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정준극 2018. 5. 11. 19:35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그리고 액슬 라 샤펠 평화조약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교전 당사국은 크게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로 나눌수 있지만 잘 아는 대로 유럽에서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면 주변 나라들도 이해 관계에 따라 마치 편을 가르듯 교전 당사국의 편에 가담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도 양편에 가담한 나라들이 다수 있다. 즉, 오스트리아 편에는 합스부르크 소관 국가들, 영국, 하노버, 더치 공화국, 작소니, 사보이 사르디니아, 그리고 러시아가 참여하였고 프러시아 편에는 프랑스, 스페인, 바바리아, 나폴리, 제노아, 그리고 스웨덴이 참여하였다. 각 나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전쟁에 참여한 것이 아니라 각각 형편대로 참여기간이 서로 다르다. 예를 들어서 스웨덴은 1741년부터 1743년까지만 참전했던 것이다. 한편, 당시 이탈리아 반도는 중세의 나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여러 공국과 공화국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우리나라도 예전에 삼국시대가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무튼 그러한 여러 공국과 공화국 중에서 주로 북부에 있는 공국들이 정세에 따라서 프랑스의 지배를 받았다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원래 이탈리아 반도에 있었던 나라들은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대명제를 위해 외세를 물리치려는 시도들을 감행하였던 것도 눈여겨 볼 일이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유럽의 중심지대에서 벌어지고 있던 때에 이탈리아 반도에서도 '우리라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라고 생각한 몇몇 나라들이 합스부르크의 지배로부터 탈피하려는 운동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나폴리 공국은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서 합스부르크가 지배하고 있는 밀라노 공국을 해방시키고자 했다. 1741년, 4만명이나 되는 나폴리와 스페인 연합군은 밀라노로 가기 전에 모데나를 거쳐가게 되었다. 모데나 공작은 내면적으로 나폴리-스페인 연합군과 동조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토 페르디난트 폰 트라운 백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가 나폴리-스페인 연합군보다 먼저 포(Po) 계곡의 남쪽에 있는 모데나로 진격하여 모데나 공작으로 하여금 평화조약을 맺도록 했다. 말이 평화조약이지 실은 항복조약이었다.


중세의 고도 모데나의 중심가


나폴리-스페인 연합군은 모데나에 대한 기선을 제압 당하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특히 스페인 사람들은 이탈리아 사람들보다 더 감정표현을 잘해서인지 당장이라도 오스트리아와 한판 붙어서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끝장을 보자는 심산이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이 과격하게 나오자 마리아 테레지아는 가만히 보고만 있으면 큰일 나겠다는 생각을 했다. 역시 마리아 테레지아였다. 그래서 1742년에 사르디니아와 동맹을 맺어서 나폴리-스페인 연합군의 기세를 꺾을 생각이었다. 합스부르크의 사르디니아의 협상은 토리노에서 진행되었다. 그리하여 1742년 2월에 토리노 약정서가 체결되었고 두 나라는 동맹군을 구성키로 합의하였다. 그후 1742년에는 오스트리아의 트라운 백작이 주로 이탈리의 스페인군과 나폴리군을 상대하여 전투를 이끌었다. 그러는 중에 1742년 8월에 비록 대규모는 아니지만 영국 해군함대가 나폴리 항국에 도착하는 일이 생겼다. 저 멀리 밀라노 부근에 가서 있던 나폴리군 중에서 1만 병력이 나폴리를 방어하기 위해 급히 돌아와야 했다. 그러다보니 나폴리군과 함께 있던 스페인군은 전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다행하게도 스페인 본국에서 보충부대가 프랑스를 통해서 북부 이탈리아에 도착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사르디니아와 동맹을 맺었지만 이상하게도 두 나라 모두 프랑스와는 교전을 하지 않았다. 외교적으로 복잡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의 전투는 이제레(Isere) 계곡에서 사르디니아군과 스페인군 사이에 벌어졌을 뿐이었다. 이 전투에 프랑스는 마치 약속이나 한듯 참여하지 않았다.


