). 9구 알저그룬트의 누스도르퍼슈트라세(Nussdorferstrasse) 54번지는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가 태어난 집이다. 전차 37번, 38번을 타고 가다가 카니시우스가쎄(Canisiusgasse)에서 내리면 바로 길거리에 있는 집이다. 평소에는 문이 닫혀 있으니 초인종을 누르면 안에서 인기척이 있다. 슈베르트는 이 집의 부억으로 사용하는 장소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슈베르트가 태어난 당시에는 주소가 힘멜포르트가쎄(Himmelpfortgasse)였다. 슈베르트는 이 집에서 태어난 후 약 4년반을 살다가 인근의 조일렌가쎄(Säulengasse) 3번지 집으로 이사가서 청년시기까지 살았다. 조일렌가쎄 3번지는 알저그룬트 교구교회가 운영하는 학교가 함께 있는 건물로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이 학교의 교장이었고 슈베르트도 한때 이 학교의 교사로서 재직했었다.


현재의 슈베르트 생가 건물 내정(호프)의 모습. 이곳에서 간혹 슈베르트를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리기도 한다.


○ 슈베르트 가라게(Schubert Garage). 어린 슈베르트가 1801년부터 1818년까지 살았던 집이다. 슈베르트의 아버지인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는 리히텐탈학교의 교장이었다. 슈베르트도 아버지를 도와서 이 학교의 보조교사로서 잠시 봉사했었다. 슈베르트는 이 집에 살면서 여러 작품들을 작곡했다. 교향곡 2번, 3번, 4번, 5번, 그리고 연가곡인 '마왕'(Erlkönig)은 이 집에서 작곡한 대표적인 작품들이다. 현재는 9구 조일렌가쎄(Säulengasse) 3번지로서 자동차 정비소인 '슈베르트 가라게'가 들어와 있다. 전에 살던 누쓰도르퍼슈트라쎄의 집에서 멀지 않으며 리히텐탈 교회로부터도 가깝다.


슈베르트 가라게의 입구


○ 리히텐탈 교회(Lichtental Kirche). 9구 마르크트가쎄(Marktgasse) 40번지에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이다. 슈베르트는 이 교회에서서 태어난 다음날인 1797년 2월 1일 세례를 받았다. 이 교회는 슈베르트의 부모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기도 하다. 슈베르트의 세례명은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였다. 가운데 이름으로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페터)의 이름을 넣었다. 슈베르트는 이 교회에 어릴 때부터 다녔으며 한때는 소년성가대원으로 봉사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슈베르트가 처음으로 음악교육을 받은 교회이다. 그리고 아카데미셰 김나지움을 나온 후에는 이 교회에서 10년간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다. 슈베르트의 미사곡 2편이 이 교회에서 초연되었다. 미사곡 1번 F 장조인 장엄미사는 이 교회의 설립 1백주년을 기념해서 1814년 9월 25일에 당시 17세였던 슈베르트가 지휘하여 초연되었다. 슈베르트의 후기 미사곡들인 G 장조, B 플랫 장조, C 장조 미사곡은 모두 이교회를 위해 작곡한 것이다. 오늘날 이 교회는 '슈베르트 교회'라고 불리며 교회에 설치되어 있는 오르간은 '슈베르트 오르간'이라고 부른다. 슈베르트가 자주 연주했던 오르간이기 때문이다.


