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시컬 뮤직 팟푸리/클래시컬 뮤직 팟푸리

특이한 정신질환의 작곡가들

정준극 2017. 7. 4. 17:23

특이한 정신질환의 작곡가들


요즘이야 의료기술이 진보하고 생활환경이 개선되어서 한창 나이에 질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일이 그다지 많지 않지만 클래시컬 음악의 전성기인 18세기로부터 20세기에 이르기까지는 왜 그런지 유명 작곡가들 중에서 질병으로 단명한 경우가 적지 않았다. 모차르트가 그랬고 슈베르트가 그랬으며 비제, 쇼팽 등등 단명의 유명 작곡가들을 열거하자면 한이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질병으로 세상을 떠난 유명 작곡가 중에서 상당부분은 정신질환을 겪다가 합병증 등등으로 세상을 떠난 경우여서 기이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작곡이라는 것이 원래 고된 정신노동이고 창작이라는 것이 신경을 바짝 긴장하게 만드는 것이니만치 작곡가들의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정신질환으로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수 없다. 잘만하면 치료를 할수 있는데 말이다. 정신질환 중에서는 절망감으로 인한 증세와 불안감으로 인한 증세가 가장 많았다. 아무튼 정신병리학적 문제로 인하여 세상을 떠난 위대한 작곡가들의 면모를 살펴보기로 한다. 그런데 정신질환이라고 해서 반드시 정신이상만을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증세로 인해서 정신적인 질환으로 발전한 경우도 포함된다.


○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본(Bonn) 인근의 엔데니히(Endenich)에 있는 프란츠 리하르트 박사의 요양소(Sanatorium)에 수용되었다가 세상을 떠났다. 엔데니히 요양소는 주로 말기 결핵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지만 정신질환 환자들도 수용되어 있는 곳이었다. 입원이 아니라 수용이라고 한 것은 마치 감방처럼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슈만은 1854년 2월 27일에 정신적인 착란을 일으켰는지 뒤셀도르프의 집에서 슬리퍼만 신고 밖으로 나와서 라인강 다리로 올라가서 투신자살을 기도하였다. 마침 그 곳에 어떤 보트가 지나가다가 뱃사람이 슈만을 구출했기에 당장 목숨은 건졌다. 어떤 사람은 슈만이 강물에 투신한 것은 집안 내력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슈만의 누이인 에밀이 1825년에 라인강에 투신하여 숨을 거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라인강에서 뱃사람에게 구출된 슈만은 놀라서 뛰어온 사람들에게 자기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그날은 바로 카니발이 시작되는 장미의 월요일이어서 사람들은 슈만을 에워싸고 빌커슈트라쎄(Bilkerstrasse) 15번지의 아파트로 가는 내내 즐거운듯 따라 다녔다고 한다. 슈만은 며칠 후인 3월 4일에 정신병원에 입원하고서 그후 클라라를 만나지 않았다. 아마 일부러 자기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서 면회를 못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제자인 브람스는 수시로 면회하였다. 브람스가 남편 슈만과 아내 클라라의 중간 연락병 역할을 하였다. 클라라는 슈만이 아무래도 얼마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서 마지막으로 슈만을 면회하였다. 1856년 7월 27일이었다. 슈만은 클라라를 알아는 보았지만 말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이틀 후에 슈만을 세상을 떠났다.


슈만이 다리의 중간 쯤에서 라인강으로 뛰어내렸다고 생각되는 뒤셀도르프의 라인강 다리. 지나가던 뱃사공이 슈만을 구해주었다.


