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동성애 작곡가들의 면모

정준극 2017. 6. 16. 18:52

위대한 작곡가들 중에는 동성애자도 있었다

15인의 특별한 작곡가들 점검


저명한 작곡가들이라고 해서 동성애자가 없으란 법은 없다. 다만, 기독교의 관점에서 보면 동성애는 하나님의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이기 때문에 비난을 받아서 마땅하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구약성경 창세기 2장 18-24절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 할수 있다. 특히 18절과 24절을 보면 "18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24 그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이다. 사람은 성장하면 남자와 여자가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두어서 가정의 기반이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 정상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독신으로 사는 사람들도 있지만 동성애를 하기 때문이다. 클래시컬 음악의 세계에서도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또 지금도 있다. 헨델, 차이코브스키, 브리튼...이런 분들이 동성애를 중요시했다. 그밖에도 더 있다. 과연 어떤 작곡가들이 동성애자였는지 알아보는 것도 클래시컬 음악을 좀 더 이해하는데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서이다. 물론 심증은 있으나 물증이 없는 경우도 있어서 양해를 바란다. 다음 소개하는 동성애 작곡가 중에서는 현재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 장 바티스트 륄리(Jean-Baptiste Lully: 1632-1687)는 이탈리아의 투스카니 대공국의 피렌체(플로렌스)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조반니 바티스타 룰리(Giovanni Battista Lulli)였으나 프랑스로 가서 장 바티스트 륄리로 바꾸었다. 륄리는 평소에 춤을 기가 막히게 잘 추어서 대인기였는데 마침 1653년에 태양왕이라고 하는 루이 14세와 춤을 멋들어지게 추고 난 후에 일약 궁정작곡가로 기용되었다. 루이 14세도 춤이라면 한 춤 하는 사람인데 륄리에게는 명함도 내밀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아무튼 어찌나 루이 14세의 총애를 받았던지 륄리는 프랑스 오페라를 전매하다시피 했다. 말하자면 프랑스의 오페라 극장에서는 거의 예외 없이 륄리의 오페라만이 공연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누구든지 오페라를 작곡하고서 극장의 무대에 올리고 싶거나 궁정에서 공연하고 싶으면 우선 륄리를 통해야 했다. 그러다보니 기고만장해져서 분별 없는 행동을 하기가 일수였다. 결국 화무십일홍이었다. 루이 14세로부터의 총애를 잃기 시작했다. 특히 루이 14세가 륄리를 고약하다고 생각한 것은 륄리가 여자들과 난잡하게 논다면 그나마 이해하겠는데 남자들과도 별별 해괴한 짓을 다 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륄리는 이성애자 겸 동성애자였다. 사실 국왕의 총애를 받는 지체 높은 륄리가 동성연애를 한다는 사실은 알려지지도 않았거니와 안다고 해도 쉬쉬하였다. 그러다가 궁정 오페라단에서 심부름하는 브루네라는 미소년이 파리에서 친구들을 만나서 자기로 말하자면 륄리와 이런저런 관계라고 떠들어 대는 바람에 륄리의 동성애 스캔들이 발없는 소문이 천리 간다는 식으로 다 알려지게 되었다. 륄리는 얼마후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다가 자기도 모르게 지휘봉으로 발등을 찍는 바람에 상처가 덧나서 세상을 떠났다.


장 바티스트 륄리


○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ick Handel: 1685-1759)은 신앙심이 깊은 사람이어서 설마 동성애를 할 사람으로는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우리의 생각이다. 헨델에게는 정말로 사랑이니 섹스니 하는 것이 생각하기도 싫은 하찮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느날 조지 2세가 헨델에게 '그대는 어찌하여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것을 무시하며 결혼이란 것을 생각치도 않는가'라고 우악하게 물었다. 그러자 헨델은 '폐하, 본인으로 말씀드리자면 음악 이외의 것은 어떤 것도 생각할 시간이 없사옵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헨델에게는 그저 음악만이 모든 것이었다. 그런 헨델인데 런던에서 그저 시간만 있으면 동성애자들이 모이는 사교클럽에 가서 지냈다는 것이다. 가서 무슨 행동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늘날로보면 게이바와 같은 곳에서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 기가 막히는 것은 헨델은 런던에서만 그런 클럽에 다녔던 것이 아니라 이탈리아와 독일에 있을 때에도 궁정에서 그런 유형의 모임이 있으면 참석했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헨델 전문가인 영국의 엘렌 해리스 박사가 쓴 '오르페오로서의 헨델: 실내 칸타타에서 음성과 욕망'(Handel as Orpheus: Voice and Desire in the Chamber Cantata)에서 슬며시 암시하기도 했다. 믿거나 말거나! 


