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

북미와 인도, 그리고 서인도제도

정준극 2018. 5. 21. 10:38

북미와 인도, 그리고 서인도제도의 상황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의 여파는 북미와 인도에까지 미치었다. 북미의 분쟁은 영국 식민지 국가들에서는 '킹 조지의 전쟁'(King George's War)라고 알려진 것이다. '킹 조지의 전쟁'이라고 한 것은 영국의 조지 왕이 관여하여 승리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로써 영국은 북미에서 뿐만 아니라 인도와 기타 대륙에서 강력한 존재로 부상하였다. 영국이 상대로 삼은 대상국은 기본적으로 프랑스였다. 프랑스는 영국과 마찬가지로 북미에서 여러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고 이로써 신대륙에서의 식민지 점유 게임에 있어서 영국과 라이발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기왕에 유럽 본토에서 일어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을 기회로 삼아서 북미에서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전초전을 벌였고 결과적으로 영국의 우세 속에 막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킹 조지의 전쟁'은 1744년 5월에 영국과 프랑스가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여 시작되었으며 4년이나 끌었다. 전투는 주로 영국의 식민지로 되어 있는 뉴욕, 매사추세츠 만, 뉴 햄프셔, 노바 스코샤, 그리고 프랑스의 식민지로 되어 있는 뉴 프랑스에서 벌어졌다. 참전 당사자는 이로쿼이 연방, 그레이트 브리튼 왕국, 패트리어트, 뉴 프랑스였다. 여러 전투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1745년 4월부터 6월에 걸쳐 벌어진 전투에서 영국군이 노바스코샤의 케이프 브레턴 섬에 있는 프랑스 요새인 루이부르(Louisbourg)를 점거한 것이라고 할수 있다. 프랑스군은 루이부르를 재탈환하기 위해 1746년에 전투를 벌였지만 날씨와 질병 탓에, 그리고 사령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영국이 점거하고 있던 루이부르는 훗날 인도의 마드라스와 교환하기 위해 프랑스에 반환되었다. 뉴 프랑스라는 것은 1534년 자크 캬르티에가 오늘날의 새로랭만을 탐험하고나서 식믹지로 삼은 이래 북미에 분산되어 있는 다섯 곳의 프랑스 식민지를 말한다. 뉴 프랑스는 '프랑스 북미 제국'(French North American Empire)라고도 불렀으며 간단히 '로열 뉴 프랑스'라고도 불렀다. 뉴 프랑스에 속해 있는 지역은 오늘날 캐나다의 퀘벡, 트루아 리비에레(Trois-Rivieres), 몬트리얼: 허드슨 베이 지역; 아카디(Acadie) 지역; 뉴파운들랜드 섬의 플레상스(Plaisance) 지역; 루이지안느 지역을 말한다. 각각의 지역은 독립적인 행정을 주관하였다. 


영국군의 루이부르 공성. 1745년


영국이 북미에서 프랑스와의 라이발전에서 승리하자 영국은 내노라하는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나아가 인도에서 프랑스와의 세력 다툼에서도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로써 영국은 유럽 이외의 대륙에서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큰소리 치는 나라가 되었다. 인도대륙은 일찍부터 영국이 눈독을 들여서 상당부분을 식민지로 삼고 있었는데 프랑스가 배가 아파서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1746년 9월에 프랑스 병력이 마드라스 인근에 상륙하여 마드라스 항구를 공성할 채비를 했다. 마드라스는 인도에 있는 영국인 정착지 중에서 규모가 상당히 컸지만 어쩐 일인지 수비대의 규모는 빈약했다. 군사적 목적보다는 상업적 목적이 더 중대하여서였다. 마드라스 인근에 상륙한 프랑스 군대가 마드라스로 진군하여 공략을 시작하려하자 마드라스는 안되겠다 싶어서 항복의 길을 택하였다. 프랑스는 항복의 조건으로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상당한 현금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프랑스군의 부르돈네 장군이 그런 협상을 하자 프랑스의 인도회사(Compagnie des Indes)의 총재(Governor General)인 뒤플렉스(Duplex)는 말도 안되는 조건이라면서 반대했다. 그런데 마침 그러한 때에 인도양 특유의 폭풍우인 사이클론이 몰려오는 바람에 프랑스 함대는 큰 타격을 받아서 본국으로 돌아가는 일이 험난하게 되었다. 뒤플렉스는 부르돈네 장군이 위축되어지자 마드라스와의 협정을 돌연 취소하였다. 그러자 인도 남부 지역의 세력있는 부족장들이 영국을 지지하여서 프랑스 군대에 대항하는 작전을 펼쳤다. 인도 병력은 숫적으로 프랑스군에 비하여 월등했지만 정예 프랑스군을 당항수가 없어서 패배했다.


