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작곡가들의 이런저런 에피소드
위대한 작곡가들에 대한 생전에 수많은 에피소드들 중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몇가지 흥미로운 사항들만 간단히 소개코자 한다. 작곡가들은 이름의 알파벳 순서로 소개한다.
○ 고전음악의 아버지라고 하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그를 고용한 봐이마르 공작의 미움을 받아 한때 감옥에 갇힌 일이 있다. 바흐가 주인인 봐이마르 공작의 허락을 받지 않고 다른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위대한 작곡가 중에서 감옥에까지 갇혔던 사람은 바흐가 유일할 것이다. 바흐는 수많은 작품을 남긴 것으로 되어 있지만 악보의 상당수가 분실되어서 과연 어떤 음악이었는지는 알수 없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악보들이 발견되어서 깊은 감동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무반주 첼로 모음곡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바흐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첼로모음곡(BWV 1807-1012)은 바흐가 세상을 떠난지 100년도 훨씬 더 지나서야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스페인의 비루투오소 첼리스트인 파우 카잘스(Pau Casals: 파블로 카잘스로 더 알려짐: 1876-1973)가 13세 때에 바르셀로나의 어떤 고물상점에서 참으로 우연히 그뤼츠마허 에디션을 발견하여 혼자서 열심히 연습을 하여 1890년 그가 14세 때에 처음으로 직접 연주해서 그로부터 어떤 작품인지 알려지게 되었다. 바흐는 작곡가들 중에서 자녀를 가장 많이 둔 사람일 것이다. 바흐는 첫번째 부인에게서 12명의 자녀를, 두번째 부인에게서 역시 10명의 자녀를 두어서 도합 22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22명 중에서 10명만 성장하였다. 바흐는 23세 때에 첫 자녀를 두었고 마지막 자녀는 그가 57세 때였다.
바흐 가족의 가정음악회 장면 일부
○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은 성미가 독특하기로 유명했다. 베토벤은 자기의 피아노 작품을 직접 연주한 일이 많았는데 만일 청중석에서 잡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리면 당장 연주를 중단하고 밖으로 나갔다. 베토벤은 아홉 개의 교향곡을 완성했는데 교향곡 1번과 2번은 고전적인 분위기이지만 교향곡 3번은 과거의 음악과는 완전히 다른 음악이어서 초연에서 청중들을 충격에 빠트렸다. 베토벤은 왕정을 싫어하고 공화제를 지지하였다. 베토벤은 나폴레옹이 프랑스의 왕정을 종식시키고 공화제를 출범시긴 것을 높이 치하하여서 교향곡 3번을 나폴레옹에게 헌정코자 했다. 그러나 얼마후 나폴레옹이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고 대관식을 갖자 실망하여서 교향곡 3번의 첫 장을 뜯어버리고 그 다음 페이지에 다만 '어느 위대한 영웅에게 바친다'라고만 썼다. 그로부터 교향곡 3번은 '영웅'(에로이카)라는 별명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베토벤의 피아노 연주를 신중하게 듣고 있는 사람들. 친구이며 작가인 안톤 쉰들러(Anton Schindler), 악보출판가인 지그문트 안톤 슈타이너(Sigmund Anton Steiner),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아베 슈타들러(Abbe Stadler), 친구이며 외교관이고 도서관 전문가인 고트프리트 반 스비텐(Gottfried van Swieten)
○ 플라토닉 러브로 유명한 요한네스 브람스(Johannes Brahms: 1833-1897)는 베토벤의 교향곡들을 말할수 없이 위대하다고 생각했다. 브람스는 자기는 도저히 베토벤과 같은 교향곡을 감히 작곡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기 고유의 교향곡을 쓰는데 무려 20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브람스는 슈만을 스승으로 삼고서 피아노와 작곡에 대한 레슨을 받았다. 브람스는 슈만이 세상을 떠나자 미망인인 클라라와 슈만의 아이들을 볼보았다. 슈만은 클라라와 결혼하여서 여덟 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그중에서 네명이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났고 네명만 성장하였는데 브람스는 이 네명의 자녀들까지도 성실하게 돌보아주었다. 사람들은 브람스가 클라라를 그저 스승의 부인으로서 존경한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서 마음으로 깊이 사랑하였다고 하며 그렇다고 사랑의 성취를 위해서 어떤 행동이 있었던 것은 아니며 오직 정신적인 사랑이었다고 말했다. 그같은 사랑은 플라톤이 주장한 정신적인 사랑이어서 플라토닉 러브라고 불렀다.