조지 프리데릭 헨델


○ 오페라 '삼손과 델릴라'로 유명한 프랑스의 카미유 생 상스(Camille Saint-Saens: 1835-1021)는 1875년, 그가 40세가 되던 해에 느닷없이 나이가 한참 어린 마리 로르 트뤼포(Marie-Laure Druffot)와 결혼하겠다고 발표해서 친구들과 가족들을 놀라게 했던 일이 있다. 마리 로르 트뤼포는 생 상스의 제자 중 한사람의 여동생이었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지만 행복한 결혼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나이차이가 너무 나서였던 것 같다. 두 사람 의 결혼생활은 두 자녀가 모두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나서 더욱 불행하였다. 아이들이 세상을 떠나자 생 상스도 아내를 떠났다. 그리고 평생 다시는 결혼하지 않고 지냈다. 생 상스는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런 결혼생활이었지만 그렇다고 사회생활까지 고통 속에서 지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자주 외출을 해서 친구들과 술자리를 어울렸고 그런가하면 자기가 돈을 내서 근사한 만찬 모임을 자주 가졌다. 또한 새벽까지 파티를 즐기기도 했는데 뜻밖에도 여장을 하고 파티에 참석한 경우도 여러번이나 있었다. 그리고 북아프리카의 이국적인 장소를 찾아서 자주 여행을 갔다. 특히 알제리에 자주 갔었는데 아마 알지에에 잘 아는 뚜쟁이가 있었지 않았느냐는 짐작이다. 당시에 알지에는 유럽의 동성애자들이 자주 찾아가던 곳이었다. 그러므로 생 상스도 알지에에서 동성애를 즐겼을 것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카미유 생상스는 평생동안 알제리아를 사랑했다. 그는 1875년에 처음으로 알제리를 방문하고나서 알제리에 대한 사랑을 시작하였다. Suite algerienne C 장조 Op 60의 3악장은 그가 처음으로 알제리를 방문했을 때 받은 인상을 주제로 삼았다. 생상스는 또한 단악장의 Reverie Orientale를 작곡해서 1879년 6월에 파리에서 직접 지휘로 초연하였다. 이 작품 역시 알제리를 소재로 삼은 것이다.


○ 피터 차이코브스키(Peter Tchaikovsky: 1840-1893)의 노래 None but the lonely heart 는 '그리움을 아는 이만이'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오직 고독한 마음뿐'이라고 번역한 것이 더 마음에 와 닿는다. 차이코브스키의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차이코브스키는 평생을 고독과 번민을 삼키면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성애자이면서도 그것을 감추기 위해 고민한 것도 하나의 커다란 이유였다. 차이코브스키가 동성애자였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다만, 차이코브스키 자신은 동성애로 인하여 사회로부터 비난과 조롱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공공연하게 행동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같은 동성애자라고 해도 생 상스는 결혼해서 10년 이상을 남들이 보기에 무탈하게 보냈다. 차이코브스키도 결혼했다. 모스크바 음악원의 교수로 재직할 때에 제자였던 안토니나 밀류코바(Antonina Miliukova)라는 젊은 여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그 결혼은 그야말로 혼돈이었다. 두 사람은 비록 부부이지만 성격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맞지 않았다. 차이코브스키는 결혼 두 달 반만에 밀류코바를 떠났다. 동성애를 더욱 동경해서 떠났을 것이라는 얘기다. 차이코브스키의 동성애 감정이 극도로 표현된 것은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6번 일명 '비창'을 통해서라고 한다. 차이코브스키는 '비창'을 사랑하는 블라디미르 '봅' 다비도프(Vladimir 'Bob' Davydov)에게 헌정했다. 사람들은 블라디미르 '봅' 다비도프가 차이코브스키의 동성애의 상대방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블라디미르 '봅' 다비도프는 차이코브스키의 조카이기도 했다. 차이코브스키가 동성애자 였다는 사실은 러시아 당국을 크게 당혹시키는 일이었다. 러시아는 전통적으로 동성애를 금지하고 그런 사람들에 대한 검열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러시아가 가장 자랑하는 세계적인 차이코브스키가 동성애자였으므로 당국으로서는 곤혹스러워서 일단은 의도적으로 그런 사실이 퍼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그래서 오늘날 까지도 차이코브스키가 동성애자 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지내는 사람들, 특히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차이코브스키와 부인 안토니나 밀류코바. 옆의 사진은 차이코브스키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애인