의학 전문가들은 슈만이 세상 떠나기 전에 보여준 증세를 관찰해 보고 사인은 아무래도 매독이라고 진단했다. 아마 슈만이 학생시절에 어찌하다가 매독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매독균이 결혼기간 중에도 잠복해 있다가 악화되었다는 설명이다. 수은중독의 증세도 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매독 등을 치료할 때에 수은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슈만도 수은을 사용하다가 중독되었다는 얘기다. 또 다른 주장의 사인은 신경계통의 문제라는 것이다. 두개골 내의 질량이 보통 사람들보다 많았다고 한다. 슈만의 시신을 해부한 의사의 말에 의하면 뇌의 아래부분에 젤라틴 형태의 종양이 발달해 있었다고 한다. 뇌를 압박하는 수막종(髓膜腫: meninggioma)은 간혹 환각증세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슈만의 여러 증세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인 1854년 2월부터 점차 심해지기 시작했다. 환각증상이 자주 나타났는데 천사들의 모습이 보였다가는 곧이어 악마들의 모습으로 바뀌어 진다는 것이었다. 또한 슈만은 클라라에게 자기가 혹시 모르는 사이에 클라라를 해칠지도 모른다고 경고를 했다고 한다.


로베르트 슈만. 세상을 떠나기 전에 환각증세를 자주 보였다.


○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는 심한 알콜중독(Dipsomania)이었다. 계속 목이 말라서 견디기 힘든 갈수증도 겸했다. 무소르그스키의 알콜중독은 가족력이 있다. 그의 아버지도, 그의 할아버지도 술을 열심히 마시는 분들이었다. 무소르그스키는 군대에서 복무할 때에도 술에 절어 지냈고 사회생활을 할 때에도 동료들과 술마시기를 좋아했다. 당시에 일반인들은 귀족들에 대한 일종의 반항으로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평소에 하고 싶었던 말들을 거침없이 하게 되는데 나중에 왜 그런 말을 했냐고 따지만 술김에 그랬다면서 양해를 받을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무소르그스키의 동료들도 그가 술을 마시는 것을 하나의 사회반항 현상으로 간주해서 크게 나무라지 않았다. 무소르그스키는 정부의 체신부에 공무원으로 잠시 있었으나 결국 술 때문에 얼마 후에 해고되었다. 그 후로는 정말로 술마시는 것을 콘트롤하지 못했다. 아래의 초상화는 그가 세상을 떠나기 1주일 전에 친구인 일리야 라핀이 그린 것이다. 그의 모습에서 알콜중독의 분위기를 느낄수 있다. 코가 빨갛기 때문이다.


친구 일리야 라핀이 그린 무소르그스키 초상화. 1881년 3월에 그린 것이며 무소르그스키는 그로부터 며칠 후에 세상을 떠났다. 알콜중독으로 코가 빨개진 그대로의 모습이다.

 

○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는 여러가지 강박관념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 중에서도 강박장애(Obsessive-Compulsive Disroder)가 가장 심했다. 그는 숫자를 세는 일을 극도로 싫어했다. 그러다보니 그는 자기의 작품에서 리듬과 박자를 세는 것까지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또한 시체를 보는 상상을 자주 했다. 그러다보니 실제로 시체를 일부러 찾아가서 보는 경우도 자주 있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장례식에 버젓이 참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는 1888년에 배링공동묘지에 있는 베토벤의 시신을 중앙공동묘지로 이장하기 위해 묘지를 파헤쳤을 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옆에서 참관하였다. 생긴 것은 멀쩡한데 실은 이상한 정신상태의 브루크너는 또한 자기에 대한 의심이 심했다. 특히 자기가 과연 작곡가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한 의심이 많아서 번민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인지 그는 그의 작품을 강박관념을 가지고 수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안톤 브루크너. 강박장애가 심했다. 그래서 '브루크너 프로블렘'이라는 용어까지 생겨났다.


