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프러시아와 실레지아

정준극 2018. 1. 19. 22:40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발단

프러시아와 실레지아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레데릭의 투쟁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은 오스트리아의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프러시아가 오스트리아 영토인 실레지아를 공격함으로서 촉발되었다.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러시아간의 영토분쟁인 것으로 짐작되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확산되어서 결국은 작은 '실레지아 전투'가 커다란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으로 발전하였던 것이다. 우선 당시 프러시아의 사정부터 알아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난 해인 1740년의 프러시아는 점차 국력이 강대해 지는 국가였다. 영토는 비록 넓지 않았지만 국가의 조직이 튼튼하게 짜여 있는 나라였다. 그해 5월에 새로운 국왕이 즉위하였으니 당시 28세의 프레데릭 2세(1712-1786)였다. 프레데릭은 프러시아의 영토로 되어지만 흩어져 있거나 또는 과거부터 프러시아와 깊은 연관이 있는 지역들을 하나로 통합코자했다. 프레데릭이 즉위한지 약 반년이 지나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며 오스트리아의 대공인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났다. 돌이켜보건대 프러시아와 오스트리아는 2년 전인 1738년에 겨우 막을 내린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에서 동맹이 되어 전쟁에 참여한 일이 있다. 그러는데 1740년 10월에 샤를르 6세가 세상을 떠나자 프러시아는 지난날 오스트리아와 동맹을 맺었던 것은 없던 일로 하고 국가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입장으로 돌변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프러시아는 프레데릭 2세 뿐만 아니라 선대인 프레데릭 빌헬름 1세의 시대부터 오스트리아를 못마땅하게 생각해 왔다. 오스트리아가 프러시아를 사사건건 무시하기만 한다는 것이 이유였다. 당시에 비엔나는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다. 그런 비엔나 사람들에게는 베를린이 시골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프러시아 돼지', 또는 '베를린 촌놈'이라면서 프러시아를 얕잡아 보기가 일수였다. 그런 것이야 그냥 지나가는 말로 치부하면 되겠지만 정치외교에 있어서도 무시를 당하면 참기가 힘들지 않을수 없는 노릇이었다. 예를 들어서 오스트리아는 프러시아에게 '폴란드 왕위계승전쟁'에서 동맹국으로 싸우는 조건으로 윌리히(Jülich)와 베르크(Berg)의 두 공국을 넘겨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는 동맹을 맺고 나니까 언제 그런 얘기를 했냐는 듯이 프러시아에 대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프러시아로서는 속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대신성로마제국의 황제에게 불평을 늘어 놓을 형편이 아니어서 입을 꾹 다물고 참고 있었다. 아무튼 프러시아로서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감정의 골이 깊어지지 않을수 없었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 1740년 5월 31일에 즉위하였다. 당시 28세. 샤를르 6세는 그해 10월에 작고했다.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가 샤를르 6세의 서거 이후 왕위계승문제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에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는 샤를르 6세가 1713년에 공포한 '국사조치'를 '웃기는 처사'라고 하면서 지지를 철회하였다. 그러면 왜 처음에는 지지했느냐고 묻자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고 대답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프레데릭 2세는 오스트리아가 샤를르 6세의 서거로 아직 상중에 있는 때인 1740년 12월 16일에 갑자기 오스트리아 영토인 실레지아를 침공하였다. 샤를르 6세는 10월 20일에 향년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실상 프레데릭 2세가 두려워했던 것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 상중에 있는 것을 기회로 제국에 속한 다른 나라들이 합스부르크의 영토를 자기들 것이라고 주장하여서 다시 찾고자 한다든지 또는 신성로마제국의 왕좌를 넘보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특히 작소니의 선제후이며 폴란드의 왕인 아우구스투스 3세(1696-1763)가 어떻게 나올지에 대한 걱정이 컸다. 어우구스투스 3세는 샤를르 6세의 조카사위가 된다. 즉, 샤를르 6세의 형인 선대왕 요제프 1세의 딸 마리아 요제파가 아우구스투스와 결혼한 것이다. 폴란드 왕을 겸하고 있던 아우구스투스 3세는 진작부터 실레지아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3세는 작소니와 실레지아를 통합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사실상 이를 위해 준비를 해 왔었다. 실제로 당시의 실레지아는 오스트리아의 영토였지만 폴란드와 연고가 있었다.


