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전쟁의 발단

정준극 2018. 1. 17. 06:42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Österreichischer Erbfolgekrieg) - The War of the Austrian Succession

브리티쉬 어메리카 전쟁, 젠킨스 이어 전쟁, 1차 인도 카르나틱전쟁, 스코틀랜드의 자코뱅 봉기, 1, 2차 실레지아 전쟁으로 확산


무릇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마리아 테레지아 때문에 일어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대하여도 알고 있어야 할 것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1740년부터 1748년까지 8년 동안 유럽의 열강들이 거의 모두 참여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이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 대공(군주)인 샤를르 6세가 1740년에 세상을 떠나자 그의 큰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대를 이어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되고자 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당시에는 살리카법(Salic Law)이라는 일종의 불문률이 있어서 여자는 왕위나 영토를 승계받을수 없었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샤를르 6세는 딸에게 황제의 자리와 영토를 모두 물려주고자 했다. 그건 샤를르 6세에게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들이 하나 있긴 있었는데 아주 어릴 때에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 6세에게는 결국 딸만 둘이 있게 되었다. 그 중에서 큰 딸이 역사적으로 유명한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샤를르 6세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비록 여자이지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와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될수 있는 자격이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그래야 어쨋든 비록 여자이지만 수백년 유지되어 온 합스부르크가 명맥을 이을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럽 열강들의 생각은 달랐다. 샤를르 6세가 황제로 있을 때에는 꿈쩍도 못하던 제후들이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들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여자가 맡는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되는 일이라는 주장이었으며 아울러 허구헌날 합스부르크 가문의 출신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있느냐면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에 반발하였다. 그중에서도 프랑스, 프러시아, 바바리아가 합스부르크의 권위에 노골적으로 도전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지하는 축은 프랑스와 불구대천의 원수지간이었던 영국과 더치 공화국, 여기에 사르디니아 왕국과 작소니 선제후국이 동참하였다.


제국의 영광이 배어 있는 비엔나


결국 말로 타협이 안되면 별로 할 일도 없는 터에 전쟁으로 힘겨루기를 할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8년간에 걸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오스트리아라고 하면 오늘날에는 비엔나를 수도로 삼고 있는 오스트리아 공화국만을 얘기하는 것이어서 작은 나라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당시에 오스트리아라고 하면 현재의 오스트리아는 물론, 헝가리, 크로아티아, 네덜란드, 보헤미아, 북부 이탈리아에 이르기까지 합스부르크가 지배하는 지역을 집단적으로 부르는 명칭이었다. 그러므로 유럽대륙에서 대국 중에서도 대국이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지지하는 세력과 반대하는 세력이 마침내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스페인은 사실상 합스부르크와 혈연관계에 있었다. 그런데도 북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의 세력을 축출하기 위해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전쟁에 참여하였다. 스페인은 1739년 이래 영국과 식민지 및 무역과 관련하여 계속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에 이골이 나서인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큰 문제도 아니었다. 스페인이 오스트리아와 알륵을 빚었던 것은 18세기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에서 스페인은 죽어라고 고생만 하고 돈도 많이 썼는데 재주는 곰이 부린다는 말처럼 이탈리아 반도에서 스페인은 별로 이득을 보지 못했고 대신 오스트리아가 실속을 차렸기 때문에 속이 무척 상해 있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마치 세계대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규모가 커서 영국 영향의 미국에서 있었던 '킹 조지의 전쟁', 인도에서 벌어졌던 '1차 카르나틱 전쟁', 영국과 스페인이 1739년부터 다툰 '젠키스 귀의 전쟁'. 스코틀랜드에서의 '1745년의 자코바이트 봉기', 그리고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러시아의 프데레익(프리드리히)이 밀고 당기면서 난리를 폈던 1차 및 2차 실레지아 전쟁을 모두 포함한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한 마리아 테레지아.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인 샤를르 6세의 큰 딸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에 따른 전쟁이 유럽 대륙에서 한번 불길이 붙자 다른 지역에서도 '전쟁이 났다고? 전쟁 좋지!'라면서 심심하던 판에 잘되었다는 듯이 참견하기 시작했다. 결국 비엔나에서 붙은 불길은 걷잡을수 없이 번지기 시작해서 다른 지역으로 확산되어 또 다른 전쟁의 빌미를 가져다 주었다. 신대륙 아메리카에서는 영국의 조지 2세에 의한 브리티쉬 어메리카 전쟁(War in British America)이 벌어졌다. 영국은 스페인과 이른바 '젠킨스의 귀 전쟁'(War of Jenkins' Ear)에도 휩싸이게 되었다. 인도에서는 1차 카르나틱 전쟁(1st Carnatic War)가 일어났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자코뱅의 봉기가 있었다. 그리고 1, 2차 실레지아 전쟁이 있었다. 그리하여 비록 공식적인 전쟁의 명칭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이지만 아메리카 대륙과 아시아에까지 전쟁의 불길이 요원하게 번졌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를 차수(次數)없는 세계대전이라고까지 불렀다. 오스트리아의 왕위계승 전쟁인데 전화는 엉뚱하게도 영국과 스페인의 전쟁으로까지 번진 것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스페인은 1739년 이래 영국과 신대륙에서의 식민지 문제, 무역문제 등으로 전쟁상태였는데 그러다가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을 두고 서로 전쟁을 불사하게 되었다. 북부 이탈리아에 대한 지배권은 18세기에 있었던 스페인의 왕위계승 전쟁의 결과로 오스트리아가 가지고 있었다. 스페인은 전쟁을 위한 군비를 제공했지만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오스트리아에 모두 양보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1748년 액스 라 샤플르(Aix-la-Chapelle) 조약으로 마감되었다. 이에 따라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대공비와 헝가리 여왕으로서의 권리를 확인했지만 오스트리아가 관할하고 있던 실레지아는 프러시아의 손에 넘어갔다. 그렇게 해서 일단락 되는듯 싶었지만 오스트리아는 실레지아를 프러시아에 빼앗긴 것이 너무 억울해서 잠을 잘수가 없었다. 그래서 실레지아 탈환을 위한 전쟁을 벌였으니 그것이 종국에는 또 다른 전쟁, 즉 7년 전쟁(1756-1763)으로 확산되었다. 7년 전쟁은 당시 유럽에서 불고 있었던 정치개혁의 여파를 타고 복잡하게 얽혀지는 전쟁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원인을 제공한 샤를르 6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이다.


