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실레지아 전쟁

정준극 2018. 3. 4. 21:44

실레지아 전쟁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은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와 휴전협정을 맺었지만 속셈은 이참에 실레지아를 아예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프레데릭은 사실 그 때문에 온갖 난관을 헤치고 실레지아를 장악했는데 잠시 전황이 나쁘다고 해서 실레지아를 포기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프레데릭은 비록 프랑스와 동맹을 맺어서 오스트리아를 압박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프랑스 등등이 오스트리아를 무너트리는데 일조했다고 해서 독일에서까지 주인행세를 하거나 큰 소리를 치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면 프랑스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가? 프랑스는 오스트리아가 손을 들고 나면 프러시아던지 바바리아던지 또는 작소니던지 이들이 연고권을 찾아서 영토를 나누어 갖는 것도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결국 속내는 독일이 통일되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더구나 프러시아가 중심이 되어 하나의 독일로 통합되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사태는 이상하게 돌아갔다. 앞서 얘기한 대로 카린티아의 귀족인 오스트리아의 케벤휠러 장군이 놀랍게도 프러시아와 프랑스 연합군을 물리쳐서 린츠 저쪽으로 몰아냈으며 그 와중에 뮌헨은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케벤휠러 장군에게 항복하는 일까지 벌어졌던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헝가리에서는 프러시아에 항거하는 봉기가 일어나서 난리도 아니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프러시아와 그의 연합세력에 대해서 '한번 해보자'라는 다짐으로 투쟁을 확고히 하였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우선 프레데릭과 맺은 휴전협정의 내용들을 관련국들에게 의도적으로 폭로하였다. 프러시아의 동맹들이 프레데릭의 음흉한 속셈을 알아채리도록 하기 위한 하나의 작전이었다.


1741년 실레지아 전쟁 중의 몰비츠 전투. 가만히 보면 이런 전투에서는 보병들의 목숨이 파리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저 줄맞추어서 행진하다가 적군이 쏜 총알에 맞아 힘없이 쓰러지는 전투였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휴전은 저리가고 다시 전쟁의 불길이 붙었다. 프레데릭도 가만히 앉아서 속수무책으로만 있을수는 없었다. 프레데릭으로서는 1741년 여름에는 별다른 전투가 없었기 때문에 무언가 곰곰히 생각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명제는 간단했다. '어떻게 하면 프러시아군대를 강군으로 만들수 있을까?'에 대한 해답을 찾는 것이었다. 프레데릭은 보병이 문제가 아니라 기병이 문제라고 보았다. 프레데릭은 1741년 여름에 프러시아 기병대를 재편성하는 작업을 강력 추진하였다. 돌이켜보면 선왕인 프레데릭 빌헬름 1세는 기병에 대하여 거의 방관하다시피한 정책을 견지했었다. 아마도 프레데릭 빌헬름 1세 자신이 보병 출신이기 때문이것 같았다. 그리고 보병 훈련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는 '디 알테 데사우어'(Die alter Dessauer)도 프러시아 군대를 훈련하면서 '보병이 최고다. 기병 좋아하네'라는 생각을 갖고 있어서 기병의 중요성을 간과하였다. '디 알테 데사우어'는 안할트 데사우(Anhalt-Dessau)의 레오폴드 1세를 말한다. 프레데릭은 프러시아 기병이 몰비츠(Molwitz)전투에서 보여준 수준이하의 전투력에 대하여 크게 실망했다. 그러나 1741년 여름철에 기병대를 죽어라고 훈련시킨 결과 프러시아 기병대는 제1차 실레지아 전쟁에서 놀라운 실력을 보여주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프레데릭의 노력으로 프러시아 기병대는 무적 기병대가 되었다.


프레데릭 2세는 몰비츠 전투에서 승리하여 실제리아에 대한 통치권을 굳건히 하였다. 몰비츠 시민들의 환영을 받고 있는 프레데릭 2세. 몰비츠는 현재 폴란드의 마우요비체(Malujowice)이다.


