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가곡 왕 슈베르트

음악이 꽃피는 시절

정준극 2017. 1. 25. 08:55

음악이 꽃피는 시절

미완성의 교향곡과 무대음악


살롱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슈베르트. 친구들의 모임이 슈베르티아데였다. 폰 슈파운이 소장했던 목각 작품


슈베르트가 1819년과 1820년의 2년간은 슈베르트로서 그야말로 음악이 꽃피는 시절이었다. 지난날의 작품들보다 내용에 있어서 훨씬 발전을 보인 것이고 스타일에 있어서도 완숙된 것이었다. 1819년 2월에는 비록 미완성이었지만 오라토리오 '나사로'(Lazarus: D689)를 시작했고 이어 찬송가인 '시편 23편'(Der 23. Psalm: D706), 8중주곡인 '물의 정령의 노래'(Gesang der Geist unber den Wassern: D714), C 단조 4중주곡(Quartettsatz: D703), 피아노를 위한 C 장조 '방랑자 환상곡'(Wanderer Fantasy: D760) 등을 작곡했다. 1820년에 들어서서 슈베르트는 무대음악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오페라 '쌍둥이 형제'(Die Zwillingsbrüder)와 극음악인 '마술하프'(Die Zauberharfe)는 이때에 만든 것이다. '쌍둥이 형제'는 6월에 캐른트너토르 극장의 무대에 올려졌고 '마술하프'는 8월에 빈강변극장(Theater an der Wien)에서 초연을 가졌다. 둘 다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슈베르트는 실내악 등 소규모 작품을 주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인 군델호프(Gundelhof) 앙상블이 연주하도록 했다. 이 앙상블은 처음엔 슈베르트의 집에서 4중주단으로 시작하였다가 그후에 현악기들을 추가하여서 작은 앙상블로 발전한 단체이다. 그러나 슈베르트가 규모가 큰 작품을 작곡하기 시작하자 군델호프 앙상블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웠다. 규모가 큰 작품으로서 미사곡은 리히텐탈 교회 등에서 성가대와 함께 연주할수 있어서 예외였다. 슈베르트도 그랬겠지만 그의 친구들은 슈베르트의 교향곡 등이 더 많은 청중들의 앞에서 연주되기를 바랐다. 당시에 작곡가로서 명성을 높이려면 작품을 출판해서 널리 알리는 것이 첩경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악보출판사들은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출판하기를 주저했다. 악보를 출판해도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비엔나의 유명한 악보출판가인 안톤 디아벨리(Anton Diabelli)도 슈베르트의 작품들을 출판하기를 꺼려했다. 그러다가 어느때인가 디아벨리는 무슨 생각을 했던지 슈베르트에게 몇 편의 작품을 의뢰하기도 했다. 그래서 슈베르트의 첫 일곱개 가곡들이 출판될수 있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슈베르트는 몇푼 안되는 로열티를 받았을 뿐이었다.  


  

슈베르트의 '쌍둥이 형제', '마술하프', '공모자'의 음반


슈베르트는 1821년 3월에 괴테의 시에 의한 '마왕'(Der Erlkönig: D328)을 완성했고 이 노래를 당대의 바리톤인 포글이 콘서트에서 불렀다. 대단한 찬사를 받았다. 그러자 디아벨리는 슈베르트에게 연락해서 자기가 작곡한 왈츠를 바탕으로 변주곡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작곡가이기도 했던 디아벨리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활동하고 있는 50명의 뛰어난 작곡가들에게 변주곡을 부탁해서 그것을 '조국의 예술가연맹'(Vaterländischer Künstlerverein)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할 생각이었다. 50명의 작곡가 중에는 베토벤도 들어 있고 칼 체르니, 요한 네포무크 훔멜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청년 슈베르트는 디아벨리 변주곡에 참여하게 됨으로서 비로소 당대의 작곡가로서 인정을 받은 셈이었다. 한편, 슈베르트는 두 편의 오페라('쌍둥이 형제'와 '마술하프')가 어느정도 성공을 거두자 다른 어느 작품보다도 무대음악에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가 내놓은 무대음악들은 무슨 연융인지 실패의 연속이었다. 슈베르트는 이 기간에 약 20편의 무대음악을 만들었다. 대부분 징슈필(Singspiel)이었다. 징슈필이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는 본블로그의 다른 항목에 설명되어 있으므로 참고 바란다.


