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가곡 왕 슈베르트

슈베르트... 알아두어야 할 20가지 사항

정준극 2017. 1. 29. 11:46

슈베르트에 대하여 알아두어야 할 20가지 사항


1875년 아우구스트 리더 그림의 슈베르트


슈베르트는 20년도 채 안되는 기간동안 그야말로 활발할 작품활동을 했다. 오페라들과 교향곡들을 작곡했고 6백곡이 넘는 가곡들을 작곡했다. 서곡들과 미사곡들을 작곡했가 현악4중주와 5중주와 8중주도 작곡했다. 피아노 소나타는 20곡이 넘게 작곡했고 합창곡은 50곡이 넘는다. 슈베르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여기 20개 항목으로서 슈베르트를 소개한다.


1. 붉은 가재의 집(Zum roten Krebsen): 슈베르트가 태어난 집은 '붉은 가재 집'이라고 알려진 집이었다. 그렇다고 여관이나 주점을 겸한 집은 아니었다. 어째서 '붉은 가재의 집'이라고 이름 붙였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가재는 삶으면 붉어지므로 '붉은 가재'라는 말은 이해가 된다. 당시에는 비엔나 교회(포아슈타트)의 힘멜포르트가쎄가 주소였다. 오늘날에는 9구 알저그룬트의 누스도르퍼 슈트라쎄 54번지 집이다. 슈베르트는 이 건물 1층(우리식으로는 2층)에 있는 부엌과 식당을 겸한 방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슈베르트는 이 집에서 태어난후 약 3년 동안 살았다. 오늘날 이 집은 슈베르트 기념관으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 되었다. 


슈베르트가 태어났다고 하는 장소. 부엌 겸 식당으로 사용하던 방의 한쪽이었다고 한다.


2. 살리에리가 스카웃(Salieri, talent scout).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는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나서 불과 16세에 비엔나 궁정의 초청을 받아 비엔나 생활을 시작했다. 살리에리는 1788년에 드디어 궁정작곡가라는 확고한 지위를 차지해서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까지 무려 36년간을 비엔나 음악계에서 군림하였다. 그런 살리에리가 일곱살의 슈베르트의 재능을 높이 평가해서 스카웃하여 제국신학교(임페리얼 콘빅트 또는 슈타트콘빅트)에 입학하여 일반 교육과 함께 음악교육을 받도록 주선해 주었다. 살리에리가 어떻게 슈베르트를 만나고 알게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아마 어떤 종교행사에서 슈베르트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듣고 '야 거저 이 아이는 앞으로 노래를 잘 가르치면 좋을 것 같단 말이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슈베르트는 제국학교에 다니면서 궁정소년합창단원으로 노래를 부른다. 궁정소년합창단은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비엔나소년합창단의 전신이다. 슈베르트는 또한 학교 오케스트라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여 살리에리로부터 직접 음악이론을 배웠다. 살리에리는 슈베르트를 음악가로서 키워 준 인물이었다. 살리에리는 영화 '아마데우스'(Amadeus)에서는 모차르트를 독살한 사람으로 나오지만 그것은 영화일 뿐이며 실제로는 슈베르트를 스카웃해서 도와줄 정도로 호의적인 사람이었다.


3. 어린 작곡가(Young composer). 기록에 의하면 슈베르트는 세살(우리 나이로는 네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가지고 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아마추어 음악가여서 역시 악기를 연주하기를 좋아했다. 그래서 슈베르트의 아버지는 세 아들과 함께 가족 현악4중주단을 만들어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연주했다. 아버지는 첼로를, 슈베르트의 두 형인 페르디난트와 이그나즈는 바이올린을, 그리고 어린 슈베르트는 비올라를 연주했다. 작곡에도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던 슈베르트는 '슈베르트 가족 현악4중주단'을 위해서 간단한 작품을 작곡했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1810년에 작곡한 환타지 G 장조(D 1)이라고 한다. 슈베르트는 일곱살 때에 슈타트콘빅트에 입학하여 살리에리로부터 직접 레슨을 받았다고 한다. 슈베르트는 이때 첫 현악4중주곡과 가곡들과 피아노 소품들을 작곡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다섯살 때에 첫 작곡을 했다고 하는데 슈베르트는 그보다 좀 일러서 세살 때부터 작곡을 했다고 하니 놀랄 일이다. 아무튼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안다는 말과 같이 슈베르트는 다른 사람들 보다는 훨씬 일찍부터 작곡에 눈을 뜬 셈이다. 


