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위대한 작곡가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다시피한 작곡가도
세상에 어쩌다보니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것이 무어 그리 대단한 일이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위대한 작곡가들의 경우라면 '아니 왜 결혼을 안했을까?'라며 당연히 관심을 갖게 되기 마련이다.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작곡가인데 평생을 결혼을 하지 않고 가정을 꾸리지 않아서 결국 자녀들도 없다보니 후세를 사는 우리로서는 그분들의 후손을 만날 길이 없어서 아쉬운 입장이다. 만일 누가 '저로 말씀드리자면 저의 고조 할아버지가 베토벤이올시다'라고 말한다면 클래시컬 음악 애호가로서 그런 사람을 만난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울 것인가? 아마 간단히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고 제안했을 것이다. 어쨋든 결혼을 하지 않아서 후손이 없이 그냥 당대로만 이름이 끝난 것은 섭섭한 일이다. 위대한 작곡가 중에서 어떤 분이 결혼을 하지 않고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는지 대표적인 몇 분만 소개한다.
○ 이탈리아의 바로크 작곡가이며 비르투오소 바이올리니스트인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avaldi: 1678-1741)는 가톨릭 사제이기도 해서인지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지내다가 향년 63세로 세상을 떠났다. 바이올린 협주곡인 '사계'로 유명한 비발디는 1678년 3월 4일 베니스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건강상태가 좋지 못했다. 당시에는 유아 사망율이 매우 높았었다. 그래서 신생아인 비발디도 어떻게 될지 장담을 못할 형편이었다. 또한 당시는 또한 베니스에 언제 큰 지진이 닥쳐올지 모르는 불안한 때였다. 비발디의 어머니는 당장 오늘이라고 지진이 나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여 바빌디에게 우선 가톨릭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교회에서 신부를 불러오고 어쩌고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출산을 도운 산파에게 신부를 대신해서 세례를 주도록 했다. 그때 비발디의 어머니는 만일 아기가 아무 일 없이 자라난다면 하나님께 봉헌하겠다고 결심했다. 가톨릭의 사제로 만들겠다는 서약이었다. 그런 불안한 상태였지만 비발디는 큰 탈이 없이 잘 자랐다. 다만, 어릴 때부터 가슴이 답답하고 조여오는 듯한 증세가 있었고 그것이 발전해서 나중에는 천식으로 평생을 고생하기는 했다. 그런 증세를 의사는 strettezza di petto 라고 불렀다. 비발디는 15세 때인 1683년부터 어머니가 약속한대로 가톨릭 사제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0년 후인 1703년 마침내 가톨릭 사제로서 서품을 받았다. 사람들은 그를 Il prete rosso라고 불렀다. 붉은 사제라는 의미이다. 비발디는 가정 내력으로 붉은 머리칼이었고 더구나 빨간 사제복을 즐겨 입었기 때문에 그런 별명이 붙었다.
그 시대의 여러 작곡가들과 마찬가지로 비발디의 말년은 경제적으로 어려운 것이었다. 비발디의 작품들은 한 때 베니스를 중심으로 해서 상당한 인기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다보니 비발디의 작품에 대한 관심들이 무디어졌다. 비발디의 작품은 새로운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 비발디는 베니스를 떠나서 제국의 수도인 비엔나에 가서 지내기로 결심했다. 비발디는 가지고 있던 악보들을 팔아서 여비로 쓰기로 했다. 비발디가 비에나로 가기고 결심한 것은 몇 해 전 베니스에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샤를르 6세를 만난 일이 있는데 샤를르 6세는 비발디의 음악을 듣고서 상당히 좋았던지 '선생, 비엔나로 오시오'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비발디는 황제가 자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비엔나에 가서 잘만 하면 궁정작곡가가 되어서 편안한 생활을 할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아무튼 비발디는 1739년인가 1740년인가에 짐을 싸들고 비엔나로 떠났다. 비발디는 비엔나로 가는 도중에 그라츠에 들려서 전부터 좋아했던 안나 지로(Anna Giro: 1710-?)를 만나 보았을지도 모른다. 안나 지로는 비발디가 베니스에서 좋아했던 여인이지만 비발디가 사제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감히 결혼은 생각하지 못했었다. 안나 지로는 비발디보다 32년이나 연하였지만 사실상 사랑에는 나이가 상관이 없는 일이어서 만일 비발디가 안나 지로와 결혼할 생각만 있다면 사제직을 버리고서라도 결혼했을지 모른다. 메조소프라노 프리마 돈나였던 안나 지로는 소녀시절부터 비발디에게 성악 레슨을 받았었다. 안나 지로가 나중에 오페라 성악가로서 데뷔하자 비발디는 안나 지로를 위해 여러 오페라를 작곡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템페의 도릴라'(Dorilla in Tempe)는 순전히 안나 지로를 위해 작곡한 오페라이다. 안나 지로는 인기가 높았을 때에 무대에서 은퇴하고 상처한 귀족인 안토니오 마리아 차나르디 백작과 결혼하였다.