토리노


해가 바뀌어 1743년이 되었다. 스페인군은 2월에 캄포 산토라는 곳에서 오스트리아의 트라운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후 반년 동안은 양진영이 아무런 교전도 하지 않고 그저 대치만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오스트리아군에 로브코비츠 군주인 게오르그 크리스티안 공작이 트라운군에 합류하기 위해 독일로부터 왔다. 오스트리아군은 스페인군을 리미니까지 몰아냈다. 장 자크 루소는 마침 그 당시에 베니스에 있으면서 스페인군의 후퇴를 목격하였다. 루소는 '금세기에 있어서 가장 훌륭한 군사작전이었다'라면서 스페인군의 후퇴에 찬사를 보냈다는 것은 하나의 일화이다. 해가 다시 바뀌어 1744년이 되었다.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은 심각해졌다. 그나저나 오스트리아, 프랑스, 스페인과의 이상하게 얽히고 설킨 관계에 대하여 조금이나마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스페인 왕위계승전쟁(1701-1714)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하나의 합스부르크가 통치하였다. 그래서인지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이탈리아에 대한 정책은 별다른 차이가 없이 대체로 동일한 것이었다. 하지만 합스부르크의 이탈리아에 대한 정책은 부르봉의 프랑스와는 대칭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스페인의 마지막 합스부르크 소속인 카를로스 2세가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스페인 왕위계승전쟁이 일어났고 프랑스가 전쟁에서 승리하여 헤게모니를 잡게 되자 프랑스의 루이 필립 14세의 손자인 부르봉의 인물을 스페인의 왕으로 삼았으니 그가 스페인의 필립 5세였다. 그러자 이탈리아에 대한 대외정책은 부르봉의 프랑스와 부르봉의 스페인이 한통속이 되어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와 하나하나 대각을 이루게 되었다.


노바라 전투.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 당시에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는 캠페인을 벌인 이래 이탈리아 독립을 위해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와 수차례에 걸친 전쟁을 펼쳤다. 1849년의 노바라 전투는 대표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세상 일이라는 것이 다 그렇지만 기세등등하던 스페인군 내에서 문제가 생겼다. 대표적인 문제는 스페인군의 야전 사령관인 콘티 공자와 스페인군 총사령관인 미나 후작이 사사건건 충돌하였던 것이다. 미나 후작은 스페인 본국에서 오는 명령이나 지시는 그저 대충 들여다 보거나 또는 아예 미루어 놓기가 일수였다. 더 큰 문제는 현지 사정에 밝은 콘티 야전사령관이 무슨 제안을하면 '내가 총사령관인데'하면서 무시하고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러한 차에 1744년 6월에 스페인군은 알프스를 넘어가서 포 계곡 아래에 있는 다른 군대와 회동하는 작전을 수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가려면 제노아 공국을 통과해야 했다. 다행히 제노아는 중부 이탈리아로 가는 길을 허락해 주었다. 스페인군의 콘티 공자는 북쪽에 남아 있고 가게스(Gages) 백작이 남쪽으로 가게 되었다. 로브코비츠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가게스 백작의 진로를 파악하고서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불시에 공격하여 스페인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고 이들을 벨레트리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 곳까지 몰아냈다. 나폴리군의 전선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벨레트리는 로마제국의 가이사르 아우구스투스가 태어난 곳이다. 그러나 1744년 6월부터 8월까지는 가게스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프랑스 연합군과 로브코비츠 장군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의 대규모 군사작전을 펼친 장소가 되었다. 그러면 나폴리군은 어떤 상태였는가? 훗날 스페인의 카를로스 3세가 되는 나폴리 왕은 오스트리아군이 나폴리 접경에서 군사작전을 펼치게 된 것을 크게 염려하여서 스페인군을 지원키로 결심했다. 그리하여 스페인-프랑스-나폴리군은 오스트리아군을 급습하여 이번에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전투를 제1차 '벨레트리 전투' 또는 '네미 전투'(Battle of Nemi)라고 부르는데 네미는 전투의 한 복판에 있는 커다란 호수와 작은 마을의 이름이다.