징슈필 '휘에라브라스'의 무대. 잘츠부르크


슈베르트의 무대음악이 성공하지 못한 이유를 굳이 들자면 1822년의 '알폰소와 에스트렐라'(Alfonso und Estrella)는 대본이 형편없었기 때문이었다. 1823년 가을에 내놓은 '휘에라브라스'(Fierrabras)는 음악은 물론이고 대본도 관찮았는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에 비엔나의 오페라 무대는 로시니의 이탈리아 스타일 오페라가 완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독일 징슈필 스타일의 슈베르트 작품들은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심지어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오이리안테'(Euryanthe)도 비엔나에서 초연되었지만 관심을 끌지 못했다. 슈베르트가 계속 내놓은 징슈필인 '공모자'(die Verschworenen: D796)는 제목이 주는 인상때문에 당국의 검열에서 공연금지를 받았다. 혁명의 기운이 높이지고 있던 때에 공모니 음모니 하는 제목의 무대작품은 내용이야 어떻든 검열을 통과하기가 힘들었다. 슈베르트가 극음악을 작곡한 '사이프러스의 공주 로자문데'(Rosamunde, Fürstin von Zypern: D797)는 연극의 수준이 형편없다는 반응이어서 고작 2회 공연을 마치고 막을 내려야 했다. 슈베르트의 대표적인 무대음악으로서 세 편을 소개했는데 '휘에라브라스'는 사실상 연주하기가 대단히 어렵다는 평을 받았으므로 그렇다고 쳐도 '공모자'는 무척 재미있는 코미디여서 문제가 될 소지가 하나도 없지만 그놈의 제목 때문에 실패를 본 것이다. 그리고 '로자문데'는 슈베르트의 극음악 중에서 가장 매력적인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오늘날 어찌된 일인지 전편의 공연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다만 서곡 등만이 콘서트의 스탠다드 레퍼토리로서 등장하고 있을 뿐이다.


슈베르트가 친구들과 함께 뮤지컬 세레나데를 리허설하는 장면. 슈베르트는 23세 때부터 무대음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첫 작품은 '쌍둥이 형제'였다.


참고로 슈베르트의 무대음악 리스트를 소개한다. 대부분이 미완성이며 어떤 것은 다만 몇 곡의 노래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리고 대부분이 노래보다는 징슈필이다. 외형상으로는 21편의 오페라, 징슈필, 극음악, 오라토리오를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 중에서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어서 오늘날 그나마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은 '알폰소와 에스트렐라'와 '휘에라브라스' 정도이다.


- '거울 기사'(Der Spiegelritter: D 11). 1811년?. 5명의 소프라노, 3명의 테너, 4명의 베이스,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징슈필. 3막. 미완성. 서곡과 다섯 곡의 완성된 노래들, 1막의 세 부분만 음악이 남아 있다.

- '악마의 욕망성'(Des Teufels Lustschloss: D 84). 1814년. 3명의 소프라노, 2명의 테너, 3명의 베이스, 1명의 네레이터,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징슈필. 3막. 서곡과 23개 노래 완성.

- '아드라스트'(Adrast). 1817년. 소프라노, 테너, 베이스, 남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징슈필. 2막 또는 3막? 미완성. 13곡의 노래가 마련된 중에서 8곡은 완성, 5곡은 스케치뿐이다.

- '4년간의 임지'(Der vierjährige Posten: D 190). 1815년. 소프라노, 3명의 테너, 베이스, 네레이터,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징슈필. 1막. 서곡과 8곡의 노래 완성.