기왕에 합스부르크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한때 유럽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고 통치하였던 합스부르크 왕조 또는 합스부르크 제국은 언제 시작하여 언제 막을 내렸는가? 이에 대하여는 학자들 사이에서 여러 주장이 있지만 크게는 두가지 기간으로 정리된다. 하나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까지 겸한 1526년으로부터 계산하여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이 헝가리와 대타협을 거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1차 세계대전을 야기했다가 결국은 전쟁에서 져서 제국의 문을 닫은 시점까지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기 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기라고 본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1526년의 시작은 같지만 프란시스(프란츠) 2세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나폴레옹의 영향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한 1804년까지를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기 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기로 보는 경우도 있다. 프란시스 2세는 1804년에 오스트리아 제국을 선포하고 프란시스 1세가 되었으며 1806년에는 6백년 이상 지탱해온 신성로마제국을 도저히 지탱할수가 없어서 스스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신성로마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합스부르크-로레인 가문의 프란시스 2세 황제(오스트리아제국 황제로서는 프란시스 1세)

 

그런가하면 어떤 학자들은 스위스의 산간에 칩거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오스타리키(현 오스트리아의 전신)를 통치권을 얻은 1273년부터 합스부르크 왕조 또는 합스부르크 제국이 시작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어떤 학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서 합스부르크 가문이 스위스에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1020년대부터 계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합스부르크 왕조가 막을 내린 시기를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고 마리아 테레지아가 로레인의 프란시스와 결혼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이 합스부르크-로레인 가문으로 명칭을 바꾼 1740년을 합스부르크 왕조의 막이 내린 시기로 보는 학자들도 있고 또 어떤 학자는 심지어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큰 아들인 요셉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1780년을 합스부르크 왕조가 마지막을 장식한 시점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요셉 2세의 아버지, 즉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은 정통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이 아니라 저 멀리 독일의 로트링겐(로레인) 가문 출신이므로 정확히 말해서 요셉 2세부터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의한 신성로마제국의 통치가 아니라 부계관례에 따라 로레인 가문에 의한 통치라고 간주할수 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는 루돌프 1세가 오스트마르크트를 통치하기 시작한 1278년부터 마리에 테레지아가 세상을 떠나고 새롭게 합스부르크-로레인 가문으로 이어진 1780년까지를 합스부르크 왕조 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시기라고 보는 견해이다. 하지만 사학자들은 1526년부터 1867년까지를 공식적인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기로 보고 있다. 합스부르크 사람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처음 선출된 사람은 프레데릭 3세(1452-1493)이며 그후로 합스부르크 왕조는 12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하였다.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 이후의 합스부르크-로레인 왕조에서는 4명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배출되었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권위를 굳건히 만든 페르디난트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겸 오스트리아 대공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의 원인제공자인 샤를르 6세는 사실 그의 형인 요제프 1세가 1711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생각치도 않았는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된 인물이다. 