슈베르트의 부모가 결혼식을 올렸으며 슈베르트가 유아 세례를 받은 리히텐탈 교회의 회랑과 중앙제단


○ 슈타트콘빅트(Stadtkonvikt). 콘빅트는 나라에서, 또는 비엔나시에서 운영하는 일종의 학교이지만 주로 종교적인 교육에 중점을 두고 있는 기관이다. 그래서인지 성직자가 되려는 청소년들, 음악을 공부코자 하는 청소년들은 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했다. 슈타트콘빅트는 황실에서 지원하기 때문에 제국학교 또는 시립학교라고도 불렀다. 슈베르트가 1808년부터 1813년까지 다닌 슈타트콘빅트는 현재 1구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Dr. Ignaz-Seipel Platz)에 있다. 이 건물은 슈타트콘빅트로서 사용되고 나서 구비엔나대학교가 사용했다. 건물의 외벽에 슈베르트가 이 곳에서 공부하고 기숙했었다는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슈베르트는 1808년, 그가 11살 때에 살리에리의 주선으로에 슈타트콘빅트에 어린 나이지만 궁정소년합창단 장학생으로 입학하였다. 궁정소년합창단은 현재의 비엔나소년합창단의전신이다. 슈베르트는 이 곳에서 기숙하면서 살리에리로부터 성악과 작곡에 대한 교습을 받았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서곡들과 교향곡들, 그리고 요제프 하이든과 그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의 교향곡들에 대하여 지식을 높이기 시작한다. 슈베르트는 그러면서 아카데미 김나지움(Akademische Gymnasium)에 다니면서 정규교육을 받았다. 아카데미 김나지움은 당시에는 배커슈트라쎄 20번지였지만 지금은 슈베르트 링의 베토벤플라츠 1번지에 있는건물이다. 아카데미 김나지움의 벽면에 슈베르트가 이 학교를 다녔다는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독토르 이그나즈 자이펠 플라츠. 중안의 교회가 예수회교회이며 왼쪽 건물은 현재는 오스트리아학술원이다. 오른쪽 건물이 슈타트콘빅트의 교실 겸 기숙사였다. 현관 입구 옆에 슈베르트가 이곳에서 공부했다는 명판이 붙어 있다.


○ 성안나학교(St Anna Schule). 슈베르트는 슈타트콘빅트를 나오고나서 적당한 직장이 없어서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는 학교의 선생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교사가 되려면 사범교육을 받는 것이 필요했다. 슈베르트는 대략 1813년부터 1814년까지 시내의 안나가쎄(Annagasse)에 있는 성안나학교에서 사범교육을 받았다. 성안나학교는 성안나교회가 운영하는 기관이다. 성안나교회는 안나가쎄 3b 이지만 성안나학교는 안나가쎄 3a 로 되어 있다. 성안나교회는 어린이병원(Kinderspital)에서 근무할 간호원들을 교육하는 학교도 운영했다. 성안나는 성모 마리아의 어머니로서 비엔나의 수호성인이다. 성안나학교를 수료한 슈베르트는 1814년부터 아버지의 학교인 리히텐탈 학교에서 보조교사로서 지냈다.


안나가쎄의 성안나교회와 부속건물들.


○ 투흐라우벤(Tuchlauben) 14번지와 20번지 아파트. 성안나학교를 수료한 슈베르트는 아버지 학교인 리히텐탈 학교에서 교사로서 당분간 근무하였으나  더 이상 속박되지 않고 작곡에만 전념코자 집을 나와 지내게 되었다. 슈베르트는 가난하여서 혼자의 힘으로 아파트를 구해서 살 형편이 못되었다. 슈베르트는 1815년부터 친하게 지내는 친구인 프란츠 폰 쇼버(Franz von Schober: 1796-1882)의 아파트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오늘날 1구 투흐라우벤 14번지에 있었던 보눙(Wohnung)이다. 지금의 호텔 아마데우스의 옆에 있었던 집이다. 폰 쇼버는 부모가 오스트리아인이지만 스웨덴의 말뫼에서 태어났고 비엔나에서 활동하다가 드레스덴으로 가서 지냈으며 드레스덴에서 세상을 떠난 시인, 대본가, 화가, 배우였다. 슈베르트는 폰 쇼버의 집에서 1826년까지 지내다가 다시 폰 쇼버의 다른 집인 1구 슈피겔가쎄(Spiegelgasse) 9번지에서 지냈다. 슈베르트는 슈피겔가쎄에서 지내는 동안 미완성교향곡의 2악장까지를 완성했다. 슈피겔가쎄 11번지는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집이었다.


비엔나의 1구 투흐라우벤 거리. 슈베르트는 이 거리에 있는 친구의 집에서 거의 2년 동안을 기거했다.

슈피겔가쎄 9번지. 상단(붉은 원)에 슈베르트가 미완성교햑곡을 작곡한 집이라는 명판이 붙어 있다. 바로 옆집은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집이었다.