4. 괴테의 시(Sets texts by Goethe). 슈베르트는 오래전부터 노래를 지어 왔지만 위대한 시인의 시를 노래가사로 삼기 시작한 것은 괴테의 '물레감는 그레첸'(Gretchen am Spinnrade)이 처음일 것이다. 슈베르트가 17세 때였다. 이때부터 슈베르트는 노래에 있어서 가사와 피아노 반주가 일체가 되는 노력을 기울였다. 피아노 반주는 가사에 부응하여서 물레바퀴가 급하게 또는 더디게 돌아가는 소리를 적절하게 표현하였다. 슈베르트의 '마왕'(Erlkonig)도 괴테의 시에 의한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노래를 만들면서 여러 시인들의 시를 인용하였다. 프리드리히 쉴러, 하인리히 하이네, 프리드리히 뤼케르트, 빌헬름 뮐러, 루드비히 렐슈타브, 요한 가브리엘 자이들 등 여러 시인들이 슈베르트 가곡에 가사가 되었다.


5. 샘 솟는 멜로디(An outpouring of musical genius). 슈베르트는 비록 31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다가 갔지만 어느 누구보다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는 생전에 1천 5백여곡의 작품을 남겼다. 그가 본격적으로 작곡활동을 한 시기를 17세 때라고 한다면 31세까지 14년 동안 1천 5백여곡을 작곡했으니 1년에 약 1백곡이나 작곡한 셈이다. 가장 활발한 작곡활동을 했던 때는 1815년으로 보고 있다. 18세 때이다. 몇개의 작품을 만들었느냐는 것은 실적계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짧은 곡도 있고 긴 곡도 있기 때문이다. 그보다도 작곡을 정량화한다면 몇개의 음악 소절을 작곡했느냐를 가지고 따져 보아야 할 것이다. 슈베르트는 1815년에 2만 소절 이상의 음악을 작곡했다. 여기에는 9곡의 교회음악, 1편의 교향곡, 약 150곡의 노래가 포함된다. 1815년의 10월 어느날에는 단 하루에 8곡의 노래를 작곡한바 있다. 과연! 작곡의 천재가 아닐수 없다.


학교 선생님 시절의 슈베르트. 아이들은 말을 듣지 않고 딴짓을 하기에 바쁘지만 슈베르트는 창밖을 내다보면 악상에 젖어 있다.


6. 법학과 음악 사이에서(A Choice between Law or Music). 슈베르트는 1816년, 19세 때에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성화에 의해서였다. 그러면서도 작곡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교향곡 5번은 이 즈음에 작곡한 것이다. 슈베르트는 갈림길에서 교향곡 5번을 완성하고 나서 이제는 두말하지 않고 법학공부를 중단하고 작곡의 길로 나가야겠다고 다짐하였다. 세상의 많은 작곡가들이 처음에는 다른 공부를 하다가도 역사 '나의 갈길 다가도록 음악 인도하시니'를 외치면서 작곡의 길로 들어서는 경우가 많은데 슈베르트도 그러면 그렇다고 볼수 있다. 장래에 대한 약간의 번민 속에서 작곡한 교향곡 5번이지만 이 음악이 주는 신선함, 경쾌함, 청춘의 기쁨 등은 과연 슈베르트로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7. 슈베르티아드(Schubertiads). 슈베르트만큼 친구들이 많았던 작곡가도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친구가 많다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다. 오히려 어떤 작곡가들은 고독과 절망 속에서 지내다가 생애를 마감한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차이코브스키도 고독 속에서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고 브람스도 모르면 몰라도 별로 친구가 없이 지내다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 베토벤도 별로 친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친구들이 많았다. 청춘과 예술을 즐기는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슈베르티아드라고 불렀다. 일종의 '슈베르트 동아리'이다. 슈베르트와 슈베르티아드들은 피크닉고 가고 강에서 유람선을 타고 다니기도 하며 오페라를 연습하기도 하는가 하면 슈베르트의 피아노에 맞추어서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슈베르티아드에 대하여는 대체로 어떤 사람들인지 별도로 소개코자 한다.


