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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곡가들을 괴롭힌 별난 질병

정준극 2017. 7. 6. 21:23

위대한 작곡가들을 괴롭힌 별난 질병

작곡가들이 요단강을 건너가도록 만든 만성질환 진단


바흐,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슈만, 말러...우리가 한결같이 존경하는 위대한 작곡가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무척이나 존경한 나머지 이들의 초상화나 흉상만 보고 있더라도 그런 위대한 인물들과 가깝게 있다는 생각으로 자랑스런 마음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좋은 모습만을 마음에 간직한다. 모차르트의 초상화를 보라. 얼마나 핸섬한 청년이던가. 사랑과 존경의 마음이 저절로 생긴다. 베토벤의 초상화를 보라. 역경을 극복한 불굴의 의지를 엿볼수 있는 눈빛에 감동하지 않을수 없다. 슈베르트의 초상화를 보라. 안경 너머로 보이는 총명한 모습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그런데 이들의 생애를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성인처럼 고고하고 예지적인 생애를 보내기만 한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존경해마지 않는 많은 작곡가들이 살아가면서 개인적으로 여러 실수와 실패를 경험한것 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말년에는 정상적이 아닌 특별한 질환으로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무어라 할까 환상이 깨지는 듯한 느낌을 가질수도 있다. 다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남들이 생각치도 못하는 여러 역경과 고난을 겪으면서도 이분들은 역사에 길이 남는 위대한 음악들을 남겼다는 것이다. 아무튼 우리가 존경하는 작곡가들이 그들의 생애에서 어떤 역경을 겪었고 어떤 질병으로 고생했는지를 알게 되면 인간적으로 그들을 더욱 가깝게 느낄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작곡가들이 어떤 특별한 만성질환으로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는지  대충만이라도 알아보자.


○ 저산소증에 의한 뇌손상(Brain injury). '볼레로'로 유명한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 1875-1937)은 일명 '니만-피크병'(Nieman-Pick's Disease)이라는 뇌손상 질환으로 고통을 겪었다. 라벨은 1927년, 그가 52세 때부터 어쩐 일인지 피아노를 연주하거나 말을 할 때 어려움을 겪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5년 후인 1932년에 파리에서 택시 사고를 당해서 뇌가 현저하게 손상을 입었다. 그로부터 음악활동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건강상태는 날로 악화되어 가기만 했다. 기억력이 나빠지고 정신착란을 일으키는가 하면 불면증에 시달렸다. 게다가 걷기조차 힘들어서 산책도 하기 힘들어졌고 심지어는 글씨를 쓰지도 못하게 되었다. 의사들은 라벨의 뇌에 수종이 생겼다고 진단했다. 마침내 수술을 하게 되었다. 택시사고 때문인지 뇌의 일부가 수축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하지만 뇌가 손상되었거나 질병에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는 찾지 못했다. 훗날 라벨의 사인은 저산소증에 의한 뇌손상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라벨의 모습을 보면 반듯하게 호감을 주는 얼굴이다. 점잖은 신사의 풍모가 보인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서 그런 고통을 겪으면서 지내야 했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모리스 라벨


○ 뇌종양(Brain tumor). 오페라 '포기와 베스'로 유명한 조지 거슈윈(George Gershwin: 1898-1937)은 청년시절에 이르기까지 건강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건장한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30대 중반부터 자꾸만 주변에서 악취가 풍긴다면서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상상속의 후각장애이지만 그것도 하나의 병이었다. 학명으로는 olfactory hallucinations(후각 환각증)라고 부르는 질병이었다. 그러다가 1937년부터는 계속 고무타는 냄새가 난다고 했고 이와 함께 두통과 현기증이 나고 심지어는 졸도까지 하였다. 결국 뇌수술을 하게 되었다. 진단은 뇌종양이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거슈윈은 수술의 후유증으로 살아나지 못했다. 거슈윈은 그해 7월에, 38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최종 사인은 Glioblastoma multiforme 였다.


조지 거슈윈.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 우울증(Depression). 베토벤, 슈만, 차이코브스키, 라흐마니노프 등은 위대한 작곡가 중에서 우울증으로 고통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밖에도 후기 르네상스시기의 네덜란드 작곡가인 올란드 드 라서스(Orlande de Lassus), 살인작곡가로 악명 높은 이탈리아의 카롤로 제수알도(Carlo Gesualdo), 영국의 르네상스 작곡가인 존 다운랜드(John Downland), 프랑스의 엑토를 베를리오즈(Hector Berlioz), 러시아의 미하일 글링카(Mikhail Glinka), 오스트리아의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러시아의 낭만주의 작곡가인 안톤 아렌스키(Anton Arensky), 오스트리아의 휴고 볼프(Hugo Wolf), 미국의 챨스 아이브스(Charles Ives) 등도 우울증으로 힘든 말년을 보낸 작곡가들이다. 이들 중 어떤 사람은 우울증이 심해져서 발작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다. 슈만, 차이코브스키, 볼프는 자살을 기도했지만 실패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제레미아 클라크(Jeremiah Clarke)와 역시 영국의 피터 월로크(Peter Warlock)는 마침내 자살을 선택하였다. 클라크는 권총 자살을, 월로크는 가스흡입으로 자살하였다. 클라크는 어떤 귀부인을 사랑했는데 이룰수 없는 사랑을 비관하여서 우울증에 걸렸고 결국 권총 자살을 선택하였다. 우울증도 치명적인 질환이라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91-1953). 그렇게 감동적인 피아노협주곡을 작곡한 사람인데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었다.