샤를르 6세는 독일에 있는 작은 공국인 브라운슈봐이크-볼펜뷔텔(Braunschweig-Wolfenbüttel) 대공의 딸인 엘리자베트 크리스티네와 결혼하였다. 그제나 예나 지금이나 군주에게 있어서 필요한 것은 어서 속히 후사를 이을 아들을 두는 것이었는데 바라는 아들은 태어나지 않고 딸만 자꾸 태어났다. 마리아 테레지아, 마리아 안나, 마리아 아말리아였다. 그러다가 하늘도 무심하지 않았던지 드디어 아들 레오폴드가 태어났는데 이 또한 무슨 조화인지 태어난지 7개월만에 세상을 떠났다. 샤를르 6세로서는 아들 레오폴드가 계속 살았더라면 후사 걱정을 하지 않아도 좋을뻔 했는데 그렇게 되지 못하였다. 샤를르 6세는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공국이 다른 왕조 또는 다른 가문의 손에 넘어가면 큰일이라고 생각했다. 방법은 하나였다. 큰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왕위계승자로 만드는 것이었다. 문제는 아들만이 후사를 계승할수 있다는 이른바 살리카법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샤를르 6세는 그건 무슨 말도 안되는 법이냐면서 따를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살리카법(또는 살리안법, 라틴어로는 Lex salica)라고 하는 것은 기원후 500년경 프랑크왕국의 초대 국왕인 클로비스가 제정한 법령으로 여자는 왕위를 계승하거나 영토를 승계받을수 없다는 내용이다. 그것이 비록 프랑크 왕국에서 만든 것이지만 나중에는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들이 살리카법을 준수하였다. 살리카법이라는 말은 프랑크왕국이 처음에는 살리안족과 프랑크족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살리안-프랑크왕국에서 만든 법이라고 해야 타당하지만 프랑크 왕국에서 살리족이 중심세력이었으므로 살리안법, 또는 살리카법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요제프 1세. 샤를르 6세의 형.


샤를르 6세가 아들이 없기 때문에 딸을 후임자로 결정하겠다고 하는 주장은 일견 왕실에서의 가족문제인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이면에 여러 복잡한 사정이 자리잡고 있음을 간과할수 없다. 신성로마제국이란 것은 기본적으로 지금의 독일 땅에 흩어져 있는 여러 왕국들의 연맹으로 시작되었다. 여기에 나중에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가 주도권을 잡고 수백년 동안 황제를 배출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오리지널 독일 국가들은 마치 합스부르크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겼다는 심정으로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일곱명의 선제후라고 하는 사람들이 선출한다. 하지만 합스부르크의 입김이 상당히 강해서 여러 제후들은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니냐는 식으로 합스부르크의 세습적인 황제계승을 묵인해 왔다. 그러는데 샤를르 6세가 도가 지나쳐서 딸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삼겠다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자 독일의 열강들은 이번 기회에 합스부르크의 오만한 장기집권을 타파하고 무언가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야 한다고들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커다란 배경이 있다. 30년 전쟁이었다. 1618년에 시작해서 30년만인 1648년에 막이 내린 대전쟁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기본적으로 로마 가톨릭을 중심으로 삼고 있는 제국이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이 1517년 마르틴 루터에 의한 종교개혁,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간의 30년 전쟁으로 인해서 두 집단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하나의 끈으로 묶여 있던 신성로마제국의 울타리가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그러는 중에 오스트리아만이 강국이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다른 나라들도 강력해지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는 뮌헨을 중심으로 한 바바리아, 베를린을 중심으로 한 프러시아, 드레스덴을 중심으로 한 작소니였다. 영토만 커진것이 아니라 세력도 커졌고 군사력도 커졌다. 그러다보니 유럽의 전통적인 힘의 균형은 새로 모습을 갖추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살리카법을 내세워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을 반대한 것은 하나의 허울일 뿐이며 실은 누가 유럽의 진정한 강자이냐를 따져 보자는 상황이었다.