다시 비엔나에 간 비발다의 얘기로 돌아가면, 비발디가 비엔나에 도착하고나서 얼마후에 자기의 후원자가 될 것으로 믿었던 샤를르 6세 황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겼다. 비발디는 기댈 사람이 없게 되었다. 그는 어떤 말안장 만들던 사람의 미망인이 꾸리고 있는 집에 방하나를 얻어서 지내다가 장염이 악화되어서 1741년 7월 27일인가 28일에 세상을 떠났다. 비발디가 세를 들어 살던 집은 그후 철거되었고 그 자리의 일부에 오늘날의 자허 호텔이 들어섰다. 그래서 자허 호텔 건물의 외벽 한쪽에 비발디가 이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명판이 붙어 있다. 비발디의 장례식은 슈테판성당에서 거행되었다. 당시에 하이든은 슈테판성당의 소년성가대원이었다. 그렇다고 하이든이 비발디의 장례식에서 무슨 역할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비발디의 시신은 오늘날 칼스키르헤 옆의 공터에 매장되었다. 그 인근에 자선병원이 있었는데 그 병원에서 세상을 떠난 사람들, 또는 사형에 처한 죄인들의 시신을 매장하는 장소였다. 오늘날 그 장소에는 비엔나공과대학(TU) 건물이 들어서 있다. 비엔나에서 비발디를 기념하는 명판은 앞서 얘기한대로 자허 호텔에 붙어 있고 또 하나는 비엔나공과대학 건물에 붙어 있다. 그리고 보티프키르헤(Votivkirche) 앞의 루즈벨트플라츠에는 비발디의 '사계'를 연상케 하는 기념 조형물이 있다.
비엔나의 루즈벨트플라츠에 있는 비발디 기념 조형물. 자세한 내용은 본블로그의 비엔나의 조각들 편을 참고하기 바람.
○ 오라토리오 '메시아'와 '왕궁의 불꽃놀이' 그리고 '수상음악' 등으로 유명한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k Handel: 1685-1759)은 74년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냈다. 잘 아는대로 헨델은 독일의 할레(Halle)에서 태어났지만 42세 때인 1725년에 영국 시민이 되었다. 헨델이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사연에 대하여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다만, 혹자들은 그가 진실로 독실한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세상열락을 멀리하기 위해서 결혼을 하지 않았겠느냐는 짐작을 말했을 뿐이다. 헨델이 얼마나 독실한 신자였는지는 그가 '메시아'를 작곡 할 때에 한곡 한곡을 완성할 때마다 이러한 재능을 주신 하나님께 눈물로서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는 얘기만 들어보아도 알수 있다. 위대한 작곡가 헨델의 말년은 비참한 것이었다. 병마로 고생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헨델은 1750년 10월에 독일에 갔다가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에 네덜랜드의 헤이그(Hague)와 할렘(Haarlem) 중간지점에서 마차사고로 중상을 입었다. 이듬해에는 사고의 여파로 시력을 잃기 시작했다. 백내장이라는 진단이었다. 그런데 백내장 수술을 어쩌다보니 돌팔이에게 맡겼다. 헨델의 시력은 좋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악화되었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752년부터는 완전히 시력을 잃게 되었다. 헨델은 네덜란드에서 사고를 당한지 9년 후인 1759년 4월에 런던의 브루크 스트리트에 있는 자택에서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장례식에는 무려 3천명 이상의 조객들이 참석했다. 왕실에서는 국장에 준하는 장례식을 치루어주었다. 헨델은 유언장을 통해서 전재산을 조카인 요한나에게 준다고 했다. 그러다가 다시 추가 유언장을 만들어서 친척들과 하인들과 친구들과 자선단체에도 유산을 남겨 주는 것으로 만들었다. 사족이지만, 헨델은 미술품을 상당히 가지고 있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760년에 경매가 이루어졌다. 그림 70점과 판화 10점이 경매에 붙여졌다. 나머지 그림들은 유언에 따라 상속되었다.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헨델 기념상. 악보는 '메시아' 중에서 45번인 '내 주는 살아계시고'이다. 이 기념상 아래 바닥에 헨델의 묘소가 있다.