○ 청각장애(Deafness). 루드비히 반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이 청각을 잃어서 고통을 당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얘기이다. 작곡가로서 또는 연주자로서 청각을 잃는다는 것은 정말로 불행한 일이다. 베토벤 이외에도 청각장애로 고통을 받은 작곡가들이 더러 있다. 예를 들면 영국의 윌렴 보이스(William Boyce), 체코의 베드리치 스메타나(Bedrich Semtana), 프랑스의 가브리엘 포레(Gabriel Faure), 오스트리아의 이그나즈 홀츠바우어(Ignaz Holzbauer) 등이다. 그러나 아무래도 청각장애로 고통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은 베토벤일 것이다. 베토벤이 무슨 이유 때문에 청각을 상실했는지 그 원인은 아직도 분명치 않다. 다만 사후에 해부를 했더니 내이(內耳)가 기형이었으며 그 때문에 오랜 기간동안 기능장애가 있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베토벤이 청각에 이상이 생긴 것을 알게 된 것은 1796년, 그러니까 그가 26세의 청년일 때였다. 그후 청각문제는 점점 심각해져서 베토벤은 듣기 위해 여러 도구를 사용해야 했다. 예를 들면 나팔 모양의 보청기, 대화 내용을 적는 대화책 등이었다. 베토벤은 비록 청각장애가 있었지만 작곡은 계속했다. 하지만 1811년 부터는 피아노 연주를 포기해야 했다. 그리고 1824년에는 완전히 청각을 잃었다. 그래서 교향곡 9번의 초연이 끝나고 사람들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냈지만 듣지 못해서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러다가 솔리스트 중의 한 사람이 베토벤을 청중쪽으로 향하게 해서 사람들이 자기에게 박수를 보내고 환호하는 줄을 알았다.


루드비히 반 베토벤. 그의 사인은 청각장애는 아니지만 그의 죽음에 기여한 것이었다.


○ 시각장애(Blindness). 음악가에 있어서 시각장애도 청각장애만큼 치명적이다. 그런데 위대한 작곡가들 중에는 시각장애로 고통받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이 있다. 그런 중에도 작곡가이며 오르가니스트였던 사람들 중에서 시각장애자가 여러 명이나 있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가 잘 아는 고전음악의 아버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오라토리오의 아버지라고 하는 조지 프리데릭 헨델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인데 어쩐 일인지 두 사람 모두 60대에 들어서서 시각을 상실했다. 헨델의 뒤를 이어 코벤트 가든의 오라토리오 프로그램의 감독이 된 작곡가이며 오르가니스트인 존 스탠리(John Stanley)는 어릴 때에 이미 시각을 잃은 사람이었다. 프랑스 작곡가 겸 오르가니스트 중에도 시각을 상실한 사람들이 여러 명이나 있다. 대표적으로는 루이 비에르느(Louis Vierne)와 장 랑글레(Jean Langlais)이다. 프랑스의 첼리스트 겸 오르가니스트인 루이 브레이유(Louis Braille: 1809-1852)는 이른바 '브레이유 시스템'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점자 악보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기 때문이다.


맹인 음악가들을 위한 점자악보를 처음 만들어 사용한 프랑스의 루이 브레이유


○ 알콜중독(Alcoholism). 위대한 작곡가 중에는 술을 많이 마시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알콜중독으로 고생들을 많이 했다. 그런 중에도 러시아 국민음악파 5인조의 한 사람인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Modest Mussorgsky: 1839-1881)야 말로 알콜중독의 대표였으며 결국 그로 인해서 세상을 떠나기까지 했다. 당시 사회에서는 체제에 대한 반항, 즉 귀족사회에 대한 반항을 표현하기 위해 술들을 마셨기 때문에 무소르그스키도 그런 의미에서 과음을 했어도 별로 탓하는 사람이 없었다. 무소르그스키는 정부의 체신공무원으로 근무했지만 여러 사정으로 해고되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의 일이었다. 아무튼 그는 해고 당하고나서 술을 더 많이 마셨다. 친구들이 그러지 말라고 해도 콘트롤 할수 없는 상태였다. 무소르그스키는 42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하지만 알콜중독이 발전해서라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었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키. 세상 떠나기 얼마전에 친구가 그린 초상화. 술을 많이 마셔서 코가 빨간 그대로이다.


○ 동맥류(動脈瘤: Aneurysm). 동맥류는 뇌에서 내출혈을 일으키는 주요 원인으로 되어 있다. 펠릭스 멘델스존()은 청년 시절에 라인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익사할 뻔했는데 그때 뇌출혈의 증세를 보였다. 의학적으로는 Cerebralk eneurysm이라는 것이었다. 이때 그는 잠시 물속에서 정신을 잃고 있었다. 아무튼 그 후로 멘델스존은 두통이 심했고 사소한 일에도 과민한 반응을 보였으며 그로 인해서인지 창작력도 현저하게 저하되었다. 또한 심장마비 증세도 보여주었다. 물속에 빠졌을 때 아마 규모는 작지만 뇌출혈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1847년에 멘델스존은 사랑하는 누이인 패니 멘델스존에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그 자리에 쓰러졌고 몇달 후에 심장마비를 일으켜서 36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펠릭스 멘델스존. 뇌출혈이 원인이 되어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 관절염(Arthritis). 20세기에 스웨덴을 대표하는 가장 뛰어난 작곡가인 알란 페터슨(Allan Pettersson: 1911-1980)은 1950년대 초에 류마티스 관절염의 진단을 받았다. 그러다가 1968년부터는 걷기도 힘들어져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10년이 넘도록 집에서만 지내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수입이 거의 없어서 극심한 빈곤에 시달려야 했고 또한 이웃들도 그에게 무관심해서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20세기에 나온 가장 감동적인 교향곡이라고 하는 15편의 대규모 교향곡을 완성했다. 이와 함께 대단히 인상적인 협주곡들도 여러 편이나 작곡했다.