프레데릭은 몰비츠 전투에서의 승리로 자신감을 갖게 되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장한 바바리아 출신의 샤를르 7세에게 오스트리아의 관할 아래에 있는 모라비아를 공격하도록 요청하였다. 프레데릭 자신은 폴란드 바향으로 공격하고 대신에 샤를르 7세에게는 모라비아를 공격토록 하여 양동작전을 펼치고자 했던 것이다. 샤를르 7세로 말하자면 자기의 영토가 오스트리아에 의해 점령당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아도 실지회복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터에 동맹국인 프러시아가 모라비아 공격 제안을 하자 우선 동조하였다. 물론 프레데릭은 샤를르 7세에게 프러시아군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한바 있다. 이에 따라 프러시아의 육군원수인 쿠르트 크리스토프는 해가 바뀌어 1742년이 되자마자 1월에 올무츠(Olmutz: 현재 체코공화국의 올로무츠)로 진격하여 단번에 올무츠를 함락했다. 프러시아는 케벤휠러 장군이 되찾은 린츠도 되찾고 싶었다. 프러시아, 프랑스, 작손은 린츠 탈환을 위해 공동작전을 펼치기로 했다. 그러나 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브로글리 장군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블타바(몰다우) 강변에 진을 치고 있었으나 바바리아군이 케벤휠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을 대적하기 위해 다른데로 이동하자 전력이 크게 약화되어서 아무것도 못할 형편이었다.


올로무츠 중심광장


한편, 프레데릭의 프러시아군에 합류한 작손군도 워낙 이 사람들은 행동이 느리고 또한 유유자적하는 습성이 있어서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더구나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온 로레인의 샤를르 공자가 이끄는 대군이 체코의 부드봐이스(Budweis)와 일라바(Jihlava: Iglau)에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함부로 행동할 형편이 아니었다. 로레인(로트링)의 군사들이 왜 오스트리아를 지원하러 왔느냐 하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프란시스 스테픈이 로레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프러시아 연합군은 브르노(Brno: 독일어로 Brünn)를 공격대상에 두었다. 하지만 브르노로 향하던 프러시아군은 갑자기 진로를 바꾸어서 남부 모라비아 남쪽의 츠노이모(Znojmo: 독일어로 Znaim)와 미쿨로프(Mikulov: 독일어로 Nikolsburg)로 향하였다. 그런가하면 프러시아군은 비엔나의 바로 턱밑에까지 이르러서 비엔나를 위협하였다. 그런데 한심한 얘기지만 프레데릭군의 진격은 군사작전이라기 보다는 약탈행위였다. 민폐가 심했다. 그래서 모라비아 주민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였다. 로레인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샤를르 공자의 군대는 프러시아의 오스트리아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포진하였다. 그것은 프러시아군이 실레지아로부터 나오는 것을 막는 것이기도 했다. 사정이 이렇게 돌아가자 작손군은 자기들이 무엇때문에 나와서 싸워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불만이었고 더구나 대우도 신통치 않아서 사기가 현저하게 떨어졌고 결국은 작손으로 돌아갔다. 프레데릭의 군대도 사태를 관망해 보니 이로울 것이 없다고 판단해서 보헤미아로 물러갔다. 그리고 모라비아를 점거하고 있던 프러시아군도 규모가 소수였기 때문에 언제 무슨 공격을 당할지 몰라서 상부 실레지아로 퇴각하였다.


브르노(브륀). 오늘날 체코공화국 제2의 도시이다. 실레지아 전쟁에서 전략상 중요한 거점이었다.