네미 호수와 네미 마을. 오늘날의 모습


그런 일이 있은지 얼마후인 1744년 8월 초에 나폴리 왕은 갈리스판(Gallispan: 스페인-프랑스 연합군)이 새로 장악한 벨레트리 마을을 개인적으로 방문하였다. 시저의 고향이기 때문에 평소에도 한번 오고 싶었는데 이번에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낸 마을이 마침 벨레트리이기 때문에 사정도 한번 살펴 볼겸 찾아갔던 것이다. 나폴리 왕이 온다는 정보를 입수한 오스트리아군은 이 기회에 비밀작전을 펼쳐서 적에게 타격을 주고 싶었다. 8월 11일 새벽에 약 6천이나 되는 오스트리아군은 브라운 백작의 지휘로 벨레트리 마을을 급습하였다. 오스트리아군은 나폴리 왕을 납치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마을 구석구석을 뒤져 보았지만 나폴리 왕은 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 나폴리 왕은 적이 급습한 것을 알고 숙소의 옷도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하고 창문을 통해 탈출하여 말을 타고 급히 마을을 빠져 나갔던 것이다. 이를 제2차 벨레트리 전투라고 부르는데 오스트리아군이 이 전투에서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하고 퇴각함으로서 나폴리에 대한 진격은 여기에서 접어 두어야 했다. 오스트리아군은 북쪽으로 이동하여서 콘티 공자가 지휘하는 갈리스판과 대치하고 있는 사르디니아군을 지원키로 했다. 알프스 산간지역에서도 갈리스판과 오스트리아군의 전투가 심심찮게 펼쳐졌다. 이 기간에 알프스 산간지역에서는 거의 매일처럼 대포 소리가 그렁그렁 울렸으니 주민들의 고통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알프스 산간지역에서의 전투는 대체로 갈리스판이 우세하였다. 갈리스판 야전사령관인 콘티 공자는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 내려와서 마을들을 차례차례 점령하기 시작했다. 콘티 공자는 계속해서 피에드몽으로 진격하였다. 얼마 후에는 갈리스판이 사르디니아군과 일대 접전을 벌이는 일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갈리스판은 카스텔델피노 등을 장악하는 전과를 거두고 승승의 기분이었다.


시저의 고향인 벨레트리 구시가지의 카이롤리 광장 분수(Fontana di Piazza Cairoli)


갈리스판과 나폴리군, 그리고 오스트리아군과 사르디니아군이 간헐적으로 벌인 전투들에 대하여는 하나하나 소개할 필요가 없기에 생략하고 다만, 이 기간중의 중요 사건들에 대하여만 간략히 기술코자 한다. 1742년에 오스트리아와 사르디니아가 체결환 토리노협약은 사실상 제노아공화국을 당황하게 만든 것이었다. 두 세력이 합세하여 제노아를 공략할 것 같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는 차에 1743년 9월에 토리노협약보다 더 구체적이고 더 강력한 내용을 담은 봄스조약(Treaty of Worms)가 체결되지 제노아의 두려움은 더 커졌다. 제노아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었다는 생각을 했고 궁리 끝에 중립을 버리고 부르봉 측에 기대기로 작정했다. 그리하여 제노아공화국은 부르봉 연합국인 프랑스, 스페인, 나폴리와 비빌조약을 체결하여 상부상조키로 했고 내친 김에 1745년 6월에 사르디니아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했다. 한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믿었던 로브코비츠 장군이 스페인군에게 패배하자 크게 실망하고 두려워했다. 그래서 로브코비츠 장군을 해임하고 슐렙루브크 백작을 임명했다. 한편, 연합군도 콘티 공자를 해임하고 대신에 마이유부아(Maillebois) 장군을 임명했다. 부르봉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의 야전사령관이 바뀌자 그 틈을 이용해서 1745년 봄에 대공세를 취하였다. 연합군은 8만 병력이나 되는 대군이었다. 1745년 9월에 부르봉 연합군은 바시냐뇨에서 사르디니아군을 완전 대패시켰다. 이후 연합군은 기세가 등등해서 알렉산드리아, 발렌사, 카살레 몬페라토 등을 차례로 점거했다.