샤를르 6세 이후 3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 올랐던 샤를르 7세(샤를르 알베르)


샤를르 6세가 살리카법을 무시하면서까지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왕위계승자로 삼고자 한 배경에는 1713년의 국사조치(國事措置)라는 것이 뒷받침 되어 있다. 영어로는 Pragmatic Saction이라고 하며 독일어로는 Pragmatische Santion 또는 Grundlegendes Staatsgesetz(그룬트레겐데스 슈타츠게제츠)라고 한다. 글자그대로 번역한다면 '실용주의적인 제재'라고 할수 있다. 국가 또는 제국의 근간을 이루는 기본법이 있지만 시대적 상황변화에 따라 그 기본법의 내용을 수정한 것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많은 국가에서 국사조치를 발표하였고 이들을 pragmatic sanction이라고 부르지만 대문자로 쓸 경우에는 유별나게 1713년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치를 의미한다.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치는 합스부르크 왕조가 세습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헝가리 왕국, 보헤미아 왕국,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실리 왕국,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기타 영토들을 아들이 계승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만일 아들이 없으면 딸이 계승할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골자이다. 다시 반복되는 설명이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 등등의 타이틀을 갖고 있던 합스부르크의 요제프 1세가 1711년에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합스부르크 가문의 남자로서 왕위를 계승받을수 있는 사람은 샤를르 6세가 유일했기 때문에 별로 생각치도 않았는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겸 오스트리아의 대공으로 즉위하였다. 선왕인 요제프 1세는 딸만 두었지 아들을 두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요제프 1세의 남동생인 샤를르 6세가 왕위를 계승했던 것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영국군과 프랑스군의 전투


요제프 1세에게는 사실 딸 둘과 아들 하나가 있었다. 큰딸이 마리아 요제파로서 나중에 폴란드 왕비가 된 사람이다. 그 다음이 아들 레오폴드 요제프인데 1700년에 태어났지만 1년 후에 세상을 떠났다. 만일 그 아들이 무탈하여 장성했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것인데 태어난지 1년만에 세상을 떠났으니 할 말이 없다. 그 다음이 둘째 딸 마리아 아말리아인데 바바리아의 선제후인 샤를르 알베르트와 결혼하였다. 후담이지만 마리아 아말리아의 남편인 샤를르 알베르트가 나중에 자기야 말로 샤를르 6세의 뒤를 이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 사람이라고 주장하여 결국 1742년에 주위의 강력한 권유에 의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중풍이 걸리는 바람에 3년 후인 1745년에 세상을 떠났고 여차저차하여서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인 프란츠가 프란시스 1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아무튼 마리아 테레지아가 프란츠 프란시스와 결혼하므로서 부계상속을 관례로 삼고 있던 사회에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막을 내리고 대신 프란츠 프란시스의 가문인 로레인(로트링겐) 가문이 새로 문을 열게 되었다. 물론, 갑자기 로레인 가문이 되면 난처하니까 명칭은 합스부르크-로레인 가문이라고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프란츠 프란시스는 프란시스 1세가 되었지만 내막적으로는 실권이 없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데릴사위였다.



