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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인의 위대한 작곡가 더 알기 -1

정준극 2017. 12. 3. 18:10

30인의 위대한 작곡가 더 알기 - 1


○ Johann Sebastian BACH(요한 제바스티안 바흐). 바로크 작곡가. 1685년 3월 31일 독일 아이제나하(Eisenach)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작세-아이제나하 공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1750년 7월 28일 라이프치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봉사하던 라이프치히의 성토마스교회에 안치되었다. [인기작품] 오케스트라 모음곡 3번에 나오는 'G선상의 아리아', 칸타타 '마음과 입과 행동과 생명으로'(Herz und Mund und Tat und Leben)에서 '예수, 인간 소망의 기쁨'(Jesu bleibt meine Freunde: Jesu, Joy of Man's Desiring), 오르간을 위한 '토카타와 푸가' 등이 있다. [대표작품] '브란덴부르크 협주곡 1-6번',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 키보드 악기를 위한 평균율 1권과 2권, '푸가의 예술'(Die Kunst der Fuge: The Art of Fugue), '무반주 첼로 모음곡' 등이 있다. [더 알기] 바흐는 '고전음악의 아버지'이다. 고전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다. 고전음악의 장르에서도 바로크 음악의 거장이다. 작곡가 중에서 가장 많은 가족들이 뛰어난 작곡가로서 활동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바흐의 삼촌도 위대한 작곡가였으며 바흐의 아들들도 여러 명이나 훌륭한 작곡가가 되었다. 예를 들면 아들 중에서 보통 CPE 바흐라고 불리는 칼 필립 에마누엘 바흐이다. 아무튼 음악의 역사에 있어서 바흐의 가정 만큼 많은 작곡가를 배출한 가정도 없을 것이다. 바흐는 다작의 작곡가였다. 생전에 무려 1천곡 이상의 작품을 작곡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많은 작품들이 분실되어서 어떤 곡들인지 알수가 없게 되었다. 바흐의 작품은 대부분 종교음악이었다. 교회를 위한 음악이었다. 바흐의 작품들은 참으로 놀랄만큼 훌륭하여서 어떤 악기로 어떻게 연주하던지 똑같은 감동을 준다. 다시 말해서 느리게 연주하던지 빠르게 연주하던지, 또는 크게 연주하던지 조용하게 연주하던지 똑같은 감동을 준다. 한편, 그의 작품 중에서 상당수는 교육용이었다. 특히 하프시코드나 오르간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본을 작곡했다. 가장 유명한 교육용 작품은 '평균율'이다. 바흐의 수많은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자 마치 썰물처럼 잊혀져갔다. 그러다가 거의 2백년이 지나서 멘델스존이 앞장서서 바흐의 음악을 발굴하고 연주하는 바람에 비로소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전세계적인 사랑을 받게 되었다. 바흐의 걸작 중의 하나인 첼로 모음곡은 1890년에 파블로 가잘스가 어떤 헌책방에서 악보를 처음 발견하는 바람에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바흐는 한때 작세 아이제나하 공국의 군주에 의해 감옥에 갇힌 일이 있었다. 바흐가 보수를 더 준다는 직장으로 옮기려 했다는 죄목 때문이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 앞에서 오르간을 연주하는 바흐