알란 페터슨. 류마티슴 관절염으로 10년이 넘게 고생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 심장질환(Heart disease).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1860-1911)는 죽음에 대한 공포, 주로 비현실적 생각에 잠기는 신경과민, 그리고 기본적으로 미신에 사로잡혀 있던 인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평범한 사람처럼 산책과 하이킹을 좋아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단히 열정적으로 지휘자로서, 또한 교향곡과 연가곡의 작곡가로서의 활동을 했다. 그런데 1907년에 동맥 부정맥(부정맥) 진단을 받았다. 그로 인하여 화를 참지 못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말러는 비엔나 슈타츠오퍼에서 해임되었고 또한 그 해에 사랑하는 큰 딸이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겼다. 말러는 건강이 악화되었고 모습도 말할수 없이 초라하게 보였다. 말러는 이러다가는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변화를 위해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와 뉴욕 필의 지휘를 맡고자 했다. 그런데 참으로 안타깝게도 병적인 공포심과 미신은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은 미국에서 지휘를 맡으려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말러는 교향곡 9번에 대하여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 왜냐하면 베토벤도 그렇고 슈베르트도 그러하며 브루크너도 9번 교향곡을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말러는 아홉번째 교향곡을 만드면서 번호를 붙이지 않고 그냥 '대지의 노래'(Das Lied von der Erde)라는 제목만 붙였다. 그리고 그 다음에 교향곡 9번을 완성했고 이어 교향곡 10번은 완성하지 못한채 세상을 떠났다. 말러는 교향곡 9번을 교향곡 10번으로, 미완성의 교향곡 10번을 교향곡 11번으로 간주했다. 말러는 미국에 있을 때에 심장 라이닝에 염증이 생긴 것으로 확인을 받았다. 전문용어로는 Bacterial endocarditis라고 했다. 말러는 곧장 유럽으로 배를 타고 돌아왔다. 그리고 1911년에 향년 50세로 비엔나의 어떤 정신병원에서 세상을 떠났다.


구스타브 말러는 심장질환으로 50세에 세상을 떠났다.


○ 편두통(Migraines).  최초의 여성 작곡가로서 음악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힐데가르트 폰 빙겐(Hildegard von Bingen: 1098-1179)은 평생을 편도통을 지니고 살았다. 폰 빙겐은 신앙심이 돈독했다. 그래서 기도하는 중에 환상을 보고 환상에서 나타난 멜로디를 받아서 그대로 작곡한 경우가 많았다. 로마 가톨릭은 그런 폰 빙겐은 성자로 시성하였다. 훗날 학자들은 폰 빙겐이 보았다는 환영이란 것이 편두통으로 생기는 일종의 환상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편두통이라고 해도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순수한 환상으로 생각할수 있다는 설명이었다. 이를 전문용어로는 Hemicrania sine dolore라고 불렀다.


힐데가르트 폰 빙겐. 편두통을 달고 살았다.


○ 강박장애(Obsessive-Compulsive Disorder: OCD). 제2의 베토벤, 또는 바그너의 후예라고 하는 안톤 브루크너(Anton Bruckner: 1824-1896)는 생애 동안 여러 어려움을 겪으면서 보냈다. 기본적으로 브루크너는 세상물정이란 것을 몰랐으며 자기를 굽히고 남에게 고분고분 순종하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몇가지 신경질환으로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래서 전문가들은 나중에 '브루크너는 연구대상이다'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브루크너는 말년에 심한 강박장애의 증세를 보여주었다. 그중에서 하나는 이른바 뉴메로마니아(numeromania)라는 것으로서 숫자를 계속 세지 못하는 증세이다. 그 때문에 그는 창문의 유리창이 몇개인지 세는 문제부터 벽돌이 몇개인지 세는 문제까지 제대로 숫자를 세지 못했다. 숫자를 세다가는 그대로 잊어버리기도 하지만 대체로 두통이 나서 세지를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의 숫자세기 뿐만 아니라 작곡활동에서의 숫자세기에서도 문제를 들어내 보였다. 박자를 제대로 세지 못하였고 리듬을 따라 잡는데도 어려움을 보였다. 그는 또한 자기가 허약하지나 않는지 걱정이 지나쳤으며 나아가서 자기의 작곡 재능에 대한 의구심도 감추지 못했다. 한마디로 말해서 작곡가로서 재능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작곡가 행세를 하고 있지 않느냐는 애기였다. 그래서 그는 교향곡의 작곡에서 완성이라는 것을 몰랐다. 그저 계속 수정하고 또 수정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나저나 브루크너의 여러 정신문제 중에서 참으로 괴이한 것은 시체 보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생판 모르는 사람의 장례식에 가서 한참 동안 시신을 보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 1888년에는 베토벤의 유해를 이장하기 위해 묘지를 파고 유해를 꺼내는 일이 있었다. 브루크너는 그 장면을 안보고는 견딜수가 없어서 현장에 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다. 브루크너는 베토벤의 관을 열고 시신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확인까지 했다. 그 바람에 자기의 프린스 네즈(prince nez)안경을 관 속에 떨어트리기까지 했다.

