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와 음악/가곡 왕 슈베르트

슈베르트 더 알기

정준극 2017. 12. 8. 11:57

우리가 잘 알지 못했던 슈베르트에 대한 이얘기 저얘기


작곡중인 슈베르트


- 슈베르트는 생애동안에 거의 5백곡이 넘는 아름다운 가곡들을 작곡했다. 31세라는 짧은 생애를 살았던 사람으로서 놀라운 일이었다. 슈베르트의 가곡들을 모두 음반에 담는 노력이 기울여졌다. 2010년에 도이체 그라마폰이 음반으로 만들었다. 모두 21개의 CD에 담았다. 노래는 세기의 바리톤인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Dietrich Fischer-Dieskau)였다. 1925년 베를린에서 태어난 피셔 디스카우는 도이체 그라마폰의 취입을 마치고 2년 후인 2012년 5월에 세상을 떠났다. 피셔 디스카우는 진실로 위대한 슈베르티안(Schubertian)이었다.


도이체 그라마폰이 내놓은 슈베르트의 연가곡 '아름다운 물방앗간 아가씨', '겨울나그네'. '백조의 노래'.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가 제랄드 무어의 피아노 반주로 취입했다.


- 슈베르트에게는 별명이 많았다.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별명은 '가곡의 왕'(Koning der Lieder)였지만 친구들은 그에게 몇가지 재미난 별명을 붙여 주었다. 첫째는 슈봠메를(Schwammerl)이었다. 작은 버섯이라는 뜻이다. 슈베르트가 키가 작고 약간 통통했기 때문에 마치 버섯같다고 해서 그런 별명을 붙였다. 슈베르트는 키가 5피트 1인치였다. 센티미터로 환산하면 약 1미터 55센티였다. 또 다른 별명은 카네바스(Kanevas)였다. 슈베르트는 새로운 친구를 만나면 '누구시죠?'라고 묻는 습관이 있었다. 독일어로 Kann er was?(칸 에어 봐스)이다. 그래서 친구들은 슈베르트를 보고 '야, 카네바스! 어디 가니?'라고 말했던 것이다. 슈베르트는 약간 한쪽 다리가 길었다. 그래서 절름거리며 걷거나 발을 질질 끌면서 걷는 편이었다. 그러나 친구들은 그런것 가지고 별명을 붙이지는 않았다.


슈베르트와 친구들(슈베르티아데). 모리츠 폰 슈빈트 작. 1868년.


- 슈베르트에게 형이 있다는 것을 알겠는데 형제자매가 모두 몇 명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사실 별로 알 필요도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슈베르트 팬이라고 하면 슈베르트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슈베르트의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 플로리안 슈베르트(1763-1830)는 두번 결혼했다. 첫번째 결혼은 세살 연상인 마리아 엘리자베트 카타리나 비츠(Maria Elisabeth Katharina Vietz: 1756-1812)라는 여인이었다. 두 사람은 무려 14명의 자녀를 두었다. 슈베르트는 그중에서 12번째였다. 그런데 14명의 자녀 중에서 다만 다섯명만 생존하였다. 당시에는 비엔나뿐만 아니라 유럽의 어느 곳에서든지 유아사망율이 매우 높았다. 슈베르트는 생존한 다섯 형제자매 중에서 막내였다. 아버지 프란츠는 슈베르트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재혼하였다. 그리고 자녀를 다섯 명이나 더 두었다. 그러니까 잘 계산해 보면 슈베르트의 모든 형제자매는 이복을 포함해서 호적상 19명이나 된다. 새어머니가 낳은 자녀 다섯 명 중에서 몇 명이나 생존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모두 슈베르트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사족이지만 슈베르트는 분명히 비엔나에서 태어나고 비엔나에서 세상을 떠난 오스트리아의 작곡가이지만 그의 아버지는 모라비아의 농부였다가 비엔나로 이민온 사람이었다. 모라비아는 지금의 체코공화국에 속한 지역이다. 그러므로 슈베르트는 비엔나에서 태어나고 살았지만 그의 원래 고향은 지금의 체코공화국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가장 친근한 슈베르트 초상화


- 슈베르트의 사인(사인)은 무엇일까? 장질부사(장티푸스)라는 것이다. 그런데 또 다른 주장은 매독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주장은 장질부사와 매독이 합병증을 일으켜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매독은 매독균을 보유한 여성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음으로서 발생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주로 창녀들을 말한다. 슈베르트도 미안한 말이지만 젊은 나이에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과 함께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창녀들과 지낸 모양이다. 1820년대 당시에 비엔나는 인구가 별로 많지 않았는데도 무려 1만여명의 창녀들이 영업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술 얘기가 나왔으니까 말이지만 슈베르트는 당시의 다른 작곡가들과는 달리 술을 좋아했다. 교장 선생님의 아들이고 한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으며 또한 교구교회에서는 오르간 연주자로 열심히 봉사한 슈베르트인데 술을 자주 마셨다. 친교를 위해서 술 한잔 마시는 것이야 문제가 안되지만 슈베르트는 술을 많이 마시는 편이었고 더구나 술주정까지 심했다고 한다. 툭하면 옆에 있는 사람과 싸웠으며 심술궂은 일도 서슴치 않았다고 한다. 그게 모두 그의 친구들 때문이라고 볼수 있다. 슈베르트의 친구들은 화가, 시인, 작가 등이었다. 이들은 스스로를 '슈베르티안'(Schubertians) 또는 '슈베르티아드'(Schubertiads)라고 부르며 몰려 다니기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슈베르트가 활달한 성격은 아니었다. 얘기를 나눌 때에 논리가 정연하지도 못했고 자기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잘 생기거나 우아한 모습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친구들이 많았다. 그의 놀랄만한 음악적 재능과 순박한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피아노 앞의 슈베르트'. 구스타브 클림트가 음악애호가인 니콜라스 둠바의 요청으로 그린 작품