○ 이번엔 여성 동성애자 작곡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영국의 에델 스마이스(Ethel Smyth: 1858-1944)는 20세기 초에 활약했던 여성 작곡가이다. 그의 오페라 '난파자들'(The Wreckers)은 상당한 호응을 받은 것이었으며 또 다른 오페라인 '숲'(Der Wald)은 1903년 메트로폴리탄 100년 역사에서 처음으로 공연된 여성 작곡가의 오페라였다. 메트에서 에델 스마이스의 '숲' 이후 또 다시 여성 작곡가의 오페라가 공연된 것은 113년만인 2016년으로 핀란드의 카이야 사리아호(Kaija Saariaho)가 작곡한 '먼곳으로부터의 사랑'(L'amour de loin)이었다. 그건 그렇고, 에델 스마이스는 작곡가이지만 여성운동가로서도 유명했다. 그는 20세기 초반에 영국에서 일어났던 여성투표권 운동에 앞장 섰었다. 그런 에델 스마이스인데 평생을 결혼하지 않고 지내면서 여러 여성들과 친밀하게 지냈다. 그저 친밀한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열중하였다. 에델 스마이스가 사랑의 감정을 가졌던 여성 중의 한 사람은 에델 스마이스보다 24세 아래인 작가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였다. 에델 스마이스의 동성애 감정은 대본가인 친구 헨리 베네트 브루스터(Henry Bennet Brewster)에게 보낸 편지에서 읽어볼수 있다. 편지에서 그는 '당신과 같은 이성보다는 나와 같은 동성을 사랑하는 것이 너무나 쉬운 일이어서 이상할 정도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는 정신적으로 아주 건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런 사랑을 할수 있다'고도 말했다.  


에델 스마이스


○ 폭넓은 종교음악을 작곡한 프랑스의 프란시스 풀랑크(Francis Poulenc: 1899-1963)는 이성애자이면서 동성애자였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인데 그럴수가 있느냐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가 동성애자였던 것은 주위 사람들이 거의 모두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풀랑크는 결혼했다. 딸까지 하나 두었다. 그런데 이성애 보다는 동성애에 관심이 깊었다. 파트너는 여러 명이었다. 대표적인 파트너는 화가로 유명한 리샤르 샹레르(Richard Chanlaire: 1896-1973)였다. 풀랑크는 리샤르 샹레르에게 Concert champetre(목가적인 협주곡: 하프시코드 협주곡)를 헌정하면서 헌사로 '당신은 나의 생애를 변화시켜 주었습니다. 당신은 나의 30년에 걸친 햇빛이었습니다. 당신의 나의 삶과 일의 이유였습니다'라고 썼다. 리샤르 샹레르는 프란시스 풀랑크보다 세살 위였다.


티티안의 '목가적인 협주곡'(Concert champetre). 풀랑크에게 영감을 주어 같은 제목의 협주곡을 작곡토록 했다.


○ '아팔라치의 봄' 등 뛰어난 작품으로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작곡가인 아론 코플란드(Aaron Copland: 1900-1990)는 자기가 동성애자인 것을 일부러 알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감추고 쉬쉬하지도 않았다. 상대방은 주로 음악을 비롯한 예술분야에 발을 들여놓은 젊은이들이었다. 코플란드는 비록 동성애자이지만 그것 때문에 작곡가로서의 성공가도에서 장해를 받지는 않았다. 비교적 조신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물론 두 차례에 걸친 레드 스케어(Red Scare: 적색공포) 기간중에는 반미국적(Un-American)인 인물로 블랙리스트에 오르긴 했었지만 그렇다고 별다른 위해를 받지는 않았다. 레드 스케어란 미국에서 1차 대전 직후와 2차 대전 직후에 공산주의, 무정부주의, 노동조합주의 등이 반사회적인 공포의 대상이므로 '진실한 미국인'(Real American)을 보호해야 한다는 운동을 말한다. 그러니까 당시에는 동성애자도 '진실한 미국인'이 아니라고 규정했었다. 코프란드는 기본적으로 프라이버시는 철저하게 지켜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자기가 게이라는 것도 프라이버시이므로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나는 게이올시다'라고 전면에 나서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사회적으로 게이 문제가 논란이 되어도 조용히 있었다.