작소니 선제후이며 폴란드 왕인 아우구스투스 3세.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와는 라이발 관계였다.


프러시아는 별로 크지 않은 나라였다. 군사력도 크게 내세울만한 것이 못되었다. 프러시아 군대가 최근에 전쟁에 참가했던 경험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1733-35년의 폴란드 왕위계승 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신성로마제국 내에서는 프러시아의 군사력이 막강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사정을 봐주어서 명목상으로만 제국의 봉신으로서 참전을 권유했던 것이다. 그래서 프러시아군은 실전에 별로 참여하지 않았다. 신성로마제국으로서는 프러시아의 군대가 제국에 우산 아래에 있는 다른 약소 국가의 군대 정도로만 간주하였을 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인식은 잘못된 것이었다. 프러시아는 남모르게 군사력을 증강해 왔다. 프러시아의 전체 인구는 2백 20만 정도였다. 프러시아는 그중에서 4%인 8만명을 군대로 만들었다. 영토와 인구를 고려해 보면 그만한 병력이 필요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그저 군사력을 기르기에 온힘을 다했다. 이에 반하여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전체인구가 1천 6백만명이지만 군대는 재정적인 문제 등으로 가질수 있는 군대의 절반 밖에 유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방대한 영토를 방어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너무 적은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말하자면 방패가 필요한데 숭숭 뚫어진 그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프러시아 군대는 어떠했나? 너무나 과소평가되어 있었다.


프러시아 군대가 용감한 것은 지휘자가 선두에 서서 군대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7년 전쟁 중인 1758년 프러시아의 초른도르프에서 러시아와 프러시아가 전투를 벌일 때에 수세에 몰려 있던 프러시아군을 프레데릭 대왕이 앞장서서 이끌어서 승리로 이끌었다. 프러시아 국민들은 프레데릭 2세를 Der Alte Fritz(프리츠 영감)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존경했다. 용장 아래에 약졸 없다는 식이었다.