큐피드(에로스)와 사이케. 브람스와 클라라의 관계를 큐피드와 사이케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었다.
○ 헨리 퍼셀 이후 영국이 자랑하는오페라 작곡가인 벤자민 브리튼(Benjamin Britten: 1913-1976)은 2차 대전이 시작될 때에 미국 여행을 떠난 일이 있다. 그리고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에 영국으로 돌아왔다. 모든 국민들이 전쟁을 위해 헌신하고 있었지만 브리튼은 이른바 양심적 병역기피자(Conscientious objector)였다. 전쟁에서 싸우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런 그는 '전쟁 진혼곡'(War Requiem)을 작곡했다. 2차 대전 중에 나치의 폭격으로 파괴된 코벤트리 성당의 신축 봉헌을 기리기 위한 작품이었다. 성당 봉헌을 위해 진혼곡을 작곡했다는 것은 의외의 일이었다.
런던의 코벤트리 성당. 2차 대전 중에 파손되었으나 복구하였다. 양심적 병역기피자인 브리튼은 이 새로운 성당의 봉헌을 위해 '전쟁 진혼곡'을 작곡했다.
○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릭 쇼팽(Frederick Chopin: 1810-1849)은 러시아가 폴란드를 공격할 기미가 있자 폴란드에서는 음악활동을 할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20세의 청년시절에 파리로 떠났다. 그런 그는 15세 때에 제정러시아의 짜르를 위해 피아노 연주를 한 일이 있다. 짜르는 쇼팽의 재능을 높이 치하하고 기념으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었다. 작곡가로서 쇼팽은 거의 모두 피아노를 위한 작품들을 썼다. 쇼팽의 피아노 작품들은 당시로서는 전혀 새로운 스타일이었다. 무엇보다도 고난도의 테크닉을 필요로 하는 작품들이었다. 쇼팽 자신도 그렇게 작곡해 놓고 어떻게 연주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것인지를 잘 알지 못했다. 쇼팽은 자기의 작품들을 어떻게 연주해야 하는지 자기 스스로 터득하고 배우기 위해 연습곡들을 여러 곡이나 만들었다. 그것이 쇼팽의 연습곡(에뛰드)이다.
쇼팽의 피아노 연주. 유럽의 살롱에서 대단한 인기였다.
○ 20세기 프랑스 인상주의 작곡가인 클로드 아쉴 드비시(Claude-Achille Debussy: 1862-1918)는 클래시컬 음악의 현대시기를 연 작곡가이다. '목신의 오후 전주곡'(L'aprés-midi d'un faune)은 현대시기를 연 대표적인 작품이다. 그의 오페라 '플레아와 멜리상드'(Pelléas et Mélisande)는 그때까지 볼수 없었던 특이한 작품이었다. 과거에도 그런 독특한 오페라가 없었고 이후로도 없었다. 사람들은 이 오페라를 인상주의 오페라라고 불렀다. 그런 드비시인데 스캔들로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그는 아내가 있는 입장에서 어떤 소프라노와 스캔들을 만들었다. 드비시의 그런 처사에 대하여 사람들이 비난하고 신문들도 비난하자 드비시는 비난을 피해서 영국 남단의 이스트본 해변마을로 피신을 갔다. 드비시는 이곳에서 저 유명한 교향시 '라 메르'(바다)를 완성했다. 그러나 '라 메르'의 파리 초연은 드비시의 불성실한 생활에 분노한 청중들 때문에 환영을 받지 못했다.