슈베르트와 친구들. 슈베르티아데


8. 꼬마 버섯(Schwammerl). 슈베르트의 별명은 꼬마 버섯(슈밤베를)이다. 친구들이 그렇게 붙여주었다. 슈베르트는 키가 작다. 1미터 52센티라고 한다. 그런데 통통한 편이며 얼굴도 동그스럼하다. 양송이 버섯 같다. 그래서 슈밤메를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독일어에서 슈밤은 버섯을 말하는데 스펀지나 해면이라는 뜻도 있다. 어미(어미)인 -erl은 주로 오스트리아어에서 축소형을 말할 때에 붙이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별명인 꼬마 바섯을 풍자하여 그린 그림


9.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Haydn, Mozart, Beethoven). 하이든은 부르겐란트주의 로라우에서 태어나서 주로 아이젠슈타트에서 지냈고 모차르트는 잘츠부르크에서 태어났으며 베토벤은 라인강변의 본()에서 태어났지만 세 사람 모두 비엔나에서 활동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이들을 비엔나 제1학파(1st Viennese School)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프란츠 슈베르트도 포함된다. 슈베르트는 이들 세사람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현악4중주곡은 하이든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교향곡과 오페라는 모차르트로부터 영향을 받았으며 피아노 소나타는 베토벤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그러면 슈베르트는 비엔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세 사람 중에서 누구를 가장 존경했을까? 슈베르트는 하이든에게 한없는 존경심을 보냈으나 모차르트에게는 한없는 사랑을 보냈다. 그리고 베토벤에게는 경외심을 가졌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모두 비엔나에 살았지만 슈베르트가 이들을 만난 일은 한번도 없다. 물론 모차르트는 슈베르트가 태어나기 전에 세상을 떠났으며 하이든도 슈베르트가 소년 시절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만날 일이 없었다. 베토벤은 비록 베토벤이 슈베르트보다 나이가 27세나 많았지만 비엔나에서 만날 기회가 많았지만 한번도 만나지 못했다. 다만, 베토벤이 마지막으로 병마와 싸우고 있을 때에 어떤 친구가 슈베르트의 악보를 보여준 일이 있다. 베토벤은 슈베르트의 악보를 뒤적이고 보며 멜로디를 따라서 불러보기도 하다가 악보를 내려 놓고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청년은 정말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라고 말하면 감탄했다고 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한편, 모차르트를 매우 존경하고 사랑한 슈베르트는 친구들에게 '오 모차르트! 영원히 살아 있는 모차르트! 그로 인하여 우리의 영혼은 더 밝아지고 더 낫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슈베르트가 존경했던 작곡가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그중에서도 베토벤을 가장 경외하였다.