○ Ludwig van BEETHOVEN(루드비히 반 베토벤). 고전시기의 마지막에서 낭만시기가 시작되는 때에 활동한 작곡가이다. 1770년 12월 16일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쾰른선제후 지역의 본(Bonn)에서 태어났다. 12월 16일이라는 것은 정확한 사항이 아니다. 다만, 그가 12월 17일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전날인 12월 16일에 태어난 것으로 짐작할 뿐이다. 1827년 3월 26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토벤의 묘소는 비엔나 남쪽 중앙공동묘지(Zentralfriedhof)의 음악가 묘역에 있다. [인기작품] '엘리제를 위하여', '월광곡', '환희의 송가', '아델라이데' 등 [대표작품] 교향곡 3번부터 9번까지, 후기 현악4중주곡 (Op 127, 130-133, 135), 피아노 협주곡 5번 일명 '황제' 기타 등등 [더 알기] 음악의 성인이라는 별명을 들을 만큼 클래시컬 음악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다. 베토벤은 불행하게도 30대 초반부터 청각장애가 생겼고 50대에 들어와서는 청각을 완전히 상실하였다. 그런데도 작곡을 하여 불후의 명작들을 남겼다. 베토벤의 아버지는 아들 베토벤이 모차르트와 같은 음악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하루에도 몇시간씩이나 강제로 키보드 연습을 시켰다. 베토벤은 작곡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베토벤은 성격이 특이했다. 예를 들어서 연주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하는 중에 누가 떠들기라도 하면 당장 연주를 그만두고 나갔다. 베토벤의 음악은 그때까지의 음악형태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것이었다. 로맨틱 음악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었다. 그러한 새로운 타입의 음악으로서 처음 발표한 것이 교향곡 3번이었다. 과거의 음악에 비해서 너무나 다른 형태여서 청중들은 모두 충격에 빠질 지경이었다.  


친구들을 위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베토벤


○ George BIZET(조르즈 비제). 프랑스 낭만주의 작곡가. 1839년 10월 25일 파리에서 태어났고 1875년 6월 3일 파리 교외의 부지발(Bougival)에서 세상을 떠났다. 페레 라셰스(Pere Lachaise)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인기작품] 오페라 '카르멘'에서 '하바네라', '투우사의 노래' [대표작품] 오페라 '카르멘', '진주잡이'(Les pecheurs de perles), '아를르의 여인', 교향곡 1번. [더 알기] 오페라 '카르멘'은 비제가 세상을 떠나기 꼭 두달 전인 1875년 3월 3일 파리의 오페라 코미크에서 초연되었다. 신문들은 '카르멘'이 저속하다고 하면서 비난을 아까지 않았다. 비제가 세상을 떠난 6월 3일은 결혼기념일이었다. 비제는 파리음악원의 스승인 프로멘탈 알레비의 딸인 즈느비에브와 결혼하였다. 비제는 알레비의 미완성 오페라인 '노아'(Noe)를 완성했다. 비제는 지나친 애연가여서 담배가 입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결국 인후염에 악화되어서 심장마비로 이어졌다. 비제가 세상을 떠난 날에도 오페라 코미크에서는 '카르멘'의 공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비제의 갑작스런 죽름을 애도하기 위해 그날 '카르멘' 공연은 취소되었고 대신에 부엘듀의 '하얀 옷의 여인'(La dame blanche)가 공연되었다. '카르멘'은 비제의 장례식이 거행되는 날 저녁에 비제를 추모하기 위해 공연되었다. 석달 전에는 비난을 퍼부었던 신문들은 '카르멘'의 걸작이라면서 찬사를 보냈다. 이후 오늘날까지 '카르멘'은 세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오페라 중의 하나가 되었다. 비제는 어릴 때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열살 때에 파리음악워에 입학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청년시절의 비제


○ Johannes BRAHMS(요한네스 브람스). 낭만주의 작곡가이다. 1833년 5월 7일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함부르크는 자유도시국가였다. 1897년 4월 3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비엔나 남쪽 중앙공동묘지의 음악가 묘역에 있다. [인기작품] 자장가, 헝가리 무곡 등 [대표작품] 교향곡 1-4번, 피아노 협주곡 2번, 바이올린과 첼로를 위한 더블 콘체르토, 바이올린 협주곡, 독일 진혼곡 등 [더 알기] 바흐, 베토벤과 함께 고전음악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불리고 있다. 브람스는 베토벤의 교향곡들이 너무나 위대하여서 자기 자신의 교향곡을 만들기까지 20년이나 걸렸다. 그만큼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브람스의 교향곡은 베토벤 이후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브람스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스승인 로베르트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 슈만을 사모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브람스와 요한 슈트라우스의 부인인 아델레