 

안톤 브루크너. 강박장애로 고통을 겪었다.


○ 후두염(Quinsy). '카르멘'의 조르즈 비제(George Bizet: 1838-1875)는 만성 편도선염(Tonsilitis) 및 후두염으로 고통을 받았다. 비제는 후두에 통증이 있으며 목이 부어오르는 증세를 보였다. 포도상규군에 의해 감염되었기 때문이다. 비제는 그의 걸작인 '카르멘'의 공연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을 가지는 날에도 목에 염증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통증이 심해서 가벼운 심장마비가 두번이나 있었다. 그리고 목의 옆쪽에 상처가 난 것처럼 보이는 외상이 생겼다. 경찰은 목에 있는 상처를 보고 혹시 비제가 자살하려고 권총으로 목을 쏘다가 빗나가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겠느냐는 의심을 했었다. 이탈리아 베리스모 오페라의 거장인 자코모 푸치니는 담배를 많이 피워서인지 후두암에 걸려 벨기에까지 가서 수술을 받았으나 후유증 등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르즈 비제. 만성 후두염으로 고생을 했다.


○ 류마티스열(Rheumatic fever). 모차르트는 어릴 때에 류마티스열을 앓았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청년이 되고 나서도 어릴 때의 병치레에 영향을 받아서 류마티스열이 재발했다고 한다. 그리고 류마티스열은 모차르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여러 이유 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모차르트는 류마티스열의 후유증으로 고혈압 증세를 보였으며 여기에 여러 스트레스를 받아서 증세가 더욱 악화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쏘나기처럼 일하는 작업 습관도 죽음을 재촉했다는 얘기다. 모차르트는 죽음을 앞두고 고열이 났으며 몸을 움직일수 없을 정도가 되었고 임파선들이 부어 올랐으며 구토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모차르트의 치료를 맡은 두 의사는 그저 모차르트의 몸에서 피를 뽑아내는 것으로 처치를 했을 뿐이었다. 18세기 당시에는 고열의 임파선 환자에게 그런 조치를 취하는 것이 일반이었는데 사실상 그런 행위는 치명적이었다. 아무튼 모차르트는 동료이며 라이발이기도 했던 살리에리로부터 독살 당하지는 않았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어릴 때 류마티스열을 알았던 것이 사인중의 하나가 되었다고 한다.


○ 폐병(Tuberculosis). 지금이야 폐병(폐렴)이 큰 불치의 병이 아니지만 얼마전 까지만 해도 대단히 고통을 주는 질병이었으며 결국은 뚜렷한 치료방법이 없어서 대체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폐병(Pulmonary consumption)은 사람의 몸안에서 소비하는 것이므로 영어로 consumption, 즉 소비라는 의미의 단어를 붙인 질병이다. 폐병으로 인하여 생을 마감한 위대한 작곡가들은 의외로 많이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36세로 세상을 떠난 영국의 헨리 퍼셀(1659-1695), 이탈리아의 루이지 보케리니(1743-1805), 오페라 부파인 '하녀 마님'의 작곡가로서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조반니 바티스타 페르골레지(1710-1736), 오페라 '마탄의 사수'의 칼 마리아 폰 베버(1786-1826), 프랑스의 페르디낭 에롤드(1791-1833), 바이올린의 귀재인 니콜로 파가니니(1782-1840), 피아노의 시인 프레데릭 쇼팽(1810-1849), 미국의 슈베르트라고 하는 스테픈 콜린스 포스터(1826-1864), 폴란드의 작곡가이며 피아니스트인 카롤 치마노브스키(Karol Szymanowski: 1882-1937)), 그리고 발레곡 '봄의 제전'으로 유명한 러시아의 이고르 스트라빈스키(1882-1971) 등등이다. 한때는 폐병이 로맨틱한 병이라는 이상한 감정이 있었다. 그래서 오페라의 주인공들도 간혹 폐병으로 숨을 거두어서 동정심을 얻는 경우가 있었다. 잘 아는 대로 '라 트라비아타'의 비올레타와 '라 보엠'의 미미이다.


 

폴란드의 카롤 치마노브스키와 그와 같은 해에 태어난 이고르 스트라빈스키


○ 매독(Syphilis). 페니실린이 발견된 이래 매독은 크게 염려할 질병이 아니게 되었지만 그 전에는 불치의 병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심지어는 하늘이 내리는 천벌이라는 인식까지 있었다. 그리고 매독에 걸린 사람들은 창피해서 자기의 증세를 쉬쉬하는 경향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누가 매독으로 사망했는지는 분명치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 아는 몇몇 작곡가들은 매독에 감염되었으며 그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는 빠른 길을 가게 되었다. 예를 들어서 모차르트, 베토벤, 슈만, 슈베르트 등이다. 이런 위대한 분들이 매독이라니, 말도 안된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사실이다. 이들 이외에도 또 있다. 가스파레 스폰티니, 게타노 도니체티, 미하일 글링카, 베드리치 스메타나, 휴고 볼프, 프레데릭 들리우스(Frederick Delius), 에드워드 맥도웰, 스콧 조플린(Scott Joplin), 그리고 대본가로 유명한 ETA 호프만 등등 이다. 이들은 매독에 걸려서 나중에는 고열과 심지어는 기능장애를 일으켰는가 하면 눈이 멀고 귀가 안들리며 치매에 걸리고 결국은 죽음에 이르렀다. 그런데 매독균은 반드시 남녀간의 성적 접촉으로만 감염되지는 않는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염될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매독에 걸렸다는 작곡가들이 모두 남녀간의 성적 접촉으로 감염되었다고 볼수는 없다. 매독에 걸린 작곡가 중에서도 안톤 스크리아빈()의 경우는 특이하다. 그는 말년에 우선 정신질환의 증세를 보였다. 말년이라고 해보아야 고작 40대 초반일 뿐이었다. 그나저나 그는 자기가 메시아라는 과대망상증을 가지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의 환상을 작품으로 남기기 위해서 Mysterium 이라는 대작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는 이 세상이 새롭고도 신비한 시대로 전환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같은 계획은 그가 43세에 패혈증(Septicemia)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어 이루어지지 못했다.     