드비시의 '목신의 오후' 발레
○ 현대음악의 기수인 필립 글라스(Philip Glass: 1937-)는 처음 작품을 내놓았을 때 사람들로부터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다. 글라스는 작곡을 해도 연주를 주선하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이 없었다. 글라스는 작곡으로 먹고 살기기 어려워서 배관공 일도 했고 택시 기사도 해서 생활비를 겨우 충당했다. 그런데 지금은? 글라스의 음악을 들은 사람들은 다른 클래식 음악을 듣지 않는다.
1970년대 필립 글라스와 그의 앙상블
○ 오라토리오의 아버지라고 하는 조지 프리데릭 헨델(George Friderck Handel: 1685-1759)은 조지 2세의 대관식을 위해 '대관식 찬가'를 작곡했는데 그 중에서 첫번째 곡이 유명한 '제사장 사독'(Zadok the Priest)이다. 이후 영국 국왕들의 대관식, 그리고 황실의 결혼식에서는 이 곡을 연주하는 것이 관례로 되었다. 사독은 구약시대의 제사장으로서 다윗을 도와 솔로몬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는데 크게 역할을 한 인물이다. 오라토리오 '메시아'에서 할렐루야 합창이 나오면 모두 일어서는데 그같은 관례는 조지 2세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한다. 할렐루야 합창에 너무 감동한 조지 2세는 도저히 앉아서 듣기가 미안해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당시에 궁중의전에 따르면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서면 앉아 있던 다른 모든 신하들도 일어서야 했다. 그래서 연주회장에 만장한 사람들이 모두 일어섰다는 것이다. 헨델과 바흐는 같은 해에 독일에서 태어났다.
1685년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의 제임스 2세 대관식. 헨델은 이 대관식을 위해 '제사장 사독'을 작곡했다.
○ 교향곡의 아버지 또는 현악4중주의 아버지라고 하는 요제프 하이든(Joseph Haydn: 1732-1809)은 오페라도 여러 편 작곡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모든 작품 중에서 오페라가 가장 훌륭하다고 믿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그렇게 믿는 사람은 미안하게도 하나도 없다. 하이든은 조크를 좋아했다. 그래서 작품에도 간혹 조크를 사용하였다. 대표적인 조크 작품은 교향곡 94번 G 장조인 '놀람'이다. 2악장에서 조용할 음악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팀파니가 큰 소리를 내기 때문에 청중들이 깜짝 놀랐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이 조크였는지는 몰라도 오늘날 '놀람' 교향곡 2악장을 듣고 놀라는 사람들은 없다. '놀람' 교향곡의 원래 독일어 제목은 Mit dem Paukenschlag이다. '팀파니 소리와 함께'라는 뜻이다. 그것을 영어로 Surprise 라고 제목을 붙였다. 하이든은 자기가 미남의 축에는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예쁜 여인들이 자기를 좋아하고 있어서 도무지 이해할수 없다고 말했다. 하이든의 유해는 여러번 이장되었다. 가장 최근의 이장은 1954년에 비엔나 남쪽 아이젠슈타트의 갈보리교회로 이장한 것이다.
아이젠슈타트의 에스터하지 궁전에 있는 하이든 홀. 하이든의 많은 작품들이 이 장소에서 초연되었다. 그러나 교향곡 94번인 '놀람 교향곡'은 1792년 3월 런던의 하노버 스퀘어 룸에서 초연되었다.
○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프란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 바람에 피아노의 줄이 끊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당시에는 피아노 줄들이 오늘날 처럼 견고하지 않았기 때문에 끊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아무튼 청중들은 리스트가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줄을 끊지 않으면 실망을 했다. 리스트는 교향시를 처음으로 시도한 작곡가였다. 교향시는 오케스트라가 스토리를 이야기하는 음악이다. 리스트는 여행을 좋아했다. 어느 때에는 작심하고 유럽의 여러 곳을 마치 순례자처럼 여행하였다. 리스트는 여행을 통한 소감과 인상을 스토리로 엮어서 음악으로 표현했다. 모음곡인 Annés de Pélerinage(순례의 해)라는 것이다.