[브루크너 문제](Bruckner Problem)

'브루크너 문제'(브루크너 골치꺼리)라는 말은 브루크너의 향곡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어려워서 나온 용어이다. 브루크너는 생전에 모두 12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4편은 린츠 시기에 완성한 것이고 나머지 8편은 비엔나 시기에 완성한 것이다. 그런데 교향곡을 1번부터 12번까지 순서대로 번호를 붙였으며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인데 린츠 시기의 교향곡 중에서 한 편만이 교향곡 1번이라는 번호를 붙였고 나머지 세 편은 번호를 붙이지 않아서 혼돈을 주었다. 린츠 시기에 완성한 세 편의 교향곡은 그냥 '연습 교향곡 F 단조', '교향곡 D 단조' '교향곡 B 플랫 장조'라고만 불렀다. 사실 시기별로 본다면 '연습 교향곡'이 교향곡 1번이 되어야 한다. 브루크너는 린츠에서 두번째로 완성한 교향곡에 교향곡 1번이라는 번호를 붙였지만 시기별로 본다면 그것이 교향곡 2번이 되어야 한다. 이어서 'D 단조 교향곡'은 교향곡 3번, 'B 플랫 단조 교향곡'은 교향곡 4번이 되어야 하고 그후에 비엔나에서 완성한 교향곡 2번부터는 순서대로 교향곡 5번부터 12번까지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혼돈을 주기 때문에 '브루크너 문제'라는 용어가 생겼다. 그러나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브루크너는 이상하리만치 자기의 교향곡에 대하여 완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일종의 강박관념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교향곡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하였다. 뿐만 아니다. 다른 사람이 오리지널 교향곡을 수정하거나 편곡한 경우도 있다. 브루크너의 작품에서 박자와 리듬은 상당히 이상한 것이었다. 예를 들면 2+3이라는 리듬을 사용하였는데 브루크너가 어떤 의도로 그런 리듬을 제시했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따라서 새로운 해석이나 편곡이 필요한 경우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교향곡은 실상 오리지널과 차이가 있고 또한 브루크너가 수정한 교향곡과도 차이가 있기 때문에 새로운 번호를 붙일 필요가 있게 되었고 그런 케이스가 자꾸 생기다보니 복잡한 번호 체계가 되었던 것이. 그래서 '브루크너 문제'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 알렉산더 스크리아빈(Alexander Scriabin: 1872-1915)은 나르시스트였다. 자아도취장애(Narcissist Personality Disroder)이다. 현대음악의 창시자 중의 한사람인 스크리아빈은 이 세상이 종말을 마지할 때에 세상적인 방탕과 난잡함이 올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비교적(秘敎的)인 인물로 간주하였고 이에 따라 기괴한 교리를 마련하였다. 그가 정신적인 문제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10세 때에 사관학교에 들어가고서부터였다. 그후 음악원에 들어갔지만 성격문제로 졸업하지도 못했다. 그후에 그는 정신적인 무아경에 중독되었다. 그래서 자주 의식이 혼미해 질 때가 많았다. 게다가 그는 술을 많이 마셨다. 음주는 그의 정신적 불안정을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그는 술이 심하게 취하면 큰소리로 그의 능력과 권세가 하나님보다 위대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1903년에 러시아를 떠나서 파리로 가서 지내게 되었다. 그는 파리에 있을 때에 테오소피(Theosophy)에 빠져 들었다. 영적인 희열을 통해서 하나님에게 도달할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스크리아빈에게 있어서 음악이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수 있도록 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다. 그는 심지어 신비의 화음(Mystic Chord)과 같은 남들은 이해할수 없는 것들을 창안했다. 그는 연쇄상구균과 포도상구균에 의한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알렉산더 스크리아빈. 나르시스적인 자아도취병이라는 진단이었지만 완전히 주술적인 생각을 가졌다.