안톤 스크리아빈. 메시아적 과대망상증에 걸렸다.


○ 수은 중독(Mercury Poisoning). 로베르트 슈만(Robert Schumann: 1810-1856)도 결국 매독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다. 학생시절에 매독에 걸렸는데 클라라와의 결혼 생활 중에도 계속 매독균이 잠복하고 있어서 실은 적지 않은 근심 속에서 지냈다는 것이다. 슈만은 44가 되는 1854년부터 환각증세가 심해져서 간혹 천사의 환상을 보았다고 말하다가 그 천사들이 악마의 모습으로 변했다는 말을 했다. 슈만은 아내 클라라에게 자기에게 가까이 오지 말하고 말했다. 혹시 자기도 모르게 해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슈만은 점점 정신적으로 이상한 행동이나 말을 하더니 급기야 1854년 2월 27일에는 집에서 슬리퍼만 신고 밖으로 나와서 라인강의 다리에서 강으로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 다행히 지나가던 보트의 뱃사공이 구출하는 바람에 목숨은 건졌다. 슈만의 집안에는 자살 내력이 있었다. 슈만의 누이 에밀리가 1825년에 자살을 했다. 그때에도 물속으로 몸을 던졌다고 한다. 뱃사공은 슈만을 구해내어 집이 어디냐고 물어서 집까지 데려다 주었다. 슈만은 정신을 차렸는지 클라라에게 자기를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달라고 부탁했다. 슈만은 본(Bonn) 인근의 엔데니히(Endenich)에 있는 프란츠 리하르츠(Dr Franz Richarz Mental Asylum) 정신요양소에 들어가서 1856년 7월 29일 4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머물러 있었다. 슈만은 거의 2년 동안 정신요양소에 수용되어 있었지만 그동안 클라라의 면회는 금지되었다. 다만 브람스만이 슈만을 자유스럽게 면회할수 있었다. 클라라가 슈만을 마지막으로 만나본 것은 슈만이 세상을 떠나기 이틀전이었다. 그날 슈만은 클라라를 알아보는 듯했다. 그러나 몇마디 말만 입으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로베르트 슈만. 결국은 정신질환으로 고통을 겪었다.


슈만의 사인과 관련하여서는 여러가지 논란이 있었다. 대체적인 견해는 슈만이 병세의 말기에 보여준 증세는 수은중독이었다는 것이다. 당시에 수은은 매독치료용으로 흔히 사용되는 것이었다. 또 다른 원인으로는 뇌질환이 제기되었다. 슈만의 시신을 해부한 결과에 따르면 슈만은 뇌의 기저에 젤라틴 형태의 종양이 발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는 콜로이드낭(Colloid cyst), 두개안두종(Craniopharyngioma), 척삭종(Chordoma), 또는 수막종(Chordoid meningioma)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수막종은 환청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슈만은 간혹 귀에서 무슨 멜로디가 환상처럼 들린다고 말한 일이 있다. 또한 이것은 가정이지만 슈만은 조현병(Schizophrenia) 또는 양극성장애(Bipolar disorder)로 고통을 겪었다는 것이다. 조현병이라는 것은 정신질환의 하나로 무논리증, 정서적 둔마, 환각, 와해된 언어와 행동, 무욕증 등의 증세를 보이는 질환을 말한다. 그런중에도 슈만이 양극성장애를 앓고 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 이유로는 슈만이 작곡활동을 하면서 기분 내키는 대로 변경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을 들고 있다. 슈만은 생애의 마지막을 남겨두고서 자꾸 A 음이 들린다고 말했다. 이명증(Tinnitus)이거나 또는 환청일수가 있다. 그러나 슈만은 이명증이던지 또는 환청이던지 그런 증상을 보이기 전부터 정신적으로 절망감을 보이는 등 문제가 많았었다. 슈만은 결국 젊은 시절에 잘못된 이성관계로 매독에 걸렸고 수은치료를 시도하는 중에 수은중독이 되어 뇌질환으로 확대되었고 그리하여 정신질환이 심해졌다고 볼수 있다.