10. 송어 5중주곡(Die Forelle Quintet). 슈베르트의 가장 유명한 피아노 5중주곡인 '송어'의 주제가 되는 멜로디는 슈베르트가 일찍이 작곡한 솔로와 피아노를 위한 '송어'(Die Forelle.Op 32, D 550)라는 노래에서 가져왔기 때문에 그런 타이틀이 붙었다. '송어 5중주곡'의 3악장의 음악이 바로 가곡인 '송어'의 멜로디를 인용한 것이다.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던 송어가 어부의 그물에 걸리자 팔딱거리면서 빠져 나가려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원래 가곡인 '송어'의 내용은 아가씨에게 청년이 쳐 놓은 낚시에 걸려들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슈베르트는 그런 경고의 내용은 무시하고 대신에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던 송어가 낚시꾼의 낚시에 걸리자 빠져나가려고 팔딱거리는 모습으로 표현했다.


11. 요한네스 브람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게 영향(Influence to Johannes Brahms and Richard Strauss). 슈베르트의 슬픈 현악4중주는 앞으로 올 낭만주의 시기의 열정을 예비하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하여 브람스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슈베르트의 현악4중주 C 장오 D 956의 2악장인 아다지오는 나중에 브람스의 작품에서도 느낄수 있는 멜랑콜리한 스타일이다.


12. '미완성 교향곡'의 미스테러(The mystery of the Unfinished Symphony). 슈베르트의 유명한 '미완성 교향곡'에 대하여는 이상한 전설이 있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거의 30년이 지난 어느날 어떤 노인이 나타나서 슈베르트가 43년 전에 자기에게 이 교향곡의 악보를 보내주었다고 주장했다는 것이고 그래서 알려지게 되었다는 얘기다. 그 전설이 한때는 유행했었지만 이 곡은 미완성인채로 슈베르트가 그라츠음악협회에 보냈다는 것이 정설로 되어 있다. 당시 슈베르트는 그라츠음악협회로부터 명예 디플로마를 받아서 감사의 표시로 아직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우선 받아보시라면서 기증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이 교향곡의 3악장에 대한 스케치를 일부 해놓은 것이 있어서 이 교향곡이 2악장으로 마무리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4악장으로 끝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이 교향곡의 4악장이 실제로는 연극 로자문데(Rosamunde)의 막간음악(Entr'acte)이라고 주장했다.


13. 그랜드(Grand)인가 그레이트(Great)인가? 슈베르트의 교향곡 9번 C 장조에는 '그레이트'(위대하다는 뜻)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그러나 정말로 위대해서 그런 단어를 붙인 것이 아니라 단순히 교향곡 6번인 C 장조와 구별하기 위해 '그레이트'라는 단어를 붙였다는 것이다. 한편, 슈베르트는 1824년 3월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로 만드는 C 장조 교향곡을 '그랜드 교향곡'이라고 불렀으며 좋겠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러므로 '그레이트'라고 부르기보다는 '그랜드'라고 부르는 것이 보다 슈베르트의 의중을 보다 살리는 것일 것이다. 교향곡 6번 C 장조는 슈베르트가 1817-18년에 작곡한 것이다. 사람들은 나중에 교향곡 6번을 '리틀 C 장조'(Little C major)라고 불렀다.



14. 슈만이 발견한 그레이트 교향곡(Schumann's Discovery). 그레이트 교향곡은 로베르트 슈만이 1838년에 비엔나 악우회에 있는 어떤 궤짝에서 발견했다. 슈베르트의 형인 페르디난트가 찾아 주었다.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지 10년만의 일이었다. 슈만은 '이 궤짝 안에 들어 있는 보물은 나를 흥분시켜서 전율케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라이프치로 돌아온 슈만은 멘델스존에게 그레이트 교향곡의 초연을 지휘하도록 부탁했다. D 944인 교향곡 9번 C 장조 그레이트는 슈베르트가 1825년에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런데 어째서 슈베르트가 서거한지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알지 못했던 것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15. 호수의 여인에서 아베 마리아로(From Lady of the Lake to Ave Maria).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실은 슈베르트가 월터 스콧 원작인 '호수의 여인'에 대한 극음악을 작곡한 중에 나오는 노래이다. 여주인공인 엘렌의 세번째 노래이다. 가사에 아베 마리아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것을 나중에 교회의 찬송가 중에서 성모 마리아를 축송하는 가사를 인용해서 '아베 마리아'라는 노래로 만들었다. 그러므로 유명한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슈베르트가 단독으로 작곡한 것이 아니라 연극 '호수의 여인'에 나오는 엘렌의 노래에 그래도 가사만 새롭게 붙인 것이다. 