○ 렌가쎄(Renngasse) 1번지. 슈베르트가 1818년에 첫번째 공공 연주회를 개최한 장소이다. 1819년 2월에는 '목동의 비가'(Schäfers Klagelied)를 발표했다. 그에 대한 기념명판이 붙어 있다.

○ 그뤼넨토르가쎄(Grunentorgasse) 9-11번지. 9구에 있는 이 건물은 슈베르트 아버지가 교장으로 있던 학교의 건물이었다. 슈베르트는 이 학교에서 아버지를 도와 보조교사로서 일했다. 하지만 수업보다는 작곡에 더 관심을 두었다. 예를 들어'들어라 종달새'(Horch! Horch! Larch')는 이때 작곡한 노래이다.


○ '세마리 야생마의 집'(Zu den drei Hacken). 1구 징거슈트라쎄(Singerstrasse) 28번지의 식당 겸 여인숙(Gastwirtschaft)이다. 슈베르트가 단골로 드나들던 곳이다. 슈베르트는 이곳에서 여러 작품을 작곡했다. 비엔나 전통 스타일의 작지만 안락한 바이슬(Beisl)이다. 이렇게 안락한 분위기를 게뮈클리히카이트(Gemutlichkeit)라고 부른다. 벽면에는 요셉 2세 황제와 슈베르트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나무 테이블 중에서 하나는 슈베르트에게 헌정된 것이다. 슈베르트슈튀베를(Schubertstüberl)이라고 부른다. 슈베르트를 기억하게 해 주는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이 식당의 음식은 최상급이다. 이 식당에는 과거에 이 식당에 단골로 드나들었던 명사들의 초상화 등이 전시되어 있다. 예를 들면 요한 네스트로이, 에밀리 기스란(Emilie Gisran), 모리츠 폰 슈빈트, 테레제 크로네스(Therese Krones), 프란츠 쿠펠뷔저(Franz Kupelwieser), 프란츠 쇼버(Franz Shober), 배우 0벤첼 숄츠(Wenzel Scholz), 긴델라(Gindela) 등이다.


슈베르트가 단골로 드나들던 1구 징거슈트라쎄 28번의 '세마리 야생마집'.


○ '세 아가씨의 집'(Dreimäderljaus). 1구 묄커 바슈타(Mölker Bastei)이에 있는 베토벤의 파스쿠발라티하우스(Pasqualatihaus) 옆에 있는 집이다. 슈베르트가 친하게 지내던 세 자매가 살았다는 장소이다. 픽션이지만 사람들은 실제로 슈베르트가 세 아가씨들을 만나러 이 집에 자주 찾아 왔었다고 믿고 있다. 현재 이 집의 옆에는 '슈베르트 식당'이 있다. '세 아가씨의 집'은 헝가리 출신인 하인리히 베르테(Heinrich Berte: 1857-1924)가 작곡한 오페레타의 제목이다. 슈베르트의 음악들을 인용해서 편곡한 작품으로 슈베르트의 로맨틱한 생활을 그린 내용이다. 원래 스토리는 오스트리아의 작가인 루돌프 한스 바르츄(Rudolf Hans Bartsch: 1873-1952)가 1912년에 쓴 '꼬마 버섯'(Schwammerl)이라는 소설을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슈밤메를은 슈베르트의 별명(애칭)이다. 슈베르트가 키가 작고 귀엽게 생겨서 붙인 별명이다. 아무튼 슈베르트를 기억하게 만드는 기념물이다. 주소는 슈라이포겔가쎄(Schreyvogelgasse) 10번지이다.


슈라이포겔가쎄 10번지 '세 아가씨의 집'


○ 프루비르트 하우스(Fruhwirth-Haus). 슈베르트는 1825년 2월부터 1826년 여름까지 1년이 넘도록 뷔덴의 프루비르트 하우스라는 곳에 세들어 살았다. 당시 이 집의 주소는 알테 뷔덴(Alte Wieden) 100번지였다. 오늘날에는 4구 뷔덴의 테흐니커슈트라쎄(Technikerstrasse) 9번지이다. 프루비르트라는 말이 무엇인지는 정확치 않다. 아마 집주인의 이름인 듯 싶다. 칼스키르헤 옆, 비엔나시립박물관이 있는 곳이다. 슈베르트는 1826년 여름에는 18구 쿠츄커가쎄(Kutschkergasse) 44번지의 집에서 지냈다. 이어 1827년 봄에는 17구 도른바허 슈트라쎄(Dornbacher Strasse) 55번지에서 지내며 가곡의 작곡에 전념하였다.