- '페르난도'(Fernando: D 220). 1815년. 2명의 소프라노, 1명의 테너, 2명의 베이스, 1명의 내레이터, 오케스트라를 위한 징슈필. 1막. 7곡의 노래만 완성.

- '빌라 벨라에서 온 클라우디네'(Claudine von Villa Belle: D 239). 1815년. 2명의 소프라노, 2명의 테너, 2명의 베이스,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징슈필. 3막. 1막에서는 서곡과 8곡의 노래, 2막과 3막에서는 각각 한 곡의 노래가 남아 있다. 다른 노래들은 작곡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으나 모두 분실.

- '살라만카에서 온 친구들'(Die Freunde von Salamanka: D 326). 1815년. 3명의 소프라노, 3명의 테너, 2명의 바리톤,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징슈필. 2막. 서곡과 8곡의 노래가 남아 있다.

- '시의회'(Die Bürgerschaft: D 435). 1816년. 4명의 소프라노, 3명의 테너, 3명의 베이스, 2명의 바리톤,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페라. 3막이지만 미완성. 1막에서는 9곡의 노래, 2막에서는 5곡의 노래, 3막에서는 1곡의 노래와 일부 음악이 남아 있다.

- '쌍둥이 형제'(Die Zwillingsbrüder: D 647). 1819년. 소프라노와 테너 각 1명, 3명의 베이스,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1막의 징슈필. 서곡과 10곡의 노래가 남아 있다.

- '마술 하프'(Die Zauberharfe: D 644). 1820년. 1명의 테너, 6명의 대사를 말하는 사람,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3막의 동화연극(Zauberspiel). 1막과 3막이 서곡, 13곡의 노래가 남아 있다. 1막의 서곡은 '로자문데' 서곡으로 알려져 있다. 로자문데 서곡은 D 797에서도 사용되었다.

- '나사로'(Lazarus: D 689). 1820년. 다른 제목은 '부활축제'(Die Feier der Auferstehung). 3명의 소프라노, 2명의 테너, 베이스,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라토리오. 3막의 미완성 작품. 1막에서 21곡, 2막에서 8곡이 남아 있다.

- '사쿤탈라'(Sacontala: Sakuntala: D 701). 1820년. 14명의 소프라노, 3명의 알토, 5명의 테너, 9명의 베이스,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페라. 3막의 미완성. 1막과 2막에서 11곡의 스케치만 남아 있다.

- '마술 종'(Das Zauberglockchen: D 723). 1821년. 2명의 테너, 베이스,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어떤 장르의 작품을 구상했는지는 알수 없다. 다만, 2곡의 노래가 남아 있을 뿐이다. 듀엣인 Nein, nein, nein, nein, das ist zu viel(아냐, 아냐, 아냐, 아냐, 그건 너무 많아)와 아리아인 Der Tag entflieht, der Abend glüht(낮이 지나가니 밤이 빛나도다)이다. 두곡 모두 헤롯을 위한 노래이다.

- '알폰소와 에스트렐라'(Alfonso und Estrella: D 732). 1821-22년. 2명의 소프라노, 2명의 테너, 베이스, 2명의 바리톤,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페라. 3막. 서곡과 43곡의 노래가 남아 있다. 3막에서 Wie schnell bin ich erhoben은 널리 알려진 곡이다. 솔로, 듀엣, 합창이 나온다.

- '공모자'(Die Verschworenen: D 787). 또는 '집안 싸움'(Der häusliche Krieg). 1823년. 4-5명의 소프라노, 2명의 알토, 2-3명의 테너, 2명의 베이스,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징슈필. 단막. 11곡 노래가 남아 있다.

- '뤼디거'(Rüdiger: D 791 ). 1823년. 2명의 테너와 남성합창, 그리고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페라. 2곡을 스케치한 것만 남아 있다.

- '휘에라브라스'(Fierabras: Fierrabras: D 796). 1823년. 3명의 소프라노, 3명의 테너, 3명의 베이스, 1명의 바리톤, 1명의 대사를 말하는 사람,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페라. 3막. 서곡과 33곡의 노래가 남아 있다. Op 76으로 출판되었다.