16. 가곡의 왕(King of the Lieder). 슈베르트의 가장 위대한 기여는 가곡이다. 6백여곡에 이르는 가곡들은 인간 감정의 모든 면을 진지하게 표현하고 있다. 부드러움, 슬픔, 절망, 열정, 그리움, 기다림, 즐거움, 희열, 비통함, 그리고 심지어는 시골의 순수한 풍경도 노래에 담았다. 슈베르트는 그의 가곡을 통해서 인간의 음성이 얼마나 고귀한 표현수단인지를 내보였다.


17. 겨울나그네(Winterreise). 슈베르트는 1822년부터 매독 증세를 보이기 시작했고 그후로 건강상태가 점차 악화되기 시작했다. 그런 중에도 작곡에 대한 열정은 버리지 못했다. 그가 고통 중에 완성한 것이 24곡으로 구성된 '겨울나그네'이다. 마치 먼곳으로 쓸쓸하게 떠나는 겨울 나그네처럼 그의 생애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멸의 작품이다.


18. 베토벤을 애도하다(Genius and torchbearer). 슈베르트는 1827년 3월 26일 평소에 그렇게도 존경하던 베토벤이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너무나 깊은 충격을 받았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생전에 그를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 다만, 베토벤의 연주회에 가서 멀리서나마 바라보고 존경의 마음을 전했을 뿐이었다. 슈베르트는 1824년 5월 캐른트너토르 극장에서 있었던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의 초연에도 갔었다. 크나큰 감동을 받고 왔다. 슈베르트는 이 세상을 하직하는 베토벤을 위해서 무언가는 하고 싶었다. 그래서 베토벤의 장례행렬의 맨 앞에 서서 만기를 들고 가는 역할을 자청했다. 당시의 장례식 관례에 따르면 운구행렬의 앞을 선도하는 만기를 누군가 고인과 가장 친한 사람이 들도록 되어 있었다. 슈베르트가 그 역할을 맡았던 것이다. 마치 베토벤 이후의 음악은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듯한 결연한 다짐이 담겨 있는 듯한 행동이었다.


19. 비엔나 시민의 품으로 돌아간 슈베르트(Schubert Denkmal am Stadtpark). 비엔나 시내의 슈타트파르크(Stadtpark)는 비엔나 시민들의 한없는 휴식 공간이다. 넓은 슈타트파르트에는 여러 기념상들이 있으며 그 중에는 음악가들을 기리는 기념상도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다. 요한 슈트라우스, 안톤 브루크너, 프란츠 레하르, 로베르트 슈톨츠, 그리고 프란츠 슈베르트 등이다. 슈베르트는 영원히 비엔나 시민들의 가슴 속에 살아 있게 되었다. 비엔나에는 수많은 음악가 기념상이 있지만 슈타트파르트의 슈베르트 기념상은 부르크 링의 모차르트 기념상, 베토벤플라츠의 베토벤 기념상과 함께 가장 아름다운 기념상으로 손꼽히고 있다. 1872년에 설치되었다.  


20. 불멸의 음악(All time classical great). 슈베르트의 음악을 들으면 아름다운 마음이 된다.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도 해 준다. 오늘날 슈베르트는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등과 함께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인정되고 있다. 이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짧은 세월 동안만 활동했지만 그의 음악은 영원불변이다. 슈베르트의 음악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기여한 사람으로서는 리스트, 브람스, 멘델스존, 슈만 들을 들수 있다. 그러나 비단 이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이밖에도 수많은 슈베르트 챔피온이 있다는 것을 마음 속에 새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