항구도시 제노아의 오늘날 모습


이렇듯 북부 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과 스페인-프랑스군이 옥신각신하며 시간을 보낼 때에 이탈리아 내부의 정세는 그런 전투들과는 상관없는 듯 복잡하기만 했다. 그 복잡한 것을 일일히 설명하기는 어렵고 아무튼 마이유부아 백작은 연합군의 승리를 제대로 활용할 줄을 몰랐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반면에 오스트리아군은 1746년 초반부터 사기가 올라서 티롤을 거쳐서 이탈리아로 진격하는 용맹함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된 배경에는 프러시아의 프레데릭과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가 형식적이나마 평화협정을 맺고 당분간 싸우지 말자고 합의했기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에 집중할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갈리스판의 겨울 진영은 이탈리아의 아스티에 있었다. 그 진영이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을 받았다. 결론적으로 아스티에 있던 프랑스군 6천명은 오스트리아에 항복했다. 이밖에도 몇몇 전투가 있었지만 언제나 오스트리아가 승리의 깃발을 올렸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는 밀라노공국을 재탈환하였고 북부 이탈리아의 상당부분을 합스부르크의 깃발 아래에 두게 되었다. 오스트리아는 계속해서 1746년 9월에 제노아 공화국을 점령하였다. 하지만 알프스에서의 전투는 오스트리아에게 패배를 안겨준 것이었다. 한편, 제노아는 오스트리아 점령군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서 항거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46년 12월에 제노아는 오스트리아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지나간 일이지만 프랑스는 1745년에 퐁트누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동쪽으로 진군을 계속하였다. 그렇게 할수 있었던 것은 오스트리아의 동맹군인 영국군이 본국에서 자코바이트 봉기가 일어나는 바람에 대부분 본국으로 급히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프랑스군은 이듬해인 1746년에 오스트리아군과 더치공화국군을 뮤즈(Meuse)강 쪽으로 밀어냈다. 프랑스군은 실제로 오스트리아와 더치공화국이 차지하고 있던 중요 요새들을 하나하나 점령해 나갔다. 그러더니 1746년 2월에는 브뤼셀을 점거하기까지 했다.


벨기에의 디낭. 뮤즈강안의 도시이다. 프랑스군은 오스트리아-더치공화국군을 뮤즈강까지 밀어냈다.


그해 9월에 영국은 국내사정이 어느정도 안정이 되자 다시 군대를 해협건너로 파견하여 브리타니 남부의 로리앙(Lorien)을 급습하였다. 프랑스군을 네덜란드로부터 떼어내자는 전략이었다. 10월에는 리에즈 인근의 루쿠(Roucoux)에서 로레인의 샤를르 공자가 이끄는 작세군과 프랑스군 간에 대전투가 벌어졌다. 프랑스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더치공화국은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1747년 4월에 오스트리아 네덜란드를 공격하여 뮤즈까지 점령한 작세의 군대는 기고만장하여서 이제는 네덜란드 본토까지 넘보게 되었다. 그러면 네덜란드는 어떠했는가? 그저 워낙 약세이다보니 전방에서 저항하는 시늉만 했을 뿐이었다. 오렌지공 윌리엄 4세와 컴벌랜드 공작의 군대는 1747년 7월에 네덜란드를 지키려고 왔다가 마스트리히트(Maastricht) 인근의 라우펠드(Lauffeld)에서 작세군으로부터 대패를 당하였다. 라우펠드는 발(Val)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영국군을 격파한 작세군대는 승승장구하여 브라반트 지역에 대한 공세의 고삐를 조였다. 결국 네덜란드는 1748년 5월에 프랑스군과 작세군에게 항복하지 않을수 없었다. 잠시후 오스트리아를 돕기 위해서 대규모의 러시아군이 도착했지만 이미 사건이 종결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할 일이 없었다. 러시아군은 3만명이나 되는 규모였다. 이들은 리보니아로부터 행군하여서 라인강에 도착하였다. 전투와는 상관 없는 군사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찾는다면 아마도 약 70년 후인 1813년에, 그리고 2차 대전의 마지막 파트에 러시아군이 유럽에 진입하는 예행연습이었다고 말할수 있다. 아무튼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와 동맹국들은 더 이상 전쟁을 해 보았자 손해만 본다고 생각해서 평화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48년 10월 18일에 주요국 간에 저 유명한 액슬 라 샤펠(Aix-la-Chapelle) 평화조약이 체결됨으로서 8년여에 걸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액슬 라 샤펠은 독일의 아헨(Aachen)이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을 마무리하는 평화조약이 맺어진 액슬 라 샤펠(아헨)의 중심가