프란시스 1세 신성로마제국 황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 합스부르크-로레인 가문의 시작


그 당시에 딸도 왕위를 계승할수 있다는 법이 있다면 당연히 마리아 요제파가 다음 왕위를 계승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두가지 문제가 생기게 된다. 하나는 1703년에 형 요제프 1세와 동생 샤를르 사이에 '계승에 대한 상호약정'(Mutual Pact of Succession)이란 것을 맺은 것이 문제가 된다. 그 내용은 만일 두 사람, 즉 요제프와 샤를르에게 아들이 없고 딸이 있다면 요제프의 딸이 샤를르의 딸보다 합스부르크 영토에 대한 우선권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형인 요제프가 무슨 사고가 생겨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 동생인 샤를르가 왕위를 계승하게 되는데 만일 샤를르에게도 아들이 없다면 합스부르크의 모든 영토는 요제파의 딸인 마리아 요제파가 상속받게 되고 샤를르의 딸인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얘기였다. 실제로 왕위계승 서열로 본다면 샤를르의 후임자는 마리아 요제파라는 것이었다. 샤를르는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으로 샤를르는 하늘이 자기에게 아들을 점지해 주지 않는 것은 운명으로 체념하지만 혹시 자기의 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왕위계승자라고 나서면 일대 혼란이 벌어지므로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713년의 '국사조치'였다. [샤를르 7세가 어떤 사람인지는 본 블로그 항목의 나중에 자세히 소개코자 함] 


요제프 1세의 큰딸인 마리아 요제파. 나중에 폴란드 왕비까지 되었다.


샤를르 6세가 딸 마리아 테레지아의 왕위계승을 염두에 두고 1713년에 '국사조치'를 발표하자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국가들 중에서 상당수가 샤를르 6세의 조치를 승인하였고 아울러 유럽의 강호들도 용인하였다. 아마도 샤를르 6세의 위세에 반하는 의견을 내세우기가 어려워서 그랬을지 모른다. 무엇보다도 제국의회가 승인했다. 그리고 스페인, 러시아, 프러시아, 영국, 프랑스가 승인했다. 1713년만해도 샤를르 6세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러므로 형 요제프 1세의 두 딸인 마리아 요제파와 마리아 아말리아가 국사조치의 대상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가 1717년에 마리아 테레지아가 태어나자 샤를르 6세는 형의 두 딸을 국사조치의 대상에서 제외하였다. 이유는 요제프 1세의 두 딸이 이미 결혼해서 다른 나라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큰딸 마리아 요제파(1699-1757)는 작소니 선제후인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했는데 나중에 아우구스투스가 폴란드의 왕이 되는 바람에 폴란드의 왕비가 되었고 둘째 딸 마리아 아말리아(1701-1756)는 바바리아 선제후인 샤를르 알베르와 결혼하였다. 샤를르 알베르는 나중에 잠시나마 샤를르 7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다. 아무튼 샤를르 6세가 마리아 테레지아를 염두에 두고 요제프 1세의 두 딸들을 국사조치의 대상에서 제외하자 두 딸들은 제국의회의 승인에 구속되는 것을 거부했다. 말하자면 '제국의회 좋아하네. 웃기구들 있네'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둘째 딸 마리아 아말리아의 남편인 샤를르 알베르가 더 입에 거품을 물고 샤를르 6세의 조치에 반감을 표시했다. 그러는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느라고 그런지, 프랑스는 기본적으로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치'를 지지했지만 1738년에 비밀리에 바바리아와 조약을 맺고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가 차기 신성로마제국 황제로서 적법한 인물이므로 지지하겠다는 것을 약속했다.


요제프 1세의 둘째 딸인 마리아 아말리아. 바바리아 선제후인 샤를르 알베르(카를 알베르트)와 결혼하였다. 샤를르 알베르는 1742년부터 1745년까지 샤를르 7세로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의 자리에 앉았었다. 그같은 배경에는 마리아 아말리아의 내조가 컸다.


사태가 이렇게 진행되자 샤를르 6세는 몇가지 조치를 취하지 않을수 없었다. 첫번째가 요제프 1세의 큰 딸인 마리아 요제파를 위해서 그의 부군인 작소니의 선제후 아우구스투스를 폴란드 왕좌에 오르도록 밀어준 것이었다. 당시에 폴란드는 왕위계승문제를 두고 전쟁이 한창이었다. 이어서 러시아-터키 전쟁(1735-1739)에서 러시아를 지지한 것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가 두가지 전쟁에 발을 디밀어 넣은 것은 결과적으로 잘못 판단한 것이었다. 샤를르 6세의 오스트리아는 두 전쟁에 참여하느라고 병력이 손실되었고 재정에 타격을 받았으며 무엇보다도 영토에서도 손실을 보았다. 결국 오스트리아의 국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이와 함께 샤를르는 딸 마리아 테레지아를 정부의 업무에 참여토록 할 계획이었으나 이마저도 반대에 부딪혀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유럽의 열강들은 샤를르 6세의 시기가 지나간 후의 오스트리아가 과연 어떻게 생존할지 의구심을 갖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고 그런 우려가 실제로 1740년 10월에 현실로 되었다.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난 것이다.