로레인의 샤를르 공자는 승기를 잡은 김에 프레데릭을 잡기 위해 추격하였다. 마침내 1742년 5월 17일에 프레데릭은 자기를 추격해 오는 오스트리아군과 마주쳐야 했다. 그렇게 해서 오늘날에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는 코투지츠(Battle of Chotusitz: Battle of Czaslau)전투가 벌어졌다. 보헤미아에 있는 지역이다. 치열한 전투가 펼쳐졌다. 대체로 프레데릭의 프러시아군이 승리하였다. 승리의 주역은 프레데릭이 새로 편성하고 훈련시킨 기병이었다. 프러시아 기병대는 과거의 패전에 대한 불명예를 회복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프러시아 기병대는 훗날 프러시아의 영광을 드높혀 준 주역들이었다. 보헤미아에서는 코투지츠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프랑스의 브로글리 장군은 블타바에서 오스트리아 잔여병력과 부드봐이스 인근에서 전투를 벌여 약소하나마 승리를 거두었다. 이 승리는 비록 별것 아니었지만 의외로 프랑스군의 사기를 드높여 주는 것이었다. 프레데릭의 코투지츠 승리, 브로글리의 부드봐이스 승리는 마리아 테레지아로 하여금 평화협정을 맺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실레지아는 프러이사에 양보하지 않으면 안되는 처지까지 몰고간 것이었다. 그리하여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와 울며 겨자먹기로 1742년 6월 11일에 브레슬라우(Breslau)에서 별도의 평화협정을 체결하였다. 이로써 제1차 실레지아 전쟁은 막을 내리는 듯이 보였다. 하기야 사실상 1741년을 주축으로 한 제1차 실레지아 전쟁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가장 큰 이벤트였다.


제1차 실레지아 전쟁 중의 코투지츠 전투. 프러시아 기병대가 대활약을 펼친 전투였다.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간에 브레슬라우 평화협정이 맺어졌다고 해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불씨가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1743년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새로 선출된 바바리아의 샤를르 7세의 의한 예기치 못한 전쟁으로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전쟁은 재앙이었다. 프랑스군과 바바리아가 동맹군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서로 협동이 되지 않았다. 제일 큰 이유는 프랑스의 브로글리 원수가 바바리아에서 프랑스-바바리아 동맹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었다. 이 때문에 바바리아군 지휘관들과 브로글리 휘하의 지휘관들 사이에 긴장만 감돌게 되었다. 브로글리와 바바리아 사령관인 프리드리히 하인리히 폰 제켄도르프가 아예 공개적으로 다투는 일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로레인의 샤를르 공자가 이끌고 있는 오스트리아군이 도나우를 따라 진군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바바리아 동맹군은 아무런 대처도 하지 못했다. 한편 잘츠부르크 쪽으로부터는 케벤휠러 장군의 군대가 남부 바바리아로 진격해 왔고 또한 보헤미아의 로브코비츠 공자는 바바리아의 나아브(Naab) 강까지 진격해 왔다. 그런가하면 미누찌 백작이 이끄는 바바리아 군대는 브라우나우 인근의 짐바흐(Simbach) 마을에서 로레인의 샤를르 공자가 이끄는 군대의 공격을 받아 말할수 없는 곤혹을 치루었다. 짐바흐는 오늘날 뮌헨 동쪽의 짐바흐 암 인(Simbach am Inn)이다.


로레인의 샤를르 공자. 마리아 테레지아의 든든한 우군이었다. 로레인에서 태어난 오스트리아의 장군. 신성로마제국 장군이며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의 총독이었다.


이 즈음에 프랑스군은 샤를르 공자의 군대를 타격할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가졌다. 샤를르 공자의 군대가 전략적으로 열세한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프랑스군의 사령부 갈팡질팡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샤를르 공자의 군대는 별다른 저항 없이 라인강을 도하할수 있었다. 프랑스군이 혼란에 빠진 것은 총사령관인 루이 15세가 갑자기 메츠(Metz)에서 천연두에 걸려 중태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루이 15세의 상태는 너무 나빠서 사람들은 그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프랑스군은 그러했지만 다행히 제켄도르프 백작이 이끄는 바바리아군은 그런 와중에도 샤를르 공자의 군대를 추격하며 기세를 올렸다. 그렇지만 프랑스군이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은 오스트리아와 작손의 합동 공격에 고스란히 노출되어 있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라인에 있던 트라운 백작을 급히 불러서 프레데릭의 퇴로를 막도록 했다. 한편, 헝가리의 예비병력도 어느덧 전열을 가다듬어서 프러시아군을 이곳저곳에서 공격하여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샤를르 공자가 서부전선으로부터 보헤미아 쪽으로 이동하여서 프레데릭군을 압박하였다. 프러시아군은 후퇴하지 않을수 없었다. 샤를르 공자의 군대와 트라운 백작의 군대는 협동하여서 프레데릭의 프러시아군을 몰아 붙였다. 프레데릭이 점령하고 있던 프라하는 오스트리아 연합군의 손에 들어갔다. 프레데릭은 말할수 없는 손실을 입고서 실레지아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실레지아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그나마 프레데릭이 실레지아에서 죽기 아니면 살기로 버텼기 때문이었다. 라인전선으로 돌아가보면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다행히 병에서 회복되었고 그동안 너무 가만히 있었다고 생각해서 군대를 몰아서 프라이부르크(Freiburg)를 공성하여 점령하였다. 따지고 보면 양방간에 별로 큰 소득도 없으면서 아까운 군비만 들여서 전쟁을 치루고 있으니 딱한 노릇이었지만 한번 시작한 전쟁 게임이므로 무언가는 명분있는 평화가 필요했다.


