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가곡 왕 슈베르트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정준극 2017. 1. 30. 09:24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 - Schubertiads

1975년에 허만 프라이가 설립한 국제적 슈베르트 음악축제


오스트리아의 서쪽 끝 포아아를베르그주의 호에넴스의 아름다운 자연환경. 이곳에서 매년 슈베르트티아데 축제가 열린다. (크레딧: 호에넴스 슈베르티아데)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라는 말은 슈베르트가 살아 있을 때에 친구들을 그렇게 부른 말이다. 슈베르트의 친구들은 시간만 있으면 모여서 마치 인생은 어차피 즐기는 것이라는 생각에서인지 피크닉도 가고 파티도 하면서 하여튼 즐겁게 노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그러나 본래의 목적은 슈베르트의 피아노에 맞추어서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들의 모임이 무슨 공식적인 행사는 아니었다. 음악회를 열더라도 광고도 하지 않았고 개인집에서 갖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다가 슈베르트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자 '우리가 그동안 너무 놀기만 했나?'라는 약간의 자책감으로 슈베르트의 음악을 보전하고 널리 전파하는 노력을 기울이자고 다짐했다. 그래서 이들은 슈베르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계속 모여서 음악회도 열고 시낭송회도 가졌으며 사교모임을 가지며 지냈다. 슈베르트아데의 모임에는 1백명 내외가 되는 인원이 참석하였다. 그만큼 인기가 있었다. 하기야 당시 사회가 어수선하고 국제정세가 혼란스러우니까 음악회 모임이나 사교 모임을 하나의 현실도피 방안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슈베르티아데의 행사는 간혹 비엔나의 부유한 기업가나 귀족들이 후원하였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별로 많지 않았고 대부분이 슈베르티아데에 속한 멤버들이 자비를 희사하여 개최하였다. 예를 들면 젊은 화가로서 슈베르트와 특별히 막역했던 레오폴드 쿠펠뷔저(Leopold Kupelwieser)가 음악회를 후원한 것이다. 한편, 음악회의 프로그램에 있어서도 얼마 후부터는 슈베르트의 음악만을 넣지 않고 다른 작곡가의 작품들도 넣기 시작했다.


호에넴스의 베르겐첸베르크 연주회장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슈베르티아데를 그린 그림으로서 두 점이 유명하다. 하나는 슈베르트의 친구였던 모리츠 폰 슈빈트의 그림이다. 슈베르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는 중에 친구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다. 그림의 가운데 벽면에 걸려 있는 초상화는 슈베르트가 사모했던 카롤리네 에스터하지 백작부인이다. 슈베르트는 첼리츠의 에스터하지 백작 장원에서 백작의 두 딸에게 피아노와 성악 레슨을 했던 일이 있다. 슈베르트는 그때 작은 딸인 카롤리네를 유별나게 연모했었다. 이 그림은 모리츠 폰 슈빈트가 슈베르트의 사후인 1868년에 그를 추모하여서 그린 작품이다. 또 하나 슈베르티아데를 소재로 삼은 작품은 역시 슈베르트의 사후인 1897년에 화가 율리우스 슈미트(Julius Schmid)가 그린것이다. 폰 슈빈트의 그림에 비해서 좀 더 형식적인 분위기이다. 그리고 그림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슈베르트의 친구들만은 아닌 것으로 알려졌다.  


모리츠 폰 슈빈트의 그림. 화살표 있는 곳의 인물은 화가 자신이다. 1868년

울리우스 슈미트의 작품. 1897년


세월의 흐름과 함께 슈베르트의 친구들도 하나 둘씩 요단강을 건너갔고 슈베르티아데의 모임은 점차 잊혀져 갔다. 대신에 슈베르트의 작품은 점차 높은 평가를 받아서 음악계에서 슈베르트의 음악을 보전하고 전파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기 시작했다. 그런 일은 슈베르티아데 회원들의 일이 아니라 악보출판가들, 음악학자들, 연주가들, 작곡가들의 몫이었다. 세월은 더 흘러서 1900년대 중반이 되었다. 그때 쯤해서 슈베르티아데의 존재는 유명무실해졌다. 이 때에 독일의 위대한 성악가인 헤르만 프라이(Hermann Prey: 1929-1998)가 슈베르트의 작품만으로 음악회를 개최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하기야 슈베르티아데의 전통을 살리고 싶었다. 헤르만 프라이는 슈베르트의 가곡, 특히 '백조의 노래'의 해석으로 높은 찬사를 받은 바리톤이었다. 헤르만 프라이는 뜻을 함께 하는 친구들과 모여서 슈베르트 음악회를 발전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비엔나 또는 잘츠부르크와 같은 대도시에서 개최하는 것보다는 아름다운 전원에서 음악회를 갖기로 했다. 슈베르트가 평소에 복잡한 도심이 아니라 시골을 더 사랑하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음악회의 후보지로서 오스트리아의 서쪽끝 포아아를베르크주의 호에넴스(Hohenems)를 우선 꼽았다. 그리하여 마침내 1975년에 헤르만 프라이가 주축이 되어서 슈베르티아데 협회(Schubertiade GmbH)가 설립되었고 이어서 이듬해인 1976년에는 첫번째 슈베르티아데 음악회가 호에넴스에서 열렸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포아아를베르크의 작은 산간마을에서 시작된 슈베르트 음악회는 국제음악축제로 발전하여서 매년 약 80-90회의 음악회가 개최되면 세계 각지에서 약 3만명 이상의 슈베르트 애호가들이 먼곳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오고 있다.