20세기의 마드라스. 마드라스라는 명칭은 1996년에 첸나이로 변경되었다. 영국 식민지 시기의 건물들이 넓은 거리를 장식하고 있다.


기고만장한 프랑스군은 인도 남부 카르나틱 지방의 다른 영국 정착지로 눈길을 돌렸다. 쿠달로레(Cuddalore) 지역에 있는 영국의 세인트 데이빗 요새는 지리적으로 프랑스 정착지인 퐁디셰리(Pondichery)와 가까워서 여차직하면 영국군의 공격을 받을 위험요소가 있었다. 1746년 12월에 프랑스군은 쿠달로레로 진격하여 프랑스 정착지의 안정을 공고히 하고자 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영국군 수비대와 나와브 군의 예상을 뒤엎는 반격으로 대패하였다. 프랑스군은 1747년 초에 다시 세인트 데이빗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이번에는 새로 영국군 해군 함대가 도착하는 바람에 퇴각하고 말았다. 프랑스군은 1748년에 전열을 가다듬어서 다시 세인트 데이빗 요새를 공격하였으나 역시 영국군 수비대의 죽기 아니면 살기 식의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더구나 얼마후에는 영국에서 보스카웬 제독이 이끄는 병력이 수많은 대포를 가지고 도착하는 바람에 프랑스군은 후퇴하지 않을수 없었다. 영국군은 오히려 프랑스 정착지인 퐁디셰리를 함락시키려고 포위작전을 펼쳤다. 그런데 이번에는 뒤플렉스가 이끄는 지원군이 도착하는 바람에 영국군은 요새에 대한 공성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인도에서의 몇년에 걸친 영국과 프랑스간의 전투는 소강상태에 돌입하였고 양편이 이제 싸움은 그만하자고 해서 평화협정을 서두르게 되었다. 평화협정의 결과로 마드라스는 다시 영국으로, 정확히 말하면 영국의 동인도회사의 소유가 되었다. 대신에 프랑스는 캐나다의 루이부르를 되돌려 받았다. 두 나라의 전투는 일면 중지되는 듯했으나 간혹 국지적인 전투가 있기는 했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서 영국과 프랑스는 하이데라바드와 카르나틱의 점유권을 두고 이른바 '7년 전쟁'에 돌입하게 되었으니 근세의 세계는 전쟁으로 날을 지새고 평화협정으로 밤을 지새는 일을 반복하였고 그 와중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헤게모니 쟁탈전이 한 몫을 하였다.

  

픙디셰리의 프랑스풍 교회 건물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과 관련하여서 비단 북미와 인도에서만 연결 전쟁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실상 세계 각지에서 여러 전쟁이 이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서인도 제도에서의 전쟁이었다. 서인도 제도에서의 헤게모니 쟁탈전 주역들은 영국과 스페인이었다. 사실상 두 나라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정식으로 시작되기도 전인 무엇이 그리 바쁜지 모르겠지만 1739년에 이미 전쟁에 돌입하였다. 서인도제도에서의 영서(英西: 영국-서반아) 전쟁은 일면 '젠킨스의 귀 전쟁'(War of Jenkins' Ear)이라고도 부르는데 여기에는 당연히 사연이 있다. 젠킨스는 영국 상선의 선장인 로버트 젠킨스를 말한다. 젠킨스 선장이 무역을 위해 서인도에서 영국으로 돌아가는 중에 그의 상선이 스페인 함선에 나포되었다. 스페인 해군은 젠킨스 선장의 귀를 자른 후에 살려서 돌려보냈다. 마치 선전포고와 같은 행위였다. 이에 영국이 분노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른바 '젠킨스의 귀 전쟁'이 1739년 10월에 시작되었던 것이다. 서인도 제도와 남미에는 스페인의 식민지가 다수 있었다. 영국 해군은 우선 서인도 제도의 스페인 식민지를 동쪽과 서쪽의 양면에서 공격키로 작전을 세웠다. 영국의 에드워드 버논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서인도로부터 스페인 식민지를 공격키로 했고 앤슨 경이 이끄는 함대는 남미 최남단의 케이프 혼을 돌아 태평양으로 나와서 스페인 식민지를 공격키로 작전을 세웠다. 그런데 스페인과의 일전을 불사하겠다는 영국 함대는 문제가 많았다. 우선 출전을 해야 하는데 준비가 더디게 진행되었다. 게다가 함선들이 정박해 있는 도크에서도 문제가 많았다. 그리고 장교들 사이에 웬 파벌이 그렇게 심한지 서로 작당하여 비판하고 싸우기가 일수였다. 그러니 작전은 양동으로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았지만 실패는 보나마나였다. 그래도 운수가 좋았던지 버논 제독의 해군은 오늘날 파나마에 있는 포르토 벨로(Porto Bello)를 공격하여 점령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그건 영국 해군이 훌륭해서가 아니라 스페인의 방어가 허술해서였다.