오늘날의 프라이부르크. 바덴뷔르템버그 주에 속해 있다.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당시에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프라이부르크를 점령한바 있다.


해가 바뀌어 1745년이 되었다. 1745년에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세 전투인 호엔프리드버그(Hohenfriedberg) 전투, 케셀스도르프(Kesselsdorf) 전투, 퐁트누아(Fontenoy) 전투가 벌어졌던 해이다. 1745년의 해가 뜨자 1월 8일에 바르샤바에서는 이른바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영국, 오스트리아, 더치 공화국, 작소니의 4개국이 공동전선을 펼치기로 약속한 조약이었다.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된 날로부터 12일 후인 1월 20일에 샤를르 6세 서거 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장했던 샤를르 7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일이 생겼다. 새로운 황제를 선출해야 했다. 샤를르 7세의 아들이며 상속자인 막시밀리안 3세도 후임 황제 후보자로 얘기되었다. 그 와중에 샤를르 7세의 뒤를 바치고 있던 바바리아군은 또 한번의 불운을 당해야 했다. 오스트리아의 바탸니(Battyani) 백작과 베른클라우(Bernklau) 남작, 그리고 브라운(Browne) 백작이 공동작전을 펼쳐서 바바리아군을 여러 요새에서 쫓아냈던 것이다. 결국 바바리아군은 심하게 말해서 분열되고 마비되었다. 그래서 모두 동쪽으로 후퇴해야 했다. 프랑스군이 바바리아군을 구하려고 달려 왔으나 수적으로 우세임에도 불구하고 바탸니 백작이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오히려 대패하였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샤를르 7세의 아들인 막시밀리안 3세도 다시한번 뮌헨을 포기하고 피난길에 나서야 했다. 결국 4월에 바바리아와 오스트리아간에 휘센(Füssen)조약이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의하면 막시밀리안 3세는 차기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자리에 연연하지 않으며 대신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인 프란시스 1세를 차기 황제로 적극 추대한다는 조건으로 휴전한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휘센조약으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은 당분간 중지되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대왕이 실레지아를 점령하고 나서 1741년에 실레지아 귀족들로부터 충성을 다짐받고 있다.


아무튼 그렇게 되자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은 다시 외톨이가 되었다. 프랑스로부터의 도움을 기대할수 없게 되었다. 프랑스는 플란더스 전투에서 언제나 주도적으로 싸워주었던 동맹이었다. 돌이켜 보건대, 바로 얼마전인 1745년 3월 말에는 프랑스의 루이 15세가 프랑스군 야전 사령관인 모리스 드 삭스와 함께 9만 5천명의 대병력을 이끌고 셸트(Scheldt) 강 하구로 진군하여서 투르네이(Tournay)를 포위하였던 일이 있었다. 당시에 투르네이는 단 7천명의 더치 수비대가 수성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이렇게 포위하고 공성하자 컴버랜드 공작이 이끄는 영국군이 투르네이에 대한 프랑스군의 공성을 깨트리려고 시도했다. 프랑스군의 사령관으로 바로 얼마전에 임명된 모리스 장군은 정보활동을 대단히 중요시 한 사람이었다. 그는 컴버랜드의 영국군이 프랑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어떤 루트를 이용할지를 첩모를 통해 파악했다. 공격루트랄 알고 있으면 매복하여서 적을 섬멸하기가 쉬운 법이다. 모리스 장군은 영국군을 셸트강 동안의 평원에서 공격키로 작전을 세웠다. 투르네이 동남방 약 3km 지점에 있는 퐁트누아 마을 근처의 평원이었다. 1745년 5월 11일 새벽 5시를 기해서 프랑스군이 영국군에게 포격을 가했다. 영국군은 투르네이를 공격할 계획이었지만 먼 길을 달려 오느라고 아직 진영을 정비하지 못한 상태였다. 프랑스군의 포격은 점점 심해졌다. 영국군은 정오쯤해서 완전 지리멸렬해졌다. 영국군은 퇴각하기에 바뻤다. 이렇게 해서 유럽 대륙에서 과거에 무적이라고 하던 영국군은 프랑스군의 포탄에 말한마디 건네지 못하고 무너졌다. 그리고 전투에서 포병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한번 일깨워 주었다. 퐁트노이 전투가 있은지 얼마후인 6월 20일 투르네이는 프랑스군에게 항복했다. 그것이 유명한 퐁트누아 전투였다.