오스트리아제국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 엘리자베트(씨씨) 황비, 루돌프 황태자 등의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리스트
○ 위대한 작곡가이며 지휘자인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교향곡들은 대체로 대규모 구성으로 되어 있는 작품들이다. 예를 들어 교향곡 8번은 '천의 교향곡'이라고 불릴 정도로 많은 연주자들이 등장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실제로 1천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말러는 유태인이었다. 그래서 여러가지로 불이익을 받았다. 그는 또한 항상 고향이 없다고 느꼈다. 어느때 그는 '나는 세번이나 집 없는, 고향이 없는, 조국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보헤미안으로 살아야 했다. 독일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스트리아인으로 살아야 했다. 이 세상에서는 유태인으로 살아야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슬픔의 작곡가였다. 어릴 때엔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여러 명이나 세상을 떠나서 슬픔을 참고 지내야 했다. 결혼해서는 두 딸을 두었는데 큰 딸이 병에 걸려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말러는 엔나의 그린칭 공동묘지에 있는 큰 딸의 무덤 옆에 묻혔다.
말러의 지휘 모습을 코믹하게 그린 그림
○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은 영국을 좋아해서 영국을 몇번이나 방문했었다. 영국인들도 멘델스존을 좋아했다. 특히 빅토리아 여왕이 그를 좋아했다. 그래서 빅토리아 여왕은 큰 딸 빅토리아의 결혼식 음악으로서 멘델스존의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에서 결혼행진곡을 사용토록 했다. 멘델스존은 지휘할 때 지휘봉(바톤)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이 아이디어는 독일 보다는 영국으로 전파되어서 영국에서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에 바톤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큰딸 빅토리아 공주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빌헬름 황태자의 결혼식 장면. 신부입장할 때에는 바그너의 로엔그린에서 축혼가, 신랑신부가 퇴장할 때에는 멘델스존의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에서 결혼행진곡이 연주되었다.
○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 1908-1992)의 음악은 대부분 기쁨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된 기쁨이 충만했기 때문이다. 메시앙은 새소리에 매우 매혹되었다. 그래서 새소리를 작품에 자주 인용하였다. 메시앙은 전쟁 중에 독일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석방되었다. 그후 로레인 지방에 머물면서 밤낮으로 새들을 관찰하며 새들의 소리를 음표로 표현코자 노력했다. 메시앙은 7백 종류나 되는 새들의 소리를 구별할수 있었다. 메시앙은 새들을 하나님의 메신저라고 믿었다.
프랑스의 로레인 지방에서 새소리를 연구하는 올리비에 메시앙
○ 음악의 신동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957-1791)와 관련해서는 에피소드가 수없이 많이 있지만 모두 소개할수는 없고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가 보면, 그는 다섯 살때 처음으로 작곡했고 여섯 살 때부터는 유럽의 여러 국왕, 왕비, 왕자, 공주들의 앞에서 연주했다. 대단한 신동이 아닐수 없었다.
어린 모차르트가 아버지 레오폴드의 주선으로 쇤브룬 궁전에서 연주를 하고나서 인사하고 있다. 아마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앞에서인듯 싶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옆에는 남편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프란츠 1세이다.
○ 요한 파헬벨(Johann Pachelbel: 1653-1706)은 생전에 작품과 연주로 대단히 유명했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거의 모두 분실되었고 오늘날 한 작품만 사랑을 받고 있다. 캐논 D 장조이다. 이밖에도 샤콘스 F 단조,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 E 단조, 키보드 변주곡 모음집인 헥사코르둠 아폴리니스(Hexchordum Apollonis)등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파헬벨은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포도주 상인이었다.