○ 역사상 가장 위해단 작곡가로 존경받고 있는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도 잘 아는 대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향년 58세였다. 베토벤은 젊은 시절에 몇 명의 여인들을 마음에 두고 사랑하였다. 그러나 그 중에서 누구하고 결혼까지 생각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결혼할 생각은 가졌던 것이 분명하지만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은 그가 사랑했던 여인들이 대개가 지체 높은 귀족 집안의 여인들이어서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 중에서 한 여인이 율리(줄리에타) 주이키아르디라는 아름답고 젊은 여인이었다. 베토벤이 줄리에타를 만난 것은 명문 브룬스비크의 집에서였다. 베토벤이 31세 때인 1801년이었다. 그때 베토벤은 요제피네 브룬스비크의 피아노 레슨 선생이었다. 베토벤은 줄리에타를 사랑했지만 신분의 차이로 인해서 결혼을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베토벤은 나중에 피아노 소나타 14번을 줄리에타에게 헌정하였다. 보통 월광소나타(Mondscheinsonate)라고 부르는 곡이다. 그후 베토벤은 피아노 제자인 요제피네 브룬스비크를 사랑하게 되었다. 요제피네는 1804년에 첫 남편인 요제프 다임 백작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낸 처지였다. 베토벤은 요제피네에게 1804년부터 1810년까지 무려 15통의 열정이 담긴 편지들을 보냈다. 물론 요제피네도 베토벤을 특별하게 생각했지만 가족들의 베토벤과의 교제를 워낙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었다. 가족들은 요제피네에게 만일 평민인 베토벤과 결혼한다면 요제피나 소생의 자녀들은 귀족의 신분을 갖지 못하게 된다고 위협하다시피 했다. 요제피네는 1810년에 폰 슈타켈버그 남작과 재혼하였다.
비엔나의 베토벤플라츠에 있는 베토벤 기념상 상단
그 후에 베토벤은 테레제 말파티(Therese Malfatti)라는 여인을 사랑하였으나 역시 신분의 차이로 인하여 다시한번 실연의 비통함을 경험해야 했다. 베토벤의 '엘리제를 위하여'는 테레제 말파티에게 헌정한 것이라고 한다. 베토벤이 요제피네 브룬스비크와 테레제 말파티와의 사랑이 허무하게 스러지자 그해(1810)부터 심한 두통과 고열에 고생하기 시작했다. 베토벤은 의사의 권유로 지금은 보헤미아의 온천장인 테플리츠에 가서 6주간 휴양하며 지낸 일이 있다. 그해 겨울에 비엔나로 돌아온 베토벤은 교향곡 7번의 완성을 위해 집중하였다. 그러나 휴양한 것도 아무런 소용이 없이 다시 머리가 아픈 등 병마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의사는 다시 테플리츠에 가서 지내라고 명령하다시피 했다. 베토벤은 1812년 여름을 테플리츠에서 보냈다. 나폴레옹이 모스크바를 점령했다고 퇴각한 바로 그해였다. 베토벤의 유명한 서한인 '불멸의 연인에게'(Immortal Beloved)는 테플리츠에 있을 때에 쓴 것이다. 그러나 과연 '불별의 연인'이 누구인지는 아직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을 정도로 확인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율리(줄리에타) 주이키아르디라고 말했고 또 어떤 사람은 테레제 말파티 또는 요제피네 브룬스비크라고 말했으며 심지어는 안토니 브렌타노라고까지 말했다. 그런가하면 어떤 사람들은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이 다름 아닌 동생 요한의 부인이 된 테레제 오버마이르라고 까지 말했지만 그것도 신빙성이 있는 얘기는 아니다. 베토벤은 1812년 테플리츠에서 비엔나로 돌아와서 10월 쯤에 동생 요한을 우정 만나서 요한이 테레제 오버마이르라는 여인과 결혼하려는 것을 극구 만류코자 했다. 왜냐하면 테레제는 이미 사생아 아이까지 하나 두고 있었을 정도로 행실이 올바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생 요한은 베토벤의 설득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마침내 그해 11월에 테레제와 결혼하였다. 어떤 사람은 베토벤이 실은 테레제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테레제가 낳은 사생아 카를은 실상 베토벤의 아이이기 때문에 동생 요한과 결혼하려는 것을 극구 반대했다는 얘기지만 역시 신빙성은 거의 없다. 아무튼 베토벤은 이럭저럭하다가 결혼도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말년에 병마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헤서 세알을 떠났다. 베토벤의 장례식 등등에 대하여는 본블로그의 베토벤 편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으므로 참고 바란다.