1871년 이전에는 뷔덴에 있는 빈강의 모습이 이러했다. 칼스키르헤 옆의 빈강에 놓여 있는 슈봐르첸버그브뤼케. 슈베르트는 1825-26년에 칼스키르헤 부근의 프루비르트하우스라는 집에 세들어 지냈다.


○ 몬트샤인하우스(Mondscheinhaus). 슈베르트는 1825-26년 기간에 프루비르트하우스의 바로 옆 집, 그러니까 알테 뷔덴 10번지의 집에서도 잠시 기거했었다. 이 집은 슈베르트의 친구로 화가인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의 할머니의 집이지만 할머니가 혼자 살고 있어서 슈베르트가 잠시 함께 기거했었다. 이 집은 당시에 '황금 달빛 집'(Zum goldenen Mondschein)이라는 이름이 붙은 집이었다. 사람들은 '춤 골데넨 몬트샤인'이라고 하는 것이 길어서 간단히 '몬트샤인하우스'(Mondscheinhaus)라고 불렀다. 그 전에는 비엔나에서도 알아주는 댄스홀(Tanzsaal)로 이용된 집이었다. 현재는 4구 뷔덴의 테흐니커슈트라쎄 1번지이다.


칼스키르헤의 뒤편, 그림에서 오른편에 있는 집이 몬트샤인하우스였다.


○ 슈베르트가 세상 떠난 집(Sterbehaus Schuberts). 비엔나의 인네레 슈타트(1구)에 살던 슈베르트는 1828년 9월에 친구 프란츠 폰 쇼버의 집에서 벗어나고 아울러 친구 모리츠 폰 슈빈트의 집에서도 벗어나서 당시로서는 비엔나의 포아슈타트(Vorstadt: 교외)에 해당하는 뷔덴(Wieden)의 형 페르디난트의 집으로 옮겼다. 그때 쯤해서 슈베르트의 건강은 대단히 좋지 않은 상태였다.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딘난트는 1828년 봄에 가족과 함께 뷔덴 71번지 집에 세들어 살고 있었다. 당시에 뷔덴에는 새로운 집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는데 거리 이름들이 정해지지 않아서 주소도 정확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었다. 그저 포아슈타트 뷔덴 몇 번지라고 하면 우편이 들어가던 때였다. 페르디난트는 71번지 건물의 2층에 살았다. 슈베르트는 형이 세들어 살고 있는 집의 방 하나에 기거하게 되었다. 슈베르트는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1828년 11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그 집은 4구 뷔덴의 케텐브뤼켄가쎄(Kettenbrückengasse) 6번지이다. 비엔나의 야채와 과일시장으로 유명한 나슈마르크트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지하철 U4의 케텐브뤼켄가쎄에서 내리면 된다. 당시에 그 집은 '론슈페르크 도시집'(Zur Stadt Ronsperg)라는 이름이었다. 론슈페르크는 보헤미아와 바바리아의 국경 지역에 있는 도시 이름이다. 아마 집 주인이 론슈페르크 출신이어서 그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 당시 빈강의 건너편인 이 지역에는 새로 집들이 들어서고 거리가 만들어졌지만 거리 이름은 정해지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1828년 9월 18일에 빈강(Wien Fluss)을 가로 지르는 케텐브뤼케가 건설되자 거리 이름을 케텐브뤼켄가쎄라고 정하였다. 현재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은 기념관으로 되어 있다. 입장료는 2 유로이며 19세 이하는 무료이다.


케텐브뤼켄가쎄 6번지의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 붉은 색 원이 있는 곳에 그런 내용의 명판이 설치되어 있다.

슈베르트가 세상 떠난 집에 부착되어 있는 명판. 단순히 '1828년 11월 19일에 음의 시인인 프란츠 슈베르트가 이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라고 되어 있다.