요한 크리스토프 파헬벨
○ 드미트리 프로코피에프(Dmitri Prokofiev: 1891-1953)는 글을 읽기도 전에 작곡부터 했던 그야말로 신동이었다. 그는 아홉살 때에 첫 오페라를 만들었다. 그러다가 1948년부터는 소련 정부와 불편한 관계에 있게 되었다. 당국은 프로코피에프가 쇼스타코비치와 마찬가지로 인민들에게 너무 어려운 작품을 만든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인민의 적'으로 선포했다. 따라서 그의 음악은 상당기간 동안 금지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인민의 적'은 프로코피에프가 아니라 소련 정부당국이라고 목소리를 낮추어서 말했다. 프로코피에프는 요제프 스탈린의 박해를 받았다. 그런데 두 사람은 똑 같이 1953년 3월 5일에 세상을 떠났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탈린의 죽음은 온 세계에 중요한 뉴스가 되었지만 프로코피에프의 죽음은 당시에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소련당국이 1991년에 가서야 발행한 프로코피에프 기념우표. 프로코피에프는 차이코브스키 이후 가장 뛰어난 소련의 작곡가로 추앙받고 있다.
○ 이탈리아 베리스모 오페라의 거장인 자코모 푸치니(Giacomo Puccini: 1858-1924)의 오페라가 나오자 사람들은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오페라라고 생각했던 것이라면서 환영했다. 음악에 감정이 충분히 들어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아주 큰 소리로 아주 오래 노래하기 때문에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여주인공들은 대체로 마지막에 비통하게 숨을 거둔다. 결국 사람들은 코미디보다는 비극을 더 선호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라 보엠의 피날레. 미미가 죽어가는 모습을 로돌포가 지켜보고 있다. 미미는 죽어가면서도 훌륭한 아리아를 부른다.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났는지 모르겠다. 캐나디언 오페라.
○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Sergei Rachmaninoff: 1873-1943)는 당대에서 가장 뛰어난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였다. 연주자이면서 작곡가인 그는 주로 피아노 음악을 작곡했는데 연주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곡들이어서 유명했다. 그는 교향곡도 작곡했다. 그런데 첫번째 교향곡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은 것을 알고 그후 3년 동안 교향곡을 작곡하지 않았다. 그는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러시아를 떠나 서방으로 갔다. 그는 당국의 눈을 피해서 썰매를 타고 핀랜드로 넘어 갔다. 짐도 없이 그저 몸만 빠져 나왔다. 라흐마니노프의 미사곡인 Liturgy of St John Chrysostom은 러시아정교회를 위해 작곡한 것이다. 일반적인 서유럽의 미사곡과는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느낄수 있다.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으로 러시아에는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정부가 들어섰다. 레닌이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 현대음악의 기수인 아놀드 쇤버그(Arnold Schoenberg: 1874-1951)의 현악4중주곡 2번은 현대적 고전음악의 첫 작품이다. 과거의 작품들과는 너무 달라서 청중들을 충격에 빠트린 작품이다. 쇤버그라고 하면 이상한 조성으로 구성된 작품을 만들었기 때문에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실은 말러처럼 아름다운 음악을 작곡했다. 예를 들면 Verklärte Nacht와 Gurrelieder 이다. 쇤버그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연주가 거의 불가능한 작품으로 유명했다. 쇤버그는 그런 사실을 매우 기뻐했다.
쇤버그의 '변화된 밤'(Verklarte Nacht) 음반 표지. 쇤버그 앙상블 연주. 에곤 쉴레(1890-1918)의 그림을 표지에 사용했다. 그림의 제목은 '포옹'(연인들 II: Die Umarmung(Liebespaar II)이다.
○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는 31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1천 곡 이상의 그야말로 주옥과 같은 작품들을 작곡했다. 그는 가곡 이외에도 교향곡도 여러 편을 작곡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아무래도 미완성교향곡이다. 그런데 미완성교향곡은 슈베르트의 사후에 악보가 발견되었다. 슈베르트는 친구들에게조차 새로운 교향곡을 작곡하고 있다는 얘기를 하지 않아서 아무도 미완성교향곡이 있는 줄을 몰랐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을 무척이나 존경했다. 존경했다기 보다는 경외했다. 슈베르트는 그토록 경외하는 베토벤을 처음으로 만날 기회가 있었다. 슈베르트는 어쩔 줄을 모르고 당황하다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도망가듯 나갔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장례식에서 운구행렬을 인도하는 횃불드는 역할을 자진해서 맡아 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죽을 것이라는 예감을 가졌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가 죽으면 제발 베토벤의 발치라도 좋으니 그곳에 묻어 달라고 당부했다. 슈베르트는 베토벤이 세상을 떠난 다음 해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유언대로 배링공동묘지의 베토벤 옆에 묻혔다. 1888년에 베토벤의 유해를 짐머링의 중앙공동묘지로 이장할 때에 슈베르트의 유해도 이장하게 되었다. 두 사람은 중앙공동묘지에서도 옆에 자리하게 되었다.