파나마의 포르토 벨로 요새 유적지


그후 버논 제독은 본국으로부터의 보충병력을 받아 1741년 3월부터 약 두달 동안 카르타제나를 죽어라고 공격했다. 오늘날의 콜럼비아이다. 그런데 영국군은 본국으로부터의 보충병력을 기다리느라고 사실상 시간을 많이 소비했다. 그동안 카르타제나의 스페인군은 방어 준비를 착실히 할수 있었다. 영국군은 준비가 철저한 스페인군을 깨트릴수가 없었다. 게다가 갑자기 영국군에서 전염병이 돌았다. 바다에 떠 있던 영국 함선들도 상당수가 스페인의 포격을 받아 파손되었다. 영국군은 큰 손실을 입고서 철수하지 않을수 없었다. 그러부터 1748년에 이르기까지 영국은 서인도 제도에서 스페인에게 어떠한 타격도 주지 못했다. 영국군은 스페인군의 반격 때문에 손실을 입은 것이라기 보다는 자체적인 실수와 자연재해로 손실을 보았다. 안슨 제독이 이끄는 해군은 케이프 혼을 돌아서 나가는 것에 실패를 보았고 많은 배를 잃었다. 1744년에 영국으로 가까스로 돌아간 것은 안슨 제독의 기함인 센츄리온 하나뿐이었다. 그런데 영국으로서는 다행이라고 할까 하여튼 안슨 제독은 칠레와 페루 해안을 따라서 내려가다가 스페인 군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어쩔수 없이 태평양을 건너서 스페인으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필리핀 인근에서 스페인의 대상선인 갤리온(galleon)을 재수 좋게 나포하였다. 스페인의 대상선에는 엄청난 보화가 실려 있었서 그것으로나마 겨우 패배의 빚을 갚을수 있었다. 안슨의 영국 해군은 말할수 없이 모진 고생 끝에 겨우 영국에 도착할수 있었다.

 

젠킨스의 귀 전쟁


카리비아에서의 영국과 스페인의 헤게모니 쟁탈을 위한 전투도 서로 지쳐서인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그러한 즈음에 두번의 중요한 전투가 있었다. 영국이 쿠바의 산티아고를 공략한 것이 그 하나이다. 영국은 성공하지 못했다. 또 하나의 전투는 두 나라 호송선들이 해상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벌어진 전투이다. 스페인은 남미로부터 본국오르 보내는 보화를 안전하게 보내려고 안깐힘을 쓰고 있었으며 영국은 그 보화를 중간에서 낚아 채려고 노력하였다. 영국은 스페인 함대가 남미의 금광으로부터 캐낸 금괴들을 운송하고 있다고 믿어서 죽어라고 전투를 벌였다. 전투는 영국에 유리하였지만 스페인 보물선이 하바나 항구로 도피하는 바람에 닭 쫓던 개가 지붕만 바라보는 격이 되었다.


스페인 식민지 시대의 아바나 항구. 군사적으로 철통과 같은 항구였다.