○ 마르가레텐 교회(Margareten Kirche). 비엔나의 5구 마르가레텐에 있는 로마 가톨릭 교회이다. 현재의 주소는 쇤브룬너 슈트라쎄(Schönbrunner Strasse) 52번지이다.  50번지에는 현재 성모약국(Muttersgottes Apotheke)이 자리잡고 있다. 본래의 교회 이름은 '마르가레텐 성 요제프 교회'(St Josef zu Margareten Kirche)이다. 그러나 보통 '성자 요제프'(Zum Heiligen Josef) 교회라고 부른다. 이 교회에서 1828년 11월 21일 슈베르트 영결미사가 거행되었다. 영결식에서는 슈베르트가 작곡한 '당신에게 평화를'(Pax vobiscum: D 551)과 요한 밥티스트 갠스바허(Johann Baptist Gänsbacher: 1778-1844)가 작곡한 '추도모테트'(Trauermotette)를 금관악기로 구성된 앙상블과 합창단이 연주했다. 이 교회에서 장례미사를 마친 슈베르트의 시신은 배링 공동묘지 내에 있는 예배처인 '성로렌츠와 성게르트루트'(Zum Heiligen Lorenz und zur Heiligen Gertrud)로 옮겨졌고 이어 배링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슈베르트의 장례미사가 거행된 마르가레텐 성요제프 교회의 중앙제단

마르가레텐 성요제프 교회. 하단의 붉은 타원으로 표시된 곳에 슈베르트의 영결미사가 거행된 교회라는 명판이 붙어 있다.


○ 배링공동묘지(Währinger Friedhof)의 슈베르트 묘지. 슈베르트는 1828년 11월 21일 비엔나의 18구 배링(Währing)에 있는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존경하여서 자기가 죽으면 베토벤의 무덤에서 가까운 곳에 묻어 달라고 부탁한바 있다. 베토벤은 그 전해인 1827년 3월에 세상을 떠나서 배링공동묘지에 안장되어 있었다. 슈베르트의 친구들은 그러한 요청을 들어주기로 해서 베토벤의 무덤 옆에 슈베르트의 무덤을 마련했다. 오늘날 배링공동묘지의 두 사람 묘지에는 유해가 없다. 1888년에 중앙공동묘지로 이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묘비는 그대로 남아 있다.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열성 팬들은 지금도 배링공동묘지를 찾아와서 묵념을 드리며 헌화하고 간다. 비엔나 시당국은 배링공동묘지에 있던 묘지들을 대부분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로 이장하였다. 배링공동묘지가 있던 자리는 지금 슈베르트 공원의 일부가 되어 있다.


배링의 슈베르트 공원에 남아 있는 슈베르트의 묘비. 그 옆에는 베토벤의 묘비


○ 중앙공동묘지(Wiener Zentralfriedhof)의 슈베르트 묘지. 1888년에 비엔나 시당국의 계획에 의해 배링공동묘지에 있던 슈베르트의 유해를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로 이장하였다. 오늘날 슈베르트의 묘지와 묘비는 중강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서 역시 베토벤의 옆에 자리압고 있다. 모차르트의 묘지와 기념비와는 삼각형을 이루고 있다. 잘 아는대로 모차르트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는 아는 사람이 없다. 장크트 막스 공동묘지에 모차르트의 묘를 만들었으나 가묘일 뿐이다. 그래서 중앙공동묘지의 모라츠트 묘도 가묘로서 만들수 밖에 없었다.


중앙공동묘지의 슈베르트 묘지와 묘비(오른쪽). 가운데는 모차르트, 왼쪽은 베토벤의 묘지와 묘비


○ 브루노 크라이스키 공원(Bruno Kreisky Park)의 보리수. 5구 마르가레텐은 슈베르트와 관련이 있다. 마르가레텐 교구교회에서 슈베르트의 영결미사가 거행된 것도 하나의 인연이었다. 마르가레텐 남성합창연맹(Männergesang-Verein)과 아마추어합창협회(Arbeitersangerbund)는 1928년 11월 19일 슈베르트 서거 1백주년을 맞는 날을 기념하여 공동으로 마르가레텐의 브루노 크라이스키 공원에 보리수를 식수했다. 이를 슈베르트린데(Schubertlinde)라고 부른다. 슈베르트의 명가곡 '보리수'를 생각해서이다.