아론 코플란드


예를 들어서 1969년 뉴욕 인근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저 유명한 스톤월 폭동이 일어났을 때에도 게이로서 입을 다물고 있었다. 스톤월 폭동은 게이단체들이 권익옹호라는 측면에서 스톤월 인(Stonewall Inn)에서 경찰에 대항해서 폭력 시위를 벌인 사건을 말한다. 하지만 그렇게 나서지는 않았다고 해도 숨지도 않았다. 코플란드는 여행을 다닐 때에도 파트너와 함께 다녔다. 코플란드의 동성애 파트너로서 공공연하게 알려진 인물로서는 사진작가인 빅터 크라프트, 화가인 알빈 로스, 피아니스트인 폴 무어, 댄서인 에릭 존스, 작곡가인 존 브로드빈 케네디, 화가인 프렌티스 테일러 등이 있다. 그중에서도 빅터 크라프트는 평생은 아니지만 코플란드의 생애에서 상당기간 동안 가장 변함없는 파트너였다. 물론 이들의 로맨스는 1944년 이전에 막을 내렸지만 말이다. 크라프트는 원래 바이올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음악적인 재능이 뛰어났었다. 그러다가 16세 때인 1932년에 코플란드의 제자가 되었다가 코플란드의 주장에 따라 바이올린을 포기하고 사진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크라프트는 코플란드의 파트너로서 지내다가 코플란드를 떠나서 결혼하였다. 훗날 코플란드는 크라프트의 아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상속해 주었다.


아론 코플란드와 레오나드 번슈타인


○ '현을 위한 아다지오' 그리고 오페라 '바네사'(Vanessa) 등으로 유명한 미국의 사무엘 바버(Samuel Barber: 1910-1981)도 동성애자였다. 파트너는 너무나 유명한 오페라 작곡가인 지안 카를로 메노티(Gian Carlo Menotti: 1911-2007)였다. 바버가 메노티를 만난 것은 커티스음악원에서 학생으로 있을 때였다. 그로부터 거의 40년에 걸친 오랜 파트너쉽이 시작되었다. 두 사람은 협력자이기도 했다. 메노티는 작곡가이면서도 대본가여서 바버를 위해 오페라 '바네사'와 '핸드 오브 브릿지'(A Hand of Bridge)의 대본을 제공했다. 두 사람은 합해서 네번의 퓰리처 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카프리콘(Capricorn)이라는 저택을 공동으로 구매했는데 이곳에서 거의 30년이나 함께 지냈다. '카프리콘'은 바버의 오보에, 트럼펫, 플루트, 그리고 현을 위한 협주곡의 제목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파트너로서 지내다가 말년에 즈음해서 그런 관계를 그만 두었다. 그후 바버는 절망으로 창작력의 결핍을 경험하였다.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작곡가의 한 사람으로 존경받고 있는 사무엘 바버는 펜실베이니어주의 웨스트 체스터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사무엘 바버는 아버지가 저명한 의사였기 때문에 비교적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바버의 어머니는 피아니스트였고 또한 숙모는 메트로폴리탄의 콘트랄토였으며 삼촌은 미국적 예술가곡을 주로 작곡한 작곡가였다. 바버는 이들로부터 음악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특히 숙모인 루이스 호머를 통해서 여러 음악가들을 소개 받고 친분을 유지할수 있었다. 바버는 10세 때에 첫 오페라를 시도했다. '장미 나무'(The Rose Tree)라는 제목이었다. 바버는 12세 때에 마을 교회의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그리고 14세 때에 필라델피아의 커티스음악원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피아노와 작곡, 그리고 성악을 공부했다. 그는 10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작곡을 시작했다. 바버는 커티스에서 지안 카를로 메노티를 만나서 거의 평생을 파트너로서 지냈다. 바버와 메노티는 1943년에 뉴욕주의 마운트 키스코에 저택을 하나 공동구입했다. 그리고 이 집에서 메노티와 함께 상당기간 동안 지냈다. 바버에게도 힘든 시기가 있었다. 그의 세번째 오페라인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가 무대에 올려지기 전부터 거친 평판을 받자 절망감으로 고통을 받았다. 이와 함께 알콜 중독 증세를 보여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다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는 1966년 9월에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하우스의 오프닝에서 초연되어 그나마 절망감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그는 70세가 되어서도 작곡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작품은 1978년에 완성한 Third Essay였다. 바버는 1981년 뉴욕에서 암으로 서거했다.