○ Anton BRUCKNER(안톤 브루크너). 오스트리아-독일 낭만주의를 마지막으로 장식한 작곡가. 1824년 9월 4일 린츠 교외의 안스펠덴()에서 태어났고 1896년 10월 11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브루크너의 시신은 린츠 인근의 장크트 플로리안()에 있는 아우구스틴수도원의 오르간 아래의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대표작품] 11개의 교향곡, 종교음악 등. [더 알기] 지휘자 한스 폰 뷜로브는 브루크너에 대하여 '반은 천재, 반은 바보'라고 말했다. 브루크너는 다른 작곡가들 앞에서는 극도로 겸손하였다. 특히 바그너는 마치 신처럼 존경했다. 그는 작곡에는 대단히 신중했다. 그래서 교향곡 1번을 작곡하기 전에 연습교향곡을 작곡했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은 미완성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베토벤과 마찬가지로 9개의 교향곡을 남긴 셈이다. 브루크너는 뛰어난 오르가니스트였다. 10세 때에 이미 완성된 오르가니스트였다. 그는 13세 때에 장크트 플로리안에 있는 아우구스틴수도원에 들어가서 본격적인 음악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10대 초반의 소년이면서 아우구스틴수도원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했다. 그가 연주했던 오르간은 나중에 '브루크너 오르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브루크너의 시신은 그 오르간의 아랫쪽에 안치되어 있다. 브루크너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하지만 여러번이나 결혼하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상대가 모두 10대의 어린 소녀들이었다. 일례를 들면 친구의 딸인 루이제라는 소녀에게 마음이 끌려서 결혼하자고 요청했으나 나이차이가 너무 많아서 당연히 거절당한 일이다. 브루크너는 루이제가 청혼을 거절하자 칸타타 '거절'(Entsagen)을 작곡했다고 한다.


안톤 브루크너 초상화


○ Benjamin BRITTEN(벤자민 브리튼). 영국의 현대적 고전음악 작곡가. 1913년 11월 22일 서포크의 로우이스트오프트(Lowestoft)에서 태어났고 1976년 12월 4일 역시 서포크의 알드버러(Aldeburgh)에서 세상을 떠났다. 알드버러의 성베드로-성바오로 교회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인기작품] '청소년을 위한 오케스트라 입문'(The Young Person's Guide to the Orchestra). 영화 '나이트 메일'(Night Mail)의 음악. [대표작품] 심플 심포니(Simple Symphony), 오페라들인 '피터 그라임스'(Peter Grimes), '루크레치아의 능욕'(The Rape of Lucretia), '알버트 헤링'(Albert Herring), '빌리 버드'(Billy Budd), '한여름 밤의 꿈'(A Midsummer Night's Dream), '전쟁 레퀴엠'(War Requiem) 등. [더 알기] 브리튼은 20세기에 가장 위대한 오페라 작곡가 중의 한사람이다. 브리튼 이전에는 약 250년 동안 내세울만한 영국 오페라가 없었다. 브리튼은 영국에도 오페라가 있다는 것을 세계에 알린 사람이다. 브리튼은 2차 대전의 직전에 미국을 방문한 일이 있다. 1942년에 영국으로 돌아온 그는 '양심적 병역거부자'(Conscientious objector)가 되었다. '전쟁 레퀴엠'은 코벤트리 대성당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코벤트리 대성당은 2차 대전 중에 나치의 폭격을 받아 파손되었었다. 브리튼은 1976년에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다. 브리튼은 파트너인 테너 피터 피어스(Peter Pears)와 함께 '알드버러 페스티발'을 시작했다. 이 음악제는 오늘날 세계적인 유명한 음악제로 발전하였다. 페스티발의 메인 이벤트는 알드버러에 있는 오래된 맥주공장에서 열린다. 보리를 몰트로 만들던 건물이었다.