8년여에 걸친 국제적 전쟁이 끝났지만 오스트리아는 전쟁전보다 나아진 것이 없었다. 오히려 손해만 보았다. 대표적으로는 실레지아를 프러시아에 양보한 것이었다.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에서 일부 영토를 스페인에게 넘겨주어야 했다. 실레지아를 내주고 북부 이탈리아의 영토를 조금 양보했다고 해서 오스트리아의 정체성에 타격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큰 타격이라고 하면 신성로마제국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오스트리아로서 제국 내에서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리더쉽이 타격을 입었던 것이다. 제국의 우산 아래에 들어 있던 독일국가들, 그중에서도 특히 프러시아에게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내주었으니 말이다. 하기야 오스트리아가 관할하고 있는 영토는 방대하여서 실레지아를 넘겨 준 것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니긴 했다. 반면에 프러시아는 실레지아를 얻어서 영토도 늘어났고 인구도 불어 났으며 특히 경제가 크게 진작되었다.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가장 큰 이득을 보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프레데릭 국왕을 프레데릭 대왕(Friedrich der Grosse)이라고 불렀다.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와 대등한 입장이 되자 프러시아로서는 독일 민족주의의 불길을 당기게 하였으며 통일에 위한 노력에 앞장 설수 있는 명분을 갖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루이 15세는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전승자로서가 아니라 중재자 또는 정치가로서 보여주기를 원했다. 그래서 프랑스가 전쟁에서 차지한 모든 영토들을 워래 대로 명예스럽게 돌려 주었다. 루이 15세는 '짐은 프랑스의 왕이며 장사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루이 15세가 이러한 결정을 하자 프랑스 내에서는 '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냐'라면서 말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루이 15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줄어 들었다. 프랑스는 전쟁에서 흘린 피에 비하여 너무나 작은 것을 얻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Bete comme la paix라는 말이 유행하게 되었다. '평화처럼 어리석다'는 뜻이다. 그런가하면 심지어 Travailler pour le roi de Prusse(프러시아의 왕을 위해서 일했다. 즉,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남 좋은 일만 했다)고 말했다.


프레데릭(프리드리히) 대왕은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궁전에서 플루트 연주하기를 즐겨했다.


그런 프랑스인데 그래도 얻은 것은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모욕을 준 것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를 촌놈 취급하며 없신 여기게 되었다. 그러나 한가지 간과한 일이 있었다. 프러시아를 너무 관대하게 대해 준 것이었다. 결국 훗날 보불 전쟁을 통해서 프러시아와 한판을 벌이게 된 것도 프랑스가 프러시아를 너무 몰라본 결과였다. 사실 프랑스는 전쟁 기간 중에 프러시아에 대하여 유감이 있었다. 프러시아는 오스트리아와 평화협정에 대한 협상을 두 차례나 가지면서 단 한번도 프랑스에게 사전 통보한 일이 없었다. 프랑스를 무시한 처사였다. 프러시아의 그런 처사를 보고 실상 루이 15세도 '프러시아가 저러면 곤란하지..'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그 사람들 정말 못됐군'하면서 싫어하는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믿지 못할 동맹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부르봉의 루이 15세는 심지어 해묵은 적대관계에 있는 합스부르크와 손을 잡아서 프러시아를 눌러야 겠다는 구체적인 생각까지 했다. 영국은 프러시아와 한 통속이 되어 그나마 유리한 조건으로 협상을 마무리 짓고 전쟁에서 빠져 나올수가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과거 동맹국이었던 영국이 프러시아와 손을 잡고 이익만 챙긴 것에 대하여 분개했지만 어쩔수가 없었다. 영국은 오스트리아가 중부 유럽에서 더 이상 주도권을 장악하지 못한 것을 인식하ㅏ고서 프러시아와 손을 잡은 것이었다. 앞으로 있을 지도 모르는 프랑스의 공격으로부터 하노버 왕조를 지키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과연 영국의 판단은 나중에 평가를 받았다. 1차 대전과 2차 대전을 통해서 영국은 프러시아를 적으로 삼고 싸워야 했기 때문이었다.


액슬 라 샤펠 평화조약을 비유한 작품. 자크 뒤몽 작품. 프레데릭과 마리아 테레지아의 평화협정을 비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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