프러시아 군대는 프레데릭 2세의 선왕인 프레데릭 빌헬름 1세 때부터 강군전략으로서 정예훈련을 받아왔다. 그 중심에는 '올드 데사우어'(Old Dessauer)라고 불리는 안할트 데사우 공자인 레오폴드 1세의 공이 컸다. 그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프러시아 군을 일당백으로 만들기 위해 훈련에 훈련을 거듭했다. 2차 대전 때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돌격을 감행하는'독일 병정'은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빌헬름 1세 때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다. 프러시아 군이 얼마나 훈련이 잘 되었는가는 예를 들어서 오스트리아 병사는 1분에 소총을 세발 쏠수 있지만 프러시아 병사는 1분에 다섯발을 쏠수 있다는 것만 보아도 잘 알수 있는 일이다. 프러시아의 기병대와 포병대는 아직 뛰어난 수준이라고는 말할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해서는 월등히 우수했다. 또한 오스트리아 군대는 복무기간이 끝나도 징병되어 오는 병사들이 도착해야 제대할수 있지만 프러시아 군대는 병사들의 교대가 즉각즉각 이루어지도로 시스템이 구축되어 있었다. 아무튼 프러시아 군대는 은밀한 중에 강군이 되어 있어고 이들의 실레지아 공략은 별로 힘들지 않은 것이었다. 그나저나 다른 나라들은 프러시아가 군사력을 강화하고 있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한편, 프레데릭 2세는 실레지아 침공을 기획하기 전에 비밀작업을 진행하였다. 1739년에 프랑스와 비밀협정을 맺어서 프러시아가 실레지아를 공격하는 것과 때를 맞추어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의 옆구리인 서부지역을 공격키로 한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장례식이다 무어다 해서 혼란스러운 와중이어서 프러시아와 프랑스의 동맹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서부 실레지아에서 가장 중심되는 도시인 브레슬라우의 구시가지 일대. 브로츠와프라고도 한다.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는 1740년 12월 초에 프러시아군대를 오더(Oder)강변에 은밀히 집합시켰다. 그리고 12월 16일에 선전포고도 없이 실레지아로 진격해 들어갔다. '실레지아 전투'의 시작이었다. 오스트리아는 실레지아에 군대를 집중적으로 배치하지 않고 있었다. 오스트리아는 지나간 수세기에 걸쳐서 그나마의 주력부대를 헝가리와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시켰다. 헝가리에 주둔시킨 것은 오토만 터키의 침략을 막기 위함이었으며 북부 이탈리아에 주둔시킨 것은 이 지역을 넘보고 있는 스페인의 군사활동을 저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므로 실레지아가 중요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병력을 나누지 못했다. 그리고 설마 프러시아가 침공할 줄은 생각치도 못하고 있었다. 실레지아를 방어할수 있는 오스트리아 군은 고작 3천명 정도였다. 그런데 오스트리아는 아무래도 프러시아의 공기가 수상하다고 생각해서 그나마 4천명 정도의 병력을 급히 실레지아로 파견했었다. 그래서 실레지아 방어군의 병력은 7천명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7천명 병력으로는 실레지아의 글로가우, 브레슬라우, 브리그 요새 정도만 수성하도록 했고 실레지아의 다른 지방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게다가 7천명 병력중 일부는 12월에 날씨가 너무 추워지자 모라비아 지방으로 후퇴해서 있었다. 실레지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전체 세수 중에서 약 10%를 차지하고 있는 노란자위였다. 브레슬라우(브로츠와프)는 상업의 중심도시였다. 실레지아에는 규모가 큰 광산들이 많았다. 공업은 직조와 염색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인구가 1백만 이상이나 되었다. 프레데릭은 실레지아를 공략하면서 장기전이 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실레지아의 남부 거점들에는 아직도 오스트리아의 병력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연히 장기전으로 들어간다면 군수품의 조달등에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프레데릭은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제안을 했다. 기왕에 프러시아가 실레지아를 차지한 것은 어쩔수 없는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라고 말했으며 대신에 합스부르크의 다른 영토에 대하여는 손을 대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별 약속도 다 있다. 또하나 프러시아로서 께름직한 것은 영국과 러시아가 프러시아의 동진과 실레지아 점거를 달가와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아무튼 프레데릭으로서는 즉전즉결이 필요했고 그러한 전격작전으로 실레지아의 거의 전역을 점거할수 있었다. 프러시아군은 특히 이듬해인 1741년 4월에 아직도 눈이 덮힌 몰비츠(Mollwitz) 인근의 평원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대거 격퇴하여 전쟁의 승기를 잡았다. 몰비츠 전투에는 젊은 프레데릭 2세가 직접 선봉에 섰었다. 프레데릭 2세는 몰비츠 전투에서의 승리로 전투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1741년의 몰비츠 전투. 프러시아의 프레데릭 2세가 승리를 거두었다.