지안 카를로 메노티는 이탈리아 마조레 호수 인근의 카델리아노 비코나고(Cadegliano-Viconago)에서 태어났다. 스위스와의 국경에서 가까운 마을이다. 메노티의 아버지는 커피상인이었다. 메노티는 일곱살 때부터 노래를 작곡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1살 때에는 그의 첫번째 오페라인 '피에로의 죽음'(The Death of Pierrot)을 작곡했다. 대본도 그가 썼다. 메노티는 1923년에 밀라노음악원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메노티의 어머니 이네스는 남편(메노티의 아버지)이 세상을 떠나자 식구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떠났다. 메노티는 1928년에 커티스에 입학하였다. 사무엘 바버와 레오나드 번슈타인은 커티스의 동창생들이었다. 메노티와 바버는 생애에 있어서나 작품활동에 있어서나 파트너가 되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메노티가 바버의 오페라인 '바네서'를 위해 대본을 제공하면서 비롯되었다. '바네사'는 1958년 메토르폴리탄에서 초연되어 상당한 호응을 받았다. 메노티는 커티스 학생 시절에 펜실베이니아의 웨스트 체스터에 있는 바버의 고향집에 가서 지낸 일이 많았다. 메노티와 바버는 커티스를 졸업하고서 작곡을 위한 조용한 집이 필요해서 뉴욕주의 마운트 키스코에 저택 하나를 마련했다. 두 사람은 이 집에 카프리콘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두 사람ㅇ른 거의 40년 동안 이 집에서 동거동락했다.


사무엘 바버와 지안 카를로 메노티. 1958년


결혼을 하지 않은 메노티는 1974년에 프란시스 '칩' 펠란(Francis 'Chip' Phelan: 1938-)이라는 청년을 양자로 입양하였다. '칩'은 배우이면서 피겨 스케이팅 선수였다. 메노티가 '칩'을 알게 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인 1960년대 초였다. 배우인 '칩'은 메노티의 오페라에 비록 마임이지만 자주 등장했었다. '영매'(The Medium)에도 등장했었고 '블리커가의 성자'(The Saint of Bleecker Street), 그리고 '달걀'(The Egg)에도 출연했었다. 메노티가 '칩'을 입양하자 '칩'은 성을 메노티로 바꾸었다. '칩'은 1985년에 스코틀란드의 기포드란 곳에서 말린다 필터 머피와 결혼하였다. 메노티는 이들의 결혼을 축하하여서 스코틀란드에 있는 자기 집의 부근에 집을 하나 사서 주었다. 훗날 메노티가 세상을 떠나자 메노티의 재산문제로 다툼이 있었다.


메노티와 양자 프란시스


○ 20세기 영국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이 동성애자였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기 때문에 자세한 얘기는 피하고자 한다. 파트너는 테너 피터 피어스(Peter Pears: 1910-1986)이었다. 피터 피어스는 브리튼보다 7살 위였고 브리튼보다 꼭 10년이나 더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두 사람을 잘 아는 어떤 친구에 의해서였다. 그 친구가 1937년에 비행기 추락사고로 세상을 떠나자 두 사람은 자진해서 그 친구가 남긴 물건들을 정리하는 일을 했다. 그것이 두 사람의 같은 뜻으로 추진했던 첫번째 프로젝트였다. 이후 브리튼과 피어스는 거의 40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인생의 반려자로서 서로를 존중하며 지냈다. 브리튼은 피어스가 주역을 맡도록 여러 오페라를 작곡했다. 예를 들면 브리튼의 대표적 오페라인 '피터 그라임스'이다. 이에 대해서 피어스는 브리튼의 작품을 가장 뛰어나게 해석해서 브리튼의 작품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도록 도왔다. 두 사람의 관계는 가장 이상적인 동성애라는 얘기를 들었다.