- '사이프러스의 여왕 로자문데'(Rosamunde, Fürstin von Zypern: D 797). 1823년. 1명의 알토,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극음악. 서곡과 9곡의 노래가 남아 있다.

- '글라이헨에서 온 백작'(Der Graf von Gleichen: D 918). 1827년. 4명의 소프라노, 2명의 테너, 6명의 베이스, 혼성합창과 오케스트라를 위한 오페라. 2막. 미완성. 1막에서 11곡을 스케치한 것과 2막에서 9곡을 스케치한 것이 남아 있다.

- '음유시인'(Der Minnesänger: D 981). 작곡을 시도한 연도는 미상, 음악도 분실

- 제목을 알수 없는 오페라(D 982). 2명의 소프라노, 테너와 베이스 각 1명, 오케스트라를 위한 작품. 3곡을 스케치한 것만 남아 있다.


'알폰소와 에스트렐라' 무대. 칼리아리 리리코 극장


기왕에 슈베르트의 무대음악을 소개한 차제에 그의 교향곡에 대하여도 일고코자 한다. 슈베르트는 외관상으로 교향곡을 13편이나 작곡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넘버링이 붙어 있는 교향곡은 10편에 이른다. 슈베르트의 생전에 넘버링이 붙은 교향곡은 6편 뿐이다. 나머지 4편은 그의 사후에 붙여진 것이다. 13편 중에서 3편은 완성하지 못하고 스케치만 해 놓은 것이다. 슈베르트의 교향곡 중에서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미완성교향곡'은 교향곡 8번이다. 물론 슈베르트의 사후에 붙여진 넘버링이다. '미완성교향곡'은 슈베르크가 2악장 까지만 작곡하고 밀어넣어 두었던 작품이다. 원래는 4악장으로 구성되어야 했다. 그래서 '미완성'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그러나 많은 음악사학들이 이 작품은 2악장 만으로도 더 이상의 악장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고 주장하고 인정하였으나 그래도 슈베르트의 원래 의도가 4악장짜리를 작곡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 '미완성교향곡'이라는 타이틀을 붙인 것이다. 슈베르트의 교향곡을 시기별로 정리해 보았다.


- 1811? D 2B. 교향곡 D 장조 (종전에는 D 997로 분류했었다). 1악장의 일부가 남아 있다. 그러므로 완전 교향곡이라고 볼수 없다. 또한 14세 때에 작곡했다고 하면 완숙한 경지의 작품이 아니라고 볼수 있다.

- 1813년. D 82. 교향곡 1번 D 장조

- 1814-15년. D 125. 교향곡 2번 B 플랫 장조

- 1815년. D 200 교향곡 3번. D 장조

- 1816년. D 417. 교향곡 4번 C 단조. '비극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 1816년. D 485. 교향곡 5번 B 플랫 장조

- 1817-18년. D 589. 교향곡 6번 C 장조. '작은 교향곡'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 1818년. D 615. 교향곡 D 장조. 1악장과 2악장의 피아노 스케치만 남아 있다. 교향곡 넘버링은 없다.

- 1820년. D 708A. 교향곡 D 장조. 전 4 악장에 대한 피아노 스케치가 남아 있다. 하지만 교향곡 넘버링은 없다.

- 1821년. D 729. 교향곡 7번 E 장조. 전 4악장에 대한 피아노 스케치가 남아 있다. 나중에 붙인 넘버링이다.

- 1822년. D 759. 교향곡 8번 B 단조. 1악장과 2악장이 완벽하게 작곡되어 있으며 3악장의 스케르초 부분이 남아 있다. '1악장 후의 막간음악'(Entre-Acte nach dem 1. Aufzug)은 별도로 D 797로 분류되었으며 아마도 4악장일 것이라는 추측이다. 음악학자들은 비록 3악장의 작곡도 추진했고 4악장으로 보이는 음악도 있으므로 이 교향곡을 완벽한 교향곡이라고 불렀지만 일부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완성으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미완성교향곡'이라고 부른다.