퐁트누아의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프랑스군이 아직 전열을 가다듬지 못한 영국군에게 포격을 가하여 타격을 주고 있다.


그러는 중에 1745년 여름에 뜻하지 아니한 사항이 발생하였다. 프랑스가 영국 왕위를 주장하고 있는 챨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의 편을 들어주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스코틀랜드에서 반발이 심하여 봉기가 일어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잉글랜드가 스코틀랜드에게 신경을 쓰느라고 유럽 본토에서의 전쟁으로부터 관심을 돌릴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1745년 8월 말에 챨스는 스코틀랜드 서북쪽의 헤브라이드 제도에 속한 에리스케이 섬에 잠시 머무르다가 스코틀랜드에 상륙하였다. 잉글랜드 왕위를 차지하려는 투쟁을 마다하지 않겠다는 심산에서였다. 스튜어트 왕가의 일원인 챨스는 우선 잉글랜드 왕실에 저항하고 있는 자코바이트에 충성을 보인 멤버들을 접촉하여 군대를 일으키고자 했다. 자코바이트라는 말은 제임스의 라틴어 표현인 자코부스(Jacobus)에서 비롯한 것이다. 영국에서는 명예혁명으로 스튜어트 왕가의 사람들이 추방 당한 일이 있다. 스튜어트 왕가의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이었다. 그러므로 성공회로부터 배격 당하였던 것이다. 스코틀랜드에 뿌리를 두고 있던 제임스 2세(스코틀랜드에서는 제임스 7세)는 영국의 왕위를 되찾기 위해 충성을 다하는 추종자들과 함께 봉기를 일으켰는데 그것을 자코바이트 봉기라고 부른다. 스코틀랜드 자코바이트의 봉기는 1688년에 처음 일어났고 그후 1708년, 1715년, 1719년에도 일어났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이제 마지막으로 1745년에 본토에서는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에 프랑스의 챨스 후원으로 다시한번 불을 지피게 되었던 것이다. 챨스가 스코틀랜드에 도착하자 그의 휘하에 모인 자코바이트는 1천 3백명에 이르렀다. 당시 영국왕은 하노버 왕조의 조지 2세였다. 조지 2세는 존 코우프(John Cope) 장군으로 하여금 챨스의 자코바이트 군대를 물리치도록 했다. 그리하여 코우프 장군은 8월 말에 영국군 2천명을 이끌고 퍼스에 도착하였고 이어 9월 하순에는 에딘버러를 공략하여 항복을 받아냈다.


스튜어트 왕가의 챨스를 지지하는 스코틀랜드의 자코바이트들이 영국군과의 전투에 임하고 있다.


