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가곡 왕 슈베르트

슈베르트의 형 페르디난트

정준극 2017. 1. 29. 10:40

페르디난트 슈베르트

작곡가로서 프란츠 슈베르트의 형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 슈베르트


위대한 작곡가로서 '가곡의 왕'이라고 불리는 프란츠 슈베르트를 소개하는 마당에 그의 형까지 소개할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고 할지 모르지만 형 페르디난트 역시 작곡가였고 동생 프란츠의 생애에 많은 영향을 끼쳤기에 소개하는 바이다. 슈베르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무슨 금슬이 그렇게도 좋은지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유아 사망율이 대단히 높아서 9명이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나고 5명만 생존하였다. 아들 셋, 딸 둘이었다. 큰 아들이 이그나즈였고 둘째 아들이 페르디난트였으며 막내가 프란츠, 즉 우리의 슈베르트였다. 슈베르트의 가족들은 조일렌가쎄에서 살 때에 가족 현악4중주단을 만들어서 심심하면 모여서 연주를 하곤 했다.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는 첼로, 큰형 이그나즈는 바이올린, 둘째 형 페르디난트는 비올라, 그리고 어린 프란츠는 바이올린을 맡아서 연주했다. 어떤 때는 어린 프란츠가 비올라를 연주하기도 했다. 둘째 형인 페르디난트는 비록 아마추어이지만 아버지로부터 음악교육을 받아서 나중에 작곡가로서 활동할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물론 페르디난트는 어릴 때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이 유별났었다. 페르디난트는 프란츠보다 5년 먼저인 1794년에 태어났으며 프란츠보다 31년이나 더 활동하다가 1859년에 향년 65세로서 세상을 떠났다.  


작곡가로서 페르디난트는 그나마 여러 작품을 남겼는데 대표작으로서는 '목자 미사곡'(Hirtenmesse: Op 13), '살베 레지나'(Salve Regina: Op 12: 여왕님을 찬양하라), F 장조 미사곡(Messe F-Dur: Op 10), '필리아에 레굼'(Filiae Regum), 레기나 코엘리(Regina Coeli: 하늘의 여왕) 등 주로 교회음악이었다. 페르디난트가 프란츠의 생애에 있어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프란츠가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세상을 따났다는 것, 페르디난트가 프란츠의 장례식을 주관했다는 것, 그리고 프란츠가 남긴 악보들을 관리했다는 점 등이다. 프란츠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곳은 오늘날 비엔나 4구의 케텐브뤼켄가쎄 6번지 건물의 2층에 있는 작은 방으로 이곳은 페르디난트가 식구들과 함께 살고 있던 아파트였다. 페르디난트는 가족들이 많았다. 두번 결혼했는데 두 부인에게서 무려 놀라지 마시라 29명의 자녀를 생산하였다. 그중에서 12명이 생존하였지만 아무튼 대가족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런 와중에 동생 프란츠가 마땅히 거처할 곳이 없고 더구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어어서 어쩔수 없이 비좁은 곳이지만 형 페르디난트의 아파트에 와서 지내게 되었고 몇달 후에 세상을 떠난 것이다.


케텐브뤼켄가쎄 6번지.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집.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 슈베르트가 살던 집


페르디난트는 어릴 때에 아버지로부터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웠고 얼마 후에는 큰 형인 이그나즈로부터도 바이올린을 배웠다. 그러다가 비엔나 1구에 있는 장크트 안나(성안나) 교회의 성가대에 들어가서 성가대 지휘자인 요제프 드레흐슬러(Joseph Drechsler)로부터 정식으로 음악공부를 하게 되었다. 페르디난트는 오르간에 재능이 많아서 16세 때에 리히텐탈 교구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이와 함께 비엔나에 있는 어떤 고아원의 음악교사가 되었다. 페르디난트는 1816년에 지금은 물론 없어졌지만 그 고아원에서 정식 교사로 승진하였다. 페르디난트가 22세 때였다. 그 해에 그는 학생 중에서 반반하게 생긴 안나라는 여자를 사랑하여서 결혼하였다. 동생인 프란츠 슈베르트는 1818년에 형 페르디난트를 위해서 '독일 진혼곡'(Deutsche Requiem: D 621)을 작곡하였다. 페르디난트는 나중에 이 진혼곡을 자기가 작곡한 것처럼 출판했으나 훗날 학자들에 의해 프란츠의 것으로 판명되어 슈베르트 작품 목록에 포한될수 있었다. 그렇다고 페르디난트가 악의가 있어서 동생의 작품을 자기의 작품처럼 내세웠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을 뿐이었다. 페르디난트는 1820년에 알트레르헨펠트(Altlerchenfeld) 교회의 성가대 지휘자 겸 음악교사가 되었다. 그러다가 4년 후에는 성안나 교회가 운영하는 보통학교(Normal-Hauptschule)의 정식교사로 임명되었다. 페르디난트의 첫번째 부인인 안나는 1832년에 병마와 싸우다가 세상을 떠났다. 동생 프란츠가 세상을 떠난지 4년 후의 일이었다. 상처한 페르디난트는 아이들도 많고 하여서 곧이어 재혼을 하였다. 테레제라는 여인이었다. 그렇게해서 페르디난트는 부인 두 명을 통해서 토탈 29명의 자녀를 생산하였으며 그중에서 12명이 생존하였던 것이다. 페르디난트는 1838년에 비엔나음악원의 오르간 명예교수가 되었다. 비엔나음악원은 비엔나 악우회가 설립한 교육기관으로 오늘날 비엔나국립음대라고 불리는 비엔나 공연예술-음악대학교의 전신이다. 페르디난트는 학교 행정에 능숙하다는 평을 받고 있어서 1851년에 성안나교회가 운영하는 보통학교의 교장으로 초빙을 받아 상당기간 교장으로서 동안 봉직했다.


페르디난트는 동생 프란츠가 세상을 떠나자 프란츠가 가지고 있던 자료들을 상당히 많이 떠안아 가지고 있게 되었다. 페르디난트는 그 중에서 오페라, 미사곡, 교향곡 몇 편만을 놓아두고 나머지는 모두 악보출판사인 디아벨리에게 팔아서 생활비로 썼다. 디아벨리 출판사는 프란츠 슈베르트가 남긴 작품들을 하나하나씩 정리해서 출판하여 팔았고 그런 사업은 디아벨리가 세상을 떠난 후까지 계속되었다. 페르디난트 자신으로서느 여러가지 교육자료들을 집필한바 있다. 그리고 종교음악도 상당히 작곡했다. 페르디난트는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자녀들도 많고 하여서 언제나 생활이 곤궁했다. 페르디난트는 유언으로서 자기의 글이나 작곡한 것을 나중에 누가 출판한다면 사례금은 모두 남아 있는 가족들이 가질수 있게 해 달라고 당부했다.


말년의 페르디난트. 185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