피아노 앞에서 작곡에 열중하고 있는 베토벤
○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는 어느 누구보다도 짧은 생애인 31세에 세상을 떠난 위대한 작곡가이다. 그는 비록 짧은 생애이지만 6백곡이 넘은 주옥과 같은 가곡을 비롯해서 교향곡, 실내악곡, 협주곡, 미사곡, 오페라, 극음악 등을 남겼다. 그러나 그가 비엔나에서 활동할 당시에는 그저 일부의 사람들, 주로 친구들이 그의 음악을 좋아했을 뿐이며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야 비로서 그의 진면목이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펠릭스 멘델스존, 로베르트 슈만, 프란츠 리스트, 요한네스 브람스 등 19세기 작곡가들은 슈베르트의 음악을 높이 평가하여서 그의 작품에 대한 챔피언으로 활동했다. 슈베르트는 아직 젊어서 진지한 사랑을 할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애기이다. 다만, 그나마 사랑에 대하여 눈을 떴다면 오페라 '세 아가씨의 집'(Das Dreikmaderlhaus)에서 볼수 있는대로 로맨틱한 사랑의 감정을 가졌었다고 본다. '세 아가씨의 집'은 헝가리의 하인리히 베르테(Heinrich Berte)라는 사람이 슈베르트의 음악으로 만든 오페레타이다. 슈베르트는 두 친구와 함께 비엔나 시내의 어떤 집에 하숙을 한다. 바로 옆집에는 세 아가씨가 살고 있다. 첫째 딸고 둘째 딸은 슈베르트의 두 친구들과 어느새 약혼하는 사이게 되었고 마침내 결혼식을 올린다. 슈베르트는 셋째 딸인 한네를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성격이 수줍어서 고백을 하지 못한다. 그러는 중에 쇼버 남작의 애인인 배우 주디타 그리시가 나타나서 한네를이 누구인지 잘 모르고 공연히 쇼버 남작을 좋아한다고 믿어서 질투심으로 슈베르트와 한네를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든다. 결국 슈베르트는 한네를에게 사랑을 고백하지 못하며 한네를은 쇼버 남작과 결혼한다는 줄거리이다. 그러나 이 얘기는 소설일 뿐이며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 현재 비엔나 1구의 슈라이포겔가쎄에 '세 아가씨의 집'이라는 건물이 있어서 기념되고 있지만 그 옆의 집에 슈베르트가 친구들과 함께 기거했다는 증거는 없다. 대신에 그 옆집은 파스크발라티하우스로서 베토벤이 잠시 거주했던 집이다.
슈베르트가 친구들과 함께 즐거운 시간을 갖고 있는 장면
이렇듯 슈베르트의 사랑 이야기는 '세 아가씨의 집'에 잠시 나오지만 그 외에 어떠한 에피소드도 남아 있지 않다. 슈베르트는 창작활동이 가장 활발하던 시기에 참으로 안타깝게도 건강을 잃기 시작했다. 슈베르트는 1828년 1월 31일 형 페르디난트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의사의 공식적인 사인은 장질부사로 나와 있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얘기되었다. 특히 매독이 말기에 접어 들어서 죽음으로 발전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녔었다. 아마도 슈베르트는 젊은 나이에 친구들과 함께 창녀들과도 어울렸던 모양이었다. 그런 주장을 뒷받침 해주는 얘기는 슈베르트가 수은중독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슈베르트의 말기의 증세가 수은중독 증세와 같았다는 것이다. 당시에 수은은 일반적으로 매독을 치료하는데 사용되었다. 슈베르트는 세상 떠나기 직전에 심한 두통과 고열, 관절이 붓는 증세, 그리고 구토증을 보였다. 그래서 음식을 입에도 대지 못할 정도였고 그러다보니 영양 부족으로 병세가 더욱 악화되었다는 것이다.
슈베르트에 대한 오페레타인 '세 아가씨의 집' 장면. 비엔나의 폭스가르텐인듯.
○ '카타니아의 백조'로 알려진 빈첸조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는 평생을 결혼을 하지 않고 지냈다. 평생이라고 해 보아야 34년이었다. 벨리니를 '카타니아의 백조'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시칠리아의 카타니아 출신이며 백조의 노래처럼 길고도 아름다운 노래를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벨리니는 생기기도 여자처럼 아름답게 생겼고 더구나 아름다운 오페라를 만들어내는 뛰어난 재주가 있기 때문에 그를 사랑하는 여인들이 줄을 섰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상은 별로 그렇지 못했다. 대신에 이상하게도 벨리니는 이루지 못할 사랑만을 추구하다가 결국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구약성경에 유딧(Judith)이라는 여사사가 나온다. 유대 땅을 침략한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잘라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위기에서 구한 여인이다. 그러한 유딧을 주인공으로 삼아서 여러 작곡가들이 오라토리오와 오페라를 작곡했는데 그렇다고 벨리니도 유딧을 주인공으로 삼은 오페라를 만들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벨리니를 얘기하는 중에 유딧을 얘기하는 것은 유딧의 이탈리아식 표현이 주디타(Giuditta)인데 벨레니는 평생에 주디타라는 이름을 가진 두 여인 때문에 결혼을 커녕 번뇌의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첫번째 주디타는 당대 최고의 소프라노인 주디타 파스타(Giuditta Pasta: 1797-1865: 원래 이름은 주디타 네그리)이다. 벨리니의 오페라들을 유명하게 만든 여인이다. 주디타 파스타는 벨리니의 '몽유병자'에서 아미나의 이미지를 창조하였고 '노르마'에서는 타이틀 롤의 이미지를 창조하였다. 두 오페라 모두 1831년에 밀라노에서 초연되었다. 그와 같은 인연으로 두 사람의 음악적인 협동은 말할 나위도 없고 감정적으로도 대단히 가까웠다. 파스타는 벨리니가 자기의 재능을 최고로 발휘해서 인기를 독차지하게 만들어 주니 고맙게 생각했고 벨리나는 파스타가 자기의 오페라에서 주인공 역할을 뛰어나게 잘 해서 자기의 명성을 높여 주었으니 고마운 생각이었다. 벨리니는 파스타에 대한 감사의 생각으로 파스타를 위해 1833년에 '텐다의 베아트리체'(Beatrice di Tenda)를 작곡했다. 아무튼 두 사람은 뜨거운 관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서로 사모하는 심정을 간직하며 지냈다. 물론 벨리니는 한때 주디타와 결혼할 생각까지 했으나 여러 여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나저나 주디타는 일찍이 1816년에 테너 파스타와 결혼하여 주디타 파스타가 되었고 자녀까지 두고 있었다.