-  '아베 마리아'(Ave Maria)라는 노래는 원래 가톨릭 교회에서의 기도송이다. 성모 마리아에게 간구하는 내용을 담은 기도송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기도송으로 사용하는 '아베 마리아'로는 두 곡이 유명하다. 하나는 샤를르 구노의 '아베 마리아'이며 다른 하나는 슈베르트의 '아베 미리아'이다.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전주곡 1번에 나오는 멜로디를 바탕으로 삼은 것이다. 구노는 바흐의 멜로디를 바탕으로  '아베 마리아'를 만들었다. 바흐의 이 멜로디를 구노에게 소개한 사람은 멘델스존의 누이인 패니(Fanny)였다. 아무튼 그래서 구노의 '아베 마리아'는 보통 바흐-구노의 '아베 마리아'라고 소개되고 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원래 교회에서의 기도송으로 작곡한 것이 아니었다. 월터 스콧의 서사시인 '호수의 여인'(The Lady of the Lake)에 붙인 노래이다. '호수의 여인'은 스코틀랜드의 황량한 고원지대, 드넓은 호수, 신비한 동굴, 용맹한 전사,  반란, 사랑이 얽힌 대서사시이다. 월터 스콧은 슈베르트와 거의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시인 겸 작가이다. 슈베르트는 '호수의 여인'에 감동을 받아서 이 서사시에 나오는 시 중에서 몇 개에 노래를 붙였다. 그 중의 하나가 '엘렌의 노래'이다. 슈베르트는 주인공인 엘렌을 위해 세 곡의 노래를 작곡했다. 그 중에서 세번째가 바로 '엘렌의 세번째 노래'(Ellens dritte Gesang: D 839)로서 오늘날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이다. 월터 스콧의 '호수의 여인'은 독일의 교육자이며 역사학자인 아담 슈토르크(Adam Storck: 1780-1822)가 영어 시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슈베르트는 슈토르크의 번역 버전을 가사로 삼아서 '엘렌의 세번째 노래'를 작곡했다. 슈베르트의 '아베 마리아'는 비록 교회의 기도송으로 작곡된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슈베르트의 멜로디에 전통적인 라틴어 기도문을 가사로 붙여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로시니의 오페라 '호수의 여인'의 한 장면. 메트로폴리탄. 조이스 디도나토.


- 슈베르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작품 중의 하나는 '송어'(Die Forelle)이다. 피아노5중주곡이다. 그런데 슈베르트가 원래 '송어'라는 가곡을 작곡했다는 것은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피아노5중주곡인 '송어'는 1819년에 작곡했고 가곡 '송어'는 그보다 2년 전인 1817년에 작곡했다. 가곡 '송어'는 오스트리아의 시인인 크리스티안 슈바르트(Christian Schubart: 1739-1791)의 시를 가사로 삼은 것이다. 그런데 슈베르트는 슈봐르트의 시에서 마지막 구절은 노래에서 삭제하였다. 왜냐하면 내용이 아무래도 교육적이지 못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슈바르트의 마지막 구절을 보면 송어를 젊은 아가씨로 보았고 낚시꾼을 아가씨를 유혹하려는 못된 청년으로 보았다. 즉, '아가씨들이여, 낚시대를 들고 유혹하려는 남자들을 보시오. 조금만 잘못하면 이미 때는 늦는 답니다. 피를 흘리게 되지요'라는 내용이다. 이 구절은 젊은 아가씨들에게 젊은 남자들을 조심하라는 도덕적 경고의 메시지이며 아울러 섹스에 대한 비유이기도 했다. 그래서 슈베르트는 그런 내용이 노래가사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해서 삭제하였다. 아무튼 슈베르트의 '송어'는 그런 저런 이유로 더욱 유명해졌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송어'를 '숭어'라고 말하는데 그건 잘못된 것이다. 숭어는 영어로 gray mullet 이라고 하며 숭어과에 속한 바닷물고기이다. 송어는 영어로 trout 라고 하면 연어과에 속한 바닷물고기이다. 송어는 산란을 위해 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자기가 태어난 장소로 돌아오는 놀라운 습성이 있다.