호에넴스의 마르쿠스 지티쿠스 홀에서의 슈베르트 페스티발 연주회


오늘날 슈베르티아데 음악회의 또 다른 표현인 슈베르트 페스티발은 포아아를베르크주의 호에넴스와 슈봐르첸버그에서 열리고 있다. 호에넴스에서는 주로 마르쿠스 지티쿠스(Markus Sittikus) 홀에서 열린다. 가곡의 밤, 실내악 연주회, 피아노 리사이틀의 밤 등이 진행된다. 슈봐르첸버그에서는 주로 안젤리카 카우프만(Angelika Kauffmann) 홀에서 열린다. 역시 여러 종류의 다양한 음악회가 마련되고 있다. 아무튼 슈베르티아데 음악회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실속있는 슈베르트 페스티발이다. 음악회 이에외도 강연회, 전시회, 유명 음악인들에 의한 마스터 클라스도 운영된다. 2011년에는 호에넴스에 프란츠 슈베르트 기념관(Franz Schubert Museum)이 오픈되었다. 기념관이 있는 건물은 호에넴스에서 가장 오래된 주택건물 중의 하나로 예전에는 사제관으로 사용되던 건물이다. 기념관 건물의 방 하나는 작곡가인 잘로몬 줄처(Salomon Sulzer: 1804-1890)을 위한 전시실인데 그가 태어난 집은 기념관에서 가까운 곳에 있다. 잘로몬 줄처의 아들인 요제프 줄처는 이 건물에 특별히 '슈베르트 판타지'라는 타이틀의 전시실을 만들어서 기증했다. 이 전시실에는 지그문트 롬버그에 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지그문트 롬버그는 헝가리 출신의 하인리리 베르테가 엮은 오페레타 '세 아가씨의 집'(Das Dreimaderlhaus)을 영어판 뮤지컬 스타일로 만들어서 브로드웨이에 선을 보였다. 이 뮤지컬로 인해서 슈베르트의 음악들이 브로드웨이에 널리 소개되었다. 지그문트 롬버그의 어머니가 호에넴스 출신이다. 지그문트 롬버그는 '황태자의 첫사랑'(The Student Prince)의 음악 등을 작곡했다.  


호에넴스 마르크트슈트라쎄 1번지의 슈베르트 기념관 및 슈베르티아데 기념관


Villa Rosenthal의 1층에는 소프라노 엘리자베트 슈봐르츠코프(Elisabeth Schwarzkopf) 기념관이 있다. 남편인 영국의 음반제작자 월터 레게(Walter Legge)과 관련된 자료도 별도로 전시되어 있다. 슈베르티아데 기념관은 호에넴스의 마르크트슈트라쎄(Marktstrasse) 15번지에 있다. 슈베르티아데 협회의 사무실은 호에넴스 슈봐이처 슈트라쎄(Schweizer Strasse) 1번지의 빌라 로젠탈(Villa Rosenthal)에 있다. 호에넴스로 가려면 인근에 장크트 갈렌(St Gallen), 알텐라인(Altenrhein), 프리드리히스하펜(Firedrichshafen), 메밍겐(Memmingen)에 국내선 공항이 있다.


호에넴스의 빌라 로젠탈. 슈봐이처 슈트라쎄 1번지. 엘리자베트 슈봐르츠코프 기념관이 있다. 이 건물의 1층에는 슈베르티아데 협회 사무실이 있다.



[슈베르트가 남긴 말]

- 진실된 친구를 만난 사람은 행복하다. 자기 부인이 진실된 친구라면 그 사람은 더 행복하다.

(Happy is the man who finds a true friend, and far happier is he who finds that true friend in his wife.)

- 나는 나의 상상력을 될수 있는 한 많이 장식하려 한다.

(I try to decorate my imagination as much as I can.)

- 아무도 다른 사람의 슬픔을 느낄수 없다. 마찬가지로 아무도 다른 사람의 기쁨을 이해할수 없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서로의 마음에 와 닿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지나칠 뿐이다.

(No one feels another's grief, no one understands another's joy. People imagine they can reach one another. In reality they only pass each other by.)

- 매일 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다시 일어나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매일 아침이며 나의 슬픔이 새로워진다.

(Every night when I go to bed, I hope that I may never wake again, and every morning renews my gried.)

- 세상이란 무대에서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을 연기하는 것과 비슷하다.

(The world resembles a stage on which every man in playing a p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