당대의 프리마 돈나 주디타 파스타. 오른쪽은 주디타 투리나
두번째 주디타는 주디타 투리나(Giuditta Turina)였다. 벨리니는 소프라노 주디타 파스타가 비록 연상이지만 연모의 감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름답고 젊은 부인인 주디타 투리나에게 애정을 쏟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828년이었다. 그러니까 벨리니가 27세의 청년 때였다. 벨리니는 투리나의 피아노 레슨 선생으로 알바를 하였고 그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 가까워질수 있었다. 투리나의 결혼은 사랑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남편에게 관심이 없었다. 남편도 그러려니 하며 벨리니와 친구처럼 지내는 것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묵인했다고 한다. 벨리니는 1828년 가을에 '비안카와 페르난도'의 공연을 위해 제노아에 가게 되었다. 그때 투리나도 함께 갔었다. 그 후로 두 사람은 거의 5년 동안 뜨거운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 투리나의 남편은 두 사람이 설마 대단히 뜨거운 관계일 줄은 생각치도 못했다. 그랬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1833년 쯤해서 악화되기 시작했다. 직접적인 요인은 대본가인 펠리체 로마니 때문이었다. 그때 벨리니의 '텐다의 베아트리체'가 베니스에서 공연을 가졌다. 이 오페라의 대본은 로마니였다. 공연은 실패로 돌아갔다. 로마니는 실패의 원인을 벨리니에게 돌렸다. 로마니는 벨리니가 어느 여자와 정신없이 지내는 바람에 음악이 형편없게 만들어졌다고 비난했다. 그런 비난을 그냥 말로 했으면 그나마 관찮았을 터인데 공공연히 인쇄를 해서 돌렸다. 화가 난 벨리니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로마니의 대본이 형편없어서 오페라가 실패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베니스의 시민들은 대본이고 음악이고는 관심이 없고 벨리니의 숨겨 놓은 애인이 누구냐는 것 가지고 말들이 많았다. 대단한 스캔들이었다.
카타니아의 피아짜 스테시코로. 벨리니 기념상이 우뚝 서 있다.
그러한 때에 투리나의 남편은 투리나의 방에서 벨리니가 구구절절 써서 보낸 연애편지를 발견했다. 그저 친구처럼 잘 지내려니라고 생각했는데 두 사람의 관계가 그게 아닌 것이 발각되었다. 투리나의 남편은 당장 이혼 소송을 냈다. 투리나도 '사랑이 없는 결혼이었는데 잘 되었다. 바라던 일이다'라고 응수하였다. 그러면서 투리나는 이 참에 벨리니와 아예 합쳐서 부부로서 살고 싶어했다. 그러나 벨리니의 감정은 로마니와의 싸움 때문인지 바뀌었다. 투리나의 집요한 집착이 싫어졌다. 결국 벨리니는 투리나와 결혼하는 대신 런던으로, 파리로 도피성 여행을 떠났다. 벨리니는 런던에서 파스타의 친구라고 하는 어떤 여인을 사랑해서 청혼하였으나 거절당한 일도 있다. 그후 벨리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파스타의 딸과 결혼하겠다고 나섰다. 물론 파스타 부부는 말도 안되는 소리라면서 거절하였다. 벨리니는 이제는 결혼이고 무어고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1835년 9월 23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릭 쇼팽(Frederick Chopin: 1810-1849)은 프랑스에서 지내면서 시인인 조르즈 상드와 깊은 관계를 가지며 지낸 것은 다 아는 사실이지만 그에 앞서 폴란드에 있을 때 마리아 보드친스카(Maria Wodzinska: 1819-1896)라는 여인과 약혼까지 했던 일은 잘 알려지지 않은 사항이어서 소개코자 한다. 아무튼 쇼팽을 그런 전력이 있지만 39세의 나이로 세상 떠날 때까지 결혼하지 않고 지냈다. 마리아는 한마디로 대단한 여자였다. 우선 매력적으로 생겼다. 지중해의 터치가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피부가 올리브 톤이며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였다. 마리아는 귀족 집안 출신이었다. 아버지가 백작이었다. 다복한 집안이었다. 오빠가 셋이고 여동생이 하나 있는 가족이었다. 보드친스키 백작은 가족들을 데리고 1832년에 폴란드를 떠나 스위스의 제네바로 와서 지냈다. 이곳에서 마리아는 피아노를 배웠다. 존 필드의 뛰어난 제자였다. 미술도 공부했다. 제네바 미술원에 다녔다. 여러 청년들이 마리아의 주변에서 사랑을 얻고자 했다. 나중에 나폴레옹 3세가 된 루이 나폴레옹도 그 중의 하나였다. 시인 율리우스 슬로바키도 마리아를 사랑하여 시를 헌정했다. 마리아는 누구나 사랑하고 싶어하는 그런 여인이었다. 쇼팽은 마리아를 위해 화려한 왈츠 Op 13을 헌정했다. 1835년에는 이별 왈츠를 헌정했다. 마리아는 이에 보답하여 쇼팽의 초상화를 그렸다. 미술평론가인 타드 술츠라는 사람은 마리아가 그린 쇼팽의 초상화를 보고 지금까지 나온 쇼팽의 초상화 중에서 들라크루아가 그린 것 다음으로 가장 훌륭한 것이라며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쇼팽과 마리아는 1836년에 약혼했다. 마리아의 어머니가 딸의 약혼을 후원해 주었다. 하지만 마리아의 아버지는 달랐다. 