본에 있는 슈만의 묘소


○ 신경매독(Neurosyphilis: Cerebro-spinal syphilis). 벨칸토 오페라의 거장인 게타노 도니체티(Gaetano Donizetti: 1797-1848)는 신경매독으로 고통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다. 뇌척수에 매독균이 감염되어서 결국은 육체적으로는 물론이고 정신적으로도 심각한 상태에 이르러 세상을 떠났다는 것의 의사들이 설명이었다. 신경매독이라는 것은 뇌 또는 척수에 재귀열 매독 등의 병원체, 즉 파상균이 감염되는 것을 말한다. 신경매독은 대체로 치료를 받지 않아서 만성 매독이 된 환자들에게서 발생한다. 매독균에 감염된지 10년 또는 20년 후에야 증세가 확연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통상이다. 사실상 도니체티는 말년에 10년 이상이나 심한 불안감에 곁들여서 계속되는 두통과 구토증 등으로 고생을 하였다. 하지만 증세가 그렇게 심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치료는 거의 받지를 않았다. 도니체티의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것은 1845년 8월이었다. 그때에 도니체티는 비로소 신경매독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이와 함께 정신질환이 심각하다는 것도 진단되었다. 그때에 도니체티는 프랑스에 있었다. 진단을 맡았던 리코르드 박사는 도니체티가 날씨가 좋은 이탈리아로 돌아가서 요양을 하고 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 것 같지만 지금은 1월이므로 4월 전에는 날씨가 춥기 때문에 여행을 떠나지 않는것이 좋겠다고 주장했다. 리코르디 박사를 비롯한 관련 의사들은 도니체티가 더 이상 자기 스스로 어떤 사항을 결정할 능력이 없을 정도라고 전했다.


게타노 도니체티


몇달 후인 1846년 2월에 담당 의사들은 도니체티의 정신상태가 도저히 그냥 둘수 없는 정도이므로 시설에, 즉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다. 이탈리아에서 도니체티의 건강이 염려되어서 파리에 온 조카 안드레아는 의사들의 권고를 중요하게 생각해서 도니체티를 특수 시설에 수용해서 치료키로 결심했다. 그러나 도니체티는 그런 시설에 들어가는 것을 싫어했다. 아직도 관찮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카 안드레아는 도니체티에게 잠시 파리를 떠나서 시골의 온천장과 같은 곳에 가는 것이라고 속이기로 했다. 시골에 집을 마련해 놓고 의사들이 와서 치료토록 하는 계획을 세웠다. 도니체티는 중요한 약속이 있어서 2월 12일까지는 비엔나에 가야 했다. 조카 안드레아는 도니체티에게 비엔나에 가는 것처럼 속이고 마차를 준비해서 시골 요양소로 향하였다. 그리고는 목적지 쯤에 도착해서는 마차가 고장이 나서 마차를 고칠 때까지 시골집에서 묵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이 투숙한 곳은 파리 교외의 이브리 쉬르 세이느에 있는 메종 에스퀴롤이란 집이었다. 도니체티는 사나흘이나 시골집에서 묵게 되자 낌새를 알아차렸다. 도니체티는 다른 사람들 몰래 파리의 친구에게 자기를 구출해 달라고 간청하는 편지를 썼다. 하지만 그 편지는 배달되지 않았다. 의사들은 도니체티의 건강을 염려해서 파리 또는 비엔나에서 지내지 말고 어서 이탈리아로 가서 지내는 것이 마음의 안정도 얻을수 있어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조카 안드레아는 도니체티의 이탈리아 귀향을 준비했다. 그런데 뜻하지 아니한 장애물이 생겼다. 파리 경찰은 정신질환자가 아무런 대책도 없이 파리를 떠나는 것은 안된다고 하며 다른 의사들에게 더 확실한 진단을 받은 후에 결정하자고 말했다. 안드레아는 이래가지고는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1846년 9월 7일인가 8일에 도니체티를 데리고 무조건 이탈리아로 떠났다. 도니체티가 가지고 간 것은 '알바 공작'(Le duc d'Albe)의 미완성 스코어와 '리타'(Rita)의 완성된 스코어, 그리고 개인용품 몇가지뿐이었다. 그동안 돈이 생길 때마다 사놓았던 보석도 가져갔다. 도니체티 일행 4명은 아미엔까지 기차로 가서 다시 브뤼셀로 갔다가 마차 두대를 빌려서 독일로 들어갔고 독일에서 스위스를 거쳐 이탈리아로 가는 머나먼 일정이었다. 도니체티 일행은 세인트 고타르드협곡을 거쳐 알프스를 통과하는 힘든 여행을 마치고 마침내 한달만인 10월 6일에 베르가모에  도착했다. 친지들은 도니체티가 좀 더 나은 환경에서 편안하게 지낼수 있도록 베르가모의 귀족인 스코티의 저택에 머물도록 주선했다. 도니체티는 베르가모에서 약 2년을 투병하며 지내다가 1848년 4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도니체티 묘소