벤자민 브리튼과 평생의 파트너인 테너 피터 피어스. 두 사람은 합동하여서 알드버러 페스티발을 창립하였다.


○ Frédérick CHOPIN(프레데릭 쇼팽). 낭만주의 작곡가. 1810년 3월 1일 폴란드의 바르샤바 인근 첼라초바()에서 탄생했다. 혹자는 탄생일이 2월 22일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바르샤바는 나폴레옹이 설립한 바르샤뱌공국(Duché de Varsovie)이었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쇼팽은 프랑스 국적으로 태어났다. 1849년 10월 17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파리의 페레 라셰스 공동묘지에 묘소가 있다. 그러나 쇼팽의 심장은 바르샤바의 성십자가교회에 안치되어 있다. [인기작품]. 미뉴트 왈츠(왈츠 D 플랫 장조, Op 64의 No 1), 장송곡(피아노 소나타 2번 B 플랫 단조, Op 35의 3악장에 나오는 음악). [대표작품]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 연습곡(에뛰드) Op 10과 Op 25, 베르세우스(Berceuse), 기타 수많은 왈츠, 마주르카, 폴로네스, 녹턴 등 [더 알기] 쇼팽은 음악신동으로서 7세 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15세 때에는 제정러시아의 짜르를 위해 피아노를 연주했다. 짜르는 쇼팽의 연주를 무척 좋아해서 고맙다는 뜻으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주었다. 쇼팽의 피아노 곡들은 과거의 스타일과는 전혀 다른 것이어서 과거의 방법으로 피아노를 공부했던 사람들로서는 연주하기가 생소했다. 그래서 쇼팽은 자기 작품의 연주에 도움이 되고자 연습곡들을 작곡했다. 쇼팽의 작품들은 거의 모두 서정적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또한 분노와 절망을 표현하기도 했다.


쇼팽의 임종. 1849년 테오필 크비아트코브스키 작


○ Claude DEBUSSY(클로드 드비시). 낭만주의 시기로부터 현대 시기로 변천하는 과정의 작곡가이다. 그러나 드비시의 음악은 너무나 오리지널하기 때문에 후기낭만주의 또는 초기 현대주의 음악이라고 단언하기가 어렵다. 음악학자들은 드비시의 음악을 인상주의라고 말한다. 드비시는 1862년 8월 22일 프랑스의 생 제르멩 안 레이(Saint-Germain-en-Leye)에서 태어나서 1918년 3월 25일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드비시의 묘소는 파리의 파시(Passy) 공동묘지에 있다. [인기작품] '달빛'(Claire de Lune), '목신의 오후'(L'apres-midi d'un faune), 피아노 소품집인 '어린이 코너'에서 '골리웍의 케이크워크'(Golliwogg's Cakewalk) [대표작품] 오페라 '플레아와 멜리상드'(Pelléas et Mélisande), 전주곡 1권과 2권, 오케스트라를 위한 '바다'(La Mer). [더 알기] 드비시의 '목신의 오후' 전주곡은 클래시컬 음악에서 현대음악으로 발전하는 첫번째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드비시의 음악의 특징은 조용하고 부드러워서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주는 것이다. 드비시의 작품은 대부분 피아노를 위해 쓴 것이다. 오페라 '플레아와 멜리상드'는 그때까지의 오페라와 비교할 때에 전혀 다른 스타일의 것이었다. 드비시 이전에도 그런 오페라가 없었고 드비시 이후에도 그런 오페라가 없었다. 드비시는 복잡한 애정행각의 소유자였다.


'플레아와 멜리상드'의 환상적인 무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한 무대이다.