마리아의 아버지는 쇼팽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이유를 들어서 결혼을 반대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1837년에 종말을 고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1849년에 쇼팽은 세상을 떠났다. 마리아는 1841년에 요제프 스카르베크라는 사람과 결혼했다. 요제프의 아버지인 프리데리크는 쇼팽이 세례 받을 때에 대부였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쇼팽의 이름도 대부의 이름을 따서 프리데릭이라고 불렀다. 얼마후 마리아 부부는 이혼하였다. 마리아는 1848년에 전남편의 딸을 임차해서 사용하고 있는 사람과 재혼하였다. 마리아는 재혼하여서 새 남편과 30여년을 함께 살았다. 아무튼 쇼팽은 마리아와의 결혼이 성사되지 않자 심적으로 공허한 상태가 되었고 그래서 조르즈 상드와 특별한 관계를 가지며 지냈고 결국 건강의 여의치 않아서 정식 부인이나 자녀가 없이 세상을 떠났다.
프레데릭 쇼팽
○ 플라토닉 러브의 모델이라고 하는 요한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다. 브람스의 그같은 평생독신의 배경에는 누구나 알다시피 스승인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 클라라를 깊이 사모하여서라고 한다. 물론 그렇다고 클라라에 대한 브람스의 감정이 사모 이상으로 발전했던 것도 아니고 사모 이하의 일시적은 동정도 아니었다. 1854년에, 그러니까 브람스가 21세의 약관일 때에 슈만은 라인강으로 걸어들어가서 자살을 기도했다. 그래서 곧바로 본() 인근에 있는 정신요양소에 격리 수용되었다. 결국 슈만은 정신병원에서 2년 후인 1856년에 폐염이 악화되어서 세상을 떠났다. 슈만이 정신병원에 수용되자 브람스는 본에서 가까운 뒤셀도르프에 머물면서 슈만의 가족들을 돌보고 클라라를 대신해서 이런저런 일들을 처리해 주었다. 그리고 클라라는 슈만을 면회 갈수 없었지만 브람스가 대신 자주 면회를 갔다. 클라라가 슈만을 겨우 면회할수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임종이 가까워서 면회를 허용했을 때였다. 슈만은 클라라가 마지막으로 면회를 하고나서 이틀 후에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클라라에게 깊은 동정심을 가지게 되었다. 브람스에게는 클라라가 이상으로 생각하는 여인상이었다. 헌신적이고 사랑에 넘치고 가정적이며 아름다웠고 게다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에 그러했다. 클라라와 아이들에 대한 브람스의 마음은 지극했다. 그것은 일종의 지극한 사랑이었다. 아마 클라라도 브람스에게 사랑의 감정을 가졌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의 깊은 관계는 친구 이상으로 발전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그런 우정어린 사랑은 클라라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지속되었다. 클라라는 브람스보다 무려 14년 위였다. 브람스는 슈만이 정신요양소에 수용되던 해에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Op 9를 클라라에게 헌정하였다. 한편, 클라라는 슈만이 세상을 떠난 후 혼자 살면서 자주 연주회를 가졌는데 그 때마나 브람스의 작품을 프로그램에 넣어주며 브람스의 경력을 지원했다.
그런 브람스인데 한 때 결혼하려고 약혼까지 한 일이 있다. 브람스는 1859년에 아가테 폰 지볼트(Agathe von Siebold)라는 여인과 약혼을 했다. 슈만이 세상을 떠나서 클라라가 혼자 지내던 1859년이었다. 그런데 얼마후 약혼이 깨어졌다. 브람스가 클라라에게 지극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아가테 쪽에서 무척 심란하여서 먼저 파혼을 제안했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브람스는 아가테를 상당히 사랑했었던 모양이었다. 브람스가 아가테에게 보낸 편지가 나중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구구절절 사랑의 호소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파혼 이후로 다시 만난 일이 없다. 훗날 브람스는 친구들에게 '아가테야 말로 나의 마지막 사랑이었다'라고 털어 놓았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인 1897년에 향년 64(또는 63)세로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브람스는 1896년 여름에 황달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늦게 다시 진단했더니 간암으로 나왔다. 브람스의 아버지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니 집안 내력인지도 모른다. 브람스가 생애 마지막으로 일반 장소에 모습을 보인 것은 1897년 3월 3일이었다. 한스 리히터가 그의 교향곡 4번을 지휘한 때였다. 사람들은 교향곡 4번의 각 악장이 끝날 때마다 예외적으로 많은 박수를 보냈다. 브람스의 건강은 점차 악화되어서 그로부터 꼭 한달 후인 1897년 4월 3일 숨을 거두었다.