피터 피어스와 벤자민 브리튼


○ 미국의 현대 작곡가인 루 해리슨(Lou Harrison: 1917-2003)은 동성애자일 뿐만 아니라 동성애자들의 권익옹호를 위한 운동에 적극 참여한 인물이다. 해리슨은 동성애가 절대적으로 사회에서 문제가 될수 없다 확고한 신념으로 게이들을 위한 활동을 후원하였다. 예를 들어서 그는 미국에 있는 여러 게이남성합창단을 위해 작곡을 했고 편곡을 했다. 해리슨은 그러한 공로로 1999년에 매년 시상하는 아메리카 게이/레스비안 음악상을 받았다. 해리슨의 파트너는 전자기술자이며 아마추어 음악가인 윌리엄 콜비그(William Cilvig: 1917-2000)이었다. 두 사람은 1967년에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 만나서 공동으로 사업을 추진하다가 33년 동안 인생의 파트너로서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착수한 프로젝트는 인도네시아 자바의 악기인 가믈란을 미국식으로 개량하여 제작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제작한 아메리칸 가믈란은 해리슨이 작곡한 인형극 오페라인 ''젊은 시저'(Young Caesar: 1917)와 '라 코로 수트로'(La Koro Sutro: 1972), 그리고 해리슨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바이올린과 아메리카 가믈란을 위한 모듬곡'(Suite for Violin and American Gamelan: 1974)에 사용되었다.  


루 해리슨


○ 세계적 지휘자이며 작곡가인 레오나드 번슈타인(Leonard Bernstein: 1918-1990)도 동성애자였다. 그렇지만 결혼하여 가족을 가졌다. 번슈타인은 게이라는 것 때문에 사회적으로 불이익을 받을 것이 걱정되어서 결혼했고 세자녀까지 두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번슈타인이 양성애자라는 것은 아니다. 번슈타인은 기본적으로 동성애자였다. 젊은 남자들과 깊은 동성애를 하였다. 번슈타인은 결혼 생활 중에도 게이로서 몇몇 젊은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다고 한다. 그래도 결혼생활은 큰 풍랑이 없는 행복한 것이었다. 레오나드 번슈타인은 유태인이었다. 우크라이나에서 살던 유태인의 후손이었다. 번슈타인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지휘자이며 작곡가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음악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미용실장비 판매원이었다. 우크라이나 남서부의 로브노에서 살다가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 미국으로 이민을 왔고 매사추세츠의 로렌스라는 곳에 정착했으며 이곳에서 번슈타인이 태어났다. 번슈타인은 어릴 때부터 음악적인 재능이 정말로 뛰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음악천재라고 불렀다. 그런데 청년시절부터 그가 게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번슈타인은 청년시절에 어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되기 위해서 응모한 일이 있다. 오케스트라의 이사회는 대단히 보수적이어서 지휘자가 될 사람이 게이라는 소문을 듣고는 번슈타인의 임명을 보류하였다. 번슈타인은 자기가 게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결혼키로 했다. 번슈타인은 멋진 청년이기 때문에 수시로 젊은 여자들의 관심을 끌었고 실제로 몇번의 로맨스가 있었지만 역시 게이였기 때문인지 결혼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그러다가 칠레 출신의 배우(오늘날로 말하자면 TV 탈렌트)인 펠레치아 몬테알레그레(Felicia Montealegre: 1922-1978)를 만나자 결혼해야 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미모의 펠리치아는 칠레인이지만 코스타리카에서 태어났고 미국으로 와서 배우 생활을 하고 있었다.