유럽 본토에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깃발을 올리는 것과 함께 지중해에서도 영국과 스페인의 신경전이 계속되었고 급기야는 건곤일척의 일대 결전으로까지 치닫게 되었다. 여기에 프랑스가 스페인을 지원하게 되어 지중해전쟁의 양상은 한치 앞을 알지 못하는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면 영국 해군은 어떤 상태였는가? 영국 해군의 안슨 제독은 남미 끝의 케이프 혼을 통과하여 대서양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대신에 태평양을 건너서 필리핀 해역으로 나아갔으며 내친 김에 동남아와 아라비아해를 섭렵하는 대장정의 길에 올랐다. 안슨 제독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지중해에 대한 영국의 관심지역을 조사해 보기로 했던 것이다. 반면에 스페인 해군은 주로 이탈리아 반도에만 눈독을 돌리고 있었다. 스페인은 기왕에 소유하고 있는 이탈리아 반도와 인근 도서를 보호하기 위해 본토로부터 소함대의 병력을 이탈리아 반도로 파견하였다. 스페인의 돈 후안 호세 나바로 제독이 이끄는 소함대는 카디스(Cadiz)항을 출발하였다. 그런 상황을 은밀히 지켜보고 있던 영국의 니콜라스 해독 제독의 함대가 스페인 소함대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지중해에 들어선 스페인 함대는 1741년 12월에 다행스럽게 프랑스의 드 쿠르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소함대와 연합했다. 스페인으로서는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셈이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드 쿠르 제독은 '영국의 해독 제독이 스페인 함대를 공격하면 그때 힘을 합쳐 주겠다'고 선언했다. 말하자면 소극적인 합동이었다. 만일 드 쿠르 제독의 프랑스 함대가 해독 제독의 영국 함대와 전투를 벌이게 된다면 그건 두 나라가 지중해에서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영국은 유럽 본토에서 오스트리아 왕위계승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의 마리아 테레지아의 편을 들어서 참전하여 프랑스와 상당한 전투를 벌였고 또한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치고 받는 전투를 벌였지만 지중해에서는 처음이어서 여간 조심스럽지가 않은 형편이었다.


스페인 남서부의 유서 깊은 카디스 항구. 오늘날의 모습. 가운데는 카디스 대성당


지중해에서 영국과 프랑스간의 적대적인 전투는 여러 장소에서 간헐적으로 벌어졌지만 그것이 양국간의 본격적인 해전으로 발전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744년 3월에 프랑스가 영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였고 이에 영국고 해볼테면 해보자라면서 맞섰다. 프랑스가 갑자기 영국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한 것은 프랑스로서는 영국 섬을 침공할 준비가 어느정도 완료되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리고 실은 그로부터 약 한달전에 툴롱 해상에서 두 나라의 해상전투가 벌어졌는데 프랑스가 단연 우세를 보였기 때문에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다. 또한 프랑스가 영국에 대하여 형식적이나마 선전포고를 한 배경에는 스페인이 해전이 벌어지면 도와주기로 약속한 것도 큰 이유가 되었다. 영국과 프랑스-스페인 해군의 전투는 영국에게 커다란 손실을 던져 주었다. 영국은 퇴각하였지만 그렇다고 불서 연합 함대가 영국 섬에 상륙하는 일은 없었다. 스페인 함대는 이탈리아에 있는 스페인군에 대한 군수품을 전달하기 위해 돌아갔다. 영국 해군이 불서 연합함대에 제대로 대항도 해보지 못하고 패배하여 돌아오자 영국 내에서는 '이게 무슨 창피한 일이냐'는 불만의 소리가 높았다. 아무튼 그로 인하여 영국 해군의 대대적인 개혁 작업이 착수되었다.


툴롱 해전


북해에서의 전투도 간과할수 없는 사건이었다. 1744년초에 프랑스는 영국을 침공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스코틀랜드의 자코바이트 저항세력이 합세하기로 약속되었다. 프랑스는 병력을 프랑스 북서부 해안의 됭케르크(던커크: Dunkirk)로수송하였다. 1744년 2월에는 자크 아이마르 백작이 이끄는 20척의 프랑스 함대가 영국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의 상륙을 시도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프랑스 해군의 장비가 우수하지도 못했고 충분하지도 못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사령관인 제독이 대단히 소심한 사람이었다. 여기에 날씨마저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아이바르 백작은 프랑스 함대를 영국 섬의 남쪽인 더 다운스(The Downs)로 겨우 피신할수 있었는데 여기에는 존 노리스 경이 이끄는 영국의 25척 함선이 기다리고 있었다. 원래 됭케르크에 있는 병력이 아이바르 백작을 지원하기 위해 달려 오기로 되어 있었지만 날씨 탓으로 그나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약체의 프랑스 해군이 영국 해군에게 호되게 혼이 났음은 물론이었다. 프랑스 해군은 어째서 약체가 되었느냐 하면 국가의 재정이 파산지경에 이르게 되자 더 이상 지원을 받지 못했으며 게다가 당국의 관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아무튼 프랑스는 영국을 침공하여 국위를 높이고 또한 스코틀랜드의 자코바이트를 지원하려던 생각을 접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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