1878년의 클라라 슈만. 클라라가 59세 때였다. 브람스는 클라라가 77(또는 76)세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결같이 돌보아주었다.
○ 오페라 '피터 그라임스', '전쟁 진혼곡', 그리고 오케스트라 쇼피스인 '청소년을 위한 오케스트라 입문'으로 유명한 영국의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은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았지만 실제로는 테너 피터 피어스와 오랜기간을 동거동락했기 때문에 다른 독신 작곡가들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볼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튼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독신 작곡가의 범주에 넣을수 있다. 브리튼은 24세 때인 1937년에 피어스와 처음 만났고 그 이후로 평생을 친구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지냈다. 사람들은 두 사람의 관계를 동성애 관계라고 보았다. 두 사람은 실제로 한 집에서 함께 살았다. 브리튼은 어찌보면 특이한 성격의 인물이었다. 브리튼은 젊은 시절에 나쁘게 말해서 소아성애적인 면을 보였다. 그건 당시 사회규범으로 보았을 때 죄악이나 마찬가지였다. 브리튼은 청년이 되어서 몇몇 소년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으며 지냈다. 첫번째 대상은 1934년 당시에 13세였던 피어스 던컬리라는 소년이었다. 그때 브리튼은 20세였다. 브리튼은 피어스 소년을 특별한 애정으로 보살펴 주었다. 어떻게 특별히 돌보아 주었는지는 자세히 모르겠다. 그 다음으로는 데이빗 헴밍스라는 소년과 마이클 크로포드라는 두 소년이었다. 이 두 소년은 보이스 소프라노로서 1950년대에 브리튼의 작품에서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브리튼이 소년들을 무척이나 좋아하고 애정어린 보살핌을 주었지만 그렇다고 성폭행을 했다던가 하는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저 음악을 사랑했고 그런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들을 사랑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브리튼과 가까이 지낸 몇몇 사람들은 브리튼이 10대 소년들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끼는 데에는 무언가가 있었다고 보았다. 가장 가까운 친구인 피터 피어스는 어느때 브리튼에게 '세상에는 아직도 사랑스러운 것들이 남아 있다. 아이들, 소년들, 밝은 햇빛, 바다, 모차르트, 그리고 너와 나'라고 말한 일이 있다. 이 말인즉 브리튼이 소년들을 특별히 사랑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학문적으로 보았을 때 브리튼이 소아성애자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모르겠다. 귀여운 어린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은 누구나의 성품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혹자는 아이들이야 말로 순진하고 섹스에 대한 감각이 없기 때문에 브리튼이 좋아했던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2013년에 브리튼 전기작가인 폴 킬디(Paul Kildea)는 '브리튼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고 하지만 실은 매독이 있는지를 몰라서 치료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을 떠났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킬디는 브리튼이 피어스와 함께 뉴욕에 가서 지낼 때에 미안하지만 난잡한 성관계가 있어서 매독에 걸린 것이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영국이 자랑하는 위대한 작곡가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가 아닐수 없지만 일부 사람들은 브리튼과 피어스가 동성연애를 하면서 매독이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런 논란이 있자 브리튼의 주치의격인 심혈관의사는 '누구든지 대체로 중요한 수술을 하기 전에 매독 여부를 검사한다. 그런데 브리튼의 경우는 음성이었다'면서 매독 주장을 일소에 붙였다. 그후 브리튼의 매독 논란은 몇번 더 계속되었지만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에 어느 틈엔가 유야무야되었다. 그나저나 브리튼의 건강상태는 그야말로 걸어다니는 병원이라고 할 정도로 문제가 많았다. 브리튼의 또 다른 전기작가인 카펜터는 '브리튼의 건강상태를 체크하면 20가지의 질병을 발견할수 있다. 브리튼의 전기작가가 '물론 그 중에는 대수롭지 않은 것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심각한 수준이다'라고 말한 것만 보아도 브리튼의 건강상태가 얼마나 취약했는지를 알수 있다. 그런데도 브리튼은 산책도 줄기차게 했고 수영도 자주 했다. 자기의 신체를 좋은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도 노력했던 것이다. 아무튼 질병 투성이의 브리튼에게 있어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역시 심장이었다. 브리튼은 심장 때문에 말년을 고생하였고 결국 그로 인해서 세상을 떠났다.
브리튼과 피어스. 두 사람은 1937년 이래 서로 인생의 반려자로서 지냈다.