마르가레텐의 브루노 크라이스키 공원에 있는 슈베르트보리수. 슈베르트 서거 1백주년을 기념하여 심었다. 돌로만든 설명판은 마르가레텐 남성합창연맹과 아마추어합창협회가 공동으로 제작해서 설치한 것이다.


○ 슈타트파르크(시립공원: Stadtpark)의 슈베르트 기념상. 비엔나의 슈타트파르크(시립공원)는 비엔나의 공원 중에서 가장 많은 조각들을 품고 있는 곳이다. 음악가들만 해도 유명한 요한 슈트라우스 2세의 황금상이 있으며 이밖에도 프란츠 슈베르트, 로베르트 슈톨츠, 안톤 브루크너, 프란츠 레하르 등의 기념상이 있다. 슈베르트 기념상은 비엔나 출신의 유명한 조각가인 칼 쿤드만(Carl Kundmann: 1838-1919)이 제작한 것이다. 그러나 좌대는 덴마크 출신으로 비엔나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당대의 조각-건축가인 테오필 한젠(Theophil Hansen: 1813-1891)이 제작한 것이다. 슈베르트는 한 손에 연필을, 다른 한 손에 오선지를 들고 있어서 금방이라도 작곡을 하려는 모습이다. 좌대의 3면에는 아름다운 부조가 제작되어 있다. 음악의 장르를 표현한 부조들이다. 전면에는 음악적인 환상을 표현한 부조이다. 왼쪽에는 기악을, 오른쪽에는 성악을 표현한 부조들이다. 슈베르트 기념상은 슈베르트 탄생 75주년 및 서거 44주년을 기념하여서 비엔나 남성합창연맹(Wiener Männergesang-Verein)이 설치한 것이다.


슈타트파르크의 슈베르트 기념상. 슈베르트 탄생 75주년 및 서거 44주년을 기념하여서 비엔나 남성합창연맹이 설치했다.


○ 슈베르트 분수(Schubert Brunnen). 9구 알저그룬트의 리히텐슈타이너수트라쎄()와 알저바흐슈트라쎄()가 만나는 모퉁이에 있다. 사각형의 좌대 위에서 목욕하는 소녀상이다. 1928년 11월 18일, 슈베르트 서거 1백주년을 기념하여서 제막되었다. 슈베르트는 1828년 11월 19일에 세상을 떠났다. 대리석 조각은 조각가 테오도르 슈툰들(Theodor Stundl: 187501934)의 작품이며 좌대는 건축가인 프란츠 마투셰크(Franz Matuschek)의 작품이다.


알저그룬트의 슈베르트 분수. 슈베르트 서거 1백주년을 기념하여 설치한 분수이다.


○ 횔드리히스뮐레 여관(Gasthof Höldrichsmühle)과 '보리수'. 슈베르트의 연가곡 '겨울나그네'에 나오는 '보리수'(Der Lindenbaum)의 무대가 되는 장소이다. '성문 앞 우물가에 서 있는 보리수'(Am Brunnen vor dem Tore da steht ein Lindenbaum)이라고 시작하는 노래이다.  비엔나와 바덴(Baden bein Wien)의 중간 쯤의 힌터브륄 바이 빈(Hinterbrühl bein Wien)에 있는 횔드리히스뮐레 여관 앞에 있는 보리수이다. 지금은 호텔이다. 뫼들링의 비엔나 숲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힌터브륄을 거치는 것이 바람직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는 곳이다. 여관으로부터 길건너 편에 회렌베르게 자연공원(Naturpark Föhrenberge)이 있다. 횔드리히스뮐레 호텔의 주소는 힌터브륄 바이 빈의 가드너슈트라쎄(Gaadnerstrasse) 34번지이다.


슈베르트가 힌터브륄 바이 빈의 맑은 시내물이 흐르는 횔드리히스뮐레 물방앗간에서 악상에 젖어 있는 그림

횔드리히스뮐레 여관을 배경으로 한 슈베르트 기념 엽서. 왼쪽에 서 있는 커다란 나무가 보리수이다.





ö ä 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