그런데 코우프 장군이 며칠 후에 스코틀랜드의 프레스톤팬스라는 마을에 도착하여 적군을 공격을 막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야외에 진을 쳤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영국군이 프레스톤팬스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 챨스의 스코틀랜드 군대가 코우프군을 급습하였고 영국군은 대패하여 퇴각하였다. 이제 챨스는 스코틀랜드에서 영국군을 몰아냈으므로 온 스코틀랜드가 자기에게 속했다고 믿었다. 당시에 챨스의 스코틀랜드군, 더 정확히 말하자면 자코바이트군은 보병이 5천이여 기병이 3백이었다. 챨스는 여세를 몰아러 1745년 11월 중순에 스코틀랜드의 국경을 넘어서 영국으로 진군하였다. 말하지만 참으로 오랫만에 스코틀랜드가 영국을 침공한 일이었다. 챨스는 영국내에 있는 자코바이트들이 보충병과 군수물자를 제공해 줄것으로 기대했다. 챨스의 스코틀랜드군으로서는 그런 지원이 절실하게 요청되었던 터였다. 왜냐하면 영국이 챨스의 침공을 막기위해 이미 3개 노선으로 정부군을 진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영국군의 병력이 스코틀랜드군을 훨씬 능가한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영국내 자코바이트들로부터의 지원을 말처럼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상태라면 패배는 당연한 것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자코바이트와 영국 정부군의 전투

              

챨스의 참모들은 챨스에게 사태가 이러하니 스코틀랜드로 퇴각하여 다음 기회를 보는 것이 좋겠다고 진언하였다. 참모들은 스코틀랜드 땅에서 싸우는 것이 영국 땅에서 싸우는 것보다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챨스는 일단 스코틀랜드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와 그 일대는 전에 영국군에게 점령당한바 있어서 어느 곳을 거점으로 삼아야 할지가 문제였다. 챨스 군대는 스코틀랜드의 폴커크 무이르(Falkirk Muir)에 본영을 설치하고 스코틀랜드 각지로부터 자코바이트 지원병을 모집하였다. 그렇게하여 8천이나 되는 병력을 거느리게 되었다. 자코바이트 전투가 벌어진 이래 가장 막강한 병력이었다. 1746년 1월 17일 날씨가 무척 나쁜 중에 전투가 벌어져서 스코틀랜드군이 7천이나 되는 영국군을 크게 물리쳤다. 얼마나 날씨가 나빴느냐하면 폭풍이 불고 진눈깨비가 내리더니 아예 폭우가 내리는 그런 날씨였다.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를 정도로 앞이 안보이는 그런 상황에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승리도 잠시뿐, 몇 달 후인 4월 27일의 컬로든 전투(Battle of Culloden)에서는 챨스의 스코틀랜드군이 여지없이 패배하였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폴커크 무이르 전투


영국에서는 하노버 왕조와 스튜어트 왕조의 권력 다툼에 따른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전투가 결국은 잉글랜드의 승리로 돌아갔고 자코바이트 봉기를 주도했던 챨스는 빈손을 들게 되었을 때에 유럽 본토에서는 아직도  이곳저곳에서 전투가 그칠줄 모르고 있었다. 1745년 여름은 엘베강 상류에서 양방간에 전투로서 시간을 소비하였다. 그러는 중에 새로운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선출하는 사항이 시도되었으나 영국과 프랑스간의 이해가 맞지 않아서 펜딩 상태였다. 이러한 때에 오스트리아는 군비를 재정비하고 마인(Main) 계곡과 란(Lahn) 계곡 그리고 프랑크푸르트에서 프랑스군과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특히 오스트리아의 트라운 장군은 승승장구여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되자 여러 선제후들은 오스트리아의 위세에 눌리지 않을수 없었다. 결국 1745년 9월 13일에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인 로레인의 프란시스가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었다. 선제후들이 프란시스를 새로운 황제로 선출하자 며칠후 프러시아와 영국도 어쩔수 없이 프란시스를 인정하지 않을수 없었다. 이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마리아 테레지아는 만족하지 못했다. 1741년에 브레슬라우 조약에 따라서 오스트리아 소유의 실레지아를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에게 양보한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오스트리아 측의 계속적인 전투 승리에 힘입어서 프러시아를 압박하여 실레지아를 되찾을 생각을 했으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는 울며 겨자먹기로 프러시아의 실레지아 점령을 인정해야 했다. 하기야 그 이전인 1745년에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프러시아군에게 번번히 패배를 경험하여서 사기가 푹 떨어져 있었기도 했다. 호엔프리트버그 전투가 대표적인 경우였다.


1745년에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 프란시스 1세.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부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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