○ George Friderick HANDEL(조지 프리데릭 헨델). 바로크 시기의 작곡가이다. 1685년 2월 23일 독일의 할레(Halle)에서 태어났다. 당시 할레는 마그데부르크(Magdeburg) 공국에 속한 도시였다. 헨델은 1759년 4월 14일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 내에 있다. [인기작품] 오라토리오 '메시아'에서 '할렐루야 합창', 오페라 '세르세스'에서 라르고(옴브라 마이 푸), 대관식 음악으로 작곡한 '제사장 사독'(Zadok the Priest). [대표작품] 오라토리오 '메시아', 수상음악(Water Music), 왕궁의 불꽃 놀이(Music for the Royal Fireworks), 오르간 협주곡 Op 7, 오페라 '알치나' '세르세스' '아그리피나' 등. [더 알기] 헨델은 하노버 선제후인 게오르게를 위한 카펠마이스터(음악감독)이었다. 게오르게는 나중에 영국의 조지 1세가 되었다. 그래서 헨델은 런던에 가서 조지 1세의 궁정작곡가로 봉사했다. '제사장 사독'은 1727년 조지 2세의 대관식을 위해 작곡한 것이다. 그로부터 이 곡은 영국에서 대관식의 공식음악으로 사용되어 왔다. '수상음악'은 조지 2세가 테임스강에서 뱃놀이를 하는 중에 연주되도록 작곡한 것이다. '왕궁의 불꽃놀이'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작곡한 것이다. '할렐루야' 합창이 연주될 때에는 청중들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이 하나의 관례로 되어 있다. 조지 2세가 '할렐루야' 합창을 들으면서 너무나 감동적이어서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섰던 것이 유래라고 한다.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서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따라서 일어서는 것이 법도였기 때문에 '할렐루야'가 연주될 때에 모두들 조지 2세를 따라서 일어서 있었다고 한다. 베토벤은 헨델에 대하여 '그는 세상 어느 작곡가보다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다. 나는 그의 무덤 앞에서 모자를 벗고 무릎을 꿇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헨델의 '수상음악'을 들으면서 테임스강에서 뱃놀이를 하고 있는 조지 1세. 1717년.

  

○ Joseph HAYDN(요제프 하이든). 고전시기의 작곡가. 1732년 3월 31일 오스트리아의 로라우(Rohrau)에서 태어났고 1809년 5월 31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비엔나 남쪽 아이젠슈타트(Eisenstadt)의 버그키르헤(Bergkirche)에 마련되어 있다. [인기작품] 현악4중주 Op 76의 3번 '황제'(Kaiser), 교향곡 94번 '놀람'(실제로는 2악장), 오라토리오 '천지창조'에서 '하늘의 주의 영광을 말하고'(Die Himmel erzählen die Ehre Gottes) [대표작품] 교향곡 94번 '놀람', 교향곡 104번 '런던', 교향곡 100번 '군대', 교향곡 101번 '시계' 등, 현악4중주곡들, 오라토리오 '천지창조', 미사곡들, 오케스트라곡인 '십자가상의 칠언'(Die sieben letzten Worte unseres Erlosers am Kreuze) [더 알기] 하이든은 104편의 교향곡을 작곡했다. 그래서 '교향곡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하이든은 현악4중주곡을 70편 이상이나 작곡했다. 그래서 '현악4중주의 아버지'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다. 하이든은 간혹 '파파 하이든'이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그를 존경해서였다. 하이든은 모차르트와는 달리 작곡으로 상당히 부유한 생활을 했다. 하이든은 그의 오페라가 대단히 훌륭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날 미안하지만 그의 오페라는 거의 공연되고 있지 않다. 하이든은 신앙심이 매우 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조크도 대단히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대표적으로 그의 교향곡 '놀람'을 보면 알수 있다. 청중들이 조용한 음악을 기대하고 있는 중에 갑자기 큰소리의 음악이 나오므로 놀랐기 때문에 '놀람'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당시에는 대단히 놀라게 만드는 음악일지 모르지만 오늘날에는 놀라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이든은 별로 잘 생긴 얼굴이 아니었다. 하이든도 자기가 못생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쁜 여자들이 자기를 왜 좋아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하이든의 동생인 미하엘 하이든도 상당히 재능있는 작곡가였다. 하이든은 세상을 떠나서 그의 시신이 수난도 겪으면서 이장도 여러번 해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안식처를 찾은 것은 그가 세상을 떠난지 145년 후인 1954년이었다. 그가 오랫동안 지낸 아이젠슈타트이었다.  