레오나드 번슈타인과 펠리치아 몬테알레그레. 결혼초


펠리치아가 번슈타인을 만난 것은 1946년 피아니스트인 클라우디오 아라우(Claudio Arrau)가 마련한 파티석상에서였다. 얼마후 두 사람은 약혼하였다. 그러나 금방 파혼되었다. 펠리치아는 이미 몇년전부터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 배우인 리챠드 하트(Richard Hart)와 깊은 관계에 있었는데 멋도 모르고 번슈타인과 결혼하겠다고 나섰다가 리챠드 하트와 도무지 헤어질수가 없어서 약혼을 없던 것으로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5년후인 1951년, 우리나라에서는 전쟁이 한창이던 때에 리챠드 하트가 세상을 떠났다. 그러자 펠리치아와 번슈타인은 기다렸다는 듯이 그해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렇게 되자 번슈타인이 게이라는 소문은 수그러들었다. 게다가 번슈타인과 펠리치아는 세 자녀까지 두었다. 제이미, 알렉산더, 니나였다. 펠리치아는 56세 때인 1978년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까 번슈타인과 결혼해서 27년을 함께 살았던 것이다. 펠리치아는 TV 탈렌트로서 여러 드라마에 출연했다. 대표적인 것은 1950년에 크라프트 텔리비전에서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에 주인공 노라로 출연한 것이다. 그전 해인 1949년에는 CBS에서 소머셋 몸의 소설인 '인긴의 굴레'(Of Human Bondage)에서 밀드레드 역을 맡았다. 상대역인 필립 캐리는 챨톤 헤스턴이었다. 펠리치아는 연극배우이기도 했지만 1960년대 말의 반전운동에도 깊이 관여하였다. 펠리치아는 1967년에 '평화를 위한 또 다른 어머니'(Another Mother for Peace)라는 반전단체의 설립에 직접 관여하였다. 이 단체는 가정주부들에게 반전교육을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펠리치아는 1969년에 워싱턴에서 베트남전쟁을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에 너무 작극적으로 참석하다가 당국에 의해 체포된 일도 있다.


번슈타인과 펠리치아, 그리고 자녀들인 제이미와 알렉산더


펠리치아는 남편 번슈타인이 동성애자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펠리치아는 The Leonard Bernstein Letters 라는 책을 썼는데 2013년에야 출판된 이 책에서 펠리치아는 '당신은 호모입니다.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중생활의 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이 마음의 평안을 얻고 건강에도 문제가 없으며 온통 생각이 동성애에 집중되어 있다면 어쩔수 없는 일입니다'라고 썼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번슈타인과 함께 일했던 아서 로렌츠는 번슈타인에 대하여 '결혼한 게이 남자이다.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있다. 그는 그저 동성애자이다'라고 말한 일이 있다. 셜리 로드 펄이라는 번슈타인의 또 다른 친구는 '아마 번슈타인은 섹스적으로는 남자를 필요로 했고 감정적으로는 여자를 필요로 한 것 같았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번슈타인의 결혼생활은 행복한 것 같았다. 사람들은 번슈타인 부부가 서로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했다. 번슈타인은 부인 펠리치아의 죽음으로 상당히 절망하였고 또한 자기가 버려진 것처럼 느꼈다고 한다. 그렇지만 번슈타인은 결혼생활 중에도 간혹 젊은 남자들과 혼외정사를 가졌다고 한다. 물론 부인인 펠리치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번슈타인은 나이가 들어갈수록 남자와의 관계를 거의 가지지 않았다고 한다.


1960년대에 펠리치아와 함께 연주여행을 떠나는 번슈타인


○ 미국의 전위음악 작곡가인 폴린 올리베로스(Pauline Oliveros: 1932-2016)는 테리 라일리(), 로렌 러시() 등과 함께 전후 미국의 전위음악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었다. 그는 특히 녹음테이프를 이용한 전자음악으로 유명했다. 그런 그는 또한 뛰어난 아코디오니스트였다. 아코디온 연주를 담은 음반도 만들었다. 그는 1960년대에 샌프란시스 테이프음악센터의 창설멤버 중의 하나로서 초대 센터장을 지냈다. 그는 이른바 '딥 리스닝'(Deep Listening)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창안하였다. 그는 '딥 리스닝 연구소'(DLI)를 설립하고 딥 리스닝 실제를 전파하는 역할을 하였다. DLI는 비단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 예술, 기술, 힐링에 이르기까지 응용분야가 폭이 넓다는 것이다. 폴린은 대단한 남녀평등주의자(페미니스트)였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레스비안처럼 생활을 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여성을 애호하여서 여성들과 많은 생활을 하였다. 특히 그는 여성앙상블들과 협동하는 일을 즐겨했다. 그리고 이색 예술가들과도 교류가 깊었다.   