비엔나 남쪽 짐머링에 있는 중앙공동묘지에는 베토벤의 묘지 옆에 슈베르트의 묘지가 있다. 가운데는 모차르트의 가묘
○ 클로라 슈만(Clara Schumann: 1819-1896)은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클라라는 처음으로 악보를 암기하여 연주한 피아니스트였다. 클라라는 슈만과의 사이에서 여덟 자녀를 두었다. 그중에서 네명은 클라라보다 일찍 세상을 떠났다. 클라라는 작곡가로서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여자는 작곡하면 안된다는 생각때문에 작곡을 하지 않았다가 36세 이후부터 작곡을 하기 시작했다.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1년전이었다. 클라라는 브람스로부터 한없는 사랑을 받았지만 그것이 전부였다.
○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은 클라라와 결혼하기 위해 소송까지 냈었다. 당시에는 남편이 가족을 충분히 부양할수 있다는 증거가 있어야 결혼승락을 받을수 있었는데 슈만은 특별한 벌이가 없어서 클라라와 나중에 태어날 아이들을 부양하기가 어려우므로 결혼을 승락받지 못하고 있었다. 소송은 2년이나 끌었다. 아무튼 슈만은 소송에서 이겨서 클라라와 결혼 할수 있었다. 슈만은 피아노를 더 잘 연주하기 위해 어떤 손가락인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손가락을 묶고 피아노 연습을 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손가락에 상처를 입어서 그후 부터는 피아노를 제대로 연주하지 못했다.
○ 세르게이 쇼스타코비치(Sergei Shostakovich: 1906-1975)는 오페라 '므첸스크구의 레이디 막베스'(Lady Macbeth of the Mtsensk District) 때문에 소련 정부당국과 곤란한 관계에 있게 되었다. 오페라가 조잡하고 유치하며 야비하다는 이유였다. 소련 정부는 쇼스타코비치를 '인민의 적'으로 간주하였고 '레이디 막베스'는 30년간 공연금지 상태였다. 소련정부가 쇼스타코비치를 인민의 적으로 간주하자 그의 작품을 연주하려는 사람들도 없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 쇼스타코비치는 교향곡 4번을 발표할 생각이어서 리허설까지 진행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교향곡 4번을 연주했다가는 자기와 단원들에게 더 큰 어려움이 닥칠 것으로 판단해서 리허설을 중단했다.
스탈린의 소련 당국으로부터 조잡하고 유치하며 야비하다는 얘기를 들은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 '므첸스크구의 레이디 막베스'의 한 장면.
○ 이고르 스트라빈스키(Igor Stravinsky: 1882-1971)의 '봄의 제전'(Le Sacre du Printemps)이 처음 공연되었을 때 음악이 지나치게 와일드해서 연주회장에서 일대 혼란이 일어났다. 급기야 관중들은 편을 갈라서 난투극을 벌이게 되었고 경찰이 출동해서야 겨우 진정시킬수 있었다.
○ 표트르 일리이치 차이코브스키(Pyotr Iliych Tchaikovsky: 1840-1893)의 '1812년 서곡'은 오늘날에도 콘서트의 스탠다드 레퍼토리가 되어 있는 유명한 작품이다. 그런데 차이코브스키는 실제로 이 곡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차이코브스키의 음악은 강력한 감정으로 넘쳐 있어서 누구가 쉽게 이해할수 있는 것이다. 감정이 가장 강력하게 담겨 있는 작품은 그의 마지작 작품인 교향곡 6번 일면 '비창'(파테티크)이다. 차이코브스키가 세상을 떠나기 9일전에 초연되었다.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아직도 미스테리가 남아 있다. 혹자는 사인이 콜레라라고 주장했지만 어떤 사람들은 자살했다고 주장했다.