현악4중주곡의 연습을 지도하는 하이든. 아이젠슈타트


○ Franz LISZT(프란츠 리스트). 낭만주의 작곡가. 1811년 10월 22일 헝가리에 속한 소프론 지역의 라이딩 마을에서 태어났다. 라이딩은 지금은 오스트리아의 부르겐란트주에 속한 곳이다. 1886년 7월 31일 독일의 바이로이트에서 세상을 떠났다. 바이오리트의 알터 프리드호프(Alter Friedhof)에 안장되었다. [인기음악] 헝가리 광시곡, 사랑의 꿈(Liebesträume) 제3번 [대표작품] 헝가리 광시곡(라프소디), 피아노 소나타 B 단조, '순례의 해'(Années de Pèlerinage), 피아노 협주곡 1번과 2번, 교향시 '파우스트 심포니'. [더 알기] 리스트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피아니스트였다. 작곡가로서 많은 피아노곡을 남겼다. 그러나 대부분 연주하기에 너무 어려운 곡이어서 피아니스트들을 힘들게 하고 있다. 리스트 당시에는 피아노가 오늘날의 피아노처럼 단단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연주하는 중에 줄이 끊어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사실 청중들은 만일 리스트가 피아노 줄을 끊지 않으면 오히려 실망했다고 한다. 리스트는 바그너의 열렬 팬이었다. 리스트의 유일한 딸인 코지마는 결국 남편과 이혼하고 바그너와 결혼하였다. 뛰어난 지휘자인 남편 한스 폰 뷜로브는 바그너 팬이었다. 브람스는 리스트의 음악을 좋아하지 않았다.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리스트가 브람스의 피아노협주곡 B 단조를 연주할 때면 일부러라도 잠에 들었다. '순례의 해'는 리스트가 유럽 각지를 방문하여서 그곳의 풍광을 마치 일기처럼 그린 작품이다. 그래서 음악일기라고 부른다. 그런 종류의 음악은 '순례의 해'가 처음일 것이다. 교향시라는 장르의 음악을 처음 작곡한 사람도 리스트였다. 오케스트라로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다. 리스트는 잘 생겨서 젊은 시절에 온 동리 여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훗날 그는 가톨릭의 사제가 되었다.