○ 엑토르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1803-1869)는 조병우울증(Manic-Depressive Illness)에 걸려 있었다. 베를리오즈는 이른바 환각적인, 즉 사이키델릭 음악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다. 그에 의하면 우울증환자, 즉 멜랑콜리아(Melancholia)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계속적인 고통을 받아서 격앙된 상태의 환자이며 다른 하나는 권태감과 소외감을 가지고 있으며 또한 무기력하고 감정이 결핍된 환자라는 것이다. 베를리오즈가 어떤 부류의 조병우울증이었는지는 모른다. 아마 둘 다 포함한 것 같다. 베를리오즈의 실제적인 성격은 그렇지 않은데 작품에서만 그런 취향을 보였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소리를 지르며 바닥에 뒹구는 그런 성격이라고 평한 사람도 있었다. 그 때문에 그의 음악이 그랜드하였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환상 속에서 자기 자신의 파멸을 생각하는 면도 있었다고 한다.


베를리오즈는 조병우울증으로 환각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 무조음악과 12음기법의 마스터이며 아마추어 화가인 아놀드 쇤버그(Arnold Schoenberg: 1866-1925)는 남들이 보면 정말 이상할 정도로 숫자13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 13에 대한 공포증을 영어로는 트라이스카이데카포비아(Triskaidekaphobia)라고 부른다. 어쨌든 쇤비그는 13에 대한 공포증이 있어서 그의 오페라의 제목인 Moses und Aaron을 Moses und Aron으로 고쳤다. 처음의 제목은 알파벳 숫자가 13이어서 Aaron에서 a를 하나 빼서 Aron으로 만들어서 도합 12개 철자가 되도록 했다. 그는 13이라는 숫자만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13의 배수도 두려워했다. 예를 들어서 그는 13의 배수가 되는 해에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쇤버그는 13의 배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1951년에 세상을 떠났다. 하지만 날짜는 7월 13일 금요일이었다. 쇤버그의 마지막 작품인 연가곡 '공중정원의 책'(Das Buch der hangenden Garten)은 작품번호 13으로 되어야 겠지만 나중에 쇤버그가 12a로 바꾸었다. 하지만 근자에는 새롭게 Op 15가 되었다. 쇤버그는 76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76도 따지고 보면 7+6=13 이라는 계산이다.


아르놀트 쇤버그(쇤베르크)는 13이라는 숫자를 극도로 기피하였다.


○ 짐노페디의 작곡가인 에릭 사티(Eric Satie: 1866-1925)는 음식에 대한 집념이 강했다. 집념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었다. 그는 자기만의 특별 식단으로 연명했다. 그가 쓴 비망록에는 그가 먹을수 있는 식품이 어떤 것인지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에 의하면 그는 흰색의 식품을 고집하였다. 예를 들면 계란의 흰자위와 설탕이었다. 또한 잘게 부순 하얀 뼈, 죽은 동물의 지방, 송아지 고기, 소금, 코코넛, 맹물로 요리한 닭고기, 곰팡이가 슨 과일, 쌀, 순무, 장뇌를 섞은 소세지, 파스트리, 하얀 색의 치즈, 목화씨 기름으로 만든 살라드, 그리고 생선은 몇몇 종류에 한정했다. 그리고 특이하게도 파리의 거리에 나갈 때에는 반드시 망치를 들고 나갔다. 왜 그랬는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긴다.


에릭 사티의 식성은 놀랍도록 이상했다.


○ 영국의 싱어송 라이터이며 핑크 플로이드 밴드의 창설 멤버인 시드 바레트(Syd Barrett: 1946-2006)는 정신분열증(Schizophrenia)으로 고통을 받았다. 그가 그런 증세를 처음 보였던 것은 10대 후반부터였다. 그후로부터 이상한 생각, 이상한 행동, 그리고 긴장증세(Catatonia)가 겹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 그는 거리에서 마약을 사서 복용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정신이상 환자들에게서 흔히 볼수 있는 당뇨증세도 보였다. 항정신이상 증세의 약을 복용하였더니 그저 눕거나 앉아만 있는 증세를 보여서 결국은 당뇨를 악화시키기만 했다. 사람들은 그를 정신이상으로 몰고가기를 주저했다. 대신에 신경쇠약(Nervous breakdown)이라는 표현을 썼다.


시드 바레트는 클래식 음악가는 아니지만 정신이상 증세로 고통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