프레데릭의 실레지아 전쟁을 위해 프랑스와 동맹을 맺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설명한바와 같다. 그 동맹조약을 브레슬라우 조약이라고 부른다. 1740년 6월에 맺어졌다. 이 조약에 의해 프랑스군이 8월 15일에 라인강을 건넜고 계속해서 비엔나로 진격하기 위해 바바리아 선제후의 군대와 도나우에서 합류하였다. 그리하여 9월에는 바바리아-프랑스 연합군이 린츠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이때쯤해서 작소니도 반오스트리아 동맹군에 합류하였다. 오스트리아는 이들이 비엔나로 진격하는 줄 알고 비록 열세이지만 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동맹군이 진로를 갑자기 방향을 바꾸는 사태가 벌어졌다. 목표는 비엔나가 아니라 프라하였다. 동맹군은 세갈래로 나뉘어서 보헤미아로 진군하였다. 프랑스군은 암버그(Amberg)와 필젠(Pilsen)을 경유하여 프라하로 향하였다. 바바리아 선제후의 군대는 부드봐이스(Budweis)로 진격하였다. 그리고 작소니는 엘베(Elbe) 계곡을 통해서 보헤미아로 진군하였다. 한편, 실레지아에 있던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이 비엔나를 침공하는 줄 알고 상당수 병력을 비엔나 방위를 위해 이동했다. 그러다보니 프레데릭 2세의 프러시아군은 실레지아에서 별로 힘들이지 않고 작전을 수행할수 있었다. 실레지아의 지방에 있던 요새들이 하나둘씩 싱겁게 프러시아에 점령당했다. 그러는 중에 마리아 테레지아는 헝가리에 호소하여서 무려 6만명이나 되는 병력을 지원받을수 있게 되었다. 한편 비엔나에서는도나름대로 시민에게 호소하여 자원병력을 만들수 있었다. 그렇게 되자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바바리아 동맹군을 보헤미아에서 쫓아내고자 비록 추운 날씨의 겨울이었지만 대대적인 공세를 취하게 되었다. 


1745년 5월 퐁트노이 전투에서 프랑스 사령관 모리스 드 삭스가 영국 군기를 노획하여 당시 프랑스 왕세자인 루이 15세에게 전달하고 있는 장면. 호레이스 베르네 작.


한편, 작손 출신의 모리스 장군은 소수 프랑스군과 함께 1741년 11월 26일에 프라하를 휩쓸었다. 당시 보헤미아의 오스트리아군 사령관은 마리아 테레지아의 부군인 프란시스 스테픈이었다. 그는 프라하를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움직였으나 아무래도 낯선 군대여서 도무지 신속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프란시스 자신도 우유부단한 사람이었기에 언제나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식이었다. 바바리아의 선제후는 자기가 무어라고 스스로 오스트리아 대공이라고 부르며 목에 힘을 주고 다녔지만 실상 프랑스군의 프라하 공격에는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회만 노리다가 남들이 차려놓은 밥상이나 차지하는 그런 위인이었다. 그는 그해 12월에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으며 이듬해인 1742년 1월에는 선제후들의 지지를 받아서 공위중인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되고 샤를르 6세의 뒤를 이은 샤를르 7세라고 불렀으니 세상 일이란 알다가도 모르게 묘하게 돌아가는 그런 때였다. 그러한 때에 오스트리아에서는 카린티아의 유서깊은 귀족가문 출신인 루드비히 안드레아스 케벤휠러(Ludwig Andreas Khevenhüller: 1683-1744) 장군이 군대를 이끌고 1741 12월 27일에 프라하로 진격하여 작손과 프랑스 연합군을 순식간에 몰아냈고 내친김에 이들 연합군을 저 멀리 린츠까지 물러나게 했다. 그러한 뜻하지 아니한 케벤휠러의 군사작전은 바바리아까지 위협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뮌헨은 오스트리아의 케벤휠러 장군에게 항복하였다. 뮌헨이 오스트리아에 항복한 바로 그날은 앞서 말한 샤를르 7세가 프라하에서 새로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대관식을 갖는 날이었다. 사태가 이렇게 돌아가자 프러시아의 프레데릭은 오스트리아와 비밀리에 협상을 하여 휴전에 합의하였다. 휴전은 되었지만 프러시아가 강점한 실레지아는 어떤 조치가 없이 현상 그대로 있었다.


비엔나의 마리아 테레지엔 플라츠에 있는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기념상의 하단에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에서 오스트리아를 위해 큰 전공을 세운 루드비히 안드레아스 케벤휠러 장군의 기마상이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 기념상의 하단에 있는 인물들은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 오스트리아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을 기념하여 조각으로 남겨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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