오스트리아의 화가 칼 체비(Carl Zewy: 1855-1929)가 그린 '송어'라는 제목의 그림.


슈베르트는 가곡 '송어'에 상당한 애착을 가졌다. 그래서 1821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네번에나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서 오늘날의 가곡으로 만들었다. 피아노5중주곡을 작곡하게 된 것은 슈베르트를 좋아하는 사람으로 오베르외스터라이히의 슈타이르(Steyr)에 살고 있는 질베스터 파움가르터(Sylvester Paumgartner)라는 사람이 '송어'의 멜로디를 너무나 좋아해서 그 멜로디를 바탕으로 변주곡을 만들어서 피아노5중주곡을 작곡해 달라고 신신당부했기 때문에 슈베르트로서는 평소에 모르는 사이도 아니고 해서 작곡을 들어주었던 것이다. 파움가르트너라는 사람은 음악애호가로서 아마추어 첼리스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파움가르트너는 부자였다. 그렇게 해서 슈베르트 최대 걸작 중의 하나인 '송어'가 만들어졌다. '송어'는 피아노5중주이지만 종래의 피아노5중주 구성과는 다르다. 종래에는 피아노에 현악4중주를 합하는 구성이었다. 그러나 '송어'는 피아노,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 베이스의 구성이다. 더블 베이스가 있기 때문에 보다 흥겹다. 슈베르트는 나중에 '송어'의 주제를 다른 작품에도 인용하였다. 즉, 현악4중주곡 14번인 '죽음과 소녀', 플루트와 피아노를 위한 변주곡인 '시들은 꽃'(Trockne Blumen: D 802), 방랑자 환상곡(Wanderer Fantasy: D 760),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위한 C 장조 환상곡(Fantasia in C for Violin and Piano: D 934)에 인용하였다. 그 시대의 뛰어난 피아니스트이며 작곡가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Johann Nepomuk Hummel: 1778-1837)은 슈베르트의 5중주곡인 '송어'를 바탕으로 역시 5중주로 편곡한 작품을 만들었다. 5중주의 구성도 '송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했다. 비엔나에는 훔멜의 작품을 주로 연주하는 앙상블이 있었다. 슈베르트는 피아노5중주곡인 '송어'를 '훔멜앙상블'을 위해 작곡했다.


'송어'라는 이름의 호텔이 있다. 오스트리아 카린티아주 봐이센제(Weissensee)의 테헨도르프(Techendorf)에 있는 전원호텔이다. 힘차게 흐르는 시내가 있고 호수가 있는 마을이다.


- 슈베르트의 아버지인 프란츠는 학교 선생님이었지만 아마추어 첼리스트이기도 했다. 어린 슈베르트는 아버지로부터 음악의 기초를 배웠다. 하지만 학교 선생님으로서 슈베르트을 가르칠 능력이 되지 않았다. 얼마후 슈베르트는 당대의 작곡가인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주선에 의해 제국소년합창단의 멤버로 들어가서 노래도 부르고 음악공부도 할수 있었다. 그러나 변성기가 되자 더 이상 소년합창단원으로 있을 수가 없어서 나왔고 아버지의 일을 도와서 학교 선생님으로 봉사했다. 그러기를 3년이나 했다. 수업시간에 새로운 멜로디가 떠오르면 수업에는 관심없고 곧바로 오선지에 멜로디를 그렸다느니 하는 에피소드는 학교 선생님으로 있을 때에 나온 얘기이다.  


가곡의 왕 프란츠 슈베르트



[슈베르트 어록]


- 진실한 친구를 찾은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고 그 친구가 평생의 반려자라며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

Happy is the man who finds a true friend, and far happier is he who finds that true friend in his wife.

- 나는 나의 상상력을 장식하기 위해 할수 있는 한의 노력을 한다.

I try to decorate my imagination as much as I can.

-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슬픔을 느낄수 없다. 마찬가지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기쁨을 이해할수 없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도달할수 있다고 상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서로를 지나칠 뿐이다.

No one feels another's grief, no one understands another's joy. People imagine they can reach one another. In reality they only pass each other by.

- Easy mind, light heart. A mind that is to easy hides a heart that is too heavy.

- If only your pure and clean mind could touch me, dear Haydn, nobody has a greater reverence for you than I have.

- I never force myself to be devout except when I feel so inspired, and never compose hymns of prayers unless I feel within me real and true devotion.

- Nobody understands another's sorrow, and nobody another's joy.

- Why does God endow us with compassion?

- Every night when I go to bed, I hope that I may never wake again, and every morning renews my grief.

- When I wished to sing of love, it turned to sorrow. And when I wished to sing of sorrow, it was trransformed for me into love.

- The greatest misfortune of the wise man and the greatest unhappiness of the fool are based on convention.

- A man endures misfortune without complaint.

- There are two contrary impulses which govern this man's brain - the one sane, and the other eccentric. They alternate at regular intervals.

- The world resembles a stge on which every man is playing a part.

- Why should the composer be more guilty than the poet who warms to fantasy by a strange flame, making an idea that inspires him the subject of his own every different treat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