러시아-터키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한 러시아의 카타리네(1729-1796) 여제를 신격화한 작품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버지인 샤를르 6세는 1740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마리아 테레지아는 23세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기 4년 전인 1736년에 로레인 가문의 프란시스와 결혼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사실은 모든 직위를 계승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오스트리아의 대공녀 겸 헝가리와 크로아티아의 군주(여왕), 그리고 보헤미아의 군주(여왕)의 자리는 당장 계숭했지만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자리는 1740년부터 2년간은 공위였고 그후 1742년부터 1745년까지는 바바리아의 샤를르 알베르가 차지하는 바람에 바라만 보고 있었다가 1745년에 그의 남편인 프란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는 바람에신성로마제국의 여제(엠프레스)로서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의 대공녀(Archduchess)가 되어 오스트리아, 헝가리, 크로아티아, 보헤미아의 군주가 되었지만 기타 영토의 군주로서도 타이틀을 가졌다. 즉, 트란실바니아, 만투아, 밀라노, 로도메리아와 갈리치아,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 그리고 파르마의 군주를 겸했던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남편인 프란시스 1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었고 본인은 황비(또는 여제)라고 불리는 위치였지만 실제로는 남편은 그냥 자리만 지키는 입장이었고 만사는 마리아 테레지아가 처리하였다. 사족이지만, 마리아 테레지아와 부군 프란시스 1세는 결혼생활 약 30년에 토털 16명의 자녀를 두었다. 아들 다섯명, 딸 열한명이었다. 아들 중에서 두명(요제프 2세, 레오폴드 2세)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역임하였고 딸들 중에서는 프랑스 왕비, 나폴리-시실리 왕비, 파르마 대공녀가 나왔으니 대단한 여인임에는 틀림없다.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시스 1세의 가족. 현재는 12명의 모습만 보인다. 가운데 키 큰 남자가 요제프 2세 황제가 된 사람이며 맨 오른쪽 남자는 레오폴드 2세 황제가 된 사람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아버지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난후 5년이 지나서야 신성로마제국의 여제라는 타이틀을 지니게 되었지만 실상 그렇게 되기까지 아버지 샤를르 6세가 길을 닦아 놓았던 것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다. 1713년의 '국사조치'가 그것이었다. 샤를르 6세가 '국사조치'를 발표했을 때 작소니, 프러시아, 바바리아, 프랑스는 모두 그 조치를 지지했었다. 그러나 1740년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이들 열강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샤를르 6세의 국사조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런 와중에서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는 말도 없이 오스트리아 영토인 실레지아를 침공하였다. 이로써 7년간에 걸친 '실레지아 전쟁'이 시작되었는데 이 전쟁을 역사학자들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라고 불렀다. 이 전쟁의 과정에서 마리아 테레지아는 실레지아를 프러시아에 넘겨 주어야 했고 이탈리아에 있는 또 다른 소소한 영토들을 양보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대부분 영토를 견고히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첨언하자면, 마리아 테레지아는 프러시아에게 실레지아를 빼앗긴 것을 두고두고 원통하게 생각하여서 그 이후에 계속된 '7년 전쟁'을 통해서 실레지아 회복을 시도했지만 불행하게도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튼 실레지아 등등의 이유로 마리아 테레지아는 평생을 프러시아의 프레데릭과 오월의 관계로서 지냈다. (실레지아는 폴란드 서남부와 체코 동북부에 걸친 지역이다. 오데르 강 중부와 북부 유역 및 주데텐 산맥을 따라 위치한다. 이 곳에서 가장 큰 도시는 브로츠와프이다. 폴란드에 속해 있다.)


실레지아는 오늘날 폴란드의 서부에 속한 지역이다. 실레지아의 중심도시인 브로클라브(Wroc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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