 리스트의 피아노 연주회는 언제나 대만원이었다. 특히 귀부인들이 많았다. 그의 피아노와 의자는 꽃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 Gustav MAHLER(구스타브 말러). 후기 낭만주의 작곡가. 1860년 7월 7일 보헤미아의 칼리스테(Kaliste: Kalisicht)에서 태어났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지역이었다. 1911년 5월 18일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났다. 비엔나 교외의 그린칭공동묘지(Grinzinger Friedhof)에 안장되었다. [인기작품]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 1971년도 영화인 '베니스의 죽음'(Death in Venice)에 사용되었다. [대표작품] 교향곡 1-10번. [더 알기] 교향곡들은 연주시간이 긴편이고 많은 연주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연주시간이 가장 짧은 것이 교향곡 1번 '거인'으로 약 1시간이다. 교향곡 2번부터 10번까지는 연주시간이 대략 1시간 반이나 걸린다. 연주자로 말하자면 교향곡 8번이 가장 많은 연주자를 필요로 하는 것이어서 '천의 교향곡'(Symphony of a thousand)이라고 불린다. 물론 실제로 1천명 연주자가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보통 이상의 많은 연주자를 필요로 하는 교향곡이다. 그리고 그의 교향곡에는 깊은 감정이 담겨 있다. 말러의 시기에는 그의 교향곡들이 별로 인기를 끌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 말러는 지휘자로서 더 유명했다. 그러나 연주에 있어서는 대단히 엄격해서 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조그만 실수라도 용납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개인적으로 보면 말러는 살면서 많은 슬픔을 겪은 사람이었다. 말러는 가난한 집 출신이었다. 할머니는 거리에서 행상을 하며 아들을 키웠다. 말러의 아버지는 마부였다. 그러다가 나중에 돈을 벌어서 시골에서 조그마한 여관을 운영했다. 말러에게는 13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말러는 그 중에서 두번째였다. 첫번째는 아들이었는데 유아사망했다. 말러의 형제들은 대부분이 어릴 때 세상을 떠났다. 말러는 동생들이 죽어 나갈 때마다 한없는 슬픔을 이겨내야 했다. 말러는 유명한 화가인 에밀 쉰들러의 딸인 알마 쉰들러와 결혼하였다.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재원이었다. 결혼후 두 딸을 두었다. 첫째 딸 마리아는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말러의 부인인 알마는 많은 스캔들을 뿌리는 여인이었다. 그것도 역시 말러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에서는 그의 슬픔들을 들을수 있다. 말러는 어디를 가서 살던지 고향과 집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보헤미아 출신이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서 무시를 당해야 했고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 사람이기 때문에 무시를 당했으며 어디를 가던지 유태인이기 때문에 무시를 당했다. 헐리우드의 어떤 영화감독은 말러의 음악을 너무나 좋아해서 1971년에 그가 감독한 영화 '베니스의 죽음'에 말러의 음악을 사용했다. 그 감독은 또 다른 영화를 위해 말러에게 음악을 작곡해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말러가 이미 6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것을 알고 있지 못했다. '백야' '로코와 그의 형제들' 등 수많은 걸작을 감독한 루키노 비스콘티였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말러. 막스 오펜하이머 작. 1935년


○ Felix MENDELSSOHN(펠릭스 멘델스존). 낭만주의 작곡가. 1809년 2월 3일 독일의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당시에 함부르크는 독립된 도시국가였다. 1847년 11월 4일 라이프치히에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베를린의 삼위일체공동묘지(Kreuzberg: Dreifaltigkeitsfriedhof)에 있다. [인기작품]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에 나오는 결혼행진곡, 가곡 '노래의 날개 위에'. 바이올린 협주곡 E 단조 [대표작품] 교향곡 3번 '스코틀랜드', 교향곡 4번 '이탈리아', 교향곡 5번 '종교개혁', 바이올린 협주곡 1번과 2번, 현악4중주곡 6번, 오라토리오 '엘리야', 오르간을 위한 여섯개의 소나타, 무언가. [더 알기] 멘델스존은 영국을 무척 좋아해서 몇번이나 방문했다. 빅토리아 여왕 치하의 영국도 멘델스존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멘델스존은 빅토리아 여왕과 매우 가까운 사이로 지냈다. 빅토리아 여왕은 큰 딸 빅토리아와 프러시아의 프릳드리히 황태자의 결혼식에 사용할 음악을 직접 선택했다. 멘델스존의 극음악 '한여름 밤의 꿈'에서 결혼행진곡이었다. 신랑신부가 부부로서의 서약을 마치가 교회당으로부터 걸어 나올 때 연주되었다. 이후로 멘델스존의 결혼행진곡은 세계에서 사용되는 결혼행진곡이 되었다. 멘델스존의 누이인 패니도 뛰어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였다. 멘델스존의 아버지는 처음에 어린 멘델스존은 법이나 경제를 공부하도록 하고 누이 패니를 음악가로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여자가 음악가로서 성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그만두도록 했다. 대신에 어릴 때부터 놀라운 음악적 재능을 보인 멘델스존을 음악가로 만들기로 했다. 멘델스존은 지휘자로서도 훌륭했다. 멘델스존은 지휘자가 바톤을 사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같은 아이디어를 영국에서 처음으로 시도하였고 그후로 다른 지휘자들도 지휘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멘델스존은 바흐의 열열한 팬이었다. 바흐가 세상을 떠나고 나자 바흐의 이름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멘델스존의 바흐의 음악을 찾아서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오늘날 사람들이 바흐의 음악을 놀랍도록 사랑하게 되었다.