폴린 올리베로스


○ 미국 전자음악의 갓마더(대모)라고 불리는 웬디 카를로스(Wendy Carlos: 1939-)는 어릴 때 이름이 월터(Walter)였다. 그러다가 1960년대 말에 성전환을 이루어서 여성으로서 생활하기 시작했고 이름도 웬디로 바꾸었다.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전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Switched-on Bach(스위치드 언 바흐)라는 앨범이 있다.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은 이 앨범에 실린 음악들을 모를리가 없다. 로버트 무그라는 전자악기 전문가가 개발한 무그 신테사이저(Moog Synthesizer)로 바로크 음악의 거장인 바흐의 음악을 연주한 것이다. 그렇게 유명한 음악인데도 그 음악을 만든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웬디 카를로스이다. 웬디 카를로스는 로드 아일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브라운대학교에서 물리학과 음악을 공부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캘리포니아에서 로버트 무그를 만나서 신테사이저 음악에 뜻을 함께 하여 그로부터 오랜기간동안 파트너로서 지냈다. 웬디는 1968년에 뉴욕에서 지낼 때에 자기의 여성적인 징후에 대하여 아무래도 무슨 조치를 취해야 겠다고 결심하고 그로부터 홀몬 교체 치료를 받았다. 그후 여러 치료를 거치면서 완전한 여성으로서 생활하기 시작했다. 그가 레스비안이거나 또는 페미니스트라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여성 작곡가로서 활동해 왔다.


웬디 카를로스는 성전환으로 여성이 된 사람이다.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가 제작한 '스위치드 언 바흐'를 모르는 사람은 없다. 1960년대 말로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 미국의 제니퍼 힉던(Jennifer Higdon: 1962-)은 오늘날 세계 클래시컬 음악 분야에서 가장 인정을 받고 있는 작곡가이다. 제니퍼는 2010년에 '바이올린 협주곡'으로 퓰리처 음악상을 받았고 그보다 앞서서 2009년에는 '타악기 협주곡'으로 그래미상을 받았다. 그의 첫번째 오페라인 '콜드 마운틴'(Cold Mountain)은 2015년 산타페 오페라가 초연하여 대단한 반응을 얻었다. 그의 수많은 경력과 작품활동을 소개하는 것은 생략하고 한가지만 얘기하자면 그는 2014년 8월에 오랜 파트너인 배우 셰릴 로슨(Cheryl Lawson)과 결혼식을 올렸다는 것이다. 제니퍼는 셰릴과 고교시절에 밴드부에서 만나서 이후 파트너로서 지냈다. 지휘자인 마틴 알솝(Martin Alsop)이 두 사람의 결혼식을 주례했다.  


미국의 클래시컬 뮤직 작곡가인 제니퍼 힉던


○ 니코 멀리(Nico Muhly: 1981-)는 현대를 사는 작곡가로서는 가장 촉망받고 있는 청년 작곡가이다. 그런 그는 게이이다. 그래서인지 게이를 주제로 삼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가장 최근에 작곡한 오페라 '판결'(Sentences)은 유명한 에니그마 암호해독가이며 게이인 알란 튜링(Alan Turing)의 생애를 조명한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멀리는 자기가 게이라는 사실을 굳이 내세우려 하지 않고 있다. 그는 게이들이 이상하게 여성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꾸며낸듯한 높은 피치의 목소리로 말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지만 게이라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의 또 다른 오페라인 '투 보이스'(Two Boys)역시 게이를 다룬 작품이다. '투 보이스'는 2011년 런던에서 잉글리쉬 내셔널 오페라가 초연했고 미국 초연은 2013년 메트로폴리탄에서였다. 게이 문제를 신중하게 다룬 작품이어서 많은 공감을 얻었다. 버몬트 출신인 멀리는 콜럼비아대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했고 뉴욕의 줄리아드에서 음악석사학위를 받았다. 그와 같이 작곡을 공부한 사람으로서는 오페라 '베르사이유의 유령'으로 유명한 존 코릴리아노, 그리고 크리스토퍼 라우스가 있다.


미국의 현대 작곡가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는 니코 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