○ 위대한 작곡가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위대한 작곡가의 아들이어서 관심을 끌었던 작곡가가 있다. 모차르트의 아들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Franz Xaver Wolfgang Mozart: 1791-1844)이다. 보통 볼프강이라고 불리는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작곡가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너무 유명해서 그 그늘에 가려서 빛을 보지 못하였다. 그리고 볼프강은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는 바람에 자녀가 없다. 만일 볼프강이 결혼해서 자녀를 두고 또 그 자녀들의 결혼해서 후손들이 생겼다면 오늘날 우리는 모차르트의 후손을 만나는 감동을 경험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못해서 아쉬움을 주고 있다.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와의 결혼에서 여섯 자녀를 두었다. 그 중에서 네 자녀는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고 두 아들만 어른으로 성장하였다. 남은 두 아들 중에서 형인 칼 토마스 모차르트(Carl Thomas Mozart: 1784-1858)는 물론 음악에 재능이 있었지만 음악가가 되지 않고 외교관이 되어서 이탈리아주재 오스트리아 대사관에서 근무하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결혼하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후손이 없다. 막내 아들이 볼프강 또는 모차르트 주니어라고 불리는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이다. 모차르트가 세상을 떠나기 5개월전인 1791년 7월에 태어났다. 볼프강은 음악적 재능이 있기도 했지만 모차르트의 아들이라는 후광 때문에, 그리고 어머니 콘스탄체의 극성 때문에, 어릴 때부터 훌륭한 스승들로부터 음악을 배웠다.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와 요한 네모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로부터 피아노를 배웠고 요한 게오르그 알브레헤츠버거(Johann Georg Albrechtsberger)와 지기스문트 폰 노이콤(Sigismund von Neukomm)으로부터는 작곡을 배웠다. 과연! 볼프강은 아버지 모차르트처럼 어릴 때부터 작곡에 대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볼프강은 1805년, 그러니까 13세 때에 비엔나의 유서 깊은 테아터 안 데어 빈(Theater an der Wien)에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을 발표해서 작곡가로서 데뷔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역시!'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볼프강은 전문 음악인으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아버지 모차르트와는 달리 자기의 작품에 대하여 언제나 '별것 아닙니다'라며 겸손해 했다. 지나친 겸손이었다.
볼프강은 아무래도 무언가 벌이가 있어야 겠다고 생각해서 1808년에 폴란드의 렘버그(현재의 르비브) 인근의 피드카민이라는 작은 마을로 가서 바보로브스키 백작집의 딸들에게 음악 레슨을 하게 되었다. 보수는 그럭저럭 관찮았지만 시골인 피드카민은 너무나 한적해서 견디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래서 1년 후에 큰 도시인 부르슈틴으로 갔다. 부르슈틴의 야니체브시키 백작 집에서 음악 교사로 오라고 해서였다. 볼프강은 백작의 딸들에게 음악 레슨을 하는 한편 마을에서 아버지 모차르트의 작품을 연주하는 모임을 주선하면서 의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볼프강은 부르슈틴에서 2년을 지내다가 렘버그로 다시 갔으며 이번에는 그곳에서 무려 20년을 음악교사 등의 활동을 하며 지냈다. 볼프강은 1826년부터 3년 동안 렘버그의 성체칠리아합창단을 지휘했다. 무려 4백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대합창단이었다. 볼프강은 1826년에 성게오르게 그리스정교회에서 아버지 모차르트의 진혼곡을 지휘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성게오르게 정교회와 성체칠리아 합창단은 합동하여 렘버그에 음악학교를 오픈했고 볼프강은 음악교사로 임명되었다. 그후 그는 1819년부터 1821년까지 바르샤바, 엘빙, 단치히(그단스크) 등을 순회하며 연주회를 가졌다. 그후에는 비엔나로 돌아와서 잠시 지냈다. 비엔나의 안톤 디아벨리가 자기의 춤곡을 주제로 50명의 현역 작곡가들로부터 변주곡을 받아서 출판코자 할 때에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도 포함되었다. 그만큼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볼수 있다. 볼프강은 1838년에 비엔나를 떠나서 아버지의 고향인 잘츠부르크로 갔다. 볼프강은 모차르테움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1844년 7월에 위암으로 칼스바드에서 요양 중에 세상을 떠났다. 칼스바드(Karlsbad)는 오늘날의 칼로비 바리(Carlovy Vary)이다. 볼프강은 칼스바드에 안장되었다. 볼프강의 묘비에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은 그의 생애의 에센스였다'라고 적혀 있다. 볼프강은 결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녀도 없다. 그가 사모했던 여인이 있기는 있었다. 요제피네 데 바로니 카발카보(Josephine de Baroni-Cavalcabo)라는 귀족이었다. 그러나 신분상의 차이 등으로 결혼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카발카보 남작부인은 상당기간 동안 볼프강의 파트론이었다. 볼프강은 카발카보 남작부인에게 첼로 소나타를 헌정하였다.
모차르트의 아들인 프란츠 사버 볼프강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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