1821년에 칼 프리드리히 첼러는 봐이마르에 있는 친구 괴테를 방문했다. 괴테는 72세였다. 첼러는 12세의 제자 멘델스존을 데리고 갔다. 멘델스존은 괴테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 괴테는 멘델스존의 재능을 보고 놀라워하며 천재라고 칭찬했다.


○ Olivier MESSIAEN(올리비에 메시앙). 현대작곡가. 1908년 12월 10일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탄생했고 1992년 4월 27일 파리 교외의 클리시(Clichy)에서 세상을 떠났다. 메시앙은 리옹 남쪽, 그르노블 서쪽의 생엉투안라베이(Saint-Antoine-l'Abbaye)의 공동묘지에 묘소가 있다고 한다. [대표작품] 투랑갈리아 교향곡,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곡'(Quartuor pour la fin du Temps),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변화(La Transfiguration de Notre Seigneur Jésus-Christ), '죽은자의 부활을 기다리며'(Et exspecto resurrectionenm mortuorum), '골짜기로부터 하늘의 별들까지'(Des canyons aux étoiles), 오페라 '아시시의 성프란치스코'(Saint-Francois d'Assise), 피아노 또는 오르간을 위한 작품 다수(예를 들면 '새들의 카탈로그'(Catalogue d'oiseaux). [더 알기] 많은 작곡가들이 독실한 기독교인들이었지만 메시앙은 특별히 신앙이 돈독했다. 그의 작품들은 거의 모두 주님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어떤 작품은 대단히 기쁨네 넘친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을 알게 된 기쁨을 표현한 것이다. 메시앙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를 무척 사랑했다. 그의 작품 중에서는 새들의 노래를 옮기려고 한 것들이 많이 있다. 특히 피아노 작품 중에 그러하다.  '시간의 종말을 위한 4중주곡'은 그가 2차 대전 중에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혀서 제8포로 수용소에 있을 때에 작곡한 것이다. 초연은 포로수용소에서 있었다. 모든 전쟁포로들은 물론이고 독일 경비병까지 들으로 왔었다. 메시앙은 나중에 그의 연주회 중에서 가장 훌륭한 청중들이었다고 밝혔다. 사용한 악기는 수용소에서 구할수 있는 유일한 악기였고 누구나 연주할수 있는 악기였다. 이 곡의 피날레는 대단히 평화스랍고 아름다웠다. 포로수용소에서 작곡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정말로 놀라운 작품이었다.


독일군 제8포로수용소에서 악단을 조직해 연주회를 갖고 있는 메시앙. 제8포로수용소는 지금의 폴란드, 당시에는 실레지아에 있었다.

  

○ Claudio MONTEVERDI(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르네상스라고 불리기 직전의 바로크 작곡가. 1567년 5월 초에 이탈리아의 크레모나에서 탄생했다. 5월 15일에 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그 전에 태어났다. 1643년 11월 29일 베니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베니스의 프라리(Basilica di Santa Maria Gloriosa dei Frari) 교회에 안치되었다. [대표작룸] '복되신 성모의 저녁기도'(Verspero Della Beata Vergine), 오페라 '오르페우스의 전설'(La Favola d'Orfeo), 오페라 '아리아드네'(Ariadne), 오페라 '율리시스의 조국 귀환'(Il ritorno d'Ulisse in patria), 오페라 '포페아의 대관식'(L'incornonazione di Poppea), 기타 소규모 합창단을 위한 마드리갈 작품들. [더 알기] 바로크 시기의 대표적인 작곡가 중의 한 사람이다. 몬테베르디는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최초의 오페라를 작곡했기 때문이다. 몬테베르디의 오페라는 수백년 전에 만들어진 것들이지만 오늘날에도 자주 공연되고 있다.


오페라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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