- 1828? D 936A. 교향곡 10번으로 분류한 것은 슈베르트 사후의 일이었다. 슈베르트는 D 장조를 선호하였는데 이 교향곡도 D 장조이다. 그러나 4악장이 아니고 3악장의 포맷을 사용하였다. 3악장의 피아노 스케치가 완성되어 있었다.

- 1825? D 944. 교향곡 9번 C 장조로서 '그레이트'(Great) 교향곡이라고 불리는 작품이다. 넘버링 역시 슈베르트의 사후에 붙인 것이다. 1825년에 착수해서 1828년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도 이 교향곡의 작곡에 정신을 쏟았다. 또는 '그문덴 가슈타인 교향곡'이라는 별명도 있다. 그문덴(Gmunden)과 가슈타인(Gastein)은 오스트리아의 알프스 지역에 있는 도시로서 온청장이 유명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휴양을 위해 죽어라고 찾아온다.'그문덴 가슈타인 교향곡'은 넘버링으로 교향곡 10번이다. 슈베르트는 이 교향곡을 완성한 후에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류블리아나에서의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1822년에 베버를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되었고 이어 그렇게도 존경하는 베토벤을 만날수 있었다. 그러나 특별한 사건은 없었다. 베토벤은 슈베르트의 음악적 재능에 대하여 이미 알고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슈베르트를 칭찬했다고 하지만 그건 전해 내려오는 얘기일 뿐이며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없다. 그래서 베토벤은 슈베르트 음악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알고 있지 못했다는 얘기이다. 왜냐하면 당시에 슈베르트의 기악곡이나 무대음악들은 악보로 출판된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던 것이다. 베토벤은 임종이 가까운 때에 몇몇 젊은 작곡가들이 작곡한 악보들을 살펴보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슈베르트의 악보를 보고는 '슈베르트에게는 하늘의 재능이 마치 불꽃이 튀듯 보인다'라고 소리쳤다는 얘기도 있다. 베토벤이 슈베르트를 어떻게 생각했고 어떻게 보살펴 주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없지만 반면에 슈베르트가 베토벤을 얼마나 숭모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해 내려오고 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너무나 존경하여서 베토벤이 1827년 3월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말할수 없이 큰 충격을 받아서 베토벤을 따라서 저 세상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을 품었다고 한다. 실제로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장례식에서 당시의 장례 관례에 따라 맨 앞에서 만장을 들고 장례행렬을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베토벤의 장례를 끝까지 지켜본 슈베르트는 친구들에게 나중에 자기가 죽으면 배링공동묘지의 베토벤 무덤에서 가깝게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슈베르트가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나자 친구들을 슈베르트의 유언을 깊이 새겨서 배링공동묘지의 베토벤 묘지 옆에 슈베르트의 묘지를 만들었다. 비엔나의 짐머링에 중앙공동묘지(Zentralfriedhof)가 생기고 음악가 묘역이 마련되자 배링공동묘지에 있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유해도 중앙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이곳에서도 역시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옆에 안장되었다.


비엔나의  배링공동묘지(지금은 슈베르트 공원)에 남아 있는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묘지와 묘비. 베토벤의 묘지는 1827년에, 슈베르트의 묘지는 1828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후 비엔나시가 비엔나의 남쪽 짐머링에 대규모 공동묘지를 조성하고 음악가 묘역을 따로 만들자 배링공동묘지에 있던 베토벤과 슈베르트의 무덤은 1888년에 중앙공동묘지로 이장되었다. 그러나 배링공동묘지의 베토벤과 슈베르트 묘지는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비엔나 중앙공동묘지(첸트랄프리드호프)의 음악가 묘역에 있는 베토벤(왼쪽), 모차르트(중앙), 슈베르트(오른쪽) 묘지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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