○ 오페라의 황제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 1813-1901)는 셰익스피어를 대단히 존경해서 그의 작품 중에서 세편이나 오페라로 만들었다. '맥베스' '오텔로' '활슈타프'이다. 베르디는 '리어 왕'도 오페라로 만들 생각을 했으나 리어왕과 같은 특별한 성격의 인물을 음악으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포기하였다. 베르디는 19세기를 장식한 가장 위대한 두 사람의 오페라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다. 다른 한 사람은 리하르트 바그너이다. 두 사람은 같은 해에 태어났지만 음악은 스타일이 판이하였다.
베르디는 셰익스피어를 존경하여서 그의 희곡을 바탕으로 세 편의 오페라를 만들었다. '활슈타프'는 베르디가 생애에서 마지막으로 작곡한 오페라이다. 로시니는 베르디의 '활슈타프'에 대해서 '베르디는 코믹한 내용을 너무 심각하게 작곡한다'고 말한 일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르디의 '활슈타프'는 코믹 오페라이다.
○ 뛰어난 바이올니스트였던 안토니오 비발디(Antonio Vivaldi: 1678-1741)는 25세 때에 가톨릭 신부의 서품을 받았다. 그러면서 연주자로서, 작곡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했다. 그래서 돈도 상당히 많이 벌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생활이 곤궁해져서 가지고 있던 악보들을 모두 팔아서 여비를 마련하여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서 비엔나로 갔다. 비엔나로 가기로 작정한 것은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샤를르 6세가 비발디에게 비엔나에 와서 궁정작곡가가 되면 좋겠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여서였다. 그런데 샤를르 6세는 비발디가 비엔나에 도착한지 얼마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뒤를 이어 마리아 테레지아가 실질적인 군주가 되었으나 비발디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했다. 비발디는 후원해 주는 사람이 없이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난 다음 해인 1741년에 비엔나에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비발디가 매장되었다고 하는 곳에는 현재 비엔나공대학교의 건물이 들어섰고 건물의 외벽에 비발디가 1741년 7월 28일에 이곳에 묻혔다는 내용의 기념 명판이 붙어 있다. 이 명판은 비엔나은행연합회가 비발디의 탄생 3백 주년을 기념하여서 제작하여 설치했다.
○ 뮤직 드라마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는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정말로 획기적인 업적을 남긴 사람이다. 그래서인지 바그너에 대한 평가서, 연구보고서, 자서전 등등이 무척 많이 나와 있다. 그래서 혹자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가장 많은 글이 쓰여진 사람이라고까지 말했다. 이와 함께 바그너는 가장 논란이 많았던 작곡가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그너를 마치 신처럼 숭배하였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그를 증오하고 비난하기에 바뻤다. 바그너의 오페라 중에서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공연시간이 무려 다섯 시간이나 되는 것이다. 당시로서는 일대 변혁이었다. 그렇게 긴 오페라를 참고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명가수'는 바그너의 다른 오페라들과는 다른다. 비극이 아니라 코미디이기 때문이다. 바그너는 자기 오페라의 대본을 거의 모두 자기가 직접 작성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음악을 무척이나 숭배하고 좋아했다. 나치의 대규모 회가 있을 때에는 바그너의 음악을 연주토록 해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그래서 바그너의 음악을 나치음악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나치음악이므로 거부를 당하고 있기도 하다. 이스라엘에서는 아직도 바그너의 음악을 거부하고 있다. 나치 때문에 고통을 당한 유태인들의 많아서이다.
1937년,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합병하기 1년 전에 바이로이트에 있는 반프리트 빌라(Wahnfried Villa)를 방문한 히틀라가 바그너의 며느리인 비니프레트 바그너(Winifred Wagner)와 즐거운 얘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 바그너를 존경한 히틀러는 비니프레트에게 꽃다발까지 주었다. 두 청년은 바그너의 손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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