○ 노인성 치매증(Senile dementia). 베드리치 스메타나(Bedrich Smetana: 1824-1884)가 세상을 떠난 후 병원에서 기록한 사인은 노인성 치매증으로 되어 있다. 스메타나는 60세에 세상을 떠났다. 60세라면 노인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는 나이이다. 그런데 노인성 치매증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스메타나의 가족들은 스메타나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쇠약해진 것은 매독 때문이라고 믿었다. 독일의 신경과 전문의인 에른스트 레빈 박사가 1972년에 발표한 스메타나의 검시보고서도 매독이 사인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20세기에 들어와서 스메타나의 사인을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체코의 에마누엘 블체크 교수가 스메타나의 시신에서 근육조직 샘플을 떼 내어서 분석하였고 그 결과 매독으로 인한 사망이 가장 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체코의 의사인 지리 람바 박사는 블체크 교수의 분석은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반박하면서 샘플로 사용한 조직은 상태가 적당하지 않기 때문에 매독균과 비교하기가 어렵다는 주장을 했다. 그렇다면 스메타나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어떤 증세들을 보였는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스메타나가 세상을 떠나기 5년 전인 1879년, 그는 친구인 체코의 시인 얀 네루다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무래도 정신분열 증세가 올 것 같아서 두렵다는 말을 했다. 미칠 것만 같다는 얘기였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882년 겨울에 스메타나는 절망감, 불명증, 환각 증세, 그리고 현기증과 경련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간혹 실어증에 걸리기도 했다. 이듬해인 1883년, 스메타나는 새로운 교향조곡인 '프라하 사육제'(Prague Carnival)의 작곡에 착수했다. 그러나 도입부과 폴로네스만 겨우 작곡했을 뿐 더 이상 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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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코 국민음악의 거장인 베르디치 스메타나. 그도 사람이 그러면 안되는데 매독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메타나는 교향조곡을 뒤로 미루고 이번에는 새로운 오페라인 '비올라'(Viola)를 착수하였다. 셰익스피어의 '12야'(Twelfth Night)에 나오는 여주인공을 바탕으로 삼은 작품이다. 그러나 이것도 정신상태가 점차 악화되어가는 바람에 다만 몇 부분만 작곡하고서 하차하였다. 스메타나의 건강문제가 공공연하게 대두된 것은1883년 10월이었다. 프라하에서 어떤 리셉션에 참석했는데 친구들을 아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1884년 2월 쯤해서는 무슨 일을 하더라도 일관되게 집중해서 하지 못하는 증세를 보였고 이어서 간혹 폭력적으로 돌변하기도 했다. 스메타나의 가족들은 스메타나를 집에서 치료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1884년 4월 23일에 프라하에 있는 카테린키 정신병원에 수용하였다. 스메타나는 이곳에서 정확히 19일 후인 1884년 5월 12일에 숨을 거두었다. 스메타나의 장례식은 5월 15일 프라하 구시가지의 틴교회(Tyn Church)에서 거행되었다. 교회에서 장례예배를 마친후 장지인 비세라드(Vysehrad) 공동묘지로 갈 때에는 프라하의 흘라홀(Hlahol)합창단원들이 운구행렬의 앞에서 횃불을 들었고 이들의 뒤를 이어 많은 사람들이 장지까지 함께 갔다. 오늘날 스메타나의 묘소는 프라하를 방문하는 음악애호가들의 순례지가 되어 있다. 스메타나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 밤에는 국립극장에서 '팔려간 신부'가 공연키로 되어 있었다. 무대에는 스메타나를 추모하여서 검은 천이 크게 내걸렸다.


프라하의 스메타나 묘소(가운데)


○ 급성대장염(Amoebic intestinal disease). 벨칸토 오페라의 뛰어난 작곡가인 빈첸조 벨리니(Vincenzo Bellini: 1801-1835)는 파리 교외의 퓌토(Puteaux)에서 1835년 9월 23일 오후 5시경에 세상을 떠났다. 사람들은 벨리니의 건강이 크게 문제가 없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몹씨 당황했다. 그때 벨리니의 나이는 34세였다. 사후의 진단에 따르면 급성대장염 및 간에 종기가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벨리니는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파리 시내에 살지않고 상당히 떨어져 있는 퓌토에서 혼자 살았다. 벨리니가 아무래도 위독하다고 생각한 친구 몇명이 지켜보았지만 그 전에는 혼자서 심한 통증에 시달리며 지냈다. 만일 일찍 제대로만 치료를 받았더라면 세상을 떠나기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그러지를 못했다. 왜 그랬을까? 훗날 역사학자들은 그 부분이 아무래도 궁금증으로 남는다고 말했다. 벨리니의 죽음과 관련해서 하이네와의 관계는 아직도 흥미있는 얘기로 남아 있다. 벨리니는 1835년 여름에 어떤 문학모임이 주관하는 만찬에서 만난 일이 있다. 이때 하이네는 벨리니에게 '당신은 천재올시다. 그렇지만 하늘이 준 재능에 보상을 하기 위해서 일찍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입니다. 위대한 천재들은 대체로 젊은 시절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모차르트(35세)가 그렇고 라파엘(37세)이 그렇습니다.'라고 말했다. 평소에도 다소 미신적이었던 벨리니는 하이네의 그 말을 듣고 상당히 두려워했다. 그 후로 벨리니는 하이네를 싫어했다. 그러자 파리 사교계에서 이름을 날리던 마담 주베르가 자진해서 두 사람의 화해를 위한 만찬을 주선했다. 그 자리에는 이탈리아의 왕족인 벨지오이오소 공주도 참석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벨리니는 갑자기 몸이 몹시 아파서 참석못하겠다고 전했다. 벨지오이오소 공주는 자기의 주치의를 퓌토에 있는 벨리니의 집으로 보냈다. 의사는 벨리니의 상태를 보고 며칠 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몸이 몹씨 아프다고 말한 그날로부터 13일이 지난 9월 22일에 벨리니는 한잠도 못자고서 밤새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다음날인 9월 23일 낮에는 아주 심한 경련을 일으키기도 했고 결국 오후 5시 경에 세상을 떠났다.  


빈첸조 벨리니


○ 세균성 심장내막염(Bacterial endo carditis). 구스타브 말러(Gustav Mahler: 1860-1911)의 죽음과 관련하여 병원에 기록된 사인은 세균성 심장내막염이었다. 심장 판막에 결함이 있어서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심장내막염에 걸리면 생존율은 항생물질이 생성되기 전의 경우 거의 제로 퍼센트가 된다. 말러는 세상 떠나기 1년전쯤부터 정신적으로 문제를 보였다. 말러는 1910년 여름에 교향곡 10번의 작곡을 추진하여 아다지오악장을 완성했고 이어서 나머지 4악장에 대한 스케치를 해놓았다. 그리고 11월에는 뉴욕에서의 지휘가 예정되어 있어서 부인 알마와 함께 뉴욕으로 갔다. 말러는 뉴욕에서 콘서트 지휘와 순회연주 지휘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 말러는 그로부터 한달 후인 12월의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목에 통증을 호소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얼마 동안을 버티었다. 다음해인 1911년 2월에 말러는 체온이 40도까지 오르는 고열에 시달려야 했다. 주위 사람들은 지휘를 중지하고 안정과 치료가 필요하다고 말했지만 말러는 카네기 홀과의 약속을 어길수는 없다고 고집하였다. 카네기 홀의 연주회는 현대 이탈리아 음악으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부소니의 '베르체우스 엘레지아크'()는 세계초연이어서 사람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던 터였다. 카네기 홀의 지휘가 말러의 마지막 지휘였다. 말러는 카네기 홀 연주회가 끝나자마자 침대에 누웠고 결국 세균성 심장내막염이라는 어려운 진단을 받았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심장내막염은 사망율이 매우 높은 병이었다.


구스타브 말러


그러나 말러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말러는 사람들과 새해 콘서트 시즌에 대하여 얘기를 나누며 의욕을 보였다. 더구나 새해 콘서트에서는 알마의 작품이 연주되기 때문에 신경을 많이 쓰지 않을수 없었다. 말러는 3월 3일의 카네기 홀 콘서트를 최선을 다해서 마쳤다. 알마의 노래는 소프라노 프란시스 알다(Frances Alda)가 불렀다. 말러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는 듯 싶었다. 말러는 비엔나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말러 가족들은 전용 간호사와 함게 4월 8일에 아메리카호에 탑승해서 뉴욕을 떠났다. 말러 일행은 열흘 후인 4월 18일에 파리에 도착했다. 그리고 말러는 파리 교외의 뇌일리()에 있는 진료소에 입원하였다. 그러나 말러는 하루 이틀이 지나도 아무런 차도를 보이지 못했다. 마침내 5월 11일 가족들과 친구들은 말러를 기차에 태워서 비엔나로 가도록 했다. 비엔나에 도착한 말러는 9구 마리안넨가쎄 20번지에 있는 뢰브(Löw) 정신요양소에 곧바로 입원하였다. 그리고 1주일 후인 5월 18일에 뢰브 정신요양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말러의 장례식은 5월 22일 치루어졌다. 말러가 요청한 대로 그린칭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말러는 묘비에 자기의 이름만 적어 달라고 당부했다. 왜냐하면 '나를 찾아온 사람이라면 내가 누구인지 알것이므로 굳이 설명이 필요없으며 나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굳이 설명을 써 놓을 필요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장례식에는 부인 알마가 참석하지 않았다. 의사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아놀트 쇤베르크는 '성자 구스타브 말러'(The Holy Gustav Mahler)라고 쓴 화한을 헌정하였다. 브루노 발터, 알프레드 롤러, 분리주의 화가인 구스타브 클림트 등이 참석했고 유럽의 여러 유명 오페라극장의 대표들도 조의를 표하기 위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참석하였다.


비엔나 그린칭 공동묘지의 구스타브 말러 묘소. 말러의 요청에 의해 묘비에 이름만 적혀 있다.


에릭 사티(Eric Satie: 1866-1925)

에릭 사티는 20세기 파리 아방갸르드 작곡가 중에서도 선구적인 인물이지만 그보다도 그의 기이한 행동으로 세간에 더 화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사티의 죽음은 그렇게 비정상적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술을 많이 마셔서, 그것도 프랑스의 압상트라고 하는 독한 술을 많이 마셔서 간경변이 되어 죽은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릭 사티는 향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것이 특이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생활이 참으로 기이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소개코자 한다. 사티는 아르퀴에일(Arcueil)이란 곳에 있는 작은 원 룸 아파트에서 27년을 살았다. 그렇게 오래 한 곳에 살았고 많은 사람들과 모임을 가졌지만 단 한사람도 그의 아파트를 방문한 일이 없다. 그의 아파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밝혀진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방 하나짜리의 작은 아파트이지만 두대의 그랜드 피아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피아노를 2층처럼 올려 놓았다. 공간이 비좁아서였다. 두 피아노의 페달은 끈으로 묶어서 아래에서 한번에 움직일수 있도록 해 놓은 것도 특이했다. 사티는 열두벌의 회색 양복을 가지고 있었다. 모두 똑같은 디자인에 똑같은 옷감의 양복이었다. 사티는 양복 한 벌이 해져서 입을수 없게 되고 나서야 다음 양복을 입었다. 그래서 열두벌의 양복 중에서 여섯벌은 해져서 옷장의 한 구석에 있고 아직 입지 않은 여섯 벌의 양복은 새것으로 그대로 보관되어 있었다. 대단한 준비성이었다. 사티는 우산을 좋아했다. 여러 종류의 우산을 무려 100개나 보관하고 있었다. 그리고 손수건 사랑도 유별났다. 세어보니 84장을 가지고 있었다. 사티는 이런 수집품 이외에도 많은 편지를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 자기가 자기 앞으로 보낸 편지였다. 편지에는 누구와 만날 약속이 되어 있으면 만나는 장소에 대한 자세한 설명과 함께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등등이 세밀하게 적혀 있었다. 편지라기보다는 조사보고서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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